季桓子卒 遺言謂康子 必召孔子라 其臣 止之 康子乃召冉求 孔子如蔡及葉
楚昭王 將以書社地封孔子 令尹子西不可 乃止 又反乎衛時 靈公已卒
衛君輒 欲得孔子爲政 而冉求 爲季氏將 與齊戰有功
<직역>계환자가 죽을 때에 (아들인) 강자에게 유언으로 이르기를 반드시 공자를 부르라고 했으나 그 신하들이 저지하고, 강자는 이에 염구를 불렀느니라. 공자가 채나라에서 섭땅에 이르시니 초나라 소왕이 장차 공자에게 서사의 땅으로써 봉하려 하였으나 영윤인 자서가 불가하다 하니 이에 그만두었음이라. 또 다시 위나라에 돌아왔을 때 영공이 이미 졸하였느니라. 위나라 군주인 첩이 공자를 얻어(등용하여) 정사를 하고자 하였고, 염구는 계씨의 장군이 되어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웠느니라.
如 갈 여 葉 잎 엽, 여기서는 ‘고을이름 섭’ 輒 문득 첩, 여기서는 ‘성 첩’
<해설>
노나라의 계환자가 죽으면서 계강자에게 반드시 공자를 불러 함께 정사를 의논하라고 유언하였다. 가신들이 나서서 모두 반대하자 계강자는 대신 공자의 제자였던 염구(字는 子有, 혹은 冉有)를 등용하였다. 염구에 이어 자공도 계강자에게 발탁되어 가고 공자 일행은 방랑을 계속한다.
<사진설명 : 중국국가박물관에 2011년1월 설치된 공자동상 : 이 동상은 100일만에 박물관 뒷 정원으로 옮겨졌다.>
앞서 진채절량의 시기를 겪다가 섭공(葉公)이라고 부르는 초나라의 장군 반제량(潘諸梁, 일찍이 섭읍의 長을 지냈기에 흔히 섭공이라 부름)을 만난다. ‘孔子 如蔡及葉’은 공자가 채나라에 갔다가 섭땅으로 가서 섭공을 만났다는 뜻이다. 섭공은 자로에게 공자에 대해 묻기도 했고(『논어』술이편 18장), 직접 공자에게 가르침을 청하기도 하였으나 공자를 초나라 소왕에게 추천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초 소왕은 서사의 땅 7백리를 봉지로 주어 공자를 중용할 뜻을 가졌으나 영윤인 자서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자서는 공자가 초나라 도성에 들어오는 것까지 막았다. 공자는 여러 제자가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나라를 떠나 다시 위나라로 돌아갔다. 길에서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라는 도교의 은자(隱者)들을 만난 것이 이때이다(『논어』미자편 6장).
공자 나이 63살 때인 기원전 489년, 공자는 위나라에 도착했으나 위 영공은 이미 죽은 상황이었다. 손자인 출공(出公) 첩(輒)이 군주가 되어 공자에게 정사를 맡기고자 하였으나 출공은 과거에 바람둥이 계모를 죽이려다 도망간 아버지가 귀국하면 양위를 해야 할 처지이기에, 공자의 正名論과 이상정치에 동조할 수 없었다. 공자는 다시금 벽에 부딪혔다(『논어』술이편 14장).
康子乃召孔子 而孔子歸魯 實哀公之十一年丁巳 而孔子 年六十八矣 然魯終不能用孔子 孔子亦不求仕 乃敍書傳禮記 刪詩正樂 序易彖繫象說卦文言 弟子蓋三千焉 身通六藝者 七十二人
<직역>강자가 마침내 공자를 부르자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가시니, 실로 애공 11년 정사(丁巳)년으로 공자 나이 68세라. 그러나 노나라는 끝내 능히 공자를 등용하지 아니하니 공자 또한 벼슬을 구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에 전해지는 역사기록과 예에 관한 기록을 서술하시며, 시를 다듬고, 음악을 바로 잡았으며, 『易』에 십익전(十翼傳)인 단전과 계사전(상전,하전) 대상전 소상전 설괘전 (서괘전, 잡괘전) 문언전(건괘, 곤괘)을 서술하셨느니라. 제자가 대략 3천명인데 몸으로 육예에 통한 자가 72명이라.
繫 매달 계 刪 깎을 산 敍 차례 서
<해설>이때 계강자는 아버지의 유언도 있는데다 공자의 제자인 염구가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것을 계기로 마침내 공자를 노나라로 초빙한다. 이에 공자는 고향땅인 노나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계강자는 염구, 자공, 유약을 대표로 파견하여 예를 갖추어 공자를 후하게 영접하였으니 애공 11년(기원전 484년) 공자 나이 68세였다. 그러나 노나라는 공자를 끝내 등용하지 아니하였고, 공자 또한 말년의 나이에 더 이상 벼슬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는 제자들과 더불어 강론을 하며 집필에만 몰두하였다.
공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역사기록을 정리하였고(『尙書』,『書經』이라고도 함), 예에 관해 기록하였으며(『禮經』후대에 여러 학자들의 의견이 덧붙여져 漢나라 때부터 『禮記』라고 부름), 당시까지 불리던 노래 3천여편을 모아 지나치게 음란하거나 어지러운 내용들은 깎아내고(刪詩:산시) 생각함에 삿됨이 없는(思無邪) 시 311편을 정리하여 『詩經』으로 편찬하고, 음악을 바로잡았으며(『樂經』이라는 책으로 현재는 전해지지 않음), 후학들을 위해 『易經』을 해설하였다.
공자는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질 정도로[韋編三絶:위편삼절] 『易經』을 읽었지만 문왕과 주공이 지은 글에 더 이상 손댈 수 없음을 깨닫고, 후학들을 위해 상세히 설명을 붙이니[述而不作] 이것이 십익전(十翼傳)이다. 공자의 십익전으로 완성된 『易』은 유학의 핵심사상을 담고 있다. 역작들을 완성해가면서 공자의 학문을 따르는 제자들이 날로 많아졌는데 공자에게 배운 제자들을 대략 3천여명으로 꼽는다. 그 중 육예(六藝)인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에 능통한 제자가 72명이다. 이들을 ‘신통제자(身通弟子) 72인’이라 한다.
十四年庚申 魯西狩獲麟 孔子 作春秋
<직역>(애공) 14년 경신년에 노나라 서쪽 땅에서 기린이 잡히니 공자가 『춘추』를 지으셨느니라.
<해설>공자는 최후의 역작인 『춘추』를 짓고는 서쪽 땅에서 기린이 잡혔다(西狩獲麟)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천명이 다했음을 알고 붓을 놓았다. 이로부터 후대에서 죽음으로 인해 붓을 놓는 것을 獲麟絶筆(획린절필), 麟筆(인필)이라고 한다.
맹자의 말을 빌린다면(『맹자』등문공 하편 제9장) “세상이 쇠하고 도가 미미하여 사설과 폭행이 또 일어나 신하가 그 인군을 죽이는 자 있으며, 자식이 그 아비를 죽이는 자 있으니 공자가 이를 두려워하여 『춘추』를 지었으니 『춘추』는 천자의 일이라”고 하였다. 공자는 “나를 알아 주는 것도 그 오직 『춘추』이며 나에게 죄를 묻는 것도 그 오직 『춘추』일 뿐이다(子曰知我者도 其惟春秋乎며 罪我者도 其惟春秋乎인저)”라고 하였는데, 이에 따라 『춘추』는 역사를 평가하는 한 지표가 되었으며, 春秋筆法(춘추필법)이라는 고사성어를 낳았다.
明年辛酉 子路 死於衛 十六年壬戌四月己丑 孔子卒年七十三 葬魯城北泗上
弟子 皆服心喪三年而去 惟子貢 廬於冢上 凡六年.
<직역>다음해인 신유(辛酉)년(기원전 480년)에 자로가 위나라에서 죽고, (애공)16년 임술(壬戌)년(기원전 479년) 4월 기축(己丑)일에 공자가 돌아가시니 나이 73세라, 노나라의 성 북쪽 사수 위쪽에 장사지내고 제자들이 모두 심상(心喪) 삼년을 치루고 돌아갔는데 오직 자공만이 무덤 위쪽에서 오막살이를 하니 무릇 육년이라.
廬 오두막집 려 冢 무덤 총
<해설>이듬해(기원전 480년) 스승을 그림자 같이 따르던 자로가 위나라 괴외(蕢聵)의 내란에 휘말려 전사했다. 자로는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명으로 무용(武勇)에 뛰어났으나 무모함으로 인해 가끔 공자에게 책망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인품이 호방하면서도 솔직하여 공자와 가장 마음이 통했던 제자로 꼽힌다. 자로가 죽임을 당하여 소금에 절여졌다는 얘기를 듣고 이후 공자는 일체 젓갈을 먹지 않았다.
실의와 좌절의 방랑세월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이상정치를 실현하려 했던 불굴의 공자도 천명에 불려가니 73세였다. 오늘날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의 공림(孔林)에 장사지내니 제자들은 마치 부모가 죽은 것처럼 3년을 애모(哀慕)하였으며(부모가 돌아가시면 상복을 입고 삼년상을 치르므로 服喪三年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공자의 제자들이 상복을 입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삼년상을 치렀기에 心喪三年이라고 함), 자공만은 특별히 공자의 무덤 옆에 오두막을 짓고 3년 동안 더 시묘살이를 하였다.
한편 공자의 행단강학을 洙泗之敎(수사지교) 혹은 洙泗之學(수사지학)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공자가 산동성 곡부 곧 수수(洙水, 곡부의 북쪽으로 흐르는 물)와 사수(泗水, 곡부의 남쪽으로 흐르는 물)의 부근에 살면서 제자들에게 강학을 하였기 때문이다.
孔子 生鯉 字伯魚 先卒 伯魚生伋 字子思 作中庸
<직역>공자는 리를 낳으니 字는 백어이고 먼저 죽었느니라. 백어는 급을 낳으니 字가 자사이고, 중용을 지으셨느니라.
<해설>사마천의 「공자세가」에는 노나라의 대부 맹희자(孟僖子)가 임종시에 아들인 맹의자(懿子)와 남궁경숙에게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라는 내용의 유언이 나온다. 즉 맹희자는 공자에 대해 송나라에서 멸족된 聖人의 자손임을 밝히며 공자가 어려서부터 예법에 밝은 것으로 보아 필시 통달한 사람이니 자식들에게 스승으로 모시라고 하였다.
공자는 19살에 결혼을 하고 1년 뒤 아들을 낳았는데, 이때 이미 공자는 박학하고 재주를 가진 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러한 소문은 궁궐까지 전해져 공자가 아들을 낳자 이웃들이 축하해주러 왔고, 노나라 군주인 소공(昭公)도 잉어 한 마리를 보내왔다. 공자는 이 은혜에 감격하여 아들 이름을 잉어라는 뜻의 리(鯉)라 짓고, 첫째 아들을 뜻하는 백(伯)자에 고기 어(魚)를 써서 호(號)를 伯魚라 하였다. 공자의 자식으로는 아들인 백어외에 딸 하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딸은 제자인 공야장(公冶長)에게 시집보냈다.
백어는 아버지인 공자보다 앞서 갔다.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온 지 1년만이었고 백어의 나이가 50살 되던 해였다. 백어의 아들이자 공자의 손자인 급이 바로 『중용』을 지은 자사이다.
가장 사랑하던 제자인 안연을 잃고 ‘하늘이 나를 버리셨도다, 하늘이 나를 버리셨도다(天喪予샷다 天喪予샷다)’고 통곡했던 위대한 스승 공자, 아들을 먼저 잃고 아버지로서의 비통함을 겪었던 공자,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인류를 위해 위대한 유산을 남긴 공자였다.
출처
: 『논어 易解』1권
첫댓글 자세한 해설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시 새로이 시작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