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의 유일한 농요인 마들농요가 되살아났다.
말들이 뛰놀던 들판이라는 뜻의 마들은 민간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오던 노원의 또 다른 지명이다. 비록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예전에는 볍씨만 800석을 넘게 뿌렸던 대 평야였다. 그 마들 대평야에서 모를 심고 김을 매고 수확을 하며 농사일의 어려움을 잊기 위해 흥얼거렸던 노래가 바로 마들농요이다. 그러나 노원의 급속한 도시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은 모두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농요 또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더욱이 시간이 흐를수록 당시 농요를 부르며 일을 했던 어르신들이 고령화되고 한 분씩 돌아가시면서 농요의 보존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렇게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전승의 맥이 끊겨가던 농요를 되살려 내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분이 있다. 마들농요 보존회장인 김완수(만 55세)씨다.
김완수씨는 지금은 고인이 된 김순태, 이창배, 정득만 선생님으로부터 무형문화재 제19호인 선소리 산타령을 사사 했고 이은관 선생님으로부터도 무형문화재 제29호인 배뱅이굿을 사사 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계기로 민요에 입문하게 되었을까?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인데, 학교에서 이은관 선생의 배뱅이굿 초청 공연을 한 적이 있어요. 뙤약볕 아래서 배뱅이 굿을 하는데 어린 마음에도 어찌나 소리를 구성지게 잘하던지, 공연 본 그 날은 가슴이 벌렁거려서 당최 잠이 안 옵디다. 아마 내 인생은 그때 결정되었는지도 모르죠."
민요를 처음 접했던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가 정식으로 입문하기 위해 처음으로 문을 두드렸던 곳이 바로 이은관 선생이 운영하던 민요학원이었다면, 또 이것만큼 자연스러운 세상사도 없지 않을까! 그 때가 1970년, 조금 늦깍이로 민요를 시작한 감이 없지 않지만, 이미 천성적으로 타고 난 끼와 열정은 그 늦은 시간을 만회하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1978년에는 우리국악 순회 공연단 대표 자격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국악을 보급하는 활동을 시작했던 그는 그 외에도 경기산타령 개인 발표공연, 한국 민속 예술제 3회 출연, 국립 민속 박물관, 덕수궁 중화문, 남산골 한옥마을, 서울시청 본관 마들농요 발표공연 등 얼핏 헤아려도 수 백회가 넘는 공연을 해왔다. 이것이 바로 더도 덜도 없는 그의 인생이다. 그리고 그의 인생의 뒤에는 바로 수더분한 아내와 1남 2녀의 자녀가 있다. 하지만 가족들의 고통스러웠던 인내의 시간들을 생각하면 늘상 가슴이 무거워진다고 한다.
지금도 집에서 소리를 하면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는 자식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목이 잠기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일. 그러나 이젠 당당하게 자식에게 자신의 일이 얼마나 가치있고 소중한 것인가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마들농요 복원을 위한 10년 고생이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22호라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경기민요를 줄곧 해왔던 그가 서울시의 유일한 농요인 마들농요를 처음 접한 시기는 1990년 이소라 문화재 전문위원의 채보를 통해서이다. 그는 노원구에 근근히 마들농요가 전승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앞이 아뜩해졌다고 한다. 지금까지 계속 눈앞을 맴돌며 뚜렷하게 잡히지 않았던 삶의 방향타를 확실하게 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그 말로만 간신히 전해 내려오는 농요를 제대로 복원하는 것이 도서관에 앉아서 자료 몇 줄 찾는 것으로 끝나는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이 때부터 그의 질기디 질긴 민초의 생명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고지를 눈 앞에 두고 머뭇머뭇거리며 주변을 돌아다볼 필요는 없는 것. 그는 경기도 양주군 일대와 노원구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는 본토 노인네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장애물은 늘 예기치 못했던 곳에 숨겨져 있는 법. 마들 벌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던 노인 분들은 막상 자신의 입으로 농요를 재현해 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열망이 그분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일까.. 사람들은 그에게 기억나는 노래 몇 소절씩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분들이 상계1동에 있는 갈월 경로당분들이다. 고 윤충보, 서은남, 박우석, 한동식, 박준형, 이면우, 문사용, 이영흠, 장영태씨 등 그가 얼핏 말하는 분들도 10여명에 가까운 것을 보면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수많은 어르신들의 얼굴이 스쳐갔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1990년 고 윤선보 옹에게서 받은 사사는 마들농요의 전체적인 윤곽을 세우는 문제 뿐만 아니라 당시 농요를 부르며 일을 했던 사람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수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배움의 시간이었다.
그리하여 7년에 걸친 멀고도 지난했던 복원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마들농요는 1996년 완성이 되고 그해 제37회 한국 민속예술제 서울시 대표로 출연해서 공로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복원한 마들농요를 꾸준히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해 1996년 7월 정회원 50명, 준회원 평화노인대학 100명으로 보존회를 구성했다.
문제는 회원들의 고령화로 마들농요의 맥을 이어나가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회원들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40대 15명, 50대 15명, 60대 10명, 70대 10명이다. 80세 이상 4분이 있지만 너무 고령이라 정회원에서는 제외되어 있다. 현재 보존회의 입장에서는 젊은 회원의 확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최근 서울시에서 젊으신 분들을 중심으로 5명을 모집해서 회원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노원구 상계5동에서도 7명을 신규회원으로 확보를 해서 지원을 해 주었다. 그러나 젊은 일꾼이 들어와 반갑지만 넉넉치 못한 재정 형편은 언제나 고민거리! 하지만 어려운 조건에도 마들농요의 전수 장학생 4인이 있어 커다란 위안이 되고 있다. 박운종, 신진성, 안향단, 양재순씨가 바로 그들이다. 이분들이 마들농요 보존회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의 순회공연도 하고 정기적으로 발표회도 갖는 등 왕성한 활동을 통해 농요의 보급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어렵사리 복원한 마들농요이긴 하지만, 지금 자라나는 학생들에겐 상당히 생소한 것임에는 분명하다. 이제 남은 일은 노원의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인 농요를 쉽게 부를 수 있도록 하는 일.
지금까지 농요 테이프를 제작 배포하고 꾸준한 공연활동을 통해 보급에 힘써 왔지만 아직도 대중적인 인지도는 부족한 편이다. 실제 농사를 지으며 노래를 불렀던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 영상자료로 만들어 내거나 또는 단지 농요의 재현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내기를 하는 현장에서 온 가족이 참여하는 "모내기 이벤트"와 같은 행사를 기획해 나간다면 그 교육적 효과는 배가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김완수씨에게는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 그것은 회원들이 마음놓고 연습을 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강습도 할 수 있는 "마들농요 보존회관"을 건립하는 것이다. 전통문화에 관심있는 사람들의 의지가 하나 둘씩 모인다면 그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듯 싶다.
지금도 김완수씨는 10월 24일부터 27일까지 낙안 읍성 민속 마을에서 열리는 제41회 한국 민속예술축제에 서울시 대표로 초청되어 마들농요 보존회원 51명과 함께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다. 늘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빠른 시일 내에 그 작은 소망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첫댓글 낙안읍성에서 공로상을 받았었는데...벌써 8년된 일이네요. 세월이 날으는 화살같이 빠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