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활에 대한 기록은 고대 중국의 기록에서도 '맥궁'이라고 기록되어 있을정도로 오래 되었으며 역사가 긴 만큼, 활에 관련된 기록도 많고, 삼국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궁도 많다. 그중에서도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 조선을 세운 이성계, 그리고 조선 정조도 잘 알여지지는 않았지만 명궁이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후삼국 시대의 폭군 궁예도 활과 관련된 이름일 정도인 걸 보면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활을 잘 쏘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고대에도 거의 지금과 같은 합성궁(리커브 보우)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당연히 처음부터 전역에서 합성궁을 사용한 것은 아니며, 극소수 발견되는 삼국시대 이전의 초기 활 유물들 중에는 단순 목궁도 많이 발견된다.
삼국시대로 들어와 고구려 시대에는 소갈비뼈를 사용해 만들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활쏘기가 유교에서 말하는 육예중 하나였기 때문에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활쏘기를 즐겼다. 활쏘기는 철저하게 스스로 바른 자세를 유지하면서 쏴야 하기 때문에 활쏘기 자체를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 군사적으로도 국궁은 갑오개혁 이전(1894년)까지 군대의 제식무기였기 때문에 무과시험에서도 당연히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등이 있었고 우리가 잘 아는 이순신장군이 무과 첫 고배를 마신 게 이 과목이다.
이렇게 조선시대 내내 군사적인 의도로 매우 장려되어 위로는 임금부터 아래에는 일반 평민들까지 활쏘기를 즐겨 했다고 하며 위에서 설명했듯이 구한말 외국인의 기록에는 어린아이나 아녀자들도 활쏘기에 능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활터에서 활쏘기로 돈내기를 하기도 했던 듯. 괜히 옛날 이야기에서 지나가던 선비들이 활쏘기로 영물을 때려잡는 먼치킨으로 나오는게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사실 초기의 화승총 같은 화승점화식 총이 등장한 이후에도 활은 연사속도, 유효사정거리 등에서는 오히려 총을 앞서기도 했다. 쉽게말해 임진왜란때 조총보다 조선 각궁이 성능이 더 좋았다.(…) 활이 총에게 밀리게 된 것은 성능상의 문제보다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 1. 총은 장전하고 방아쇠 당기는 법만 배우면 되는 반면 활은 숙달하는데에 오랜 기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점.
- 2. 유효사거리 내에서 총이 관통력이 압도적으로 더 강한 점.
- 3. 활은 만들고 관리하기가 총보다 훨씬 까다롭다는 점.
조선이 화약무기보다 활을 더 위력적으로 본 것도 전통이라 태종때는 편전(애기살)의 사정거리가 화약무기보다 우월하니 폐지하자는 말까지 나왔을정도였다. 그러나 개화의 바람이 불면서 활은 총의 급격한 발달과 함께 성능상의 우위조차 상실하며 그에따라 활은 전근대적이라는 생각이 퍼져나가자 활터는 이용자가 줄었고,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그 맥이 상당히 위협받기도 했으나 다행히도 고종이 세운 '황학정' 등의 활터에서 꾸준히 활쏘기가 계승되어 왔으며 황학정에서 '조선의 궁술'같은 책을 내면서 명맥이 오늘까지도 유지되어 오고 있다.
허나 일제강점기~광복 시기를 거치며 단체의 이름과 공식 명칭이 대한궁도협회와 궁도로 바뀌어버리고, 사회의 격동을 국궁계도 결코 견디지 못하고 중구난방하여 일본의 궁도처럼 통일된 규격을 가지기는 어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