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구산은 원래 납산
차를 타고 남해대교를 건너 남해읍으로 가다보면 멀리 원숭이가 서있는 것 같은 뾰족한 봉우리의 납산이 보인다. 납산의 ‘납’은 원숭이의 옛말이니 원숭이산이고, 원숭이는 한자로 猿(원)이니 猿山이다.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한자로 쓴 책이므로 '猿山'이라고 기록했다.
납산에 있는 용문사는 1666년에 절 이름이 지어졌고, 일주문의 '虎丘山 龍門寺'(호구산 용문사) 현판은 창암 이삼만(1770~1847)이 썼다고 한다. 이삼만 출생 이전에 쓰여 진 동문선, 점필재집, 택당집, 학봉집, 해사록 등에 ‘중국 육조 시대에 도생법사가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서 돌들을 모아 놓고 문도로 삼은 다음 열반경을 강론하니 돌들이 머리를 끄덕였다’라는 고사를 인용한 구절들이 있다.
미루어보아 납산은 구전되어온 본래 이름이고, 원산은 납산의 한자표기이며, 호구산은 용문사가 일주문을 세우면서 절 이름에 맞춰 가져다 쓴 것으로 보인다. 공식명칭은 1961.4.22 고시된 납산으로, 남해사람들이 오래토록 지켜온 정감이 있는 이름인데, 남해군청은 이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
호구산봉수대
근래에 남해군은 원산봉수대라고 불리던 납산의 옛 봉수대를 새로 축조하고, 호구산봉수대라는 엉뚱한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그래서 이 산을 찾는 사람들은 호구산이 공식지명이고 납산이나 원산은 속칭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록으로 보면 호구산이란 이름은 납산에 들어와 자리 잡은 용문사가 일주문에 쓴 이름으로 일반적으로 통용된 이름이 아니다(월간山 2006년 4월호 337쪽 참조).
우측으로 내려가는 길은 용문사로 가는 길인거 같고 지맥은 이정표 [석평]을 가리키는 왼쪽이다. 암봉으로 이루어진 ×550봉에 올라서면 앵강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지막 암봉 직전에서 왼쪽으로 꺾어 내려가는데 엄청난 비탈에 급격히 고도를 낮춘다.
20분 정도에 고도 200을 낮추면 돌담장을 친 쌍묘에 이어 헬기장이 나온다. 돌아보면 방금전 내려온 암봉이 하늘높이 솟구쳐 있다.
앵강만에 있는 유일한 섬 노도는 조선중기 서포 김만중이 유배되어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서포는 3년 남짓한 노도 유배생활 중 한글소설인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등을 집필하고 눈을 감았다.
김만중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버리고 장희빈을 왕비로 삼는 것을 반대하다 노도로 귀양 가게된다. 노도에서 서포는 숙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사씨남정기'라는 소설을 쓰게 되고, 모친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구운몽 소설이 탄생하게 되는 곳이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장희빈 사건을 소설화 한 것이고 사씨는 인현왕후를 말한다
숙종 14년(1688)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장소의(張昭儀)가 왕자 윤을 생산하자 숙종은 인현왕후의 양자로 삼아 원자로 삼으려 했으나 서인이 반대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두달 밖에 안 된 윤을 이듬해(1689) 원자의 정호를 정하고자 했다. 이에 서인측은 정비 인현왕후가 이직까지 젊어 왕자를 생산할 능력이 있으니 기다리자고 했다.
숙종은 서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일만에 왕자 윤을 원자로 정호하고 소의 장씨를 빈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서인 송시열을 비롯한 관료들은 대거 유배되었는데 송시열은 제주도로, 김만중은 남해로, 조카 김진규는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되어 중전 민씨(인현왕후)가 폐위되고 희빈 장씨가 중전이 되면서 원자 윤이 세자에 책봉된다.
서포는 숙종 18년(1692) 4월 30일에 5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병이 심했으나 끝내 약을 받지않고 병사했다는 기록이다.
(1637~1692, 유배기간:1689~1692)
임도
우측 용문사쪽은 비포장이고, 왼쪽은 시멘트 포장이다. 왼쪽 임도를 타면 앵강고개로 연결이 되겠다.
[호구산 / 앵강고개] 이정표 아래 앉으니 정하가 발톱 보수작업을 하는데 아무래도 불안해 보인다.
결국 두 선수는 여기서 산행을 접고 금산산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차 열쇠를 넘겨줬다.
×270봉을 넘은 다음봉에는 지형도에 없는 삼각점이 있고(△261.4 경남435), 돌아보면 납산이 하마 저만치 멀어졌다. 10분 가량 편백 숲길이 이어지다가 좌우로 갈라지는데 어디로 가든 다시 만나게 된다.
1024 도로
밀양박씨 선산 돌기둥 뒤에서 내려서면 이동에서 당항으로 넘어가는 2차선 아스팔트 도로로 19번국도에서 갈라져 나온 1024번 지방도로다. 바로 왼쪽 아래 19번국도 삼거리다. [종주길 안내도]와 이정표가 있고, 도로 건너 우측에 들머리가 있다.
앵강고개는 나지막한 ×132봉 하나를 더 넘어야 된다. 잠깐 올라서면 참호와 돌담흔적이 남은 ×132봉이다. 길이 다소 어수선하지만 잠시뿐이고, [윤덕섭선생 묘터 가는길] 팻말 옆으로 내려가면 앵강고개다.
앵강고개
19번국도가 지나는 넓은 광장같은 넓은 삼거리에, 배 모형의 화장실은 일류호텔급인데 구멍가게 하나 없다. 화장실에서 화장하고 머리 식히고 물까지 보충했다. 들은 바로는 일본의 화장실 물은 빗물이나 한번 사용한 물을 재활용한 것이나 우리나라 화장실물은 상수도 물이라 했다.
앵강만은 꾀꼬리 앵(鶯)자에 물 강(江)자를 쓰고 있지만 어원을 찾지는 못했다. 비 내리는 밤에 꾀꼬리 울음소리가 나고 꾀꼬리 눈물 같은 빗물이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로 흘러내려 '꾀꼬리의 눈물바다'로 불렸다는 그럴듯한 해석이 있기도 하다만 그리 신빙성이 있어보이지 않는다.
[진실공원] 표석이 보인다만 아직 조성이 덜된 모양이라 넓은 주차장에 위쪽에는 원목을 깐 전망데크가 있다. 휴게소 조성이 완료되면 찾는 사람도 제법 있을만 하다. 길 옆에 삼각점 (남해437)이 있는데 표고(해발높이)가 83m다.
육군대령박진경 동상 앞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시멘트길 따라 오르면 앵강만을 향해 공원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시멘트길이 끝나고 임도가 시작되는데, 그 임도 시작점에 있는 [종주안내도] 뒤 편백나무 숲으로 올라붙는다. 아쉽지만(!) 이 임도는 지맥과는 무관한 임도다.
앵강고개
현위치 : 앵강고개
편백나무 숲길로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지맥이 남쪽으로 방향전환을 하는 △582봉까지 약 한시간 반 동안 오름길의 연속이다. 집체만한 바위와 여러형태의 바위가 눈길을 끄면서 아래로는 복곡저수지와 보리암 오르는 도로가 보인다. 금산까지 복곡저수지를 완전히 한바퀴 돌아가는 형태로 마루금은 이어진다.
남해군에서 산길을 정비한 흔적이 뚜렷하다. 폭 1m 이상 넓게 열려있고 까다로운 암릉에는 사다리를 만들어 놨다. 벌목 후 아무렇게나 내버려둔 다른 곳과 여실한 차이를 보여준다.
△381.5m 경남434
앵강고개 출발 40분에 삼각점을 본다. 고도를 300이나 올렸는데 아직도 오름길은 까마득하기만 하다. 다리는 흐느적대나 저수지 건너편에 있는 금산까지 거리를 감안하니 쉴 여유도 없다.
△582.1m
멋진 바위들과 시원한 조망을 위안 삼으며 쉼없이 40분 올라가니 북으로 이동면계가 갈라지는 분기봉이다. 이제 삼동면을 만나는데 창선쪽으로 가려면 여기서 내려가야겠다. 다시 나오는 편백숲을 지나면 길에서 왼편으로 벗어난 곳에 부셔진 삼각점이 있다.
길은 내림길로 변하고 ⅹ566봉에서 남으로 방향 바뀐다. 왼쪽으로 호곡산으로 가는 능선이 갈라진다만 길은 보이지 않는다. 지도를 보면 동쪽 건너편에 무등산(△429.8)이 있다.
정면을 막는 바위에 올라서니 건너편 금산 정상부가 제법 선명하게 보이고 앵강만이 햇볕을 받아 번뜩인다. 그대로 능선길로 이어지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길은 사정없이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임도 안부 (309m)
속절없이 떨어지더만 임도에 내려서니 고도는 300이고, 다시 올라야할 금산은 700이 넘는다. 지나가는 차라도 있으면 죽은 흉내를 내서라도 얻어 타고 가겠다만 인적이라고는 없는 길이다.
아직도 금산은 가맣다
복골고개
시멘트 포장된 3거리 갈림길. 복골마을에서 올라왔으니 복골고개라 하자. [앵강고개4.85 순천바위1.72km]이정표가 있다. 오르막 들머리에 앉아 아랫배 힘을 주며 마지막 운기조식을 해본다. 옆에 지게가 하나 있는데 중국 백두산에서처럼 사람 태워주는 지겟꾼이라도 없나...?
로프 두가닥 걸린 까꼬막길을 올라서면 이후는 느긋한 오름길이다. 거대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순천바위가 조금씩 다가오고 복곡저수지 보이는 각도가 조금씩 달라진다.
ⅹ615 순천바위
어째서 순천바위가 되었노? 설악산에 있는 울산바위처럼 이 바위들도 순천에서 온 바윈가. [순천바위] 팻말따라 들어가니 쉽게 올라서도록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내산저수지가 내려다보이고 바람이 거세어 한기보다도 위험을 느낀다. [앵강고개6.57km 금산초소0.89km]
2분 올라서면 왼쪽으로 [내산산촌체험마을] 내려가는 갈림길 봉우리다. 이제 금산 갈림봉의 통신철탑이 빤히 바라보인다. 살짝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는데 안부에 구멍난 묘 하나 있다. 뭣이 파고 들어갔나, 속에서 뭣이 나왔나?
지겟꾼은 어디갔노?
순천바위
순천바위
금산초소 (666.4m △남해12)
통신용철탑이 왼편에 높이 솟아있고,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정상 직전에 우측으로 로프를 치고 [출입금지] 달아 놓은데가 금산으로 가는 길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인데 남해 종주길은 훤히 열려있고 또 보리암 오르는 길은 차가 다니는 길이고, 그 사이 1km 가량을 국립공원에서 출입금지로 막아놓았다.
지리산 깊은 골짜기야 그렇다치더라도 좌우 양쪽 대로길 사이에 있는 1km에 [출입금지, 과태료...]는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우리나라에서 ‘국립공원’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과태료’란다. 그 과태료 받아 저그 살림살이가 얼마나 나아졌는지 정말로 궁금하다.
이제 상주면을 만나는데, 우측으로 난 길은 시멘트 뚜껑덮힌 수로인지 시멘트길을 따라가면 된다. 이동통신 시설이 있는 봉에서는 방화선처럼 넓은 임도다. 차 바퀴자국이 선명하걸 보니 수시로 차량이 들낙거리는 모양이니, 저그들 작업을 위해서는 이렇게 넓은 길을 내놓고 사람의 발길은 막고 있으니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국립공원인지. 보리암 도로로 나오는 쪽도 철문을 만들어 막아놨다.
보리암
보리암 도로에는 늦은 시각임에도 사람들이 올라가고 내려온다. 절은 내일 들여다보기로 하고 입구에서 위로 난 계단따라 올라가면 금산 정상이다.
금산 ×705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우리나라 3대 기도처 중 하나인 보리암이 있는 산이다. 금산이라고 불리기 전 이름이 보광산이었다.신라시대 원효스님이 이름 없는 산에 보광사라는 절을 지으며 산 이름을 보광산이라 했다.
그리고 칠백여 년이 지난 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무렵 보광산에서 새 나라를 열기 위한 백일기도를 드렸는데 그는 새 나라의 문이 열리면 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어 주겠다고 했다. 그의 뜻대로 새 나라를 세웠지만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을 수는 없는 일이라, 산 이름에 ‘비단 금’자를 넣어 錦山이라 부르게 했다.
보광산이라 했다
미조까지
순천바위와 금산초소
금산산장
산장은 단군성전 아래쪽 [흔들바위] 있는 곳이다. 민간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일반 민박집 수준이다. 방이 여럿이고 자고가는 사람은 그리 없어보여 예약은 필요 없겠다. 침대나 샤워실을 기대하면 안되고 7,000원에 제공되는 식사는 조은말로 웰빙식이고 내눈에는 완전히 절밥 수준이다.
깔고 덮을 이불을 주는데 보일러를 얼마나 돌렸는지 방이 뜨겁다. 밤 열시까지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후는 조용해졌는데 아침까지 방은 따뜻했다.
경남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남해금산內 금산산장 (055-862-6060)
숙박 : 기본 2인에 3만원 +추가1인당 5천원
금산을 오르려면, 상주쪽에서는 산길 1시간 반이 걸리고,
복곡주차장 쪽은 복곡저수지 상단에 대형주차장이 있는데 여기다 주차하고, 정상아래 2주차장까지는 셔틀버스를 이용한다. 제2주차장에서 보리암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남해읍에서 보리암 가는 버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