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혈통의 전환
1970.10.13
한국 중앙수련소
구원섭리의 목적은 창조목적인 이상세계를 완전히 복귀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다면, 우리 인간은 계속하여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게 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사랑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은 실체적인 하나님의 출현을 목표로 아담을 창조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실체를 가진 하나님입니다. 피조물에 대한 주관은 그 자체를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면 할 수가 없습니다. 피조물은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완전한 주관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담도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존재이므로, 피조물을 관장해서 이를 완전 주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을 내세워 그 아담 속에 하나님이 직접 내재하시고자 했습니다. 아담의 육체를 하나님의 공명체(共鳴體)와 같은 입장에 세워 놓고, 하나님이 직접 천주(天宙)를 주관하려 했던 것입니다.
아담의 창조와 사랑의 가치
만물은 유형실체로 존재하지만, 하나님은 무형으로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형상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크다고 하면 무한대요, 작다고 하면 무한으로 작은 분이십니다.
피조세계를 주관하려면 그의 주인적 인격, 주체적 인격으로서의 형상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 지상 만물의 주관뿐 아니라, 무한한 영계도 주관해야 합니다. 천사장이라든가 여러 종류의 무형 실체세계까지도 주관하려면 역시 그 중심적인 타입, 곧 형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아담을 통해서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를 모두 주관하려고 하신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었습니다. 하나의 인격적인 하나님으로서 나타나는 표시를 형성시키기 위해 아담이라는 실체를 필요로 하신 것입니다. 아담의 완성과 더불어 이른바 하나님의 형상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실 때 형태·인상·인격 등이 무형세계의 중심에 계시게 될 하나님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어떠한 형태가 없으면 형태의 세계를 주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과 그 하나님과 하나가 돼야 합니다. 이를 결부시키는 것은 사랑입니다. 존재 세계의 평면적인 대표자는 인간이며, 입체적인 대표자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영원히 결부시키는 중심점이 바로 사랑이라는 끈입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게 될 때, 그의 심정과 감정은 무한한 체휼경(體恤境)과 행복감에 취하게 됩니다. 결국 사랑에 의해서 하나님과 인간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 의해서 인간과 세계가 하나가 되며, 하나님의 창조 목적인 이상세계의 실현은 여기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부활 노정
본연의 인간이란 모두 하나님과 일체를 이룬 가운데 사랑을 실체로 느끼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중심점을 노려서 아담 해와를 타락시켰습니다. 그 이후, 우주는 사랑과는 관계없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서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정립되어야 할 인격의 기준이 사탄에 의해서 파괴되었던 것입니다. 그 동기는 순조롭지 못한 반대 작용을 통해 결부되었기 때문에 항상 그 자체도 반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양심(良心)의 기준과 육심(肉心)의 기준이 반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사탄의 사랑을 중심으로 결부된 그러한 끈을 어떻게 풀어서 해방시킬 것입니까? 그것이 지금까지 인간이 수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싸워 온 노고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기점(基點)을 회복시키기 위해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우리의 양심의 문을 두드렸던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직접 들어와 하나님의 사랑을 결부시킬 수 없기에, 예언자라든가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 사랑을 체휼케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점차적으로 사랑을 발전시켜 왔던 것이며, 이것이 지금까지의 복귀섭리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소망은,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의 마음 속에 존재했던 ‘사랑’의 목적을 이루는 데에 초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메시아가 필요한 이유
이스라엘 민족은 4천년이란 역사를 통하여 선민권을 형성하였습니다.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아벨의 입장에 세우고 줄곧 메시아 사상을 가르치면서 민족을 이끌어 왔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는 믿음의 기대가 성립되면, 유대교와 서로 횡적으로 일체가 되어 실체기대를 이루고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완성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이 기대를 위해 하나님은 4천년 역사를 고생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비록 그 기대는 완성하지 못했지만 선민권을 목표로 하고 소망해 왔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상에 서둘러 예수님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와 이스라엘이 일체를 이루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해야 예수님이 메시아로 나타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참부모로 오시는 메시아를 맞이할 수 없으며, 새로운 사랑을 중심으로 한 혈통 전환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메시아가 필요한 까닭은 곧 구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구원에 필요한 근본적인 기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접촉점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과는 관계없는 사탄의 실체를 가진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는 정반대되는 까닭에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탕감이란 원죄를 제거하는 것이며, 원죄를 제거하는 데는 혈통적인 것이 근본적으로 존재합니다. 혈통적인 것은 타락인간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들의 대를 이어온 사탄의 혈통을 뽑아내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참부모인 것입니다. 이러한 참부모가 나타나지 않는 다면 선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룰 수 없으며 선한 상대 기준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악의 부모와 싸워서 사랑을 중심으로 최후 승리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통해서만 악의 혈통권이 굴복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길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승리의 기준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한 몸으로써 이를 이루기 위해 3년간의 공생애에 앞서 나를 누구보다 더 사랑하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아비와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으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혈통을 전환하는 것은 메시아가 할는 지 모르나, 전환하도록 행동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기준이 이룩되지 않는 한 우리는 구원의 길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것은 결코 쉽게 이루어 지지 않고, 죽느냐 사느냐의 경지를 통과해야 합니다. 40일 단식기도라든가 피를 토하는 죽음의 경지에 가야 혈통 전환이 가능합니다.
목숨보다도, 육체의 생명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일관한 예수님의 생애는 싸움 중의 싸움이었습니다. 또한 요셉가정에서의 박해는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마치 산 송장과 같은 생활과정을 통과하면서 소망했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과 자기의 몸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이 승리권을 완전히 이어받았다는 기준 위에 서지 않았다면, 메시아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미리 아시기에 그 방법을 줄곧 역사를 통해 실천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중심하고 창조 본연의 인간으로 결합시키고자 했습니다. 자기 일신의 괴로움을 잊고 오직 사랑을 그리워하지 않으면 본연의 인간으로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종교는 긍정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으로부터 출발하게 됩니다. 완전 부정입니다. 생명까지도 부정하는 입장을 통과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개인이 걸었던 신앙 노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개인의 입장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어떠한 역사 과정을 통과해야 되었습니다. 30세에 출발한 공적 노정 이전의 승리권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것을 완성시키지 않을 때 예수님은 공적 노정의 출발 기준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생애(私生涯) 30년 기간은 바로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으로 사랑의 기대를 마련한 기간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역사적인 대표자를 세워 놓고 줄곧 소생, 장성, 완성이라고 하는 단계적인 섭리를 펼치셨던 것입니다. 악의 부모로부터 출발한 인류 역사이기 때문에, 참부모의 가정 기준을 더듬어 사랑의 실천을 전개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기대를 터로 하여 완전한 전환의 역사를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진정한 부활의 의미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남자로부터 생명의 씨가 여자에게 들어감으로부터입니다. 그렇다면 이 전환의 길은 어디로 가서 그 교차점을 만들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여자의 복중입니다. 역사는 줄곧 그곳, 즉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조건을 세우는 역사였습니다.
그렇다면 여자의 복중에서 아기가 잉태한다고 할 때, 거기에는 남자가 있어야 하고 결국 가정이 형성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 복귀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남자의 골육 속에 숨어 있는 아기의 씨가 출발이 됩니다. 즉, 그 남자의 혈육 속에 있는 아기의 씨의 기준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일체가 되었다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완전한 혈통적 전환의 기대를 위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종교는 , ‘인간은 또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중생(重生)해야 한다’는 내용을 가진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문답과 같이, 거듭나지 않고는 천국으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를 겨냥해서 되살아나는 기반을 출발시킬 것인가? 가령 30세에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거듭난다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심정적 내용의 발생지는 30세부터가 아닙니다. 그것에 도달했다는 심정 상속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거듭나는 출발과 동기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혈통적 전환을 시키기 위해서는 아담의 골수까지, 골육의 중심부까지 들어가서, 장래의 아기가 될 그 씨에다 하나님의 사랑을 결속시키는 승리적 조건을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그리워해야
지금까지 크리스찬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랑의 근원이라 생각하고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일체가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마르게 그리워하는 경지에 들어가야 예수님과 일체가 됩니다.
예수님이 슬퍼지면 자신도 슬퍼지고 예수님이 기뻐하면 함께 기뻐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전혀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남자로서 타락하지 않은 원래의 아담인 것입니다. 즉, 영적인 아버지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과 하나가 되지 않으면 부활이란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신앙은 예수님을 목마르게 그리워하는 체휼신앙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시고 그 골수에 이르기까지 애정이 맞닿아야 합니다.
예수를 신랑으로 가르치는 데 대한 첫째 이유는 , 예수의 골육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복중을 통과했다고 하는 조건의 기대도 함께 얻으려는 것이 바로 신부의 입장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아담 속에 있는 씨와 마찬가지의 입장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성신(聖神)은 완성한 여성신입니다. 성신의 역할이란 아담 속으로 되돌아가는 일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찬은 모두 예수님의 몸 속에 있는 자녀의 씨와 같은 입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신앙을 하는 크리스찬이 과연 얼마나 됩니까? 꿈에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만 예수님을 무조건 믿고 천국에 가겠다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러나 입으로만 믿는 다고 해서 천국에 간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예수님의 골육 속으로 들어가야 완전한 복귀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섭리를 펼쳐야 하는 하나님의 역할이 어떨까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과정에는 수많은 사탄이 진을 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탄권을 뚫고 들어가는 데는 수많은 희생이 따르게 됩니다.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골육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일체를 이루는 데는 사랑 외에는 없습니다. 진리도 정의도 아닙니다. 생명이 있기에 앞서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역사도 뛰어넘을 수 있으며, 거리나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나는 길
이렇도록 분명히 가르치는 뜻은, 복귀 노정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심정적 문제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권의 제1보를 내디뎌야 할 중대한 전환기에 처해 있습니다. 혈통적인 전환기가 아니라 생애의 전환기에 서 있기에, 사탄이 참소하지 못하는 분명한 내용의 기반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이것봐! 어디에서 옮겨 왔어? ”“어디에서 출발했어? ”“타락하지 않은 에덴 동산, 하나님의 품에서? ”무엇이 그러냐고 물을 경우, 이것이 이렇지 않느냐는 분명한 입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로서는 입장이 난처하지만 어떤 분이 해주신 것이라 할 때, 사탄이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어느 건축물의 소유권이 종이 한 장으로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사랑에 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참부모의 혈육에 접할 수 있는 인연을 세웠다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예수님과 성령이 서로 그리워하는 사랑의 길을 더듬어 가야 거듭 태어나는 것입니다.
또한, 여자가 남자를 사모하며, 남자가 여자를 그리워하듯, 일치된 사랑의 경지를 통과해야 거듭납니다. 성신은 감동의 역할을 합니다. 성신의 감동을 받으면 예수님이 몹시 그리워집니다. 예수님은 신랑이요 성신은 신부입니다. 기독교의 부활의 원리는 바로 두 실체가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 때문에 역사과정을 통과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있었기에 6천년이란 시간이 흘렀던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절망적인 세계에 선생님과 같은 사나이가 나타났다고 할 때, 여러분은 아마 기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평생 동안 목숨을 걸고 싸워 나왔습니다. 세상에서 고통스런 일이란 피할 수 있지만, 이 일은 피할 수도 없습니다. 완력이나 폭력을 가지고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원리 원칙에 따라 하지 않으면, 사방에서 몰아치는 화살을 피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싸움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하고도 생각됩니다. 그와 같은 일을 할 때 탕감의 조건을 세워 내적 기반을 닦아 왔음을 여러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기반을 터로하여 전환점을 이루었다는 것은 천주적(天宙的)인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싸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담 가정에서는 아벨과 가인이 싸웠습니다. 그런데 가인을 아우의 입장에 세워야 합니다. 형님이 어떻게 아우 입장이 되느냐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탄을 끌어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은 태어나면서부터 형제지간의 싸움이었습니다.
가인이 한 사람 태어나면 아벨도 한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에서와 야곱도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다 자란 후에 싸웠습니다. 이 둘은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싸우기도 했습니다.
다말에 관해 연구를 하면 원리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시아버지와 관계해서 태어난 아이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혈통을 이어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다말의 믿음과 우리야의 아내의 입장
솔로몬의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그의 어머니인 밧세바는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다윗왕이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은 것입니다. 우리야의 아내는 말하자면 제2의 부인이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아담의 입장이요, 우리야는 천사장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천사장의 아내는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해와의 입장이 됩니다. 천사장이 아담의 상대자인 해와를 타락시켜 끌고 갔습니다. 사랑으로 점령하고 훔쳐 갔습니다. 그것을 탕감하려면 그러한 삼각관계에서 되돌아가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와 같은 원리적 기준에 입각한 조건을 세운 기대 위에 태어난 아이는 하늘의 영광스런 아이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영광의 아이입니다.
다말은 자기의 시아버지하고 관계를 했습니다. 그런데 시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정신은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법도에 의하면 음행을 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다말은 첫째 남편과 두번째 남편을 잃었으나 혈통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체면이나 위신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혈통을 어떻게 하면 남길 수 있을까 하는 것만이 문제였습니다.
혈통을 사랑했기에 혈통을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권으로 돌아가는 조건을 세우기 위해 시아버지와 관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보아서 시아버지는 곧 자기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인 심정을 지니고 있었던 마리아
복중 승리를 거둔 기준은 줄곧 이스라엘과 유대교의 자손에게 이어져 발전해 갑니다. 왜 그것이 국가적인 기준에 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탄 세계에 국가가 세워져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이스라엘 선민권이 발전하면서 내적·혈통적 승리의 기준이 연결되어 왔던 것입니다. 체면이나 위신이나 사회적 환경과 같은 것은 모두 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전부라고 하는 대표적인 심정을 지닌 사랑의 딸이 마리아입니다. 승리를 거둔 기준을 이어받은 복중에는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기반에서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이 잉태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역사적인 싸움을 끝낸 승리의 하나님 앞에 태어날 자격 조건을 완성시킨 기반 위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라갈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혈통적 내용을 안고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님은 역사이래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는 독생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 아무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껏 여러 종교가 있어도 모두 노예의 종교요, 양자(養子)의 종교권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은 사탄의 참소권을 벗어난 입장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천사가 와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영계를 총동원해서 탄생을 축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천사장은 가정적으로는 세례 요한이, 교회를 중심으로는 유대교, 나라를 중심으로는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이 하나가 되면 유대교는 자연히 하나가 되고, 세례 요한과 하나가 되었다면 유대교는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가정이 하나가 되어 힘을 합치고, 제사장을 앞세워 로마의 반대자들을 모두 추방시키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교와 이스라엘이 일체만 이루면 로마의 황제쯤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국가를 세워 로마를 병합하고, 지중해 연안 전반에 걸쳐 있는 로마 문명권이 예수님의 지휘권에 들어올 경우에는 세계 통일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전세계를 향한 지상천국의 이상을 이룩하려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2천년 동안의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고야 비로소 세계적인 기독교권인 제2 이스라엘을 형성했던 것입니다. 그런 기대 위에서 재림주님이 오시게 되었으나 기독교는 지상에 나라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예수를 죽인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기간으로서의 2천년 동안 방랑의 민족이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탕감의 철칙은 용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예수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해야 할 그 나라를 잃었기에 또다시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이스라엘 국가는 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12제자를 잃은 이스라엘은 12개국 이상의 아랍권 국가와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사탄과 대결하여 ‘이것이 하나님의 땅이다’라고 정해진 땅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마치 뜬구름처럼 바람이 부는 대로 쫓기고 쫓기면서 지금까지 흘러왔습니다.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가치없는 무리처럼 되었습니다. 수많은 정권과의 싸움을 방비할 수 있는 법칙이 없으니, 종교와 정치를 분리한다는 조건을 제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종교와 정치는 분리시킬 것이 아니라 일치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할 때, 이제부터 해야 할 복잡한 문제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민(天民)으로 입적(入籍)하려면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상에다 어떤 발판을 만들고 싶으실 것입니다. 넓은 우주라도 어느 한 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지금이 그러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성지를 결정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성지에서 기도를 올리는 데, 그것은 제물을 바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권한을 가지고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입적을 하려면 나라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살았다는 형태는 있으나, 사탄 세계에 대해 권위를 가지고 자기 위치를 당당히 외칠 수 있는 기반이 없습니다.
통일교회는 나라 없는 제3의 이스라엘 민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고생이나 싸움을 해서라도 본향을 찾아 점령해야 합니다. 이제 그 나라로 돌아가서 주권을 복귀시키고,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국민의 위치에 서서 입적하는 것이 최고의 소망인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를 세우고 빠른 기간 내에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지금의 이스라엘 민족처럼, 아랍과 전투를 하면서 이스라엘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러한 사상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일본인이 그런 국민이 되겠습니까? 미국인이 그런 국민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는 번영을 약속 받지 못합니다. 해와 국가인 일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발전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위할 줄 아는 사람은 서로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없고 서로 하나가 되면 번영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가엾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역사적인 사명을 다한다는 원리적 관점에서의 재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숙명의 과제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재림주님은 세계적인 기반을 다지지 않은 터 위에서는 오실 수 없습니다. 이러한 슬픈 입장을 뛰어넘는 데는 2천년이 걸려야 했습니다.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권은 바로 제2 이스라엘의 세계적 국가기준입니다. 즉, 영적 기준인 것입니다. 그 영적 기준은 세계권 민주국가, 유대교회권, 종교권, 기독교권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세계적 기대를 중심으로 하여 생각할 때, 거기에는 3단계의 과정을 통과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교인 가톨릭이 소생 과정을 통과하고, 장성 과정을 거친 것이 개신교입니다. 그것을 원리적으로 보았을 때, 가톨릭은 율법적 신앙이요 구약적 신앙이고, 신교는 신약적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신교가 주장하는 ‘말씀’의 실체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재림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아울러 심정을 갖추고 하나님 앞에서야 했습니다.
선생님의 사명
통일교회가 기반을 마련하려면 신약적 사명이 있는 신교가 통일교회를 맞아들여야 합니다. 그를 맞아들여 일체가 될 경우는 , 소생·장성·완성이 단번에 완성됩니다. 유대교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자연히 일체가 되듯, 기독교가 일체가 되면 민주주의 국가는 자연히 일체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산권이 근세에 있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제2차 대전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14년이 지난 후부터였습니다. 그것은 또 최후에 7년 동안의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기준이 되어 있습니다. 원리를 통해서 세계 정세를 살펴보면 매우 재미있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걸어야 할 사명은 외롭게 혼자서 가야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우를 때려서 시작되었던 역사였기에, 새로이 신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인습적인 교리나 내용을 그대로 가지고서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래서 선생님은 교회의 반대에 부딪히는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치 실체적인 예수님이 쫓겨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2천년의 역사를 20년으로 탕감하려는 것이 지금까지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면 탕감은 어디서부터 하는 가. 한국의 이남에서는 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에, 선생님이 북한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북으로 갔다는 것은 사탄의 본거지에 가는 것이요, 세계적인 사탄권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공산권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쫓겨나 로마로 들어갔던 것과 같습니다.
로마로 향했던 기독교가 400년 동안의 싸움을 거쳐 승리권을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선생님은 북한으로 가서 공산당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 곳에서 몇 사람을 데리고 넘어야 했던 상세한 내용을 말로 다 한다면 끝이 없습니다.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와서 감옥으로 향해야 했으며, 감옥에서도 제자 몇 사람을 이끌고 나와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반대하고 도망쳐 버리는 입장이어서는 안 됩니다. 공산당이 아무리 두렵다고 하지만 목숨이 아까워 도망쳐버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복귀시켜야 했기에,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지만 몇 사람의 식구가 남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에게 세 제자가 있었다고 하는 데, 사실은 그 세 제자가 가정을 유지해서 서지 않으면 안 되는 배후의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제자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초석을 놓는 하나의 방편에 불과합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 세 제자는 가인의 입장이요, 예수님은 아벨의 입장입니다. 이 세 제자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목숨을 걸고 같이 행동한다면 결코 예수님은 천상(天上)으로 가시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기독교는 6백년으로써 세계적인 기반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성도들은 목숨을 걸고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세 제자의 입장
예수님과 제자들이 일체가 되었다면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여 횡적 기반이 됩니다. 에덴 동산에서 해와를 잃었던 것은 하나님의 원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는 마리아를 중심으로 복귀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잃고 말았습니다. 3대에 걸쳐 모두 잃어버린 격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기도와 정성의 제단을 쌓은 세 사람의 부인식구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지구본부(地區本部)를 중심으로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한국 교포 몇 사람을 세워서 기도를 올리십시오. 일본도 그러한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일본 복귀는 빠른 시일에 이룩되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님도 그러한 내용을 알기 때문에 북한으로부터 세 사람의 기도 부인과 남자(金君)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을 기반으로 하여 남한에서 비로소 통일교회는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교에서 쫓겨나온 그 길을 또 다시 더듬어 승리했다는 기준을 세워야 복귀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통일교회는 새로이 출발했지만, 아벨의 입장에서 형님격인 기독교와 대등한 입장에 설 수 있습니다. 그동안 통일교회가 걸었던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희생의 길이었습니다. 이 길은 죽음의 길을 더듬어 온 노정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정적 기반을 다지고, 종족적 기반과 민족적 기반을 거쳐 국가적 기준에서 인정을 받기에 이른 것입니다.
선생님은 복귀 노정에서 종의 종으로서 거지와 같은 생활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복귀는 낮은 자리로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비참한 감옥에서 복귀의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그 기반이 국가적인 기반이 되기 전까지는 선생님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국가적 탕감기준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원리적 관점이 있기에 공석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국가적 기준을 중심으로 횡적 기준을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횡적 기준을 일본이 세우도록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예언자나 개척자가 희생되었던 것은, 그 목적이 물론 아담국가를 세우는 데에도 있었지만 결국 해와 국가를 찾기 위한 노고였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후에 일본이 처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축복식을 통한 혈통 전환
그럼 여기까지 오는 데 있어서 혈통적 전환은 누가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이 일을 하기 위해 눈물겨운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기준이 있기에 여러분은 아무 공로 없이 축복이라는 새로운 전통을 잇게 되었습니다.
전환의 승리권을 세우기 위해 수천년에 이르는 하나님의 노고와, 실체를 중심으로 한 선생님의 고난의 생애를 바탕으로 선 곳이 바로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입니다. 축복이란 접목하는 것이며, 접목함으로써 혈통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과한 사람과 이미 영계로 간 많은 사람과의 가치는 어떻게 다르겠습니까? 신앙의 기준으로 볼 때 그것은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천적(天的)인 은혜를 저버리게 될 경우에는 사탄이 여러분을 참소하게 됩니다. 천사장은 장성 기준에서 사탄이 되었지만, 여러분은 완성 기준에서 타락했기 때문에 사탄이 심판하게 됩니다.
축복은 최후의 길입니다. 그냥 무책임한 세파에 휩쓸려 내려가는 결혼으로 생각한다면 커다란 잘못입니다. 이 시기는 천주의 심정을 중심한 귀중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인격을 완성하고, 완성된 남녀가 뚜렷한 목적관을 가지고 있을 때 괴로움이나 고민은 다 사라집니다. 그러한 기준에 선다면 이 지상에는 타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타락하지 않은 창조 이상의 심정권에 충만되어, 생애를 걸고 감사의 마음으로 지내야 합니다. 고생스러운 일이 있어도 그것은 여러분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쌓아 두었던 무한한 축복을 보다 더 많이 내려 주기 위해 고생스러운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심정적인 사랑에 의해서 맺어진 부부는 애정으로 생활권을 형성해야 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려면, 뚜렷한 목적과 신념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는 부부가 되어야겠습니다. 지금부터 그러한 가정을 향해 나가자고 선생님과 약속을 합시다. 그렇게 되고 싶은 사람은 양 손을 들고 기도하며 맹세합시다.
기 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저희는 이제 아버님께서 사모해왔던 본연의 가정이 얼마나 엄숙한 가정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사옵고, 그 이상만이라도 남는 가정의 경지를 향해 지금부터 손을 합하고 발을 맞추고 몸을 함께 하여 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쪼록 지금부터 깨끗한 생애를 남기고, 순수한 혈통을 남기고, 아버님의 영원한 사랑의 품 속에 힘차게 안기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지켜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러한 역사의 과정에 있어서 심정복귀의 노정을, 그것을 거듭하고, 그것을 연장시키고, 그것을 계속하는 사이에 아버님께서 어떠한 수고를 하셨는가를 생각할 때, 무엇한마디도 드릴 수 없는 저희들이옵니다.
모쪼록 온 일신을 당신에게 바치기로 결의하였으니, 양손을 들고 맹세하는 이 가엾은 자녀들을 깨끗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지키시고 이끌어 주신 아버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옵니다. 이러한 모든 천적(天的) 비밀을 가르쳐 주신 아버님 앞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이옵니다. 지상의 만민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경지에 서서, 저희가 생활에서 체휼할 수 있도록 내려 주신 이 은혜에 대해 보답할 것은 저희의 생애, 저희의 실체의 모든 것을 제물로서 당신의 제단 앞에 바치는 길밖에는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았습니다. 이러한 혜택권을 이룩해 주신 지상에 있는 참부모님께 감사드림과 동시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얼마나 수고하셨는가를 생각할 때, 몇천만 번 절하고, 입으로 외우고, 찬양하더라도 끝이 있을 수 없는 감사의 마음으로서 따르리라는 결의를 한 번 더 하는 이 순간이 되게 해주시기를 비옵니다.
올린 양손을 직접 잡으시고 금후의 격렬하고 혹은 험악한, 그리고 죄 많은 사회에 처하여, 이 길을 더듬어 가는 그 노정에 있어서 부디 서로 지켜 주고, 서로 도와주게 하옵소서. 그 상대자가 없으면 타락하기 쉽다는 것을 생각하고, 시간마다 서로 지키며, 시간마다 서로 염려하면서 더불어 돕게 하옵소서. 이 세상의 누구에게도 없는 친한 벗이 되고, 친한 어버이가 되고, 친한 자식이 되고, 형제가 되고, 이 큰 영광의 본거지인 사랑의 세계에 이르는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그러한 자녀가 되도록 아버지께서 격려하시고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혈통 전환이라는 무서운 말을 지금 들었습니다. 이다지도 복귀의 노정이 어려웠사온데, 저희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몸으로서 따라왔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이룩했다고 하는 모든 영광은 자기에게 돌리려고 하는 마음으로 해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어리석은 자이었나를 알았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면 알수록 자기 일신을 둘 곳이 없어지며, 모든 것이 하늘의 것이며, 모든 것이 부모의 것임을 생각할 뿐이옵니다.
그 이 외에는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평생을 그 신념에 싸여서 승리의 기준을 세워 서로 돕는 부부가 되어 함께 아버지 앞에 남아질 수 있기를 바라옵니다. 그리고 아버님의 사랑 속에서 영원한 자녀를 낳아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어버이로서 자녀와 하나되어 아버님께 더한층 사위기대의 사랑의 심정을 되돌려 드리는 참된 남자와 여자, 참된 부부가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옵니다.
지금, 상대자의 얼굴이 문제가 아닙니다. 학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미묘한 그 모습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버님에게 정착할 내심의 심정의 약이 얼마만큼 입체적으로 되어 있는가 하는 그것이 문제인 것을 생각하고, 더불어 아버지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당신께서 지팡이가 되고, 격려의 약이 되는 동시에 구원의 주가 되어 저희가 이 사탄의 세계, 미친 파도와 같은 이 악의 세계를 통과할 수 있게 지켜 주시고 이끌어 주실 것을 재삼 바라옵니다.
지금 맹세하고 있는 이 양손을, 이 몸을, 이 부부를 깨끗게 해 주시고, 새로운 하늘 세계에 입적하는 그 약속자로서 깨끗게 해 주시옵소서. 이들이 가는 길에 어떠한 노고가 있더라도 아버님이 함께 고생하신다는 것, 아버님께서 눈물겨운 장면 장면에서 저희 이상의 쓰라림으로 체험하신다는 것을 알고, 천지가 열리지 않아도 서로 도우며, 서로 위로하는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도록 당신께서 격려해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오늘 이 장 시간에 걸쳐서 한 모든 말씀을 골수에 간직해서 백번 죽어도 그것을 명기하고 남기고 가는, 그리고 그것을 이룩할 수 없다면 자손만대에 유언으로 남겨서 그것을 이룩하도록 하는 진정한 조상이 되게 아버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금후에 심정적인 일체의 것은 아버님 없이 생각하지 않을 것임을 다짐하오니, 새로운 가정을 창조하고 심정 세계를 개척하는 선구자로서 부끄럽지 않는 거동과 몸가짐을 갖출 수 있도록 아버님께서 지켜 주시고 이끌어 주실 것을 다시 한 번 바라나이다.
226쌍의 그 결말에 비극이 남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쁨만이 남는 입장에 설 수 있도록 아버님께서 지켜 주시옵소서. 그리고 아버님께서 세계만민 앞에 세워서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참된 가족, 참된 부부가 되도록 지켜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금후의 모든 것을 맡기겠사오니, 아버지시여, 이끌어 주시옵소서. 참부모의 이름으로 당신 앞에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5-156~181)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