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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들
-불멸의 윤동주-
황인수
감시병 둘이 황급히 3등실 쪽으로 달려갔다. 희미한 등불에 어린 그들의 낯빛이 삶아 담가놓은 우거지처럼 검푸르죽죽했다. 성질 사나운 노동자들이 자리다툼을 하며 또 난동을 부린 모양이다. 선실문을 따고 들어간 감시병들은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그들을 내리치고 발길질을 해 대리라.
“이 돼지만도 못한 조센징 놈들!”
성난 이리처럼 눈빛을 희번덕이면서 그들은 온갖 욕설로 선실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모든 조선인들을 싸잡아 모욕할 것이다.
“이 비좁은 선실에서 싸움질을 해? 그러니까 너희들은 개돼지처럼 맞아야 해! 쓰레기 같은 놈들.”
그는 선실 바닥으로 거적때기처럼 내쳐진 노동자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영춘도 같은 모습을 상상을 했나보다. 3등실로 향하는 감시병들을 돌아다보는 영춘의 눈빛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가 영춘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조심해. 감시자들이 많아.”
영춘이 그를 바라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알았어요, 형님. ……죽일 놈들……크악, 퉤-.”
영춘이 바다를 향해 가래침을 날려 보았지만, 왠지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삭여지지는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북간도를 뜨면서부터 영춘의 말끝에는 늘 ‘죽일 놈들’이 붙어 있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일본 사람들은 모두 ‘죽일 놈’이 되어 그의 입 밖으로 나갔다.
“죽일 놈들.”
그도 영춘을 흉내 내어 중얼거리듯 그렇게 내뱉어 보았다. ‘죽일 놈들, 죽일 놈들.’ 그의 마음속에는 잠실에서 꿈틀거리는 누에만큼이나 많은 ‘죽일 놈들’이 꾸물거리고 있었다.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죽일 놈들’밖에 없었다. 그의 온몸에 ‘죽일 놈들’이 달라붙어 스멀거리는 것 같았다.
‘내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죽일 놈들. 우리의 터전을 수탈하고 능멸하는 저 쳐 죽일 놈들.’
아들의 죽음을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지며, 가슴으로 분노가 차올라 퍽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지난 해 7월, 아들이 특고 형사에게 체포되어 카모카와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그의 세상은 무너졌다. 집안의 기둥인 아들. 자신의 희망이요, 목숨과도 같은 아들이 아무 죄 없이 유치장에 갇히다니. 출판사로 엎어지고, 양계장하다 말아먹고, 하는 일마다 신통치 않아 생업을 전전하며 팍팍하게 살았지만 그동안의 세월이 고단하지 않았던 것은 모두 아들 때문이었다. 그의 희망이 동경의 하늘 밑에서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들이 무죄를 선고받고 하루 빨리 풀려나기를 기도하기 위해 다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들의 사망 전보를 받은 그날 그는 죽었다. 넋이 나갔으니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천붕이 바로 이런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아들의 마지막 모습은 보아야 했다. 아들이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야 했다.
그는 우지끈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그리고 바로 사촌동생 영춘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부산행 기차를 탔다.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까지, 거기에서 다시 후쿠오카까지 갔다.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발걸음은 왜 그리 더디든지, 기차는 왜 그리 느리든지…… 아들의 몸뚱이가 더 식기 전에, 얼굴이 망가지기 전에 빨리 만져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기차도, 배도, 걸음도 너무 느리기만 해서 조바심했던 시간들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배는 현해탄을 지나 쓰시마 쪽을 향해 나아갔다. 거세진 않았지만 밤바람이 제법 날카로웠다.
“추워요, 들어갑시다.”
팔짱을 끼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2등선실을 향해 돌아서며 영춘이 그에게 말했다. 그는 먼저 올라가라고 영춘에게 손짓을 하고 다시 바다를 마주하고 섰다. 암흑의 바다. 그는 자신이 그 바다 한 가운데 떠 있음을 깨달았다. 세상은 암흑이다. 햇빛 아래서 눈을 뜨고 있어도 앞이 보이지 않으면 암흑이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암흑 속에서 그는 자식을 잃고, 희망을 잃었다. 조선은 땅을 잃고 넋을 잃고, 갈 길을 잃었다. 전쟁이 치열해지고 있으니 꿈을 잃고, 뜨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눈으로 암흑 속을 헤매는 사람들도 더욱 늘어나리라.
배가 지나가면서 걷어내는 물결 소리와 귀를 웅웅 울리는 둔탁한 엔진 소음, 그리고 사정없이 뱃전을 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로 갑판은 소란스러웠다. 그는 눈을 감았다.
‘아들도 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겠지? 의대에 가라는 내 소원을 뿌리치고 문과를 선택했지만 나름 푸른 꿈을 안고 동경으로 갔겠지. 릿교대학에서 교토의 동지사 대학으로 편입하겠다고 지난 여름 고향에 오갔을 때도 이 배를 탔겠지? 3등실에 타면 개돼지 취급 받으니까 2등실에 타라고 당부했지만 돈을 아낄 요량으로 굳이 3등실에 타서 선창마저 굳게 닫힌 그 비좁고 냄새나는 선실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불안한 눈을 껌벅였겠지?
6개월 동안 카모카와 경찰서 유치장에서는 또 얼마나 고생했을까?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특고 경찰들이 증거자료로 제시하는 터무니없는 조서들을 보며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났을까?’
“지난 일 년 동안 특고 경찰은 그림자처럼 나를 미행하고 엿들었어요. 내 자취방에 불이 몇 시에 꺼지고 켜지는 지,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지, 누구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꼼꼼하게 기록했어요. 난 꼼짝없이 당했어요. 우리 유학생들 모두가 감시당하고 있어요.”
그는 아들과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 조카 몽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가 면회를 갔던 날, 형무소에는 푸른 죄수복을 입은 50여명의 조선 청년들이 줄을 서서 주사를 맞고 있었다. 간수에 의해 이름이 불리어진 젊은이 하나가 그와 영춘이 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것이 몽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몽규의 모습은 처참 그 자체였다. 반쯤 깨진 안경을 겨우 콧등에 걸치고 있었고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몽규가 뭐라고 인사말을 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그가 몽규의 두 손을 부여잡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 모양이냐?”
몽규는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어나갔다.
“저 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어요, 삼촌. 동주도 이 모양으로…….”
몽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절망을 느꼈다.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히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들 동주가 저런 몰골로, 저렇게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갔을 거라고 생각하니 발밑이 무너지며 수 천길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동주가 독방에서 깡보리밥 한 덩어리와 단무지 몇 쪽으로 연명했었다는 말은 차라리 듣지 말았어야 했다. 주사를 맞다가 갑자기 아-인지, 어머니-인지 모를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학질 걸린 사람처럼 그렇게 온몸이 후들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따뜻한 아랫목에 등을 지지며 편한 잠을 자고 있을 때, 자신의 분신이 차디찬 감옥 바닥에서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 그는 한없이 죄스럽고 부끄러웠다.
밀려드는 어둠이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죄고 흔들었다.
죽어라, 너는 아비의 자격이 없다. 죽어라 이 놈.
그가 눈을 감는 날까지 어둠은 그를 흔들리라. 죽을 때까지 자신은 새벽이 오지 않은 어둠 속에서 살리라. 그렇게 살다가 어둠 속 어딘가로 사라지리라.
꿈이 없는 인생. 빛이 사라진 세상에서의 삶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갑자기 눈을 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뱃전 쪽으로 다가섰다. 바로 발 밑, 검푸른 바닷물 위로 허연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저 찬 물속에 몸을 던져 먼저 간 아들을 따라 가리라. 가서, 춥고 병든 아들의 몸뚱이를 꼭 껴안아 주리라. 못난 아비를 용서하라고 눈물로 호소하리라.
그가 난간을 잡고 바다 쪽으로 몸을 기울이려는데 누군가 그의 허리를 잡았다.
“형님, 그러다가 떨어지면 시신도 못 찾아요. 추우니까 들어가서 몸 좀 녹이고, 동주는 잠시 잊읍시다. 어쩌겠소. 이미 불귀의 객이 된 것을.”
영춘이 돌려 세웠을 때에야 그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시간상으로는 대마도 근방을 지날 때가 되었는데 구름이 드리워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네요.”
영춘이 허공 여기저기에 눈빛을 꽂으며 말을 이었다.
“1926년인가? 7년인가? 그러고 보니 벌써 20년 전 이야기가 되었네요. 윤심덕과 김우진이 사건 말이오. 바로 여기 어디 쯤 될 것 같은데……. 둘이 껴안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잖아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윤심덕과 김우진 이야기 중에는 그들이 사실은 죽은 것이 아니라, 동반자살을 기도한 것처럼 꾸미고 로마나 파리로 도망가서 이름과 국적을 바꿔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섞여 있었다. 그들의 죽음을 믿고 싶지 않은 이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들의 사랑을 지켜주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만들어진 이야기.
그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주가 죽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윤심덕과 김우진처럼 죽음을 가장하고 어딘가 자유롭고 풍요로운 나라로 도망쳐서 이름을 바꾸고 살고 있을 거라고, 그가 화장해서 들고 온 저 유골함 속에 있는 뼛가루는 동주의 것이 아니라 그냥 미숫가루이거나 쌀가루일 거라고.
“기차로 갈아타면 눕지도 못해요. 가서 선실 바닥에 다리 죽 뻗고 누웁시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는 영춘의 손에 이끌려 2층 선실로 올라갔다. 선실문 앞에 등이 하나 걸려 있었고, 굳게 닫힌 선창에서는 빛 한 줄기 새어나오지 않았다. 새벽 세 시 반 쯤 되지 않았을까 하고 그는 시간을 어림해 보았다. 엔진 소리와 울렁임 때문에 사람들은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실의 불을 끄고 모두 잠을 청한 까닭은 내일의 여정을 염려한 때문이리라. 대부분의 승선객들은 부산이 목적지가 아니라 부산을 경유하여 지금까지의 거리보다 더 먼 거리를 기차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와 영춘이 서 있던 갑판 난간에서 출발해서 그들이 서있는 2등실 쪽으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선실문을 열려다 말고 다가오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런 것을 직감이라고 하는 걸까? 그는 본능적으로 그 사람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검은 옷의 사람이 다가와서 문 앞에 섰다. 여자였다. 추위를 많이 타는지 온몸을 두꺼운 털옷으로 감고 있었고, 자주색 머플러로 머리와 목을 감고 있었다. 불빛에 비친 여자는 2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저- 실례합니다만, 히라누마 도오주(윤동주)의…….”
“맞소. 내가 윤동주의 아비입니다.”
“난 윤동주의 당숙이오. 무슨 일로 우리 동주를 찾습니까?”
그와 영춘을 번갈아 쳐다보던 여자가 갑자기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한 그와 영춘이 얼굴이 마주보았다.
“아니,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영춘이 여자를 일으켜 세우려 하자 여자가 고개를 바닥으로 더 깊이 숙이며 말했다.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여자의 목소리에서 비장함이 느껴졌다.
“저 때문입니다. 히라누마君이 저 때문에 죽었습니다.”
여자는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자세를 낮추었다.
“아니 형님, 동주는 감옥에서 죽었는데, 왜 이 여자는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하는 걸까요? 참, 알 수 없는 일이네…….여보시오, 사람을 잘못 찾아온 거 아니요?”
영춘이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는 영춘의 말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고 말했다.
여자를 내려다보던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그림자 하나가 떠올랐다. 검은 옷을 입은 그림자. 아니다. 그건 그림자가 아니라 미행자였다. 검은 옷을 입고 그와 영춘의 뒤를 줄곧 따라오던 미행자. 그 미행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와 영춘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도착했던 날, 형무소 앞에는 몇몇 사람이 출소자를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지금생각해 보니까 그 검은 옷의 미행자가 그 속에 섞여 있었던 것 같았다.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10여리 떨어진 화장터에서 아들의 주검을 화장시켜 나올 때까지는 검은 미행자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었다. 유골함을 들고 다시 형무소를 찾아가 몽규를 면회하고 나온 뒤부터 그는 그 미행자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조선 사람이 조선 땅에서도 감시를 당하고 사는데, 일본 땅에서는 오죽할까?’하는 생각으로 미행자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
아들이 치안유지법을 위반하고, 조선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수감되었기 때문에 그도 충분히 감시의 대상이었으리라. 그래서 일본 경찰이 자신을 따라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미행자가 일경이 아니라 여자였다니……. 이 여자는 내가 동주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왜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걸까? 그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여자가 상체를 세우더니 몸속을 뒤져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것을 그에게 디밀었다. 편지봉투였다.
“이건 또 뭡니까?”
영춘이 그것을 낚아채 불빛 아래로 가져갔다. 두 사람은 불빛에 비친 글씨를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그 편지의 수신인은 ‘히라누마 도오주’였고, 두 통 모두 ‘수취인부재’라는 붉은 木印이 찍혀 있었다.
“제 이름은 기타지마 마리코입니다. 히라누마君과 저는 영문과 클래스메이트였습니다.”
여자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좀 전보다 차분했다.
여자가 잠시 침묵하다가 무슨 말인가를 막 시작하려고 하는데 갑판 쪽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뭐야?”
감시병 둘이 이쪽을 주시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아까 3등실 쪽으로 갔던 검푸르죽죽하고, 우거지상을 한 자들이 분명했다. 영춘은 시선을 그들에게 고정시킨 채 몸만 살짝 돌려 들고 있던 편지를 허리춤에 구겨 넣었다. 여자는 몸을 일으키려고 하였지만 오히려 다리가 꼬여 주저앉고 말았다. 세 사람이 모두 어정쩡한 자세로 잠시 ‘얼음’이 되어 있을 때 감시병들이 후닥닥 올라왔다. 그들의 눈에는 두 남자가 한 여자를 폭행하는 것으로 비쳤던 것일까? 검푸르죽죽한 감시병이 손전등을 그와 영춘의 얼굴에 비추며 여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여자는 뭔가 일이 잘못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일으키며 당황한 목소리로 감시병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감시병들은 여자가 일본인임을 확인하고, 그와 영춘에게 도하증(渡河證)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여자가 감시병들을 가로막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분들을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이번에는 우거지상을 한 감시병이 막무가내로 여자를 뒤로 젖히고 그와 영춘에게 총을 겨누었다.
“앞장 서라. 좀 더 상세히 조사해 보아야 겠다.”
불길한 느낌이 그에게로 엄습해 왔다. 자초지종을 말해야겠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몰라서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층계 쪽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그 때 영춘이 감시병들에게 거칠게 소리쳤다.
“아, 글쎄, 우린 아무 잘못 없다니까. 저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가 우리 동주를 죽였다고 용서해 달라고 무릎을 꿇었다니까.”
“닥쳐라, 조센징.”
우거지상이 총으로 영춘을 칠 기세였다. 여자가 다시 감시병들을 막아섰다.
“사실이에요. 이 분은 옥사한 아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고향으로 가는 길이에요. 저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제가 잘못했어요. 그래서 용서를 빌던 참이었어요. 이분의 아들이 저 때문에 죽었거든요. 그러니 제발 이 분에게 결례하지 마세요.”
“결례라고? 이 자들은 조센징이요. 두드려 맞아야 겨우 말귀를 알아듣는 한심한 족속이라구. 아시오? 대일본제국의 황국신민이 저까짓 조센징 앞에 무릎을 꿇다니!”
검푸르죽죽한 감시병이 도끼눈을 뜨고 여자를 쏘아보았다.
“아무튼 이 분들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마세요. 만약 그랬다간 그냥 있지 않을 거예요.”
여자의 눈빛과 목소리가 단호하고 날카로웠다. 감시병들이 주춤 물러섰다. 그리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눈짓을 주고받았다.
“좋소. 잠시 따라오시오.”
우거지상이 여자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층계를 내려가 선원실이 있는 오른쪽 방향으로 갔다. 여자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 그는 안도의 긴 숨을 내쉬었다. 일이 자칫 꼬였다면 아들의 장례식은 물론 무슨 변고를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영춘과 함께 다시 갑판으로 내려갔다. 갑자기 피로가 밀려와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다간 아들을 생각하면 편안코자 하는 마음을 품은 사실만으로도 죄라고 여겨졌다.
“형님, 이 편지는 어떻게 할까요?”
난간에 기대어 허리춤에 감추었던 편지를 꺼내며 영춘이 그에게 물었다.
“무슨 내용일까요? 화근 덩어리가 될 지도 모르니까 그냥 바다에 던져 버릴까요?”
“수취인 부재라는 도장이 찍힌 것으로 보아, 우리 동주한테 보냈던 편지가 다시 되돌아간 것 같다. 그 여자가 보냈던 거니까 그 여자에게로 되돌아갔을 테고……. 동주가 그 편지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은 형무소에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그렇다면 그 여자는 동주가 형무소에 수감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 편지를 보낸 것이 틀림없어.”
그는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가서 편지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땅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선실로 들어가야 한다. 선실 어딘가에 비상용 손전등이 있을 지도 모른다. 이번엔 그가 영춘의 팔을 붙잡고 앞장섰다.
그와 영춘이 2등실로 오르는 층계에 첫발을 딛으려 할 때였다.
선원실 쪽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뛰쳐나와서는 그와 영춘을 지나쳐 선미 조타실 쪽으로 달려갔다. 좀 전의 그 일본 여자인 것 같았다. 그 여자가 입고 있는 옷의 형태와 색감이 어렴풋이나마 느껴지는 걸로 보아 곧 날이 밝아올 모양이었다. 곧이어 선원실에 있던 감시병이 달려 나와 여자를 뒤쫓아 갔다. 여자에게 위험한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그는 층계를 오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갑판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 조타실 쪽에서 급사로 보이는 선원 하나가 달려와 선원실 문을 급히 열고, 안에다 뭐라고 냅다 한 마디 지르고는 다시 조타실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다시 선원실에 있던 승조원 대여섯이 급사가 간 방향을 따라 뛰어갔다. 무슨 큰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그와 영춘도 그들을 따라 선미 쪽으로 갔다. 공연히 의심 받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 사람은 멀찍이 서서 조타실 쪽을 살펴보았다. 후미 갑판 위에 감시병을 비롯해 승조원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영춘이 좀 더 가까이 가보자고 하였지만 그가 만류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에 둔탁한 엔진 소음이 뚝 멈췄다. 그와 함께 배도 멈췄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객실에 불이 들어왔다. 그와 영춘도 적잖이 놀랐다. 그러는 사이에 날이 밝아왔다. 좀 전보다 얇아진 구름이 낮게 드리워 있었지만 비가 오거나 풍랑이 일지는 않을 것 같았다.
후미 갑판에 모여 있던 승조원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들은 모두 갑판 난간에 매달려 여객선이 지나온 뱃길을 주시하고 있었다.
승조원과 감시병들은 다시 모여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협의하는 듯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선장인 듯한 사람이 조타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엔진이 돌기 시작했다. 뱃머리가 서서히 왼쪽으로 기울더니 시모노세키 쪽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일까요, 형님? 배가 회항하고 있어요.”
서너 시간만 더 가면 부산인데, 왜 뱃머리를 돌리는가? 그는 궁금했지만 얼른 자리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와 영춘이 2등실로 올라가려는데 1등실 승객 서너 명이 그와 영춘을 지나쳐 갑판으로 내려갔다. 회항의 이유를 묻기 위해 그들은 조타실로 가는 것이리라.
“저들이 뭔가 소식을 알아올 테니 좀 기다려 봅시다.”
영춘이 선실 문옆 선창을 향해 돌아앉으며 말했다. 그도 영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영춘이 허리춤에서 편지를 꺼냈다.
“날이 밝았으니 예서 읽어 봅시다. 도대체 궁금해서 원…….”
영춘이 편지 두 통을 그에게 건넸다. 그는 누렇게 빛이 바랜 봉투를 눈 가까이 가져가 들여다보았다. 소인이 지워져 잘 보이지 않았다. 수신인의 주소는 아들이 기거하던 자취집으로 적혀 있었다.
형무소에서 시모노세키로 오기 전에 그와 영춘은 아들의 자취집에 잠시 들렀었다. 아들의 유해를 안고 자취집에 들어서자 관리인 듯한 늙은 남자가 깜짝 놀랐다. 그와 영춘이 아들이 기거하던 자취방을 한 바퀴 돌아나와 인사를 하고 돌아설 때까지 ‘히라누마’와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며 허리를 굽신거렸었다.
수신인 부분에 일본어로‘히라누마 도오주’라고 쓰여 있는 아들의 이름을 읽는 순간 그는 코끝이 찡하게 아려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창씨개명을 하고 몇 날 며칠 동안 굴욕감으로 괴로워하던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그리고 조선의 미래를 위해서 일본을 알고, 더 큰 세계를 배워야 한다며 유학을 결심했던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을 위해 제 한 목숨 따윈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그의 두 눈에서 이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기 시작했다.
편지를 꺼내 펼쳤지만 눈물이 앞을 가려 그는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춘이 가져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읽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히라누마君,
하루 종일 장맛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빗속을 걸어 君의 거처인 다케다(武田) 아파트까지 갔지만 君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부재중이더군요. 조선으로 간 건가요? 아니면 소무라 무께이(송몽규)君한테로 간 건가요?
‘별 말 없었다’는 자취집 관리인의 말로 미루어 볼 때 君은 아직 교토 시내 어딘가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그런 君에게 혹시 불상사가 생기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서 끼니도 거르고 학교로 갔습니다.
君이 자신의 처지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도서관에 틀어박혀 키에르 케고르를 탐독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요.
후텁지근하고 끈끈한 습기가 몸에 감겨 가뜩이나 어두운 마음을 더욱 무겁게 조여 옵니다.
문학부 강의실 앞 연못가 庭園石 위에 우산을 받쳐 들고 앉아서 물속으로 떨어지는 수많은 빗방울을 바라봅니다. 그 빗방울은 이내 빗줄기가 되어 물속으로 내리꽂히고, 수많은 바늘이 되어 내 마음을 찌릅니다.
히라누마君,
내 마음을 옭죄고 있는 이 불안과 고통의 원인을 君은 모를 겁니다.
장맛비 속을 헤매면서 왜 내가 君을 찾으려는지, 君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의 사소한 불찰로 인해 君의 불행이 시작될 것 같은, 아니 이미 시작되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특별고등경찰이 이미 君의 신상조사를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요.
엊그제 우리 영문과 학생 20명이 木村 俊夫(키무라 토시오) 교수를 방문했을 때 키무라 교수가 君에게 했던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방에 적국 사람이 있어. 일본에 반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히라누마君, 자네는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아.”라는…….
“저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君은 강하게 부정했지요. 하지만 키무라 교수는 君에게 ‘조선 친구들을 만나서 민족의식을 유발하는데 전념하고, 징병제도에 대해 비판하고 다닌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맞서면서 ‘그것이 反日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반문했죠. 평소 君을 따르던 영문과 친구들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고, 분위기는 일순간 얼어붙었지요. 화제를 돌려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지만, 君이 자리를 뜨고 난 뒤 오히려 엉망이 되었습니다.
키무라 교수댁에서 보았던 君의 분노한, 아니 절망적인 표정이 아직도 또렷합니다. 지난 10여개월 동안 君을 지켜보았지만 그렇게 험한 표정을 지은 君의 얼굴은 한 번도 본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뒤따라 나가서 君에게 사실대로 말하려 했으나, 君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까지 말입니다.
그날 친구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발걸음이 내내 무거웠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 때문에 카모(鴨川) 강변을 한참 동안이나 서성였습니다.
내가 君의 영문법 책을 빌리지만 않았어도 君이 키무라 교수에게 그런 말을 듣지 않았을 텐데, 그 책갈피에 끼워져 있던 君이 지은 詩가 내 눈에 띄지만 않았어도 君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나는 君이 궁금했습니다. 君에 대해서 알고 싶었습니다. 君이 어떤 詩를 썼는지 너무나 알고 싶어서 君의 시를 읽어보려 했지만 조선말이라서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영문과에서는 君이 유일한 조선인이었기에 저는 그 시를 조선말을 아는 다른 반 친구에게 번역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 친구는 세 편의 시를 건네받고 <쉽게 씌여진 시> 라는 시를 번역하여 읽어 내려가다가는 ‘이 시를 쓴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무심코 히라누마君이라고 말해버렸습니다. 그것이 실수였습니다. 전 단지 君이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워서 君의 이름을 밝힌 것인데, 君과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어서 그랬는데,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뭔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시를 읽던 그 친구가 ‘이 시를 특별고등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면 우리도 다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내가 공연한 짓을 하여 큰일을 내고 말았구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그래서 전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마다, 이 詩가 히라누마 君의 책갈피에 끼워져 있다고 해서 그가 쓴 詩라는 증거는 없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신고해서도 안 되고, 누구에게 함부로 말해서도 안 돼.”
저는 야마다 손에 들려 있던 詩가 적힌 종이를 낚아채 제 가방 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히라누마君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가 말했습니다.
“마리코, 영문과에 적군이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아. 조선말로 詩를 쓴다는 게 얼마나 큰 反日행위인지 너 정말 모르는 거야?”
야마다가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간 뒤에 엄습해 오는 불안감 때문에 잠시 서성거리다가 저는 야마다가 번역해 놓은 君의 詩 <쉽게 씌여진 시>를 꺼내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크게 문제될 만한 부분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시의 내용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멀리 낯선 땅에 와서 느끼는 외로움과 그리움이 느껴지는 시였고, 부모님을 고생시키며 의미 없는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고뇌하는 모습도 엿보였습니다. 그리고 끝부분에는 힘들고 어려운 때를 잘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아침을 기다리는’)와 자기연민의 감정(‘눈물과 위안으로’)이 녹아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라는 구절이 좀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 구절을 ‘육첩방(六疊房)은 적막한데’라고 수정한다면 특고(특별고등경찰)에 신고 된다 하더라도 큰 피해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君의 詩를 읽으면서 저는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 속에 감추어져 들여다볼 수 없었던 君의 고뇌와 고독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번 송별회 때 우지(宇治)강가에서 ‘아리랑’을 부르던 君의 슬픈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강변에서 밥을 지어 먹고 우리가 바위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三津井 慶二(미쓰이 케이지)君이 제안했었죠.
“히라누마(平沼)君, 노래 한곡 불러주지 않겠어?”라고.
‘君과 헤어지는 게 섭섭해서 그래’라고 그가 덧붙였을 때 君은 거절하지 않고 곧 바로, 그 노래를 불렀죠. 조금은 부드러우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로……. 애수를 띤 조용한 君의 목소리가 강물 따라 흘렀습니다. 멀리 강변에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고, 신록이 우거진 강 언덕 위에는 뭉게구름이 목화꽃처럼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조용히 듣고 있다가 노래가 끝나자 박수를 쳤죠. 좀 의외였어요. 평소에 조용하고 온화했던 君이 그렇게 용감하게? 노래를 부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항상 강의실 뒷문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다가 수업이 끝나면 도망치듯 나가버리는 사람이었잖아요, 君은, 수줍음 많은.
그렇게 낯가림이 심하고, 외로워 보이는 君의 얼굴 위로 특고의 포악한 고문과 쇠철창의 잔혹한 이미지가 겹치면서 君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안겨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몸이 떨립니다. 君을 찾아다니는 일 외에 3일 동안 전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히라누마君,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그 일이 이렇게 순식간에 키무라 교수에게 알려지고, 특고와 연결될 거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제발 나타나지 마십시오. 제발 특고에 잡히지 마십시오. 지금은 위험합니다. 제가 君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특고에서도 君을 찾아내지 못하기를 빌고 빕니다.
여기, 사진 한 장 동봉합니다.
송별회 때 우지강 구름다리 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히라누마君과의 정답던 청춘의 한 때를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잘 은신해 있다가 君의 고향으로 무사히 귀환하기를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부디 무사하십시오, 히라누마君.
이 편지가 히라누마君에게 전달되는 偶然이, 아니 기적이 일어나기를 엎드려 빌고 또 빕니다.
昭和 18年(1943年) 7月 14日
北島 萬里子(키타지마 마리코)
“7월 14일이면, 동주가 용정으로 출발하겠다던 날이죠? 특고에 잡혀간 날이 그날이니까. 참, 내. 아니 이 마리콘가 말콘가 하는 이 여자는 왜 동주의 시를 번역해 달라고 해서는……. 맞네요, 형님. 맞아, 이 여자가 우리 동주를 죽인 게 맞아요.”
편지 읽기를 마친 영춘이 충혈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젖은 얼굴을 소매로 훔치던 그가 편지봉투를 거꾸로 흔들었다.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 일곱 명의 학생이 그 사진 속에 있었다. 아들 동주가 첫째 줄 중앙에 서 있었고, 아들 옆에 그 여자, 마리코도 있었다. 그는 사진 속 아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들이 아직도 교토의 하늘 아래서 푸른 꿈을 꾸며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진을 자신의 가슴에 얹고 두 손으로 꼭 눌렀다. 가슴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새겨 두려는 듯.
두 사람이 편지를 읽고 있는 사이에 좀 전에 조타실 쪽으로 갔던 1등실 승객 한 명이 선실로 올라갔다. 잠시 후, 대여섯 명이 웅성거리며 다시 갑판으로 내려갔다.
그와 영춘은 두 번째 편지를 읽고 있던 중이었다. 그 편지에는 昭和 20年(1945년) 2월 15일자의 소인이 찍혀 있었다. 그것은 동주가 죽기 하루 전에 보낸 것이었다.
편지의 사연은, 1년 가까이 ‘히라누마君’의 행방을 모르다가 우연히 카모카와 경찰서 유치장에 구속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리코가 죄책감으로 인해 불면증이 걸렸다는 내용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히라누마君’이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감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갔지만 면회가 허락되지 않아 몇 번 되돌아 왔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소문에 의하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재소자를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고 있는데, 그 실험의 희생자들의 시체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는 내용까지 언급하면서, ‘히라누마君’이 생체실험 대상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죽음으로 용서를 빌고자 자살까지 기도하려 했다는 내용이었으나 그는 그 편지를 다 읽지 못했다. 왜냐하면 일등실과 이등실의 승객들이 우르르 갑판으로 몰려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그와 영춘도 갑판으로 내려갔다.
승객들이 조타실 방향을 바라보며 삼삼오오 얼굴을 맞대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영춘이 이등실에서 눈에 익은 한 사람에게 물었다.
“여자가 바다로 뛰어내렸답니다. 그래서 시체를 찾느라 배를 돌린 거래요 30여분 동안 찾았지만 허탕이랍니다.”
“마리코?”
그와 영춘의 입에서 동시에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어둠 속에서 조타실 쪽으로 달려가던 마리코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가 기어코 바다 속으로 몸을 던졌구나. 선원실로 내려간 그녀에게 감시병들이 무슨 모욕이라도 준 것일까?
일본인이지만 마리코라는 여자는 순수하고 지조가 있어 보였다.
편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마리코는 자신의 부주의로 한 사람이 참혹하게 죽어갔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후쿠오카 형무소 주변을 맴돌았을 것이다. 동주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빌기 위해서 말이다.
2월 15일에 보낸 마리코의 편지는 18일경 형무소에 도착했을 것이고, 동주가 받을 수 없음이 확인되어 반송되었을 것이다. 반송된 우편이 마리코에게 되돌아가기까지 3, 4일이 소요되고, 그것을 받은 마리코가 형무소에 오기까지 이틀 정도가 걸렸다면 마리코는 그와 영춘보다 하루 전쯤이나 같은 날 형무소에 도착했을 거라고 그는 머릿속으로 계산하였다.
마리코는 ‘수취인 부재’라는 반송사유를 ‘동주의 사망’ 으로 인식하고 형무소에 왔던 것일까?
마리코는 화장터와 동주의 자취집 등으로 이동하는 그와 영춘을 따라다니며 고해성사의 기회를 엿보다가 여의치 못하자 결국에는 관부연락선까지 타게 된 것이리라.
그런데 감시병들이 개입하는 바람에 제대로 용서를 빌지 못한 것에 대해 무척 화가 났고, 더군다나 ‘히라누마 도오주’의 아버지인 그에게 오히려 결례를 범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담백한 성격의 그녀는 무척 난감했을 거라고, 그는 애써 마리코의 처지를 헤아려 보았다.
마리코가 우리 동주를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그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고 아프게 한 죄,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하고 용서받지 못한 죄. 마리코는 그래서 더욱 자신을 들볶으며 괴로워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아들을 사랑했던 젊은 여자의, 아니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도 그녀의 인간적인 고뇌와 상처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전해지는 것 같아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불쌍한 것들. 세상을 잘못 만나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꺼져버린 가엾은 불빛들. 비록 적국의 사람이지만 마리코의 부모 또한 딸을 잃은 슬픔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리라.
그가 서둘러 선실로 올라갔다. 그는 짐칸에서 흰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꺼내 펼쳤다. 하나는 유골함, 또 하나는 골분함이었다. 유골함에 있는 유골은 머리와 팔, 가슴과 다리에서 하나씩 추려낸 것으로 용정 선산에 묻을 것이다. 그는 유골함을 다시 보자기에 싸서 있던 자리에 놓고 골분함을 들고 일어섰다. 그것은 유골을 추려내고 남은 뼈를 빻아 담은 것이었다.
의아해 하는 영춘에게 성냥을 준비시키고 그는 선실 밖으로 나왔다. 그때 승객들이 선실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모두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갑판으로 내려갔다. 배는 바다 한 가운데를 넓게 돌아 다시 부산을 향하고 있었고, 해가 떠오르려는지 동쪽 수평선 끝이 붉은 비단을 펼쳐 놓은 듯 환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마리코로부터 받은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영춘에게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라고 하였다. 편지봉투에 불을 붙였다. 그는 불붙은 편지봉투의 한 끝을 들고 일어나서 난간으로 갔다. 손끝까지 다 탄 종이가 재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리코, 이제 걱정하지 마. 동주는 마리코를 용서할 거야. 동주는 마리코를 원망하지 않을 거야. 동주는 마리코 때문에 자기가 죽은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는 갑판 위에 있던 분골함을 들고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분골을 한 움큼 집어 바다 위에 서서히 뿌리기 시작했다. 하얀 가루가 바다로, 공중으로 흩어지며 아스라이 사라져갔다.
‘아들아, 일본제국주의는 용서하지 못할지라도 마리코는 용서하거라. 아무리 세상이 혼란해도 영혼과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겠니? 죄는 그 사람들의 욕심과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 현해탄을 오가며 느꼈던 모든 굴욕과 절망에서 자유로워 지거라. 이 넓은 태평양에서 맘껏 너의 꿈을 펼치거라. 이제 모든 아픔에서 해방 되거라. 네가 원했던 평화의 시간은 올 것이다. 너와 같이 깨끗하고 맑은 영혼들이 수없이 역사의 제단 위에 스러져 갔으니……. 너와 같이 작은 불빛들이 모여 큰 빛이 되리니…….
구름이 흩어지며 쇳물처럼 맑고 붉은 태양이 수평선 위로 불쑥 솟아올랐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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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앗, 황작가님 소설이다 이따가 저녁에 들어와 읽어야지 ^^
운동주 시를 좋아하는지라 관심 있게 감상 했어요
일본이란 나란 이뻐할래야 할 수가 없습니다, 전...
현대에와선 배울 게 많은 나라라지만, 역사적인 기억으론 절대 전...
여고시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이 기억납니다.
시집 겉표지에 학사모를 쓴 잘 생긴 시인의 모습이....^^
마리꼬는 분명 시인을 사랑했을 겁니다..
온화하고 잘 생긴 시인을....
조머조마하며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