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한남금북정맥 02차(갈목재~작은구티재) 산 행 일 : 2013. 01. 11 ~ 12.(토) 산행코스 : 갈목재 ~ 서원산(541m) ~ 547봉 ~ 말티재 ~ 592봉 ~ 새목이재 ~ 구룡치 ~ 수철령 ~ 600봉 ~ 백석리고개 (산행거리 14.2km) 산행참가 : 19명.
<산행코스>
올해는 유난히도 매서운 한파와 함께 일찍부터 찾아온 폭설이 일주일이 멀다 하고 전국을 온통 설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겨울철 강원도 지역에 내리는 많은 적설을 피해 한남금북정맥을 시작했지만, 지난해 12월 둘째주 첫 산행부터 폭설로 인해 예정한 목적지인 말티재까지 진행하지 못하고 갈목재에서 중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 산행도 많은 눈으로 인해 들머리인 갈목재까지 버스가 갈 수 있을까를 염려하며, 올해 첫 산행에 대한 기대와 함께 눈(雪)으로 인한 우려를 가지고 한 달여 만에 정규 산행에 나선다. 폭설에 이어진 한파로 내린 눈은 녹지 않고, 이틀 전에 내린 눈이 더해져 미쳐 제설이 되어 있지 않으면 어떨까 하는 우려를 안고서 출발한 버스는 천신만고 끝에 산행 들머리인 갈목재에 도착한다. 아마도 제설을 하고 모래를 뿌려 놓아서 겨우 올라오기는 했지만, 버스가 길 전체를 막고 주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핸들 조작이 쉽지 않아 미처 고갯마루까지는 가지 못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제 우리 애마는 우리를 들머리 근처에 내려주었으니 그 소임은 마친 것이고, 눈길 산행이라는 짐은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 되어 산행에 대한 설렘을 밀치며 가슴 한켠에 커다랗게 자리하기 시작한다.
갈목재 공원감시초소 앞에 도착하여 심설산행 준비를 마치고,
밝은 낮이었으면 고개의 지난번 날머리 반대편 높은 절개지 울타리를 오르며 산행을 시작했겠지만, 한밤중에 시작하는 우리는 감시초소 앞에서 시작하는 정규 등산코스로 들머리를 잡는다.
들머리에서부터 등로를 덮어버린 심설을 헤치고 이어지던 발자국이 이내 나타난 통신탑에서 끊어지고, 이제는 땅바닥이 아닌 나뭇가지들을 의지하며 정맥길을 더듬어 간다. (아마도 통신탑 관리자가 잠시 관리 차 다녀간 듯)
지도의 서원산 못 미쳐서 좌틀하는 지점을 찾기 위해 헤메는 동안 잠시 쉼을 하는 백두들. 좌틀 지점을 찾아 지능선 두 곳을 내려가 보았지만 정맥길이 아닌듯하여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 잘못 그려진 정맥길.
빨간색 실선 : 잘못 그려진 정맥길(우리가 가진 지도) 노란색 실선 : 정상적인 한남금북정맥길(541.7봉이 서원봉이다)
우리가 위 지도의 빨간색 실선(오류)을 따르는 것으로 착각하다 보니, 485봉(우리 지도에는 서원산이라 표시되어 있음) 직전에 좌틀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화엄이재 전에 있는 541봉에 오르기 직전에 좌측으로 꺾이는 곳을 찾아 남쪽 방향의 지능선을 세 번이나 내려갔다가 다시 복귀했다. 심지어는 서원산에 올라서도 남쪽 지능선을 따라 한참을 내려갔다가 다시 복귀하여 한참을 고민하다가 직진의 정상 마루금 방향으로 진행했다.
지도를 너무 믿고 세밀히 크로스 체크를 하지 못한 실수로 인해 백두들이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매서운 추위에 떨게 했다. 다시 한번 사죄드리며 좀 더 다각도의 검증을 통해 안전한 산행이 되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해 본다. 산행기에서 보던 국립공원 표시 콘크리트 블록과 나부끼는 표지기들이 보인다. 나부끼는 표지기와 콘크리트 말뚝이 평소와 달리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국립공원 표시 콘크리트 말뚝.
<서원산(541.7m)> 오늘 한남금북정맥 산행코스의 수많은 봉우리들 중에서 유일하게 명칭이 붙은 봉우리다. 산 정상에는 산행기에서 보았던 콘크리트 말뚝이 하나 서 있고, 희미하게나마 "속리산국립공원"표시가 보인다.
'서원봉'이라 적힌 표지목도 작은 나무에 매달려 있다. 추위에 떨며 하염없이 기다리는 혼돈에서 벗어나 이제 정상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화엄이재를 지나는 백두들.
<화엄이재/회너미재(回越峙. 回踰峙)> 서원산을 지나 30여분 정도 내려오니 화엄이재(회너미재)를 지나게 된다. 좌측은 장안골이고 우측은 법주사로 가는 갈목리이다. 화엄이재는 갈목리에서 외속리면 서원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 속리절 스님과 구병절 스님이 이 고개에서 만나게 되면 '허행하고 되돌아 갔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고려시대부터 좌측 장안리와 갈목리에서 법주사로 불공을 드리기 위해 이 재를 넘었다고 해서 화엄이재라 부른다고도 한다. 하얀 눈이 쌓인 숲을 비추는 백두들의 렌턴 불빛이 이어진다.
화엄이재를 지나 10여분의 급오름 후에 등로는 다시 편해진다. 능선 위로 우리와 반대방향의 발자국 하나가 끊어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어김없이 정맥꾼들의 표지기가 몇 개씩 걸려 있는 고만고만한 구릉성 봉우리들이 이어진다.
450봉쯤을 지난다.
545봉 직전봉쯤 되어 보이는 봉우리에서,
잠시 쉼을 하며 힘들었던 알바의 기억을 서서히 지워간다.
545봉 직전 안부로 내려서는 도중에 앞쪽으로 전망이 트인 묘지가 나타난다.
서남쪽 보은읍 방향 조망.
밴치가 있는 547봉을 지난다.
<547봉 갈림길 삼거리> 이곳 547봉에 도착하니 오늘 처음으로 이정표가 있다. 생김새로 보아 말치재자연휴양림을 운영하는 '숲속의 집'이라는 업체에서 설치한 듯하다. 그래도 산행을 시작하여 한참의 알바 끝에 인공 지물을 보니 반갑기가 그지없다.
잠시 후 산불감시 시설이 설치된 봉우리를 지나니,
서남쪽 보은읍 오창리 방면으로 조망이 트인다.
좌측으로 모처럼 트인 시원한 조망으로 보면서 진행하는 백두들.
서쪽 오창리 방향.
<보은읍> 산간분지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보은군은 예로부터 산지의 특성을 살려 산성을 삶의 근거지로 삼았다. 험한 산지는 적을 막기 쉬운 곳으로, 다른 세력과 다툼이 많았던 옛날에는 산성이 몸을 피하는 데는 안성맞춤이었으며, 이곳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은 청원의 상당산성, 단양의 온달산성과 함께 충청북도의 대표적인 산성으로 꼽힌다. 신라시대에는 이 산성 덕분에 이곳이 삼년산군으로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보령이었다가 경상북도 상주로 편입되기도 했다. 조선 태종 때 다시 충청도로 편입되어 고종 때 보은군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이곳 보은은 대추가 많이 나서, 이곳 보은 처녀들은 대추를 많이 먹어서 입이 대추씨같이 뾰족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보은군 남쪽으로 맞닿은 영동군 옥천군과 함께 대추 생산지로 유명하다. 그래서 대추 풍년이 들어야 시집을 간다고들 하였단다. 보은읍 방향.
남서 방향의 보은군 조망.
560봉쯤의 무명봉 정상 이정표에는 말티재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560봉 정상에서 돌아본 남동 방향.
한밤중에 지나온 한남금북정맥도 가늠해 본다.
속리산 천황봉 방향으로 이어진 한남금북정맥 능선 모습.
가야 할 말티재 방향.
560봉 정상을 뒤로하고 말티재로 향한다.
말티재 너머의 가야 할 산들을 당겨보고,
북서 방향 조망.
남동 방향 조망.
가야 할 한남금북 능선도 가늠해 본다.
말티재 내림길 헬기장으로 보이는 평평한 곳에서,
깊이 쌓인 눈을 헤치고 아침식사 장소를 마련하여, 조금 늦은 아침식사를 서늘해져 오는 한기를 이기며 묵묵히 삼킨다.
엄습하는 한기에 어서 몸을 움직여 체온을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말티재로 향한다.
말티재로 내려서는 백두들.
하얀 눈에 덮여 있는 말티재에 도착한다.
고개 아래로 뚫린 터널을 통해 차량들이 오가며, 이제는 차량통행이 없는 말티재 전경.
말티재 날머리.
말티재 보은읍 방향.
말티재 표지석을 배경으로.
<말티재(430m)> 말티재는 보은군 외속리면과 내속리면을 잇는 고개로, 보은읍과 속리산면을 잇는 37번 국도가 지난다. 이제는 아래로 터널이 뚫려서 차량통행이 뜸해져 제설작업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돌로 만든 장승과 말티재의 내력을 새겨 놓은 기념비만이 이곳이 말티고개임을 알려주고 있다. 한때 속리산을 가려면 보은을 지나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관문인 말티재를 넘어야 했다. 보은읍에서 해발 400m의 꼬불꼬불 열두구비나 되는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서면, 속리산 방향으로는 비교적 완만한 내륙고원 분지가 자리하고 있다. 속리산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고개는 처음 고려 태조 대왕께서 속리산에 올 때 닦은 길이라 하며, 또 조선 세조대왕께서 올 때 얇은 돌을 깔았다고도 하는데, 1966년 도로포장공사를 할 때 옛날의 흔적이 보였다 한다. 그래서 또 다른 이름으로 박석(薄石)재라고도 부른다. 세조대왕께서 속리산에 오실 때 외속리면 장재리에서 고갯길을 연으로 넘을 수 없어 말로 바꾸어 타고, 고개를 넘고 나서 내속리면 갈목리 고개 밑 부락에서부터 다시 연으로 바꾸어 탔다고 하여 말티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오른쪽 장승과 사이가 좀 더 좋으신 듯. 아무래도 남자인 천하대장군을 지하여장군보다..ㅋㅋ
속리산 도로 개통 기념비.
<속리산 도로 개통 기념비> 고개 이름은 말재요, 처음 넘은 이는 누구였던지. 다만, 여기 생각나는 사람 신라 때 의신대사가 인도에서 돌아와 흰 노새 등에 불경을 싣고 속리산으로 들어가 법주사를 세울 적에 헐떡이며 이 재를 넘어가던 모습이 눈에 보인다. 다시 그 뒤에 고려 태조가 여기 이 길에 엷은 돌을 깔았다 하니 길의 형국은 아마 그것이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길이 험하고 가파르기 때문에 언제나 모두들 긴 탄식을 거듭하더니 천년이 지난 뒤 1923년에 이르러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새 길을 열었고, 1935년엔 자동차 길을 닦았으나 그 마저도 불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략) … 우리 군과 미군의 장비 지원을 얻어 여기 폭 넓고 평탄한 큰 길을 닦아내니 이로부터는 수많은 사람과 수레들이 웃으며 넘어가고 웃으며 넘어오리라. 아! 고마워라. 쉽게 넘는 새 길이여! 아! 미더워라. 편히 가는 큰 길이여! - 1966년 11월 1일 노산 이은상 글 -
말티재 증명.
말티재를 뒤로하고 다시 한남금북정맥 능선 잇기에 나선다.
지난 산행에서 목적지였던 이곳 말티재까지 진행했더라면, 오늘 산행의 출발 들머리는 이곳이었겠지만..ㅉㅉ (알바도 않았을 것)
580봉 올라가는 암릉길.
암릉에 올라 돌아본 말티재 너머의 한남금북정맥 능선.
급경사 오름길은 갑자기 나타난 산삼 작목반에서 설치한 검은 펜스가 쳐진 능선 위로 오르게 되고,
한남금북길을 펜스를 따라 우측 능선을 따라 이어지며 580봉을 지난다.
산삼재배지가 얼마나 크냐 하면, 자그마치 이곳 580봉에서 591봉까지 한 시간이 넘게 약 2.5km의 능선길을 걸어서야 겨우 산삼재배지를 둘러싼 검은 펜스와 이별을 할 수 있다. 580봉 내림길에서 검은 펜스 너머로 가야 할 한남금북길을 가늠해 본다.
검은 펜스가 북풍을 막아주어서 다행인 듯도 하지만, 실은 오늘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서 낮은 기온에도 불구하고 추위는 그리 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또 봉우리를 하나 넘고,
592봉쯤을 지난다.
592봉에서 새목이재로 내려서는 내림길은 거의 수직에 가까워 서서 내려가기가 힘들 정도다.
앞으로 걷지 못하고 옆으로 조심스레 내려서는 선두.
사면을 따라 비스듬히 내려오는 백두들.
우측 아래로 속리터널을 통과한 37번 국도가 중판리를 지나 북쪽으로 뻗어 있다.
급경사를 내려서서 새목이재를 지난다.
<새목이재> 보은군 속리산면 중판리와 보은읍 성족리를 이어주던 조그만 고개였는데, 지금은 산 아래로 속리터널이 개통되어 이 고개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거기다가 산삼재배단지 철조망에 막혀버려, 재로서의 기능은 완전히 사라졌다.
591봉 정상을 지나고,
576봉쯤도 이렇게 지난다.
앞에 또 다른 586봉이 나타난다.
또 또 봉우리를 지나는데,
우측 아래로 속리산면이 내려다 보인다.
능선의 경사가 조금 완만해지더니 구룡치쯤을 지난다. 앞서간 이들이 눈 위에 글씨를 두고 갔다. 쥔장에게 돌려줘야 할 텐데..ㅋㅋ
<구룡치(九龍峙)> 구룡치는 보은읍 종곡리와 속리산면 하판리를 이어주는 옛 고개인데, 구불구불 아홉 구비의 용을 닮은 고개라고 그리 명명한 듯하다. 그래서 일반 고개처럼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낮은 안부에 자리한 것이 아니라 구불구불 용의 몸통처럼 능선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505봉쯤인 듯하다. 능선 마루에서 정맥길은 우측 능선으로 꺾어진다.
554봉에서 잠시 쉼을 한다.
뒤이어 오시던 분들이 합세하여 다시금 목적지를 향한다.
시간상 이곳쯤에서 모두들 간식을 챙겼던 듯.
수철령도 지난다.
<수철령(水鐵嶺)> 이정표가 전혀 없어서 지금 가고 있는 곳이 어딘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충 지형도로 미루어 짐작컨대 수철령쯤인 듯하다. 그나마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표지기의 숫자가 다른 곳과는 달리 조금 많이 달려 있다. 보은군 종남리에서 내속리면 북암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나무가 없다"하여 '무수목'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나무가 없어 '무수목(無樹木)'이라 불리던 것이 '무쇠목'으로 변질되고, 이를 한자로 바꿔 표기하며 수철령이라 명명되었다고 한다.
536봉쯤에서.
모처럼 묘지를 지나는데, 앞쪽으로 가야 할 600봉인 듯한 봉우리가 우뚝하니 서 있다.
12:24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몇 개 지나고 비교적 평탄한 숲길을 걸어 드디어 600봉에 도착했다.
<600봉 정상> 오늘 산행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봉우리 정상에는 한 기의 묘지가 있어서 그나마 능선 위로 부는 북풍을 피할 수 있다. 이곳에서 현재의 산행 진행상황을 체크하고, 원래 목적지인 작은구치재까지의 2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의 진행은 다소 무리일 수 있다고 판단하여, 작은구치재에서 기다리던 우 기사님께 연락하여 바로 아래에 있는 백석고개에서 산행을 종료할 예정이니 백석고개로 와 달라고 부탁하고는, 후미를 기다려 정상 증명사진을 남기고 오늘의 산행을 백석고개까지만 진행하기로 변경하였음을 알린다.
연말연시에 무리를 하신 분들이 많아서 그런지, 오늘 유난히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많다. 마마도 이어지는 수많은 봉우리를 오르내려야 하는 데다가, 눈까지 많이 쌓여 있어서 거리에 비해 무척 힘이 드는 코스인듯 하다.
후미분들은 오히혀 밝은 표정으로 도착하여,
오늘 산행의 최고봉에서 산행 증명사진을 남기고,
12:49 백석고개를 향해 가파른 내림길을 이어간다.
숲길이 끝나며 논밭이 보이고...
논두렁을 따라 이어진 눈 덮인 농로를 따라 백석고개로 향한다.
농로로 내려서는 백두들
백석리로 이어진 농로를 따르며,
내려다본 백석리 마을 전경.
<백석리 마을> 산외면 지역으로 흰 돌이 많이 있어서 흰돌리라 하던 것을 흔들 또는 백석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갑리 일부를 병합하여 백석리라 하였다. 백석고개와 백석리 조망.
600봉에서 내려서는 백두들.
정맥길은 축사 우측으로 이어지지만, 쉬는 소들이 놀랄까 봐 그냥 축사 왼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되로 지나온 한남금북 정맥의 봉우리도 보인다.
축사 좌측의 도로를 따라,
축사 뒤쪽을 지나면,
좌측으로 백석고개로 이어지는 시멘트 도로가 있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 잠시 진행하면 백석고개에 도착한다.
백석고개에서 오늘의 최고봉이었던 600봉을 배경으로.
눈길에 생고생하는 우리의 애마에 올라,
보은읍내로 이동하여, 뜨거운 샤워를 간단히? 끝내고..
연탄불고기로 유명한 용궁식당으로 이동하여,
"~~삽시다!"를 외치며....
오늘의 힘들었던 산행과 매서운 추위도 추억으로 갈무리해 놓고,
항상 행복한 백두인으로 돌아와서는 서울로 향한다.
모처럼 영등포에서는 ~~~.
대간의 많은 적설을 피해 충청도로 피설을 왔는데... 올해는 한번도 거르지 않고 눈 산행을 하게 되는 것이 좋은 일인지 나뿐 일인지 이제는 분간이 쉽지 않다.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 했는데, 매번 심설산행이 이어지니 눈(目)은 즐거워하는데 몸은 많이 힘들어한다. 우리 백두님들 부디 체력관리 잘하셔서 좋은 벗들과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었으면~~ 감사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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