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3051]예서=원재(圓齋) 정추(鄭樞) 선생시 橋西(교서)
원문=동문선 제21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東文選卷之二十一 / 七言絶句 橋西(교서) 정추(鄭樞) 橋西楊柳盡飛花。교서양류진비화 信馬尋春到日斜。신마심춘도일사 滿地竹陰門半掩。만지죽음문반엄 隔溪亭館是誰家。격계정관시수가
다리 서쪽의 버들은 모두 꽃을 날리는데 / 橋西楊柳盡飛花 말 가는 대로 봄을 찾다가 해질녘이 되었네 / 信馬尋春到日斜 땅에는 대 그림자 가득하고 문은 반쯤 닫혔는데 / 滿地竹陰門半掩 시내 건너 저 정관은 누구 집인고 / 隔溪亭館是誰家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8
橋= 다리 교, 굳셀 교, 빠를 고. 楊柳양류=버드나뭇과에 속한 낙엽 교목을 통틀어 이르는 말 信馬신마= 말에 맡기다. 말이 하는대로 몸을 맡기다. 尋= 찾을 심. 掩= 가릴 엄. 隔= 사이 뜰 격. 사이 뜰 격. 誰= 누구 수.
원문=圓齋先生文稿卷之上 / 詩 橋西 橋西楊柳盡飛花。信馬尋春到日斜。 滿地竹陰門半掩。隔溪亭館是誰家。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0
정추(鄭樞) 고려 후기 동래 현령을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권(公權), 호는 원재(圓齋). 뒷날 자를 이름으로 썼다. 할아버지는 판선공(辦繕公) 정책(鄭㥽)이고, 아버지는 설곡(雪谷) 정포(鄭誧)이다. 아들은 정총(鄭揔), 정승(鄭拯), 정탁(鄭擢), 정지(鄭持)를 두었다.
[활동 사항] 정추(鄭樞)[1333~1382]는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였고 예문관 검열을 거쳐 좌사의대부에 올랐다. 1366년(공민왕 15)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을 탄핵하다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였으나, 이색(李穡)의 구원으로 동래 현령으로 좌천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된 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다시 발탁되었다.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우왕 즉위 후 좌대언·첨서밀직사사(詹書密直司事)가 되었는데, 태(胎)를 예안현(禮安縣)에 안장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뒤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제수되었다.
성품이 공검하고 근후하여 관직에 있을 때 항상 정도를 행하였다. 당시 가묘 제도(家廟制度)가 폐지되었으나, 제기를 별실에 두고 제삿날이면 반드시 손수 씻어서 제사에 쓰도록 하였다. 정추의 출사 과정이나 이후의 정치 행적을 보면 이제현(李齊賢), 이색과 행동과 뜻을 같이하는 전형적인 고려 말 사대부였다. 그에 대하여 『고려사(高麗史)』에는 “항상 권간들이 나라의 정치를 좌우하는 것을 미워하고 분개하여 마음에 불평을 가지고 있다가 등창이 나서 죽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정추의 치열한 정치의식은 직언을 서슴지 않다가 정치적 핍박을 받았던 아버지나 좌주 이제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정추는 동래로 좌천된 이후 동래와 관련된 몇 편의 시를 남김으로써 고려 후기 동래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정추의 문집에서 동래와 관련된 시를 찾아보면 「동래 공관(東萊公館)」, 「동래 회고(東萊懷古)」, 「동래 즉사(東萊卽事)」 등이 있다. 이 중 동래 공관은 고려 시대 동래 치소의 동헌에 대해 읊은 것으로, 동래 동헌에는 대나무가 심어져 있고 그 주위의 인가에는 매화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신선이 사는 듯한 아름다운 풍광을 지니고 있다고 노래하고 있다.
한편 정추가 동래로 부임하고 난 이후 동래의 여러 유적과 명승지들을 돌아보고 「동래 회고」라는 연작시를 남겼는데, 여기서 해운대·겸효대·소하정·정과정 등을 소재로 하여 여러 풍물과 전설을 읊고 있다. 또 「동래 즉사」라는 시에서는 황령산으로 달이 기우는 가운데 대나무와 매화나무가 어우러진 한밤의 동헌의 아름다운 풍경을 읊고 있다.
[학문과 저술] 정추의 학문적 연원은 이제현에 잇닿아 있다. 이제현의 문생으로서 “어릴 때부터 공경하며 역옹(櫟翁)을 섬겼다”라고 하였는데, 당대의 병폐를 바로잡고 새로운 문풍을 진작하려 한 이제현의 사상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이제현의 영향은 정추 시문의 내용과 성격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편 정추의 아버지가 이곡(李穀)과 돈독한 교유 관계를 유지하여 영향을 받는 한편, 이곡의 아들인 이색과도 정치적 사상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 외에도 정추는 이존오(李存吾) 및 한수(韓修) 등과도 밀접한 교류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성향으로 보아 정추는 고려 후기 대표적인 신흥 사대부의 일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추가 남긴 시와 글은 그의 아들에 의해 수집 정리되어 『원재집(圓齋集)』으로 간행되었다.
[상훈과 추모] 1376년(우왕 2) 수성 익조 공신(輸誠翊祚功臣)에 올랐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