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의 詩 - ‘이야기 詩’ 이론 연구>
운수 좋은 날
오탁번
노약자석엔 빈 자리가 없어
그냥자리에 앉았다
깨다 졸다하며
을지로 3가까지 갔다
눈을 뜨고 보니
내 앞에 배꼽티를 입은
배젊은 아가씨가 서 있었다
하트에 화살 꽂힌 피어싱을 한
꼭 옛 이응 ㅇ 같은
도토리 빛 배꼽이
내 코앞에서
메롱메롱 늙은 나를 놀리듯
멍게 새끼마냥 옴쭉거린다
전동차 흔들림에 맞춰
가쁜 숨을 쉬는
아가씨의 배꼽을 보면서
나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그 옛날 길을 가다가
아가씨를 먼 빛으로 보기만 해도
왼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어
들끓는 야수를 눌러야 했던
내 청춘이 도렷이 떠올랐다
공짜로 지하철을 타고
맨입으로 회춘回春을 한 오늘은
정말, 운수 좋은 날!
([2010 오늘의 좋은 시])
|작법공부|
시인 오탁번은 시, 소설, 동화, 문학이론까지 그리고 대학교수로 폭넓은 문학 활동을 하시는 분이다. 필자와 같은 연배 문인으로 오탁번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감상문에 앞서 작가 면모부터 언급하는 이유는 문학과 가까이 지내지 않는 도덕군자가 이 작품을 읽었다면 혹 작가를 천박한 사람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배꼽은 본래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 밥(영양)을 받아먹던 생명줄 자리다. 성性과 전혀 관계가 없는, 기능이 끝난 기관이다. 태어난 후에도 아기 때는 배꼽과 성은 아무 관계도 없다. 그러나 중학생쯤 되면 갑자기 제2의 성기性器로 돌변하고 만다.
배꼽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깨는 배꼽보다 더 성性과 전혀 관계없다. 일곱 살 아이라도 여자아이는 다리를 벌리고 앉지 말라고 엄히 가르치지만 어깨를 내놓는 일은 괜찮다. 그러나 처녀 나이 열일곱쯤 되면 어깨도 갑자기 또 다른 제2의 성기로 돌변한다. 지하철에서 낯선 여자의 어깨를 실수로라도 툭 건드려보라. 다음 정류장에서 성추행범으로 체포될 것이다.
발가락은 어깨보다도 더욱 성과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러나 발가락도 아이적에나 그렇지 처녀티가 나기 무섭게 이 역시 또 다른 제2의 성기로 돌변한다. 그런가 안 그런가, 여름에 슬리퍼를 신고 있는 여직원의 엄지발가락을 바닷가 조약돌 같이 예쁘다고 애무해보라. 빠르면 5분 안에 경찰이 출동하여 성추행범으로 떼갈 것이다. 그러나 남자 동료의 발가락을 애무하면 ‘미쳤냐!?’ 소리만 듣고 거의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머리칼은 성과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하는가? 미장원에 가 보라. 머리칼을 빼놓으면 여성미는 시체가 된다.
손톱, 발톱은 성과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하는가? 네일샾에 가 보라. 머리칼과 함께 손톱이야말로 여성미의 최첨단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죽은 마광수 시인은 여성의 손톱이야말로 가장 야하다고 하였다.
이 모든 신체 부위의 갑작스런 제2, 제3의 성기 돌변은 현대 여성이 유독 까탈스럽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천만의 말씀! 조선 시대에는 복숭아뼈만 보고도 다 봤다고 쑤군댔었다.
여성은 몸 전체가 성性 덩어리다. 몸의 어느 부위도 제2, 제3의 성기가 아닌 곳이 없다. 지난 2018년의 전 세계적인 ‘미투’ 사건은 여성은 몸 전체가 성기性器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 사건이었다. 그전까지는 배꼽만 쳐다봤을 뿐인데……, 발가락만 만져보았을 뿐인데……, 하였지만 더 이상 그런 핑계가 안 통하게 된 것이다. 놀라운 일은 미국 법도, 영국 법도, 프랑스 법도, 그리고 대한민국 법도 여성들의 손을 들어 줬다는 사실이다. 여성은 배꼽, 발가락……, 성기 아닌 곳이 없다는 판결이었다.
여성은 왜 성性 덩어리로 창조되었는가? 그 대답은 최초의 남성이었던 아담 할아버지가 단번에 밝혀 주지 않았느냐. 아담 할아버지는 이브를 처음 본 순간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껌뻑 죽어 넘어갔던 것이다.
만약에 여성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性 덩어리가 아니었다면, 오, 오, 너 남성아! 그대 같은 천하제일의 자기 욕망의 덩어리가 평생 여자를 데리고 살겠느냐! 여성은 성 덩어리인 것만도 아니다. 며칠 같이 살고 나면 올망졸망 새끼들이 태어난다. 평생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이 천하에 무엇이 또 있더냐! 그런데도 천하제일의 자기 욕망의 덩어리인 너 남성은 불알이 여물기 무섭게 건너마을 처녀에게 껌뻑 죽어넘어가 장가들어, 새끼들까지 데리고, 평생 시지프스 신화 같은 먹고 살아야 하는 숙제의 산을 기어오르다 자빠져 딩굴고, 또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오르는 삶을 살고 있지 않느냐! 그 이유가 무엇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여성이 온통 성性 덩어리이기 때문이 아니라면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느냐? 여성의 성性에서 위로를 얻고, 힘을 얻어 아침에 새롭게 일어나 밥벌이 전투장에 다시 나서는 것이 너 남성의 운명이 아니냐!
이것이 인생의 실체이거늘 왜 인류는 처음부터 성性을 은폐하여 온 것일까? 만약에 남성들에게 여성의 배꼽과 손톱과 발가락이 제2의 성기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전철에서 ‘아가씨’ 배꼽을 보고도 껌뻑 죽어넘어가지 않는다면, 필자는 물론 독자께서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신神이 여성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性 덩어리로 만든 이유다. 그러니까 필자의 이 작품 감상은 뇌 기능이 17세기에서 멈춘 것 같은 자들이 만들어 놓은 뒤로 새는 바가지 같은 ‘19금’이라는 이름의 영상물을 한 번도 본 일 없는 참새와 굼벵이와 지렁이까지 절로 짝짓기를 하듯, ‘아가씨’ 배꼽을 보고 껌벅 죽어넘어가는 것은 신神이 그렇게 작동하도록 만들어 놓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다만 안 그런 척하는 도덕군자들이 나타나 성을 은폐시키는 바람에 안 해도 될 양심의 꺼림직함이라는 짐 하나를 더 짊어지고 살게 되었을 뿐. 그러니까 오탁번 시인의 이 작품은 천박한 것이 아니라 안 그런 척하고 살아야 하는 꺼림직함에 대한 고발장이었던 것이다. 도덕군자 ‘너는 안 그러냐?’는 고발장!
아, 아, 안 그런 척하는 짐만 내려놓고 살 수 있어도 세상은 훨씬 살만한 세상이 될텐데……. (이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