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삶의 반영이어야만 하는가? 적어도 난 그렇다.
작가주의가 하나의 표현양식을 일관되게 표현하고 있는 존재이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이창동과 홍상수는 삶이란 주제를 일관성있게 다루는 감독들이다.
이창동과 홍상수의 영화속 인물들은 늘 이 사회에서 벗어나있는 비주류의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물론 주류인 기득권에게 던지는 날카로운 메시지와 함께.
특히 홍상수는 인간의 위선과, 삶은 언제나 갇힌 일상의 순환이며, 그 일상은 누추한 욕망과 우연의 연장일 뿐이라는 냉소와 허무의 시선을 던져준다.
아마도 50년대 프랑스의 고다르가 외치던 작가정신에 가장 근접한 감독이 아닐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이전까지의 영화소재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낙제점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저 평범하다못해 지루하기까지한 이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잡아대질 않나, 쓸모없는 부분에 카메라를 롱테이크로 들이대서 관객을 또 한번 지루하게하질 않나...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전까지는 없던 혁신, 정말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영화를 보고 관객들은 새로운 형식의 등장이라며 탄성을 질렀다.
우물에 빠진 돼지는 누굴까? 그 돼지를 보러 몰려든 사람들은 그 우물가에 비친 자신의, 우리들의 모습을 보며 부끄러운 자신을 발견하고, 우리의 자아를 발견케해준 그 영화인에게 그런 찬사를 보낸다.
일년후 그는 '강원도의 힘'을 들고 나타난다. 희한한 제목만큼이나 전혀 움직임이 없는 카메라는 따분한 우리일상의 단면을 나타내는게 아닐까??
그 따분한 카메라의 뻗치기는 '오!수정'에서는 그나마 조금씩 움직인다. 정말 아주 조금만.
감독이 카메라의 기본기능- 줌 인, 아웃등-을 모르고 있는게 아닐진대, 그래도 그는 이런 기능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그 롱테이크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내가 이영화를 권하는 이유는 짐캐리, 박중훈류의 그 작위적인 웃음은 없지만, 영화 내내 툭툭튀어나오는 일상적인 대화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과 그 흔하디 흔한 이야기속의 주인공이 되어 있는 당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가지고 있을 기억의 대사 가 날 미
치게한다.
"나 니 빤쓰까지 벗긴거다. 할 수 있는데 내가 안한거다."
"저 이런 키스 처음이예요" 오빠의 페니스를 잡고 자위를 해주기까지하는 그 처녀(?)의 입에서 나온 저 민망한 소리란.
"정말로 멘스하는지 어디 한 번 봐요."
"수정씨, 정말 많이 아프지 않으면 꼭 와요"
난 참 다행이다싶었다. 나만 저런 기억속에서 죄책감과 함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다루는 홍상수이기에, 나 이외에도 많은 이들이 비슷한 과거가 있음을 발견했기에...
'오!수정'은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자신의 기억속에서 가감되는지를 보여준다. 우린 나름대로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자기식대로 분광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방에서 키스를 나누다 떨어뜨린 것이 포큰지 스푼인지 알 순 없다. 술집에서 아줌마에게 달란게 휴지인지, 젓가락인지도 알 수 없다.
아무렴 어떠랴. 그것이 '어쩌면 우연'이었건 '어쩌면 의도'였건 '짝만 맞으면 만사형통'인 것을............
그래서.....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 부잣집 자식의 처녀 따먹기위한 일련의 행동, 발정난 부잣집 자식을 소유하기 위한 몰락한 집 딸의 처녀막 바치기 등은 별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차피 세상은 약간의 타협과 굴종속에서 더욱 편안해질 수 있기 때문에...
흑백필름이기 때문일까, 아님 공간적 배경이 어두운 술집, 뒷골목이기 때문일까, 아님 내뱉는 대사 하나하나가 내 일상에서의 생활 그대로이기 때문일까,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70,80년대 한국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가졌다.
아니지.
어쩌면 나의 일상이 천연색과는 어울리지 않는 따분한 삶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리라.
늘 홍상수의 영화를 접할때마다 그에게서 한국영화의 희망을 본다는 건 그에 대한 나의 지나친 집착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