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 나는 마산교구의 신학생이 되었다. 첫 여름방학을 맞아 집으로 갔는데, 다른 교구 동기 신학생 한 명이 여름방학을 맞아 부산에 있는 어느 수도원에서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 친구도 만나고,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소년의 집에도 가볼 겸해서 부산으로 갔다. 그리고 친구를 만나 하룻밤을 같이 지낸 뒤 다음날 송도에 있는 소년의 집으로 갔다.
그때가 1987년 이었는데, 당시 알로이시오 신부님은 부산과 서울에서 소년의 집을 큰 규모로 운영하고 있었고, 2년 전인 1985년에는 필리핀으로 구호 사업을 넓히면서 마닐라에 정원3천5백명 규모의 '산타 메사 소년, 소녀의 집'과 가난한 결핵 환자들을 위한 무료 자선병원을 세워 운영하고 있던 중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소년의 집 쪽으로 걸어가는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엄청나게 높은 철조망이었다. 소년의 집은 제법 경사가 심한 비탈에 여러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건물 주변에 엄청난 높이의 철조망이 곳곳에 설치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슨 용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보기 좋지는 않았다. 높은 철조망이 감옥을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잠시 뒤 소년의 집 안으로 들어간 내가 처음으로 본 것은 운동장에서 뛰놀고 있는 엄청남 수의 아이들이었다. 그때가 한여름이라 무척 더웠는데, 아이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내 기억에 그곳 말고도 크고 작은 운동장이 몇 군데 더 있었는데, 다른 운동장도 사정이 비슷했다. 그제야 나는 높은 철조망의 용도를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공을 차고 놀고 있었는데 높은 철조망은 공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막아 주었다. 운동장이 비탈 위에 있어 행여 공이 밖으로 튕겨 나가기라도 하면 송도 앞바다까지 굴러갈 것 같았다.
나는 운동장가에 서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 보았다. 제법 넓은 운동장에는 1백 명도 더 되는 남녀 아이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공을 차고 있었는데, 운동장안에 굴러다니는 축구공만해도 스무 개가 훨씬 넘을 것 같았다. 한 마디로 '너희들이 놀기를 원한다면 공은 얼마든지 사 주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몇년 뒤, 이번에는 서울에 있는 소년의 집에 갈 기회가 생겼다. 서울 소년의 집도 응암동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어 제법 경사가 심했는데, 그곳에도 곳곳에 크고 작은 운동장들이 있었다. 그리고 운동장은 한결같이 높은 철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운동장에서 뛰노는 엄청난 수의 아이들이었다. 마치 소년의 집 아이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놀고 있는 것처럼 운동장마다 아이들로 북적였다. 그렇다 보니 소년의 집 전체가 시끌벅적한 것이 무척이나 활기차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모두 건강해 보였고, 정신적으로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서울 소년의 집에 간 날도 무척 더운 날이었는데, 운동장에서 노는 아이들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정문가에 있는 야외 수영장이었다. 수영장에는 알록달록한 수영복을 입은 아이들이 바글거리며 수영을 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아이들이 수영을 하려면 집에서 차를 타고 제법 멀리 가야 했던 시절이다. 그것도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에 나 있었을 뿐 지방 소도시에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서울 소년의 집 아이들은 자기들이 사는 공간 앞마당에 떡하니 수영장이 있었던 것이다.
몇 년 뒤 다시 서울 소년의 집을 찾았을 때 수영장이 사라지고 없어 아쉬운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보니 다른 공간에 더 크고 넓은 실내 수영장이 들어서 있었다.
나는 서울과 부산의 소년의 집에 갈 때마다 중학생 시절 아침마다 지나쳤던 고아원이 생각났고, 성당 어른들이 왜 그렇게 알로이시오 신부님을 존경스럽게 이야기헸는지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