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2021. 06. 05 - 06 (주일), Papua Waena, 디안 하라빤 병원 격리 병실|
"이전에 아파서 입원하신 적은요?"
검진 문안을 작성하던 디안 하라빤 (RS. Dian Harapan)의 간호사가 묻는 말에, 별 생각 없이 "그런 적 ... 없을걸요." 하며 눈빛으로는 아내의 머릿속까지 스캔해 냈다. 그리곤 이내 더 확실한 어조로, "네, 없어요!" 하고 답했다. 선따니 집에서는 며칠째, 침대를 무슨 수영장이라도 되는 줄 알고 비몽사몽 온 사방으로 헤엄쳐 다니다가, 나흘째 이르러서야 검사해보니 그 흔하디흔한 말라리아에 코로나바이러스까지 동반 출현이란다.
검사 결과가 나오자 PCR 검사실의 친절한 간호사는 묻지도 않고 우리를 바로 응급실로 이끌고 갔다. 질의서 기재를 마치고 응급실 구석에 마련된 간이침대에 누웠는데, 이번에는 젊은 의사 한 사람이 다가왔다. 나는 이 나라 시민이 아니므로 치료비를 전액 본인이 부담하겠다는 서명이 필요하단 말을 하려던 것이었다. 몇 년 전부터 임시거주 비자를 받는 모든 외국인에게 BPJS라는 건강보험 가입을 의무화해 놓고는 이것은 예외란 말인 게다. 격리병실에 흔치 않은 처방에, 대충 손가락을 꼽아보다가 그럼 약만 타서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집에서 또 하룻밤을 뒹굴었다.
그런데 점점 자신감이 떨어져 갔다. 내게 남은 에너지의 마지막 한 방울이 몸을 뒤집을 때마다 또르르 구르는 소리가 폐에서 들리는 듯하고, 내 코로나 확진 바람에 오히려 자기가 마스크를 끼고 바닥에 자리를 깔고 자는 아내 보기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그래서 다시 병원행. 이번엔 조건이 무엇이든 모두 동의한다고 사인했다. 그리곤, 나의 이 답답하고, 무료하고, 스스로 앓는 소리나 들어주는 병원의 독방생활이 시작되었다. 물론 수시로 드나들며 죽이나 약이 상에 아직 놓인 걸 보면 닦달하는 간호사들, 전화로 듣는 내 목소리 톤의 밝기를 한 250색 색상표 찾아 읽듯이 간파하고는 전화기 저편에서 꺼이꺼이 울었다 웃었다 하는 아내가 위로가 되긴 했다.
사라진 냄새에 입맛까지 퇴색하자 내게 음식을 대겠다고, 그러잖아도 차로 왕복 한 시간 거리를 하루에 서너 번씩 다녀가던 아내 역시, 며칠이 못 되어 코로나에 걸렸다. 코로나에 걸리고도 자차로 움직이면 이동이 자유로운? 유연성 넘치는 이곳 규정 덕택에, 아내는 그 뒤로도 반나절이 멀다 하고 병원을 찾았다. 급기야 아내의 정성에 감동한 병원에서는 창 너머 한 5m 거리에서 담장 밖의 아내를 바라볼 수 있는 방으로 내 병실을 옮겨주기까지 했다.
한편, 초기에 발견되었던 말라리아는 그 병세만큼이나 독한 약을 써서 어느 정도 기세가 꺾였는가 했는데, 입원 중 연이은 검사에서 속속 다른 증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은 폐렴이 나타나 섬유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다음날엔 간염과 장염까지 있단다. 내가 의사는 아니지만 이건 뭔가 좀 심각해 보였다. 나의 주치 간호사인 아내는 그야말로 눈이 뒤집혔다. 그 길로 곧장, 자신이 나를 만나기 전부터, 간호사였을 때 함께 단기선교를 데리고 다니시며 의료 선교를 하시던 의사 선생님 한 분께 연락을 취하고 대책을 문의했다. 선생님의 제안으로 응급 후송 이야기가 나오고, GBT도 위기 대응팀을 즉각 꾸려 에어 앰뷸런스를 섭외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어지간한 선교 네트워크와 교회들, 해외의 한인교회들, 세계의 SIL 스태프 및 위클리프 협력교회들까지 기도하며 거의 천문학적인 응급 이송 비행편 마련에 귀한 헌금을 보탰다.
이곳 동료들의 수고 역시 일일이 다 감사할 수가 없다. 그들은 점점 지쳐가는 아내 대신으로 자신들이 손수 죽이며 국을 끓여서 배달해 주었다. 쌓을 데가 없이 수북한 음식과 과일까지 넘쳐나서, 병원에서 준 음식이라고는 이제까지 첫날 흰죽 한 그릇이 전부였다.
가만, 이렇게 감사한 제목을 하나씩 떠올리자니 저 옛날 이 나라에 첫발을 들였던 2001년 1월, 새내기 선교사 신고식을 단단히 치렀던 기억이 이제서야 떠오른다. 지난주 응급실 검진서에 "입원한 기억이 없다"고 답한 것도 뻥이었던 셈이다. 그때 입국하자마자 인도네시아 공용어를 배운다고 1년 가까이 둥지를 틀었던 반둥(Bandung)의 찜블루잇 산동네 (Ciumbuleuit atas)에서는, 아이들까지 온 식구가 급성 장티푸스로 집단 입원을 했다. 연거푸 넉 달을 몸져누워 있었는데, 한 달은 아예 병실 하나가 우리 전용이었다. 그때도 다름 아닌 그곳의 선교사 동료들과 반둥 한인교회가 음식을 해 나르고 우리를 부양했다. IMF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우리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병원비는 몇 년 만에 새 성경 번역 선교사가 온다며 우리를 기다리던 파푸아(Papua)의 SIL 소속, 세계 여러 나라의 위클리프와 고국의 GBT에서 먼저 와 있던 선배들이 자기들의 선교비를 십시일반으로 헌금해 내주었었다.
......
이렇게 일사불란한 기도와 에어 앰뷸런스의 섭외, 셀 수도 없고, 값으로 매길 수도 없고, 주님 말씀처럼 자신의 오른손으로 베푼 것을 본인의 왼손도 모르게 하려던 세상 무명의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곳 파푸아에는 또 하나의 쉽지 않은 관문이 남았던 줄 미처 몰랐다. 우리나라의 대사관까지 나서서 갖은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는데도 선따니의 공항에서 착륙허가를 내 주지 않은 것이다. 내가 알기로도, 아무리 응급상황이지만 국제공항이 아닌 일개 파푸아의 자야뿌라(Jayapura) 지역 공항에서 다른 나라의 수도 (필리핀, 마닐라)를 거쳐, 고국의 인천까지 가는 노선은 들어본 적이 없다. 덕분에, 계획대로라면 오늘 새벽에 우리를 싣고 고국으로 향해야 했던 비행기는, 출발지가 어디로 계획이 되었든 선따니에 당도하지 못했다. 계속 설득 중이라 한 이틀 뒤로 다시 계획은 세운다지만, 파푸아를 좀 아는 우리에게 그 일이 가능할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파푸아 항공청, 선따니 공항과 늘 출도착 스케줄을 논하는 야자씨 (JAARS, SIL, 위크리프 국제연대의 협력으로 운영되는 파푸아 현지 비행 선교단체)의 매니저 시드 (Syd Johnson)도 이미 부탁을 했더란다.
그랬더니, 그간 코로나를 달고서도 비행 허가를 얻는데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느라 동분서주하다 탈진한 아내에게, 이번에는 그간 병원서 이뤄진 모든 검사지를 인도네시아어에서 영문으로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니 이것은 또 어떻게 가능할까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은 평안하다. 간 수치는 눈에 띄게 더 나빠졌다고 하고, 병원의 현지 시니어 의사까지 나서 수시로 약을 바꾸며 대책에 부심하는데, 오히려 나는 마음속 더 아래로 새 닻을 내린다. 하나님이 기도를 듣고 계신 것이 너무나도 자명하고, 또 설령 우리의 기도대로가 아니더라도, 교회의 도고를 수 천배 능가하는 기이한 일을 이루시는 창조의 아버지이신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의 단편에 나오는 천사 미하일은 홀어머니를 데려가면 갓 난 쌍둥이 여아들이 어떻게 살아남겠냐며, 산모의 목숨을 취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웃 마리아라는 여인에게 그 아이들을 부양하게 하시려던 하나님의 선하심도, 그 능력도 몰랐다. 하나님은 사람이 제 능력이 아니라 은혜로 살도록 창조하셨다는 사실 말이다. 먼저는 그분이 부어 주신 생기와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살고, 계속해서는 그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면서 살도록, 우리를 교회와 공동체로 지으셨다. 그러니 괜찮다. 과분한 사랑과 은혜를 입고 또 입었으니 입이 만개라도 감사를 표하기가 부족할 따름이고, 남은 인생 조금이라도 이 은혜를 더 흘려보낼 여지를 주시면, 또 거기에 기쁨으로 매진하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