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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리포트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 O.F.S. 김영희 (모니카) -
----------------- 차 례 ---------------------
들어가는 글
1.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2. 성 프란치스코의 하느님 체험
1)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를 부르시다
(1) 나환자를 통한 인간 사랑
(2) 말씀 안에서 밝혀진 복음적 삶
(3)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2)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1) 사랑이시고 선하신 하느님
(2) 삼위일체 하느님
3.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1) 성 프란치스코 영성의 핵심
2) 가난과 겸손
3) 형제애
4) 순종
5) 기도
나오는 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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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추앙받는 수많은 성인들 중에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오늘날에도 매력을 끌고 인정받는 성인 중 한 분이다. 그의 영향력은 그리스도교를 넘어서 전 세계에 널리 퍼졌으며, 그는 모두에게 속하며 사랑을 받는 성인 중 한 분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첫 번째 전기작가인 토마스 첼라노는 성 프란치코에 대해“마치 딴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았습니다”1) 라고 적고 있다. 그래서 혼란으로 가득 찬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성 프란치스코에게 의지하여 인간애와 형제애의 꽃을 피우게 되고, 이 세상에 다시 한번 하느님에 의한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게 하는 일은 새삼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하겠다. 이렇게 ‘제2의 그리스도’라 불리는 프란치스코가 세상에 전해 준 가장 고귀한 선물은 현존의 새로운 유형이기 때문이다. 이 현존이란 복음적이고 우주적(보편적)이며 또한 심오하게 인간적이다
본고에서는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성인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렇게 성인의 생애를 알아보는 것은 인간관계를 맺을 때 상대방의 성장 배경과 과정을 알게 되면 보다 쉽게 이해하고 친해질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이다. 그 다음에 성인의 하느님 체험을 살펴 본 다음, 성인의 영성에 대해 논하도록 하겠다.
1.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2)
프란치스코는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와 어머니 피카 사이에서 1181년(1182년?)3)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의 아씨시에서 출생하였는데, 9월 26일 성 루피노 성당에서 세례자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프랑스를 좋아했던 아버지가 프랑스 여행에서 돌아와 아들의 이름을 프란치스코(프랑스인이란 뜻)로 바꾸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아버지 피에트로는 장사를 슬기롭게 해서 재산을 모으고, 아들을 키워서 전쟁터에 보내면 전공(戰功)을 세워 귀족이 될 수 있다는 꿈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 피에트로는 아씨시에서 영향력 있는 부자로 세속적인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지만, 어머니 피카 부인은 두터운 신앙심과 교양을 지녔다. 아버지 피에트로는 사업에만 몰두하여 자녀 교육은 부인에게 전적으로 일임한 채 잦은 여행을 하였으므로 프란치스코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게 된다.
프란치스코는 기초적인 라틴어와 계산을 배우고 상술도 익히게 되었으며, 15세쯤 되었을 때는 아버지의 사업을 도우며 상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는 당시의 일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기사도에 심취하여 기사가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 세속적인 풍조에 휩싸여 명예와 쾌락을 탐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아버지의 돈을 낭비하였으며, 명랑한 성격으로 친구들의 인기를 끌었으며 아씨시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또한 천성적으로 너그럽고 인정이 많아 어려운 사람을 곧잘 도와주었다.
프란치스코가 16살이 되었을 때 아씨시의 중산층과 시민들이 귀족들에게 봉기하여 봉건 제도 하의 권력의 상징인 로카 마죠레 성채를 공격하였다. 이 때 프란치스코는 아씨시 방어에 참가했는데, 오래 전부터 기사도에 심취해 있던 프란치스코는 아씨시와 페루지아의 전투에 나가 승리함으로써 훌륭한 기사가 되어 영광을 누리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씨시는 페루지아와의 치열한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었고, 이 전투에 참여한 프란치스코는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는 불행한 신세가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페루지아의 감옥에서 1년을 보내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삶에 대해 깊은 허무를 느끼게 되었다. 이 때문에 프란치스코의 감옥생활은 더욱 암울하고 고통스러웠다. 다음 해, 두 도시국가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프란치스코는 억류생활을 마치고 아씨시로 돌아왔다. 고향을 떠날 때 십대의 꿈 많은 기사 소년이었던 프란치스코는 스무 살의 병약한 젊은이가 되어 고향인 아씨시로 돌아오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집으로 돌아온 뒤에 포로생활의 영향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뒤 프란치스코의 긴 병상생활이 끝나고, 거동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예전의 즐거웠던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즐겁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삶이 허망하고 혼란스러워졌다. 이제는 그 어떤 것도 기쁘지 않았고,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으로 프란치스코 마음에는 큰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그즈음 브리엔느의 월터 백작이 아풀리아 전쟁을 하기 위해 새로 병사들을 모집했는데, 프란치스코는 아무런 목적 없이 방황하는 것보다 군에 입대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다시 군에 지원하기로 하였다. 1205년 23살이 되던 해, 그가 월터 백작의 군대에 입대하러 가던 중, 스폴레토 계곡에 이르렀을 때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신비로운 소리로 “프란치스코, 너는 주인과 종 중에서 어느 편을 섬기려 하느냐?”라는 물음이 들려왔다. 그때 그는 “주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신비로운 소리는 “아씨시로 돌아가라, 네가 할 일을 거기에서 말하여 주리라.” 하고 말하였고, 기사가 되고자 했던 그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계시가 없으므로 그는 계속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기쁨과 희열과 환희를 주었던 것들을 찾아다녔으나 모든 것이 지루하고 단조롭게만 느껴졌다. 이때부터 새로운 방황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어 한적한 곳을 자주 찾았고, 거기서 기도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로마 성 베드로 무덤 순례를 하던 중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털어 헌금하였고 얼마동안 거지가 되어 그들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1205년 어느 날 그가 시골길을 지나가고 있을 때, 한 나병환자 앞을 지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그 나병환자를 그냥 지나쳐 버리거나 동전 몇 푼을 주려고 했을 뿐 결코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았는데, 이런 두려움으로 프란치스코는 갈등하고 있었다. ‘어서 말에서 내려와 나병환자를 포옹하여라.’ ‘아니,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야.’ 결국 프란치스코는 말에서 뛰어내려 나병환자를 포옹하였고, 그러자 하느님께 대한 경외가 마음 속에서 일어나 그동안 쓰다고 느껴졌던 것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가 다시 길을 떠나며 나병환자가 있던 자리를 뒤돌아보니 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 사건은 프란치스코가 회개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나병환자를 만나고 아버지와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 후, 프란치스코는 간섭받지 않기 위해 집과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황폐한 산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 아래에서 조용히 기도하던 중, 십자가로부터 계시의 말씀을 듣는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무너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프란치스코는 이 말씀을 계시로 받아들였고 바로 아버지의 상점에서 여러 벌의 옷과 말을 팔아 산 다미아노 성당과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포르치운쿨라)4) 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로소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이러한 프란치스코의 회개 생활로 인해 아버지와의 갈등은 깊어만 갔고, 아버지 피에트로는 아들인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뿌리는 것과 노예처럼 일하는 것을 아주 못마땅해 했으므로 결국 1206년 4월 아씨시의 귀도(Guido) 주교5)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었다. 주교는 프란치스코가 그의 아버지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이때 프란치스코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결정적인 행동을 취하는데 그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옷을 모두 벗어 그의 아버지 발 앞에 놓고 군중 앞에서 발가벗은 몸으로 선 채 “앞으로 나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때부터 새로운 삶이 프란치스코의 앞길을 인도하였으며, 프란치스코는 어떤 계획을 세우거나 누군가에게 지도를 받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 대한 확신으로 인도되었다. 주님과 그의 복음이 프란치스코의 ‘길’이 되었던 것이다.
1208년 프란치스코가 포르치운쿨라 성당에서 성 마티아 축일 미사에 참례하던 중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마태오 10, 9~10)라는 복음 말씀을 듣게 되었고, 프란치스코는 이 말씀을 가난에 대한 계시로 알아듣고 그 말씀을 생활양식으로 삼았다. 몇몇 동료가 동참하여 열두 동료들이 모였을 때 프란치스코는 자기 형제회를 인가 받으러 로마로 가 교황 인노첸시오 3세를 알현하고는 자신들의 가난한 복음적 생활양식을 인준해 줄 것을 요청했다. 교황은 프란치스코가 제출한 ‘생활 양식’이 너무나도 이상적이며 엄격하다 하여 인가를 거절하였으나, 그날 밤 꿈에 쓰러져가는 라테라노 대 성당을 작은 프란치스코가 어깨로 부축하여 세우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교황은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교회를 쇄신시킬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의 회칙과 회를 즉시 구두로 승인하였다. 이때가 바로 공식적으로 프란치스코회가 창설된 순간이었다(4월 16일). 로마에서 돌아온 뒤 프란치스코와 동료들은 리보토르토(Rivotorto)6) 에서 극도의 가난을 살았다. 그들은 움막에서 살았고, 일을 하면서 애긍을 청했으며, 나병환자들을 간호하는데 헌신하였고, 아씨시 마을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1220년 총회에서 프란치스코는 총장직을 사임하였으며, 총봉사자의 직분을 카타니아의 베드로 형제에게 넘기고, 우골리노 추기경을 형제회의 보호자로 요청하여 모셨다. 그리고 최초의 3회 회칙이 우골리노 추기경의 도움을 받아 작성되어, 재속프란치스코회의 첫 회칙인 ‘생활 지침’(Memoriale propositi)을 호노리오 3세 교황에게 인준받았으며, 포기본지의 루케치오와 보나돈나 부부가 재속형제회의 첫 회원이 되었다. 1221년과 1222년에는 이탈리아의 중부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설교하여 사람들을 회개시켰다. 1223년에는 총회가 개최되어 회칙을 검토한 뒤, 폰테 콜롬보(Fonte Colombo)7) 에서 회칙을 최종 수정하여 교황 호노리오 3세의 인준을 받게 되었다. 회칙 인준을 받은 뒤 그레치오(Greccio)8) 에서 구유를 꾸며 성탄절 밤을 성대하게 지냈고, 이를 계기로 성탄절에 구유를 꾸미는 관습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형제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프란치스코는 무엇보다도 먼저 선교에 힘썼는데, 1208년 봄에는 에지디오 형제와 함께 안코나의 마르케를 돌며 선교하고, 가을에는 일곱 형제들이 포지오 부스토네에 가서 리에티 계곡을 돌면서 선교하였다. 여기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으로부터 자신과 형제회의 앞날에 대한 확신을 얻고, 형제들을 격려하면서 둘씩 짝지어 선교하도록 파견하였다. 그리고 겨울에는 베르나르도와 에지디오 형제가 피렌체까지 선교 여행을 하였다. 1211년 여름에는 시리아 선교를 계획하고 형제들과 더불어 떠났으나 폭풍을 만나 배가 달마치아 해변으로 떠밀려가는 바람에 실패하고 간신히 안코나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1219년 9월에 프란치스코는 동료들과 함께 이집트의 다미에타에 가서 이슬람의 술탄 멜렉 엘 카멜(Melec-El-Camel)을 만나 십자군 전쟁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하였지만, 술탄과는 우호적 관계를 맺었다. 그 뒤 프란치스코는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전쟁터를 돌아보면서 십자군 군대의 난폭함에 실망하고 시리아로 돌아왔다. 1220년 초에 아크리에 있다가 봄에는 술탄의 허락을 얻어 다시 성지를 순례하고 시리아까지 선교 활동을 벌였는데, 이로써 예루살렘 성지에 프란치스코의 제자들이 살기 시작하였다.
성지 순례 도중에 형제회 안에 어려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베네치아를 거쳐 5월에 로마로 돌아왔다. 거기서 모로코로 선교를 떠났던 다섯 형제가 순교9)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 기쁨에 넘쳐 “우리는 주 하느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대담 무쌍한 다섯 사람의 진정한 형제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고 외쳤다. 1223년에 프란치스코는 다시 이슬람 세계에 선교하려고 베르나르도 형제와 더불어 모로코로 떠났으나 스페인에서 병을 얻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콤포스텔라의 성 야고보 성지만 방문한 뒤 아씨시로 되돌아왔다.
프란치스코는 천상 세계로 옮겨가기 2년 전인 1224년 9월 17일 라 베르나10) 에서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을 준비하는 40일 기도를 하던 중 세라핌 천사의 환시를 보게 되었다. 이때 프란치스코는 세라핌의 여섯 날개 가운데 있는 십자가를 보았으며 환시가 사라진 뒤 성인께서는 뜨거운 열정과 더불어 주님의 다섯 상처가 각인되어 고통을 느꼈다.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은 수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닮도록 자신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의미를 지니며 그리스도의 비하(kenosis), 즉 가난의 구체적 표지이고, 성인의 일생을 극적으로 요약하는 사건인 것이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사부님이 그토록 원하던 순교가 이 오상에서 드러났다고 말했다. 순교하고자 했던 성인에게 하느님께서는 오상이라는 특별한 고통을 통해 그분이 열망하던 순교를 체험케 하셨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오상을 받음으로써 완전한 해방을 체험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건강이 점점 쇠약해지면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으며 거의 실명 상태였다. 성 다미아노 성당의 움막에 거처하면서 고통이 극심한 중에서도 아름다운 ‘태양의 노래’11) 를 지었다. 프란치스코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형제들이 성인을 시에나로 모셨으나 의사들의 노력은 헛되었으니, 다시 아씨시로 돌아왔고, 여기에서 유언을 작성하였으며, ‘태양의 노래’의 마지막 구절인 ‘자매인 죽음’을 노래하였다. 10월 3일, 해질 무렵이 되자 주님의 죽으심과 일치하고자하는 간절한 원의로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옷을 벗겨달라고 청하였고, 맨바닥에 누여졌다. 성인은 시편 142편을 낭독해 주기를 형제들에게 청했다. 죽음의 순간에 형제들은 복음의 수난기를 낭독했다. 성인은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요한 13, 1)의 낭독을 들으며, 그분 안에 하느님의 신비가 다 이루어졌을 때, 그의 영혼은 육체에서 풀려나와 하느님 영광의 심연으로 들어가고 하느님 안에 잠들었다. 이때 프란치스코는 44세였고, 회개한지 스무 해 째 되는 해였다.
1227년 3월 19일 작은형제회의 보호자였던 우골리노 추기경이 그레고리오 9세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다음 해 4월 29일 그레고리오 9세는 프란치스코를 공경하기 위한 대성당을 짓도록 모든 신자들의 도움을 청하는 칙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이듬해 7월 16일에는 프란치스코의 시신이 모셔져 있는 성 지오르지오 성당(지금의 성 글라라 성당)에서 시성식을 가졌다. 1230년 5월 25일 성 지오르지오 성당에 모셔져 있던 성인의 유해는 새로 건축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제단 아래로 옮겨져 안치되었고 오늘에 이른다.
2. 성 프란치스코의 하느님 체험12)
프란치스코의 영성의 출발은 하느님 체험으로부터 시작한다. 프란치스코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으며 온통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느라 온 시간을 보냈다. 육화13) 와 십자가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흐느끼곤 하였으며, 주님의 영의 움직임에 민감하여 거룩한 영의 뜻에 온 마음을 집중하였다. 언제나 주님의 현존을 인식하였고 성령의 숨결 안에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부르심에서 시작하여 교회의 신앙인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 영혼이 온전히 젖기까지 하느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보았다.
1)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를 부르시다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게 된 것은 페루지아에서의 병상 생활과 스폴레토의 환시, 나병환자와의 만남,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에서 받은 소명, 아버지와의 결별 등 여러 단계를 거쳐 복음적 소명으로 발전하였다. 회개하기 이전 그는 세속적 쾌락을 추구하기는 했지만 아주 방탕한 생활을 했다기보다 도덕적 순수성을 지니고 있었고, 신분 상승을 위한 기사 정신은 가지고 있었지만 물질적 재화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욕심이 없었다. 이런 특성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복음의 말씀을 만나게 됨으로써 프란치스코를 보다 높은 영적 생활로 이끌었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세속적 쾌락과 기사도에 대한 세속적 영광이라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지상에서의 기사에 대한 이상(理想)을 하느님 나라의 영신의 기사라는 보다 높은 이상으로 이끌어 주셨다.
(1) 나환자를 통한 인간 사랑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나환자를 만나게 된 체험은 유언에서 스스로 회개 생활의 시작이라고 할 만큼 커다란 사건이었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나환자와의 만남은 ‘사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극적인 체험으로, 그리고 인생의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던 것이다.
“주님이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 생활을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내가 죄 중에 있었기에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셨고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들한테서 떠나 올 때에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내게 있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14) .
이 진솔한 고백은 프란치스코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그는 나환자들을 돌보면서 인간이 겪는 고통의 깊이를 체험하였으며, 그만큼 인간에 대한 사랑의 또 다른 새로운 면을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그들을 통해 고통 받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으며,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마음 깊이 체험하였다. 그러기에 성인은 그리스도를 어루만지듯 나환자들을 돌보았다. 이러한 신앙의 심화는 주님 친히 프란치스코에게 그의 생활과 수도회를 모든 완덕의 유일한 기초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에다 세우도록 지시하셨을 때 비로소 결정적 계기를 맞게 된다.
(2) 말씀 안에서 밝혀진 복음적 삶
프란치스코가 은둔자의 옷을 입고 하느님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1208년, 마티아 축일의 복음 말씀(마태 10,7~10)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들려주신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이 복음 말씀을 듣고 프란치스코는 즉시 하느님의 영 안에서 기뻐 외쳤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하던 바다.”(1첼라노 22)15) 그리고 나서 기쁨에 넘쳐 자신이 방금 들은 영혼에 유익한 말을 서둘러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는 즉시 발에서 신발을 벗어버리고 손에서는 지팡이를 치워버리며 한 벌의 옷에 만족하고 허리띠는 가느다란 새끼줄로 바꾸어 버렸다.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에게 어떻게 살 것인지 알려 주신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 프란치스코의 생활 양식에 동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오게 되었다. 퀸타발레의 베르나르도가 프란치스코와 함께 회개의 삶을 살고자 왔을 때, 프란치스코는 둘이서 아씨시의 성 니콜라오 성당에 가서 기도한 후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서 복음서를 세 번 펼쳤다(마태 19,21; 마태 16,24; 루가 9,3).
복음 말씀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삶과 미래의 형제회 삶이 복음을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고, 즉시 “형제들이여,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생활이고 우리의 회칙이며 우리 공동체에 들어오려고 하는 모든 이의 회칙입니다. 그러므로 가서 여러분이 들은 대로 행하십시오.”(대전기 3,3)16) 라고 하였다.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에게 공동체의 생활양식을 주신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동시에 형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이로써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의 형님이시며 오빠가 되시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시라는 평범한 진리를 재발견한다. 프란치스코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 하느님의 인간을 위한 사랑을 체험하였다.
(3)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형제들의 수효가 12명으로 증가되었을 때, 프란치스코는 자신과 형제들의 생활양식을 교회로부터 인준받기 위해 1209년 로마로 갔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서를 통해 들려주신 생활양식의 이상(理想)을 분명히 또 확고하게 이해했기 때문에 고위 성직자들이 그들의 생활양식을 반대하였지만 그 이상에 끈질기게 매달렸다. 성인은 유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거룩한 복음의 양식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을 나에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몇 마디 말로 간단히 기록케 했고 교황 성하17) 께서 나에게 확인해 주셨습니다.”
회칙 인준을 교회로부터 받게 된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은 교황을 통하여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체험할 수 있었으며 교회가 맡긴 소명, 시대의 소명에 따라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해 세상으로 파견되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그 사랑 때문이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사랑,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그 사랑을 삶을 통해 이 세상 안에 뿌렸다.
2.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프란치스코의 하느님에 대한 인식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었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사랑의 보이는 정점이요, 그 사랑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는 분은 바로 성령이심을 보았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친교 가운데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모든 일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음을 재발견하였다.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된 프란치스코의 하느님 체험은 프란치스코로 하여금 하느님이 누구이신가를 고백하게 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생각하였다. 나아가 그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였다. 그분은 사랑이며 선하신 분이라는 것과 삼위이시며 일체이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신학자가 아니었지만 직관력으로 교회의 진리를 꿰뚫어 보았다. 그의 하느님 체험은 그가 얼마나 영적 감각이 뛰어났으며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에 민감하였는지 잘 보여준다. 그는 자신 안에 움직이는 성령의 숨결과 현존을 늘 인식하였던 것이다.
(1) 사랑이시고 선하신 하느님
하느님의 좋으시고 선하심은 프란치스칸 영성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이야말로 모든 프란치스칸 영적 활동의 이유이고 모든 문제 해결의 처음이요 마지막 열쇠이다.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모든 지혜이시며 모든 것을 통달하고 계신 분이시다. 또 재판관이시며 구원자이시고 심판을 하시는 분이시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참으로 좋으심과 선하심을 강조하였다.
성인이 그렇게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도 사랑하도록 권하는 하느님에 대하여 말할 때는 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엇을 강조하고 간청할 때 프란치스코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간청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인의 신심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형제회에서 첫째가는 법이 사랑이요, 프란치스칸들이 세상에 전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메시지도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도 바로 그분께 대한 사랑이다. 마음을 깨끗이 하여 모든 장애물을 제거시키는 “신심의 정신”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받아들이고 돌려드리려는 자세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모든 선을 내려 주시는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되돌리게 해준다.
하느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무한하게 초월하여 모든 선함과 아름다움과 행복을 소유하고 계시다. 하느님은 무한한 사랑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착하시고 좋으시고 선하시고 아름다우신 당신의 마음을 우리가 함께 나누어 갖기를 원하고 계시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선함과 사랑으로 가득하길 원하신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내가 그리워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선함과 사랑으로 가득하길 원하신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버려두시기까지 우리가 사랑으로 가득하길 원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알려 주셨다. 프란치스코는 그분을 생각하고 대할 때마다 그분의 선하심과 한없는 사랑에 도취되었다.
(2) 삼위일체 하느님
성인에게 있어서 하느님 체험의 절정은 ‘삼위일체(三位一體)이신 하느님’이다. 성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을 깨닫게 되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아드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빛 가운데 계시는 아버지를 뵈올 수 없으며, 하느님은 영적인 존재이시므로 영적으로써가 아니면 하느님을 뵈올 수 없고, 아드님도 아버지와 같이 영이신 만큼 아버지와 성령을 뵈옵는 방법과 다르게는 아무도 아드님을 뵈올 수 없다는 것이 프란치스코의 체험이다. 즉 성인은 영적으로 삼위일체를 활동하시는 하느님으로 보고, 생명의 창조주로, 구원을 주시는 구세주로, 성화의 작업을 이룩하시며 사랑의 일치로 초대하시는 분으로 각각의 위(位)를 믿고 공경하였다.
모든 점에서 확실하고 분명한 사실은 프란치스코에게 하느님은 유일한 절대자이시고 프란치스코 자신은 그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분을 소유하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느님의 절대적 최상 주권과 그분에 대한 변함없는 추구는 프란치스코의 존재 방식이었으며 행동방식이었다. 그는 절대자이신 주님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열망하였다. 프란치스코가 만나고 체험했으며 선포하고 노래한 하느님은 삼위이시고 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그 체험의 절정을 이루었다.
3.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은 한마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다. 영성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서 특별한 방법이나 강조점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머물고 그분을 닮아가는 것으로써 한 영혼이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완덕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과의 일치인 완덕을 향하는 여정에서 그리스도는 유일한 스승이시다. 그리스도를 통한 완덕의 길에 대하여 교회 안의 여러 성인들이 모범을 보여 주고 계신다. 베네딕토 영성, 십자가 요한의 영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이냐시오 영성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완덕을 지향하고 있지만, 각자는 방법에 있어서 나름대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하느님이 각 개인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인도하셨는가에 따라 영성이 구분된다.
각 수도회의 창설자는 고유한 카리스마를 지니며 이같은 카리스마에 따라서 그 수도가족들이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영성의 차이는 하느님께서 수도회 창립자를 특별한 방법으로 인도하시는 성격에 따라 그 수도 공동체가 발달하였던 시기에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교황 비오 12세는 이렇게 묘사했다.
“어떤 성인의 영성은 그 자신에게 나타나는 하느님을 묘사하는 특별한 방법 또는 하느님께 말씀하는 것이나 접근하는 특별한 방법이다. 모든 성인은 자기가 가장 깊이 생각하고 통찰하며, 매력을 느끼고 정복당하는 관점에서 하느님의 속성을 본다. 모든 성인은 그리스도의 특정한 하나의 모습을 찾아 그가 추구해야 할 이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교회가 그렇듯이 모든 성인이 그리스도의 전체를 닮기 위해 노력한다.”18)
한 프란치스칸의 작가가 말하기를 “만일 어떤 특수한 것이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관찰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아무 것도 특수한 것을 원하지 않으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19) 는 것이라고 했다. 프란치스코의 영성은 ‘복음의 실행’이라는 단순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프란치스코의 영성은 독특하고 매력적인 것이기 때문에 교회에도 프란치스코의 영성이라 불리는 독특한 카리스마가 부여되었다.
비오 12세가 말하기를 “그런데 프란치스코회의 가르침에는 하느님은 거룩하시고 위대하시며, 모든 것 위에 있고 선하시며, 진실로 최고의 선이시라는 것에서 일치하고 있다. 이 가르침에 의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에 의해 살며, 사랑을 위해 창조하시고 육화하셔서 구원하셨다. 즉 그는 사랑을 위해 구해주시고 거룩하게 하신다.”20) 고 했다.
하나의 영성은 다른 영성보다 낫다거나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것은 단지 다른 것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갈바리아 산에서 감동을 받고, 다른 사람은 베들레헴에서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판단과 신중함이 가장 큰 관심사라면 다른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인내와 자비가 가장 큰 관심사가 될 수도 있다. 우리 중에 더 나은 이는 없다. 우리는 우리 모습 그대로이다. 믿는 이들 중에도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다른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은 더 좋은 것이 아니라 단지 구별이 될 뿐이다.
1) 성 프란치스코 영성의 핵심
프란치스칸 영성에 있어서 강조해야 할 점은 모든 것 위에,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을 통해서 받아들여야 할 중심이 ‘사랑이신 하느님’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 강조점은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의 형제이며,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라는 것이다. 즉, 하느님 사랑 안에서 우리는 한 형제요, 우리는 영원히 한 아버지로서 같은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생활은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이다. 막연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의 원천은 ‘복음의 정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에 근본을 두고 있는 이 생활은 ‘작음의 덕성’과 ‘형제애’ 안에서 이루어진다. 아래에서 프란치스코 영성의 몇 가지 특징을 언급하겠지만 각 주제는 독립적인 것으로 분리해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실현할 수도 없다. 이들 중에 하나를 잃어버리면 모두를 잃게 될 만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면 “나는 가난의 덕목은 온전히 지키고 있는데 겸손의 덕목은 지킬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작음, 평화, 성체 신심, 기쁨, 단순, 형제애, 봉사, 십자가 신심, 성탄에 대한 신심 등 많은 주제 중 몇 가지를 살펴보자. 영성의 각 주제는 개별적으로는 의미가 없으며 전체가 상호 연관 속에 밀접히 연결되면서 ‘복음의 정신’이라는 틀 속에 모두 자리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주제는 프란치스코의 글과 가르침 안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그의 영성을 전달해 주고 있기 때문에 이 주제를 숙고하는 것은 그의 영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고 하겠다.
2) 가난과 겸손21)
성 프란치스코를 ‘아씨시의 가난뱅이’라고 부르는데, 그에 대하여 잘 모르는 이들도 빈자(貧者, 가난뱅이)라는 말에는 익숙하다. 이 때문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의 핵심을 들어보라고 하면 ‘가난’이라고 선뜻 대답한다. 그러나 이 대답은 사실 부족한 것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가난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성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이다.’22) 라고 대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의 가난이란 성인이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에서 발견하고 복음에서 발견한,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의 가난한 생활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에서 가난은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똑같은 신분을 취하신’ 겸손과 일치한다. 따라서 성인은 이 두 요소를 함께 연결시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이라고 말한다. 성인의 가난의 동기는 ‘가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가난’이란 완전히 사랑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가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랑의 결과이다.
현대에 와서 그 어떤 덕목보다도 이해하고 실천하기 힘든 것이 ‘가난’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물질적인 가치는 한 개인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소유 없이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복음적 권고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갈등을 겪는다. 한때는 교회 안에서 가난에 대한 경직된 해석으로 인하여 현세적 삶 안에서 물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기도 했다. 물질에 대한 부정적인 이해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시대에도 있었다. ‘카타리파’23) 와 ‘발도파24) ’라는 이단자들은 결혼, 물질적 재산, 외적인 전례 등을 부정하고 극기생활과 엄격한 생활을 추구하였다. 즉 세상의 것을 버리고 물질에서 해방되어 복음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극단적인 궁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결과이며, 이는 규정을 통한 강요가 아니라 주님의 영(성령)에 머물기 위한 자유이다.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가난’은 물질적 가난에 앞서 내적인 가난25) 이다. “분개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하느님의 종은 진정 아무 소유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권고 11,3)26) 라고 말한다. ‘소유 없이’라는 말은 단순히 물질적 재물을 포기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며, 외적 재물에 대한 포기는 복음적 가난이 요구하는 내적 마음의 자세를 갖는 데 수반되는 조건이다. 즉 재물에 대한 소유의 마음이 아닌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재물을 잘 관리하는 마음 자체가 중요하다. 성인이 말하는 내적인 가난은 모든 덕행과 관련을 갖고 있으며 특히 내적 가난이 없는 겸손은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가난 자체를 오히려 소유의 대상으로 삼아서 교만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성인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고자 하는 가난과 겸손의 삶을 살도록 수도회의 이름을 ‘작은형제회’라고 불렀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순례자와 나그네의 정신으로 산다. 내적 가난의 실천에 초점을 두고 살아갈 때 물질적 가난의 기준이 각자의 처지에 알맞게 주어질 것이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가난’을 타인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교만의 씨앗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재물을 신앙생활에 있어서 갈등과 번민의 요소가 아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받아들이고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3) 형제애
프란치스코의 영성에서 형제애는 고유한 부분이다.‘형제’라는 말은 그의 회칙27) 과 유언28) 에서 자주 사용된다. 성인은 모든 인간을 형제로 만났으며, 형제인 인간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모든 이의 주님이시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구성된 가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프란치스코는 인간은 물론 우주의 만물이 형제가 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이다.
성인은 형제들의 공동체가 대 수도원화 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피조물들이 내 형제와 자매임을 인식하고 그들과 한 가족으로서 형제애를 나누기를 바랐다. 그러기에 프란치스코는 세상 모든 곳이 당신의 거처였고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순례자로서의 삶을 선택하였다. 순례자와 나그네 같이 살기 위해서는 가난하고 작은 형제들로 구성된 ‘형제적 공동체’가 되어야 했다.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성장되었으며 기도 안에서 일치되었다.
또 성인의 형제애는 사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형제애’로 일컬어진다. 프란치스코는 온갖 피조물 안에서 형제애를 느꼈고 실제로 그들 안에서 창조주 하느님을 만났다. 이같은 영성은 다른 성인의 영성에 비해서 독창적이고 심오한 것이다. 피조물 안에서 느끼는 ‘우주적 형제애’는 프란치스코 성인에게서 발견되는 독특한 것이다.
4) 순종
형제애와 연관된 ‘형제적 순종29) ’은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회개생활이 요구하는 조건이다. 프란치스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 대한 순종을 떠나지 않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다.’30) 고 언급한다. 순종은 사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원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랑’(요한 15,13)으로써 순종생활의 절정은 ‘순교’이다. 실제로 순종생활을 하는 사람은 내적, 외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다.
우리는 흔히 순종을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해야 하는 것으로서만 잘못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성인은 복음적 순종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순종의 개념은 아랫사람이나 윗사람 모두에게 해당된다. 가정을 예로 들면, 부모는 권위를 내세우기 이전에 부모로서의 의무를 잘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하느님의 선물인 자녀들에게 그들의 자율성을 키워주고 존중해야 한다. 부모의 이러한 모습은 자녀들에게 자유로운 마음으로 능동적인 순종31) 을 하게 하며 복음 생활의 참 가치를 깨닫게 한다. 참된 진리일지라도 강압과 권위주의적 방법으로 전달될 때는 오히려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 부드러움, 온화함, 단순함, 겸손함 등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다.
5) 기도
프란치스코는 ‘기도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곧 기도 그 자체였다’고 할 만큼 열정을 다해 기도32) 했다. 그는 자주 관상에 몰두했고 그가 있는 곳이 바로 기도의 장소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주 은둔소를 찾아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도, 특히 관상기도33) 는 프란치스코에게 너무나 중요해서, 한 때 그는 세상에 대한 사도직 사명을 포기하고 관상생활에만 몰입하려는 원의를 가지기도 했다. 프란치스코는 동굴에서, 장터에서, 라 베르나에서, 추기경의 저택에서, 홀로 있거나, 형제들과 함께 있거나, 일을 할 때에도 늘 기도했다. 때로는 관상기도를, 때로는 자유기도를, 때로는 형제들과 함께 공동기도를, 때로는 노동하면서 기도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은 그리스도에 그 원천을 두고 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게 했고, 그 삶의 열매인 영성이 오늘날 교회의 보화로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처지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성인의 영성을 살아야 할 것이다. 세상 안에서 살아야 하면서도 기도와 관상으로 힘을 얻어 내적 가난과 겸손의 정신으로 각자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선물로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오는 글
이상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의 하느님 체험과 영성을 살펴보았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사랑에 도취되어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응답했으며, 그의 일생은 이 응답의 결실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나환자를 통하여, 형제들을 통하여, 복음을 통하여,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였으며,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과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삼위이시고 일체이신 분을 찬양하였다. 만일 우리가 프란치스코처럼 선하시고 참 좋으신 하느님을 올바로 체험하고 받아들인다면,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떤 다른 변화의 힘도 사랑의 힘을 능가하지 못하며,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은 새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기도와 삶을 통해 체험한 하느님의 신비를 만민에게 전할 사명을 받았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영이며 생명’이신 성령의 말씀”34) 을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성인이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의 최초 전기 작가인 첼라노의 토마스의 증언 그대로이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가장 용감한 기사로서 도시와 마을들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인간적 지혜에서 나오는 그럴 듯한 말로써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지식과 힘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평화를 설교하였으며 죄를 없애기 위해 구원과 회개를 가르쳤다.”35) 이러한 프란치스코의 영성의 유산은 새로운 상황과 필요가 요구되는 현대에도 그대로 살아 움직이며, 이 교회에 끊임없는 쇄신과 개혁을 이루는데 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아씨시의 가난뱅이”가 죽기 직전에 하신 말씀, 즉 “형제들이여, 지금까지 진전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 주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합시다.”36) 라는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서 자연적으로 복음을 순수하게 실행하도록 아직도 촉구하고 있다고 믿는다.
참 고 문 헌
1) 라자로 이리아르떼, 「프란치스칸 소명」, 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옮김, 분도출판사
2) 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편,「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글」, 분도출판사
3) 토마스 첼라노,「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편, 분도출판사
4) 보나벤뚜라,「보나벤뚜라에 의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 꼰벨뚜알 성 프란치스 코 수도회 편, 분도출판사
5) OFS 국가형제회 양성위원회 엮음,「지원기 양성교재 - 아씨시」, 가톨릭출판사
6) OFS 국가형제회 양성위원회 엮음,「유기서약기 양성교재 - 라 베르나」,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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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마스 첼라노,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편, 분도출판사, 137쪽
2) OFS 국가형제회 양성위원회, 「아씨시」(지원기 양성교재), 35-61쪽
3) 프란치스코의 탄생 연도는 1181년 혹은 1182년이라고 추정된다.
4) 포르치운쿨라 성당은 천사들의 성마리아 성당을 일컫는다. 원래 베네딕도회의 건물이었으나 당시에는 버려진 건물로써 프란치스코와 동료들은 리보토르토의 움막 생활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 프란치스코가 직접 수리했으며, 특별한 애정을 가진 곳으로 클라라가 성지주일에 이곳에서 프란치스코와 동료들의 환영을 받으며 새 삶을 시작했으며, 프란치스코는 이곳에서 죽기를 원했고 자매인 죽음을 맞이한 곳이기도 하다.
5) 귀도(Guido) 주교는 1204년경부터 1228년 7월 30일까지 아시시의 주교로 재임했다. 1207년 초 프란치스코는 이 주교 앞에서 아버지와 결별했고 회개 초기는 물론, 이후에도 형제회의 문제를 상의하고 협조를 구하기 위해 자주 이 주교를 방문하였다. 1225년 6월 ‘용서의 노래’를 첨가시킨 ‘태양의 노래’로서 이 주교와 아씨시 시장과의 불화를 화해로 이끌어내었다.
6) 리보토르토(Rivotorto) - ‘리보’는 강이란 뜻이고, ‘토르토’는 꾸불꾸불이란 뜻이어서, 리보토르토는 꾸불꾸불한 강이라는 뜻이다. 이 곳에는 성인이 머무르셨던 양우리와 움막이 있다. 프란치스코는 베르나르도, 카타니 베드로와 함께 아씨시 성안의 성 니콜라오 성당에서 성서를 3번 펼쳐 하느님의 뜻을 찾았다(성서를 3번 펼치는 관습은 당시 민간인에게 퍼져있던 세속적인 민속이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프란치스코는 이들과 함께 이곳 리보토르토를 첫 거처로 삼았던 것이다. 그 후 같은 해인 성 죠르죠 축일에 에디지오가 합류했었다. 그래서인지 성당 입구 문 위에는 “이 곳이 작은 형제들의 시초”라고 새겨져 있다. 성인은 짐승우리와 같은 곳에서 있는 그대로의 가난 안에서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고, 복음의 양식대로 사신 것이다.
7) 폰테 콜롬보는 이태리 중부에 위치한 자그마한 마을이다. 이 폰테 콜롬보가 프란치스칸 수도자들에게 시나이라고 불리는데 이 곳에서 성인이 회칙을 쓰셨기 때문이다. 즉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던 것에 비유되어 붙여진 것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네 번에 걸쳐 회칙을 쓰셨다. 그 중 마지막, 네 번째 회칙이 이곳에서 쓰여졌다. 그 네 번째 회칙은 인준 받은 회칙으로서(1223년 11월 29일) 바로 이 곳 폰테콜롬보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기도하시며 작성하신 회칙이다.
8) 1223년,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회칙을 인준받을 때 그는 교황님으로부터 성탄을 보다 생생하게 지낼 수 있는 허락을 받았고 그레치오로 돌아와 생생하게 강생의 신비를 재현했다. 그레치오는 구유를 만들어 주님의 성탄을
9) 이 다섯 형제들은 성 베라르도 사제와 동료 순교자이며 프란치스칸 첫 순교자들이다. 1219년 성 프란치스꼬의 아들인 성 베라르도와 동료 형제들은 모슬렘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났다. 그들은 그곳에 도착기념하는 전례가 시작된 곳이다. 주님을 그대로 닮기를 원하신 성 프란치스코가 특별히 사랑했던 곳들 중에 한 곳이기도 하다. 페루지아 전기에 의하면 성 프란치스코는 이 마을을 이렇게 칭송했다. “나는 그 어떤 도시에서도 이 그레치오라는 작은 마을에서만큼 많은 회개가 이루어진 곳을 보지 못했습니다.”한 지 얼마 안 되어 붙잡혀 모로코로 추방되었다. 마라케쉬에서 그들은 다시 감옥에 갇혀 여러 고문을 받았고 1220년 사형이 언도되었다. 이들의 순교는 성 안토니오가 작은형제회로 옮겨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축일은 1월 16일이다.
10) 베르나 산은 까센티노에 위치하고 있으며, 1213년에 베르나의 키우시의 오를란도 카타니 공작으로부터 기증 받은 것이다. 이 곳에서 프란치스코는 오상을 받았고, 이 오상을 통해서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와 완전하게 합체하였으며, 이제는 영성적으로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그를 모방하려던 그의 열망은 뜻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베르나 산은 프란치스칸의 타볼 산이며, 고통의 골고타가 된 것이다.
11) 태양의 노래는 성 프란치스코가 1225년 겨울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병석에 누워 만든 찬가이다. 불빛을 견디어낼 수 없는 눈병과 다른 지병들의 악화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주님께는 찬미가 되고 자신에게는 위로가 되며 이웃에게는 감화를 주기 위해 가사를 쓰고 곡을 붙여 형제들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였다(페전 43 참조). 태양, 달, 별, 바람, 물, 불, 땅 등의 피조물로 하여금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는 피조물의 노래와 주교와 아시시 시장과의 불화를 화해시키기 위해 부른 용서의 노래, 마지막으로 죽음을 앞두고 첨가한 죽음의 찬가로 이루어져 있다. 이 찬가는 그리스도교 문학에 있어 중요한 걸작 중의 하나로서 프란치스코가 옛 이탈리아어로 쓴 작품 중에 남은 유일한 작품이며, 이탈리아 문학의 초기 작품이다.
12) OFS 국가형제회 양성위원회, 「라 베르나」(유기서약기 양성교재), 21-28쪽
13) 그리스도교 신학의 근본 개념. 말씀이신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일. “강생” 또는 “성육신(成肉身)”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육화의 이유 : 첫째, ‘말씀’이신 성자는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켜 구원하고자 육화 하였다.(1요한 4,10) 둘째, ‘말씀’인 성자는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요한 3,16) 셋째, ‘말씀’인 성자는 인간에게 거룩함의 표양을 보여 주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마태11,29) 넷째, ‘말씀’이신 성자는 인간을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었다.(2베드 1,4) (한국가톨릭대사전 참조)
14) 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옮겨엮음,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글」, 분도출판사, 103-104쪽
15) 토마스 첼라노,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편, 분도출판사, 74쪽
16) 꼰벨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한국관구 펴냄, 「보나벤뚜라에 의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 분도출판사, 33-34쪽
17) 인노첸시오 3세
18) OFS 국가형제회 양성위원회, 「아씨시」(지원기 양성교재), 64-65쪽
19) 위의 책, 65쪽
20) 위의 책, 65쪽
21) 라자로 이리아르떼, 「프란치스칸 소명」, 프란치스코 한국관구 옮김, 분도출판사, 143-176쪽 참조.
22) 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옮겨엮음,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글」, 분도출판사, 88쪽(인준받은 회칙 6, 3 참조).
23) 알비파’(Albigesi)라고도 하는 ‘카타리파’(Catari)는 프랑스 남부와 롬바르디아 일대에 흩어져 있었는데, 마니교의 이원론에 근거한 철학적-신학적 신앙을 가졌다. 이들은 그리스도교 근본 교리 중 여러가지를 부정하고, 구약성서를 거부하고, 외적인 경배행위는 무엇이나 멸시했다. 이들은 “신도”(credenti)와 “완전자”(perfetti)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후자는 엄격한 윤리생활과 아주 극단적인 금욕생활로 자신들을 과시하였다.
24) ‘발도파’(Valdesi)는 리옹에서 처음 생겼는데, 1179년 알렉산델 3세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이들은 가난 서약을 발할 수는 있었으나 교구장의 허락 없이 설교해서는 안 되었다. 이들은 곧 자유로운 설교와 성서를 지방어로 대중화함으로써 교계와 충돌하였다. 결국 1185년에 루치오 3세로부터 단죄 받았다. 이들은 복음에 따라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면 모두가 사제이고 반대로 부당한 사제에 의해서 거행되는 행위들은 전혀 무효하다고 가르쳤다. 1218년에 이들은 ‘빠따리니’(Patarini)라고도 불리는 ‘가난한 롬바르디아인들’(Poveri Lombardi)과 합세했는데, 그들은 추문을 일으키는 사제의 생활에 강하게 반발함으로써 12세기 중반부터 인기를 누리게 된 무리였다. 이들은 특히 수공업자들 사회에서 받아들여졌다.
25) 프란치스코는 복음 전체의 핵심이 우주를 지어내신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신적 지위를 버리시고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의 비하’임을 발견한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생애 전부가 ‘비하의 신비’임을 깨닫게 되며 이 ‘비하’의 절정은 성부의 뜻을 따라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에 있음을 깨닫는다. 이런 까닭에 ‘비하’를 성인은 예수님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는 것으로 깨닫고 예수님처럼 ‘비하’의 삶을 온전히 살았다. 이에 대한 한가지 표현이 내적 가난이다. 그러므로 내적인 가난이란 마음의 가난, 겸손이다. 이것은 성인의 글인 권고 14번에 잘 나타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여러 가지 기도와 신심행사에 열중하고 육신의 많은 극기와 고행을 하면서도, 자기에게 해가 될 듯한 말 한마디만 듣거나, 혹은 어떤 것을 빼앗기기만 하면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정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빰을 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참조 : 마태 5,39).
26) 위의 책, 36쪽
27) 위의 책에서, 1회칙 5장, 10장, 11장, 2회칙 6장, 7장 참조
28) 위의 책에서, 유언 1, 14, 20, 25, 29-30, 34, 36, 38절 참조
29) 라자로 이리아르떼, 위의 책, 215-237쪽
30) 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옮겨엮음, 위의 책, 137쪽(‘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46절)
31) 토마스 첼라노, 위의 책, 357-358쪽
32) 위의 책, 306-307쪽
33) 관상(觀想 Contemplatio) 하느님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사랑하는 행위. 염경기도나 일반적 묵상기도와 달리 단순히 직관적 성격을 지닌 기도라 할 수 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단순하게 바라보며 직접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느님과 친교하기 위해서 우리는 언어와 개념과 이미지 등 매개수단을 사용한다. 그러나 친교가 깊어지고 하느님이 사람에게 가까이 현존하심에 따라 그러한 매체가 불필요해지며 마침내 하느님의 영(靈)이 사람 안에 직접 내재하여 활동하실 때에는 사람의 사고와 감정과 상상은 하느님과의 침묵의 일치를 방해하는 소음이 되기에 이른다. 더욱이 인간의 언어와 개념 등은 하느님이 인간 안에서 당신의 뜻대로 계시하시고 활동하시려는 자유를 제한하기에 이른다. 관상은 이런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관상자는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을 침묵시키고 단순히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이다.
34) 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옮겨엮음, 위의 책, 119쪽(‘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Ⅱ’ 3절)
35) 토마스 첼라노, 위의 책, 90쪽
36) 위의 책, 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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