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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기쁜 소식인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기도. (나에 대한 하느님의 갈망과 하느님에 대한 나의 갈망이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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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기쁜 소식인가? (기쁜 소식의 본질)
http://www.ofmkorea.org/ofmkfb/525500. 2023.05.01. 13:23 이마르첼리노M
무엇이 기쁜 소식인가? (기쁜 소식의 본질)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는 것은 믿음의 핵심과 본질의 하나입니다. 거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즉 죽음과 부활, 상실과 회복, 생명의 출생과 위로부터 다시 태어남, 변화와 변모라는 패턴이 있습니다. 그중에 부활과 회복은 최종목표이며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이라는 상실을 거처야 합니다. 위로부터 새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세례가 이를 말해줍니다. 그러나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중심으로 살았던 이전의 삶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겠다는 서원과 약속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사람은 처음부터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경험된 지식을 기초로 해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반드시 거처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느님으로 시작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나로부터 시작해 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삶에서 죽어야 주님의 영 안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죽음은 나의 자유를 기꺼이 주님의 손에 내어 드림으로써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나를 중심으로 만든 모든 가치체계와 원칙을 바꾼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입니다. 탐욕과 이기심으로 점철된 나의 역사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바꾸는 관계의 혁명이 새역사를 쓰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의롭고 거룩하다고 믿던 체계를 완전히 바꾸는 과정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의롭게 여기던 삶을 통째로 바꾸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는 그것이 죽음과 상실의 과정이었습니다.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삶에는 이러한 변화의 과정과 변모라는 죽음을 반드시 거처야 합니다.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필립비 3, 3-8
상실과 회복, 상실이 없다면 회복도 없으며 죽음이 없다면 새로운 탄생이라는 부활도 없습니다. 하지만 새로 태어남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해도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싫어하거나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죽음인 내려감과 내려놓음, 허용과 놓아줌의 죽음이 있기까지는 새로 태어남의 이야기는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두 세계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는 창조를 통해 당신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피조물을 통하여 반사하시며, 관계를 통해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실재와 또 다른 하나는 나를 중심으로 내가 지배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고 사용하려는 독점과 소유의 나라가 있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나를 중심으로 살았던 삶을 하느님을 중심으로 바꾸는 사람이며 선택과 결단이 그 중심을 이룹니다. 그러나 한발은 이쪽에 다른 한발은 저쪽에 둘 수는 없습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성부에 대한 깨달음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괜찮아”하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나 미미합니다. 우리는 이미 아버지의 품에 있으며 아버지로부터 내가 필요한 모든 필요성을 채웁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넉넉하고 풍요로운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자에 대한 믿음도 부족합니다. 파스카의 신비, 곧 죽음과 부활, 상실과 회복, 생명의 출생과 위로부터 다시 태어남, 변화와 변모라는 회개의 삶에 대한 기초가 너무나 부족합니다. 일상의 관계 안에서 발견되는 하느님 나라와 내어주는 몸과 쏟는 피의 현장에는 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내어주시는 몸과 피의 성사에 참여한 사람은 자신을 내어주면서 하느님의 선에 참여합니다.
우리의 내면에서 일하시는 성령에 대한 믿음도 부족합니다. 역사 안에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모든 선택과 결단에 참여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영께서는 우리의 내면에서 측은한 마음으로 함께 사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일상의 관계를 돌보시는 데 반하여 눈앞의 이익과 편안함, 그리고 눈앞의 즐거움이라는 우상에 빠져 나만 챙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너와 나와 모든 피조물 안에서 선을 반사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 회개의 본질입니다.
너와 피조물을 통하여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시는 분은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너와 피조물을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식하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은 너와 피조물과 나를 통해 현존하시는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나에게 괜찮다고 말씀해 주시는 분은 나를 위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자신을 내어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의 흐름 안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며 기쁜 소식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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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http://www.ofmkorea.org/ofmkfb/525721 2023.05.04. 09:52. 이마르첼리노M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해 주시기를 기도할 것인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것인가?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이라는 신에게 뭔가를 호소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기도의 말을 건네왔습니다. 상을 받거나 벌을 받지 않기 위해, 또 우리의 목적 달성을 위해, 우리가 주도권을 가지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말을 듣게끔 부탁을 넘어 강요하듯이 기도해 왔습니다. 기도의 숫자와 재물과 희생을 셈하면서 많이 바치면 많이 받고, 적게 바치면 적게 받고, 아무것도 바치지 않으면 하나도 받지 못한다고 여기면서, 내가 바친 크기와 양에 따라 주셔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마치 나의 노력과 정성과 힘으로, 나의 업적과 공로로 하느님을 통제하려는 듯 기도해 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반대쪽으로부터도 모든 이야기를 들으셔야 했습니다. 한쪽에서는 자기 편이 이기기를 원하고 반대편에서도 자기들이 이기도록 기도합니다. 모두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굽신거리며 그렇게 해 왔습니다. 하지만 주도권을 내 손에 들고 있는 한 모든 것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것은 참으로 바보 같은 짓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의 승패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가진 주도권을 하느님께 내어드려 그분께서 우리를 도구 삼아 당신의 자비와 선이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삼위일체의 관계성 안에서 살펴보면 기도는 상호성의 관계에서 주고받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 맺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도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용이라기보다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구체적 현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을 바라고 계신지를 살피고 성령의 열매들, 곧 바오로 사도가 열거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지 않는다면 나의 기도는 겉에만 맴도는 허공에 떠 있는 말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의구심이 듭니다.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들어주는 것이라기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나에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긍정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통하여 오늘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느님이 호소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관계성 안에서 필요성을 발견하고 그 필요를 채우도록 하는 “내어주는 몸”의 구체적 움직임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움직이시어 관계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영의 현존과 하느님 나라의 현재를 경험하도록 하시는 일입니다.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실 것이다.” (요한 15,16)
썩지 않는 열매를 맺는 것은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이러한 열매들을 맺는 것과 관계가 없는 기도들은 의미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은, 썩지 않을 열매로써 하느님이 하실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썩지 않을 열매를 맺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것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죽음 없는 부활을 찾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 저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당신이 바라는 것을 바라고, 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저의 기도를 바칩니다.” 마리아의 위대한 기도와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의 기도가 이를 말해줍니다. 두 분 다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바치는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는 기도가 하느님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일깨워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초대받지 않고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우리의 관계 속에 들어오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마리아, 육신, 모태, 인간성을 가진 나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예”라고 대답하는 나의 자유로운 동의를 원하십니다.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할 때, 주님의 거룩한 영의 활동이 나를 통해 관계 안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선의 흐름이 나를 통하여 너에게로, 모든 피조물로 확산하는 것입니다.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과 같은 의지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당신이 저를 통해, 제 안에서 결정하십시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하는 절대적인 관계 맺음의 방식입니다. 역사의 예수 안에서 믿음의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이끌어주는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나의 자유와 나의 의지를 하느님의 손에 내어드리는 구체적인 믿음의 현장입니다.
기도는 내가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움직이도록 이끌어주는 영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는 거래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기도를 거래처럼 하고 있는지, 그 실상이 너무나 어둡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나 모르는 무지의 구름 같습니다. 관계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하느님께 미루고 오로지 계명 준수와 희생과 기도문에 의지하여 숫자를 셈하면서 이를 반복하고 있는지 이것이 아버지의 고통과 슬픔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한복음을 통하여 자신을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원형을 바라봅시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위격적 선의 흐름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또 얼마나 내가 그분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인지를 깊이 바라봅시다. 그리하여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흐름 안에서 살아가도록 나도 내어주는 몸으로서 선에 참여합시다. 썩지 않을 열매가 맺어지도록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드립시다.
“아버지께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그에 손에 맡기셨다.” (요한3,35)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시지는 않으신다.” (요한 8,29)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요한 10.30)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요한 12,45)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한 14,9) “그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요한 14,20)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요한 14,23)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다 나의 것이다.” (요한 16,15)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 16,32)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4) ”아버지,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 곁에서 누리던 그 영광을 아버지와 같이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 (요한 17,5) “나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것은 다 나의 것입니다.”(요한 17,10)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요한 17,21)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아버지께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주신 그 영광을 그들도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요한 17,24)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17,26)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도록 해드리고, 아버지의 나라를 너와 피조물의 관계 안에서 발견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은 주님의 영과 그 영의 활동을 간직한 이들이 바치는 관계의 혁명을 불러오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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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나에 대한 하느님의 갈망과 하느님에 대한 나의 갈망이 만남)
http://www.ofmkorea.org/ofmkfb/525988 2023.05.08. 21:00 이마르첼리노M
기도 (나에 대한 하느님의 갈망과 하느님에 대한 나의 갈망이 만남)
기도하고 싶은 갈망은 어디서 오는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목적에 결핍과 한계를 느껴서 신의 힘을 빌려 목적 달성을 하고 싶은 마음인가? 아니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감사를 드릴 필요가 있어서인가?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머물고 싶은 갈망과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영의 이끌림에 의해서인가? 기도에 대한 갈망의 동기를 성찰하는 마음은 내면의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갈망을 느낄 때 맨 먼저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머물러 있는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느님께 말을 건네기 전에 하느님의 현존 앞에 있는 상태, 즉 지금, 현재의 순간에 깨어있음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정신없이 늘어놓고 돌아서 가버리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이지, 우리가 드린 기도와 희생과 재물로 업적과 공로를 쌓아 그 대가로 하느님이 뭔가를 주셨기 때문에 그 안에서 쉬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의 필요를 다 아십니다.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6,8) 그래서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일을 하십니다. 아버지의 일은 자녀들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돌보아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꼭대기에 앉아서 우리가 드린 기도의 지향에 따라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무지에서 나온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동반하시며 우리와 동행하시고 각자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일용할 양식” 안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 없는 하느님, 피조물 없는 하느님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선의 확산은 관계의 질에서 크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관계의 질은 상호적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만큼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믿어주실까요? 하느님이 우리를 믿는 만큼 우리가 하느님을 믿을까요? 믿음에는 신뢰가 핵심입니다. 신뢰하기 위해서는 정직하고 솔직해야 합니다. 즉 깨끗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양심에 불안을 주는 거짓말과 합리화, 탓과 책임회피,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거짓된 얼굴로는 하느님을 마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순간에도 그 얼굴을 가지고 기도하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선의 흐름을 가로막았던 단절의 죄가 대부분 나만 챙기려는 탐욕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잊은 채, 계속해서 뭔가를 달라고만 보채는 아이처럼 그렇게 합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우리의 기도지향에 따라 반응하실까요? 수많은 기도의 지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기도로 하느님을 끌어내리려는 시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기도하는 이들의 현주소를 보게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하느님이 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느님이 이미 답을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을 계속해서 찾고자 하는 갈망과 동기 자체가 이미 주어진 하느님,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에 대한 감사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영께서 나의 내면에서 나와 함께 있고자 하는 갈망과 내가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갈망이 기도로 표현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기도하려는 갈망이 바람처럼 나에게 불어오지 않았다면 기도는 내 마음에 들어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갈망하듯이 하느님도 나를 갈망하십니다. 기도는 갈망과 갈망이 만나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의 중심으로부터 다른 피조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현재의 나를 바라보고 전적인 내맡김에 의해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는 나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관계 안으로 흘러가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이 애초의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그렇게 나에게 전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의 흐름 안에 있는 나는 그렇게 이미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의 관계 안에 흐르고 있는 선의 흐름이 하느님 나라의 실재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행하는 선이 하느님 선이 반사되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그렇게 참여하면서 선을 공유하고, 또 관계 안에서 상호 간에 내어주는 몸으로 하느님의 선을 반사합니다. 반사된 선을 깊이 바라보는 것, 그것이 관상하는 이들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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