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북·중 국경선 따라 걸으며 성모님께 기도하다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40731500085
입력일 2024-07-31 수정일 2024-08-09
[강우일 주교 특별기고 - 만주 벌판을 거닐다(1)]
강우일 주교(베드로·전 제주교구장)가 지난 6월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가 주관하는 중국 평화 순례를 다녀왔다. 안중근(토마스) 의사와 윤동주 시인의 흔적을 찾아 이들의 평화를 향한 열정을 배운 강 주교의 순례기 전문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투먼의 북한·중국 국경 지역에서 강우일 주교(왼쪽 두 번째)와 순례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투먼은 함경북도 남양과 맞닿은 국경도시다.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제공
안중근 의사와 윤동주 시인 흔적 따르며 평화 향한 열정 새길 여정
지난 6월 마지막 주간에 나는 오랜만에 5박6일 일정으로 중국을 여행하고 왔다.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Pax Christi Korea)라는 가톨릭 평화운동 평신도 단체가 주관하는 평화 순례의 여정에 함께 하였다.
가깝긴 하지만 중국으로 단체여행을 떠나는 것이 내게는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좀 부담으로 느껴졌다. 자신들의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평화운동을 하는 평신도 회원들을 격려하고 지원하기 위해 팍스 크리스티의 공동대표 직함을 수락하기는 했지만, 단체여행에 동행하는 일까지는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만주에 사셨던 안중근 의사와 윤동주 시인의 흔적을 찾아 걸으며 그들의 망국의 한과 평화를 향한 열정을 새기고 이어받기 위한 여행이라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일정에 백두산 등정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사실 백두산은 통일된 다음 우리 땅을 밟으며 오르고 싶었기에 특별히 가야겠다는 매력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 일반 관광여행사가 아니라 공정여행을 기획하고 도보여행에 관련된 책을 여러 권 발간해 온 국제민주연대의 최정규 작가가 안내자로 나선다니 잘못하면 아주 고달픈 여행이 될 것 같아,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건강에 문제가 생겨 입원이라도 했으면 불참할 핑계가 생기겠는데 출발일이 다가왔으나 건강상으로도 별문제가 안 생겨 꼼짝 없이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인천에서 옌지(延吉, 연길) 공항까지는 직선거리로 가면 한 시간이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인데 비행기는 북한 영공을 피해 중국 내륙 쪽으로 돌아서 가는 바람에 두 시간이나 걸렸다. 옌지가 만주의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는 도시라 그런지 국제선 여행객은 우리 말고는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옌지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위해 줄을 섰더니 제복의 중국 공무원이 사뭇 위압적인 톤으로 우리를 향해 단체는 이쪽이라며 옆쪽으로 비켜서라고 했다.
최정규 작가는 우리에게 단체 비자를 신청한 사람들은 비자가 나온 명단의 순서대로 줄을 서서 창구에 진입해야 한다며 별도의 창구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가 사회주의 국가 땅에 발을 들여놓았음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여권 검사 과정에서는 전원 특별한 문제 없이 모두 무사히 입국 수속을 마쳤다.
공항 청사를 빠져나가 밖에서 청사 건물을 보니 제일 위에 한자와 한글로 연길이라는 아주 큰 표지가 걸려있고 그 아래로 작은 글씨의 영어, 일어, 러시아어, 만주어 표기가 붙어 있었다. 옌벤조선족자치주에서는 모든 간판에 한자와 한글을 병행 표기하도록 정해져 있다고 했다. 중국 땅에서 한글 표지판을 보니 안심이 되고 푸근하게 느껴졌다.
버스를 타고 숙소 호텔로 향하는데 옌지시는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광활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독 주택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아파트 단지가 계속 이어지는데 해가 지면서 아파트 건물 벽면 둘레와 지붕까지 화려한 원색 조명으로 치장하여 중국 경제가 크게 성장하고 있음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시내 한복판에 넓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 이름이 ‘부르하통하’라고 한다. 한강보다 약간 폭이 좁은 정도다. 강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아 푸른 버드나무라는 여진족 말이 강 이름으로 남았다고 한다. 저녁 요기를 한 다음 시내 중심가에 있는 옌벤대학 쪽으로 산책 삼아 발길을 옮기니 명동 뺨치게 젊은 세대의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 젊은 여성들이 화려한 한복을 입고 대학 교문 앞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상당수의 젊은 중국 여성들이 캠퍼스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근처 상가에는 한복을 대여해 주는 가게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코로나로 한국 여행이 완전히 중단된 후 한국에 가지 않고도 옌지에서 한국적 분위기를 충분히 맛볼 수 있기에 수많은 관광객이 중국 각지에서 옌벤지역으로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 한류 덕분인지 각종 식당가와 상가가 마치 서울의 어느 동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국풍 먹거리와 술집이 넘쳐났다. 예전에는 옌벤대학 캠퍼스 안으로 산책을 할 수 있었다는데 한국 정부가 사드를 배치한 다음부터는 보안 강화를 이유로 캠퍼스 안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고 했다.
우리도 한때 사드 배치 문제로 많은 이들이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시위도 끊이지 않았으나 중국에서는 사드 배치로 인해 한국에 대해 갖고 있던 호감이 급격히 퇴색하고 한국 기업이나 한국 관광객들을 향해 아주 엄하고 까다로운 규제를 펴게 되었다고 한다. 사드 이전에는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특히 2015년 9월 3일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의 2차대전 전승절과 열병식에 참여하였을 때 중국 정부는 한국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이 전승절에는 주로 구 소연방에 속하던 국가들이 참석하는데 친 서방 친미 정부인 한국의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중국 정부에는 아주 뜻밖의 우호적인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6년부터 미군이 한국 내 사드 배치를 거론하고 한국 정부가 이를 수용할 뜻을 밝히자, 중국 정부는 격하게 반대하고 중국 진출 한국 기업과 단체들에 대한 모든 호의적 정책을 폐기하며 양국 관계가 급속히 냉각하였다. 하지만 중국 젊은이들의 정서는 이러한 정치적 정세에는 크게 좌우되지 않았는지 한류에 대한 인기는 쉽사리 식어버린 것 같지는 않았다. 첫날 저녁 우리가 묵은 호텔은 꽤 높은 빌딩인데 호텔 방도 널찍하여 땅덩어리가 큰 대륙인의 여유를 느끼게 해주었다.
중국 투먼과 북한 남양 사이 철조망으로 가로막힌 국경선을 따라 걷고 있는 강우일 주교.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제공
“남북 겨레에 관용과 평화의 기운 불어넣어 주시기를”
철조망 가로막은 북·중 국경선 걸으며 성모님께 기도하다
둘째 날 아침 일찍 우리는 두만강 기슭에 있는 투먼(图们, 도문)이라는 국경도시로 갔다. 투먼은 한반도의 제일 동북쪽 꼭대기, 토끼 머리끝에 자리하는 도시다. 두만강이란 명칭은 토문강이라고 부르는 만주족의 발음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투먼에서 본 두만강은 강폭이 50미터 정도도 채 안 되는 것 같았다. 상류로 올라가면 강폭이 훨씬 좁고 수량도 적어 걸어서 건널 수 있다고 한다. 특히 겨울이 되면 강이 완전히 얼어붙기에 건너기가 쉽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두만강 강줄기에는 국경을 감시하는 감시선이 수시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중국 쪽 두만강 기슭에는 상당한 높이의 철조망이 세워져 있어 탈북자의 월경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투먼과 맞닿아 있는 북한 땅은 ‘남양’이라는 도시인데 그곳으로 통하는 철교와 다리가 연결되어 있었다.
중국과 북한을 잇는 국경 관문이 세 군데 있는데 코로나 이후 국경이 닫힌 후 도문과 남양의 국경선은 아직 열리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중국 관광객들이 북한 땅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북한 땅을 향해 사진을 찍자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완장 찬 요원들이 쫓아와서 촬영금지를 외쳐대고 있었다. 한국 관광객을 향해서만 의도적으로 더 엄하게 규제하는 듯했다.
중국 땅에서 북한을 바라보아야 하는 내 마음이 참으로 착잡했다. 나는 잠시 철조망이 가로막은 국경선을 따라 걸으며 성모님께 기도했다. 중국과는 외교관계도 맺고 자유롭게 교류도 하는데, 같은 동포이면서 갈라선 지 80년이 다 되어도 여전히 반목하고 비난하고 적대하는 남북의 겨레에게 성모님께서 관용과 평화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우리는 투먼에서 두만강 기슭을 따라 서남쪽으로 여행을 이어갔다. 중국 쪽에는 텃밭에 옥수수나 각종 채소류를 재배하는 소농이 계속 이어지고 산에는 큰 나무와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데, 북한 쪽은 아주 소수의 농가가 드문드문 산재해 있었고 왕래하는 주민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야산에도 큰 나무로 조성된 숲은 보이지 않고 대체로 무슨 농사를 짓는지 확인은 안 되지만 키 작은 식물을 일구는 들판만 끝없이 이어졌다. 간혹 산 위에 몇 그루 솟아있는 키 큰 나무들이 마치 대머리 꼭대기에 몇 가닥 돋아난 머리칼처럼 외롭게 서 있었다.
남쪽으로 이동할수록 두만강 넘어 보이는 북한 땅은 경사가 급해지며 꽤 험한 산맥을 이루고 있어 두만강과 함께 자연스러운 국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산줄기를 타고 넘어 두만강을 건너 탈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룽징(龙井, 용정)에서 마주한 윤동주의 시 ‘십자가’
다음 목적지는 룽징이었다. 룽징은 1899년 함경도 종성에 살던 전주김씨 가문과 남씨 가문 등 총 다섯 가문 142명이 두만강을 건너와 개척한 마을이라고 한다. 옌벤조선족자치주에서도 조선인들의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로 우리말이 잘 통한다고 한다.
점심때가 되자 버스는 우리를 룽징 냉면 잘 한다는 집으로 데려갔다. 이곳 사람들은 타지에 가면 제일 생각나고 먹고 싶은 음식이 룽징식 냉면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먹어본 냉면치고는 맛이 좀 강했다. 우리가 아는 남한식 냉면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심심한 평양식 냉면도 아니었다. 우선 면의 양이 한국 냉면의 곱빼기는 되겠다 싶을 정도로 많았다. 육수를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약간 진한 색이 돌고 면도 검은 색인데 고춧가루도 뿌려져 있었으나 그리 맵지는 않았다. 한국 냉면에는 오이나 무 또는 배가 들어가나, 룽징 냉면에는 오이와 함께 배추와 다른 채소류가 풍성히 들어 있는데 나중에는 육수 밑에 가라앉아 있던 꿩고기 덩어리가 젓가락에 잡혀 올라왔다. 나도 여름이 되면 냉면을 즐겨 먹는데 그런대로 맛있게 먹었다.
시내에서 우리는 윤동주 시인이 어릴 적에 다녔다는 대성중학교(현재 룽징중학교)를 찾아갔다. 학교 정문 돌기둥에는 ‘룡정중학교’라는 교명이 새겨져 있었다. 현지 안내인이 정문 옆 수위에게 우리가 학교 내부를 방문할 수 있는지 물었는데 그때까지 열려있던 철문이 스르르 닫혔다. 최정규 작가에 의하면 사드 이전에는 아무 문제 없이 들어가서 윤동주 시인 관련 자료를 관람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한국인 출입이 금지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묵묵히 발길을 돌려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있는 밍둥춘(明东村, 명동촌)을 찾았다. 이곳에는 민족교육과 항일 독립운동의 뿌리가 된 밍둥학교와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이 학교 학생들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13일 룽징에서 열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고 한다.
동네 초입에 있는 교회 건물은 지금 전시관처럼 꾸며져 있고 간도 지역의 민족독립운동과 반일민족문화교육의 선구자인 김약연 선생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나 우리에게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관람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곳 교회는 1800년대에 캐나다 출신 장로교 선교사들이 설립하고 운영하였는데 조선인 청년들을 적극 지원하고 양성하였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 문익환 목사가 그곳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다.
밍둥춘 일각에는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보존되고 기념관으로 방문객을 맞고 있었다. 지자체에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명소로 꾸며놓은 것 같았다. 생가 마당에는 윤동주 시인의 시가 여러 편 돌판에 새겨져 있고, 건물 한 곳에는 윤동주 시인의 생애와 저작 활동과 생의 마지막을 장식한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의 수감 시절 자료를 전시해 놓았다. 마당에 새겨진 여러 시 중에 ‘십자가’라는 제목이 내 시선을 끌었다. <2회에 계속>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공동대표, 전 제주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