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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바라보는 여섯 개의 시선
김동원 시인 · 평론가
고양이의 눈과 시간
무릇 시의 내면과 영혼은 고양이를 크게 닮아있다. 고양이의 독립성과 조용한 발걸음, 그리고 응시의 눈초리는, 사뭇 시적이다. 고대 일본의 닌자(忍者)들은 고양이 눈동자의 열림 상태를 보고 시간을 예측하였다. 일본 민가에서는 아직도 ‘고양이 눈 시간’이라는 게 있다. 고양이 눈은 새벽 무렵과 해질녘에는 동공이 크게 열려 둥글게 보이다가 차츰 달걀 모양으로 갸름해진다. 정오 무렵엔 아주 가늘어져 고양이의 눈이 숫제 바늘처럼 일직선이 된다. 이런 고양이의 라이트모티프Leitmotiv에 대해 시인 보들레르는 여성에 대한 은유로, 작가 호프만은 자아로 표상한다. 보들레르의「고양이들Le Chats」에 나타난 고양이의 중층 이미지가 강유(剛柔)를 겸한 신비로운 눈동자와 꿈, 고독과 고결한 태도, 지식과 관능, 성과 속, 의식과 무의식, 침묵과 어둠의 공포 등에, 은유와 상징의 미학으로 스며든다. 그의 시가 에드거 앨런 포우의「검은 고양이」에서 영향을 받았다면, 호프만의「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의 무어는 회색 수고양이로서, “나의 자아야말로 모든 독자에게 가장 흥미로운 것”이라는 확신에 가득 차 있다. 호프만의 경우 도스토옙스키, 고골리, 발자크, 포, 바그너, 차이콥스키 등 위대한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은 일본 근대소설의 아버지인 나쓰메 소세키의「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소세키는 이 작품을 통해 고양이의 눈에 비친 우스꽝스럽고 서글픈 인간의 초상을 드러내며, 전통과 서구의 문명 충돌에서 근대 일본인의 군상과 그들의 모순을 풍자 비판한다.
한편, 나쓰메의 고양이는 1920년대 우리나라 고월 이장희에게로 이어진다.「봄은 고양이로다」가 그것이다. 이 시는 감각적이고 참신한 표현으로 여전히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후 ‘고양이’는 1930년대 서정주의「화사花蛇」에서 다시 새롭게 변용된다. 징그러운 ‘뱀’의 혓바닥과 상징은, 스무 살 여자의 ‘고양이 같은 붉은 입술’의 색정적 원죄 의식으로 형상화된다. 70년대에 와서 이가림은「갈색 머리칼의 애인의 장난」속에서 ‘고양이’를 시니컬하게 표현한다. 원초적 본능을 자극해 관능의 문을 열게 한 충동과 유혹이 그것이다. 끝내 사랑의 문을 열지 못한 젊은 애인을 향한 애무의 시, 육체의 욕망으로선, 결코 사랑의 궁극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낭만적 진실과 알레고리가 있다. 80-90년대 사이사이 고양이 시는 잠깐 털갈이를 하며 나타났다 사라진다. 2000년대 송찬호에 와서 ‘고양이’는 다시 찬란하게 부활한다. 그의 시집『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 에 소개된 시「고양이」와「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은 빼어나다. 전자가 고양이를 통해 물질문명에 잃어버린 인간 정신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쓴 철학적 동화시라면, 후자는 인간과 자연을 ‘가난과 고독’의 한 축으로 꿴 적요의 시다. 이런 견인주의자적 자세는,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궁기를 감춰두고” 마침내 “달의 찬장을 열고” “‘마음의 비린내”를 핥을 수밖엔 도리가 없다. 시 행간의 텅 빈 달의 여백은 침묵과 청빈이 주는 아름다움에 서정시가 어떻게 깊어질 수 있는지를 새삼스레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동원의 시집『깍지』(그루, 2016)에 수록된「국화꽃밭 문 옆엔 가을비가 울고 있었어요」는, 어미 고양이의 죽음을 이미지화한 비극적인 시다. 가을비와 국화, 새끼 고양이와 어둠 속 죽음을 감싼 은유는, 인간 삶과 동일시되며 다층적 이미지로 행간 속에 깊이 숨어 있다. 이 글에서는 전혀 다른 여섯 마리의 ‘고양이’가 각자의 시선으로 ‘야옹’하고 등장한다.
봄, 고양이의 신체와 감각
이장희의「나는 고양이로다」는 감각의 극치와 세련미를 드러내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고양이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묘사가 탁월하다. 그런 만큼 언어의 윤곽이 뚜렷하고 ‘고양이’의 인상이 강렬하다. 근대시의 초기 국면에서 보기 힘든 이 시에서 “미친 봄의 불길”과 같은 다이내믹한 메타포는 재기발랄하다. 고월의 내면과 봄의 충동을 고양이와 동일시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 이장희 「나는 고양이로다」전문
한 세기가 지났건만, 공감각-시각의 후각화-의 기법은 여전히 참신한 데가 있다.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과 “봄의 생기”는 고월(古月)만의 독특한 이미지로 되살아난다. 13세 나이에 일본 유학파가 된 그는, 유학 도중 만난 한 일본 소녀를 연모하다 끝내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29세의 젊은 나이로 음독자살한다. 아마 그의 음독은 5세 때 일찍 여읜 어머니의 죽음과 부친의 친일 행각이, 시인의 자기 학대와 정서 불안, 자폐와 겹쳐 자살로 치달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간은 누구나 절망 앞에서 한 번쯤 목숨의 극단을 자살로 마감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낀다. 아명 ‘량희(양희)와 ’(고)양이‘ 또한 음성학적 층위에서 묘하게 겹쳐진다.
각 2행 4연으로 된 시「봄은 고양이로다」는 1924년 5월『금성』3호에 발표된다. 이 시의 내재율과 각운(~에, ~라)은 시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정적 이미지와 동적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배치한 구성은 치밀하다. 이 시 어느 행간에 죽음의 음산함이 깃들어 있단 말인가. 은유와 직유, 의인과 활유가 혼용되어 있는 이 시에서, 봄 햇살을 핥아먹는 고양이의 섬세한 동선과 귀여움과 생기는 완벽하게 포착된다. 시 속의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빛은 충동의 수고양이 눈빛이 아니라, 간지러운 봄 아지랑이와 꽃향기에 취해 마냥 조는, 맑고 밝은 눈빛의 암코양이일 것만 같다. 보들레르의 시「만물조응」이 그렇듯, 이 시 또한 봄의 색과 빛, 향기와 소리, 신체와 기운이 하나로 어우러져 참으로 고양된 시의 분위기이다. 그리고 그럴수록 시의 배면에는 맑은 슬픔이 고양이의 울음소리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
꽃과 뱀, 그리고 고양이
「화사花蛇」는『시인부락』2호(1936년 12월 호)에 처음 발표되었다. 미당의 26세 때 출간한 첫 시집『화사집』(1941, 남만서고)의 표제시이기도 하다. 필자가「화사」를 처음 접한 건 약관의 나이, 스물세 살 무렵이다. 징그러운 ‘뱀’의 혓바닥과 ‘스무 살 여자’의 색정적 붉은 입술, 그리고 육체적 관능의 ‘고양이’ 이미지는 그야말로 하나의 전율이었다.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베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든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 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石油 먹은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크레오파트라의 피 먹은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스며라 ! 배암.
― 서정주 「화사」전문
이렇게 ‘아름다운 배암’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마냥 믿기지가 않았다. 마늘모의 대가리를 꼿꼿이 쳐든 채,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뱀의 눈깔에서, 그는 어찌 “꽃대님”의 매혹적인 색기(色氣)를 찾아냈을까. 구약성서에 나온 이래 뱀은 이브를 꼬여내는 간교함의 상징이 다.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가 찍은 사진, 알몸의 여배우 레이첼 와이즈(Rachel Weisz)와 무늬 뱀이 뒤엉킨 관능의 포즈는 뇌쇄적(惱殺的)이다. 에덴동산에서 여호와 하느님께서 뱀에게 퍼붓는 심판은 섬뜩하다. “너는 저주를 받아, 죽기까지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어야 하리라." (창세기 3:13-14)
불덩이처럼 아랫도리가 뜨거웠던 젊은 날의 나는 미당의「화사」를 통해, 원죄의식은 커녕 오히려 교활한 뱀과 간부(姦婦)의 꾐이 어찌나 황홀했던지. 그것은 추함이 아니라 오히려 추의 미(美)였으며, 욕정이 아니라 “푸른 하늘을 물어뜯는” 원시적 본능의 갈구였다. 시에서 뱀은 ‘저주’이자 ‘유혹’ 그 자체를 상징한다. 아무리 “저 놈의 대가리”를 향해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벗어나고자 하나, 끝내는 “석유石油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에 뜨거운 몸을 맡겨야 하는, 남녀 절정의 양면을 뜻한다. “정신적 육체적 방황, 혹은 보들레르적 방황”(송하선)에서 비롯된「화사」에서 미당의 초기시가 얼마나 서구적 악마주의에 탐닉했는지, 수성(獸性)에 가까운 관능적이고 육체적인, 데몬Demon의 세계에 경도해 있었는지 가늠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화사」는 그때까지 근대시에 머물렀던 한국 시단에 현대시의 출발을 선언하는 바가 있다. 즉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해 관능의 문을 열게 하고 충동과 유혹의 눈뜸을 자각케 한다. 보들레르가 추구한 암고양이의 색정을 “크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에 스미게 하는 동시에,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으로 둔갑시킨 점은, 전통의 탁월한 현대적 변용이자 절창이다.
너는 나의 고양이
이가림의「갈색 머리칼의 애인의 장난」을 무대 위에 올려놓으면, 관객은 어떻게 반응할까? 시낭송의 한 갈래인 시낭송극은 매력적인 장르임에 틀림없다. 시극이 대사와 몸짓 중심이라면, 시낭송극은 소리가 몸짓 언어에 앞서 있다. 시가 시집 속에서 뛰쳐나오면 낭송이 된다. 하여, 낭송은 소리 예술이며, 그 속성은 현장성이자 순간성이다. 시낭송은 무대 상황에 따라 순간순간 연출되는 감정의 예술이며, 그만큼 낭송가에게 몰입과 집중을 요한다. 나는 최근 상당한 진척을 이룬 1인 시낭송극에 주목한다. 시 퍼포먼스, 시무(詩舞), 집단 시낭송극은 이미 다양한 실험과 연출이 시도되어 왔다. 특별한 장시를 제외하면 1인 시낭송극은 5분 사이 압축된 공연으로 관객을 현장에서 사로잡아야 한다. 이 극의 장점은 어떤 시·공간이든 연출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복잡하게 엉킨 현재성과 감정의 문제를 씻어내어 주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높은 수준의 무대 시설과 완벽한 시 선택, 짜임새 있는 연출, 피나는 연습량만 확보된다면, 1인 시낭송극은 시가 언어 예술로만 머무는 한계를 극복해, 전혀 새로운 무대 예술로 승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무한히 조그만 질투에도 바람에도
불을 켜는 한마리 암캐이고 싶어요
당신의 입속에 발가락을 집어 넣고
당신의 입속에 긴꼬리를 집어 넣고
당신의 입속에 빨간 혀를 집어 넣고
아주 바보의 왕국에서나 있는 웃음을 웃으면서
몰래몰래 축축한 잠으로 가고 싶어요
밝은 곳에서 만져보고 싶어요 당신의
계단 그 아래 계단을 내려가
두레박줄이 닿지 않는 육체의 우물 속에
가라앉은 슬픔과 외로움을 만져보고 싶어요
항상 저의 가장 부드러운 데를 찌르며
「너는 나의 고양이야!」당신은 말하고
제 입술에 한 방울의 기쁨을 떨어뜨리지만
도대체 끝없는 바램의 끝은 무엇일까요
도대체 사랑의 얼굴은 무엇일까요
― 이가림「갈색 머리칼의 애인의 장난」전문
이가림의「갈색 머리칼의 애인의 장난」은 1인 시낭송극으론 제격이다. 이 시는 전위예술의 시로 시니컬하다. 관객으로 하여금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충동과 유혹의 시다. 이 시는 1인 시낭송극에서 주요 제재로 다뤄질 만한 사랑, 관능, 질투, 광기, 갈증과 애증 등의 극적 요소를 내포한다. 암코양이로 대변된 쾌락적 색녀 이미지는, 천 년 전이나 천 년 후에나 젊은 청춘남녀가 찾을 색정의 달콤함을, 시 속에 적나라하게 노출시킬 것이다.
시낭송극의 무대는 제주도나 그 어느 해변의 섬이 보이는 공간이 제격이다. 야경은 출렁이는 밤바다와 어울려 그대로 또 한 편의 시의 무대가 된다. 밤새 서로의 육체에 탐닉한 아름다운 젊은 신혼부부들을 홀 가득 초대해, 시「갈색 머리칼의 애인의 장난」을 1인 시낭송극으로 꾸민다면 환상이겠다.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시낭송무대 주위가 꽃밭처럼 환할 것이다. 교태를 머금은 매력적인 여성 1인 시낭송가가 무대에 오른다. 끝없는 욕망을 갈구하는 촉촉한 음성은 젊은 청춘들의 육체와 서로가 서로를 갈구한 뒤의 그 허전한 공백을 감싸 안는다. 무엇보다 이 시낭송극은 시행 속에 미처 독자가 포착하지 못한 관능의 갈망과 허무를 시낭송가가 잘 소화해 내느냐가 관건이다. 저 감미로운 사랑의 곡「New EndIess Iove」가 배경음으로 홀 안을 부드럽게 애무할 무렵, 이미 젊은 신혼부부들의 상상 속엔, 아늑한 침대 속 두 마리 암수 고양이가 되어 서로의 몸을 탐닉할지 모른다. 나는 너의 고양이, 너는 나의 죽음과 생명, 하여, 인간은 신과 악마의 사이쯤이다. “도대체 사랑의 얼굴은 무엇일까”, “두레박줄이 닿지 않는 육체의 우물”속에서 몸과 영혼은 어떤 관계이길래, 밤마다 그 신비로운 묘음이 들릴까.
고양이 철학 시간
송찬호의「고양이」와「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은 신화적, 동화적 상상력의 극점에 놓여 있다.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에 시인과 고양이와 달이 나란히 앉아, 맑은 가난을 온몸으로 터득해 가는 시골 마을의 그 쓸쓸하고 외로운 밤 정경이 나는 좋다.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지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 송찬호「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전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은 화자에겐 외롭다.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궁기”를 참는 나와 고양이는, 나란히 창가에 앉아 달을 뜯어먹으려나 보다. 이 시는 어쩜, 그 시대 가난한 민중의 메타포가 아닐까. “연신” “손을 핥고” “등을 비벼대는” “마음의 비리내를 어쩐다?” 그렇다면, 시는 곤궁한 후에 더욱 공교로워지는 법이다. (詩窮而後工. 구양수,「매성유시집서」) 그리고 “달의 찬장을 열고” 꺼낸 “접시”의 은유는 탁월한 이미지이다. 접시는 “희고 둥근 것(보름달)”으로 다시 치환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환기하는 정서는 맑은 슬픔 또는 밝은-하얀 어둠이다. 이는 고독한 실존으로서 희고 검은 고양이의 빛과도 통한다. 이어 살펴볼 작품은 그의「고양이」이다. 철학적 동화시로서 우화적 상상력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보인 이 작품은, 고양이를 통해 물질문명에 잃어버린 인간 정신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염원한다.
여기 경매에 내놓으려 하는 오래된 꽃병이 있어요
꺾은 꽃가지에서 비린내가 나지 않으면 이제 그런 건 거들떠보지도 않네요
그러니 누가 저 꽃병목에 방울을 달겠어요?
쉬잇, 지금은 고양이 철학 시간이에요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모서리 구멍을 응시하고 있네요
아마 지금은 사라져버린 사냥 시대를 생각하고 있겠지요
우리는 모두 어둠과 추위로부터 쫓겨온 무리랍니다
한때는 방 안을 뒹굴던 털실 몽상가와 잘도 놀았답니다
현기증 나는 속도의 바퀴와 아찔한 연애도 해봤구요
네발 달린 의자에 사뿐히 뛰어 올라 털실이 떠나간
털실 바구니에 들어가 때때로 달콤한 오수를 즐기지요
앗,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방 안 모서리, 손거울, 집 열쇠, 어항의 물고기가 사라지고 없어요
다그쳐 물어도 종알종알 털만 핥을 뿐 모른다 도리질만 하네요
쫑긋 귀 동그란 눈동자……, 그토록 짧은 혀로 그것들 모두 어디다 숨겼을까요
― 송찬호「고양이」전문
《쉬잇, 지금은 고양이 철학 시간이에요 앞발을 /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모서리 구멍을 응시하고 있네요 / 아마 지금은 사라져버린 사냥 시대를 생각하고 있겠지요 / 우리는 모두 어둠과 추위로부터 쫓겨온 무리랍니다》
시인은 어떻게 고양이가 철학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인간과 가까운 ‘고양이’를 등장시켜 조곤조곤 옛이야기를 은유로 풀어내는 방식은, 이 시인만의 독특한 화법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인간의 소중한 잃어버린 시간과 기억을 “고양이”를 통해 찾아낸 듯한 은밀한 독백은, 이 시대 어른들의 혼탁한 마음과 영혼을 정화하기에 충분하다. 신범순은 이 시를 두고 ‘고양이’를 문명에 길들여진 인간의 또 다른 비유로도 해석한다. 태초의 야성을 잃어버리고 물질문명에 찌들린 인간들의 허약함을, 야생을 잃어버린 집고양이의 길들여짐에 궤를 같이한다.
《앗,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방 안 모서리, 손거울, 집 열쇠, 어항의 물고기가 사라지고 없어요 / 다그쳐 물어도 종알종알 털만 핥을 뿐 모른다 도리질만 하네요》
이 시행이야말로, 고양이의 생태를 실감나게 표현한 대목이다.송찬호는 고양이라는 녀석을 은유해 현대사회를 비판하는가 하면, 제멋대로인 고양이의 생태를 동화적 발상 속에 녹여 상상한다. 틈만 나면 방안 물건을 눈 깜박할 사이에 물고 어디로 사라지고 마는 고양이의 장난을, 시인은 밉지 않게 본다. 왜냐하면, 고양이야말로 인간 생태의 철학적 문제로까지 시적 외연을 확장하는 중요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송찬호의 시세계는 자신의 삶 주변에서부터 동화적인 것을 인식하고 재발견한다. 이미 유형화된 것이나 문명의 입구에서 안내자 역할을 맡은 그러한 동화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동화로 이 시대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색실처럼 풀어낸다. 구멍을 응시하고 사라져간 시간과 시대를 생각하는 고양이의 시간은 아닌게 아니라, 철학적 시간이다. 그리고 “그토록 짧은 혀로 그것들(존재와 시간-필자주) 모두 어디다 숨겼을까”.
국화와 고양이
겨울 밤하늘 보름달이 뜨고 사위엔 고요만이 깃든 시간, 나는 산책에서 돌아와 문득 앞집 베란다를 타고 넘어가는 한 마리 검은 고양이를 보았다. 길을 가다말고 갑작스레 휘익 하고 돌아서는 순간, 나는 고양이의 눈빛과 마주치게 되었다.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 글을 쓰는 자정 무렵, 지금도 들리는 저 고양이들이 내는 아기 울음소리는 참 기기묘묘하다. 마치 죽은 혼령 같기도 하고, 침묵의 그림자 같기도 한 그것은 내개 형언할 길 없는 시상(詩想)을 가져다준다. 고요히 듣는 다는 것이 얼마나 비밀스러운지, 소리가 이토록 시의 무궁한 영감의 신호라는 것을, 전엔 크게 깨닫지 못했다. 특히 암수의 현란한 짝짓기 울음은 짜릿한 관능마저 불러일으킨다. 어둠 속 달그림자, 그리고 그 너머 감나무의 휘어진 곡선, 수코양이들의 소리는 귀기(鬼氣)가 서린 것이 음울한 색조, 그것이다.
국화꽃밭 문 옆엔 가을비가 울고 있었어요
빗물이 하늘을 물고 내려와
꽃밭에 흘러내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 저녁 앞발을 괸 채 죽어있던 어미 고양이
새끼는 빗속에 젖어 날 쳐다보고 있었는데,
국화 꽃밭 속엔 어미가 어둠 속 웅크리고 죽어 있었어요
―김동원,「국화꽃밭 문 옆엔 가을비가 울고 있었어요」전문
이 시의 착상은 그야말로 슬픈 행운이었다. 전날 밤부터 베란다 앞 국화 꽃밭에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비에 흠뻑 젖은 세 마리 고양이와 창가에서 가을비를 구경하던 내가 서로 눈이 마주친 건 오후 한 나절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 여섯 개의 동공은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다. 어미가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가 아직 오직 않아 그런가 보다, 라고 혼자 생각해 보았지만, 볕이 좋은 아침 어미 고양이와 함께 베란다 국화 꽃밭에 나와 뒹구는 녀석들이었기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나는 비가 와서 우울한 기분이 드나보다, 라고 재차 생각하면서 읽던 책을 마저 읽으려고 서재로 향했다. 저녁 어스름은 이미 창가 유리문에까지 밀려왔지만, 가을비는 금세 그칠 낌새가 아니었다.
비가 창문을 타고 내리는 밤은, 나는 촛불을 켜고 빗물이 유리문에 비치는 무늬의 신비를 좋아한다. 어룽져가는 빗방울과 그 흐름의 무질서 속에 내비친 촛불의 움직임은 참으로 시적이다. 그날도 촛불을 붙이자마자, 시마(詩魔)가 들어와 내 귓전에서 끊임없이 소곤소곤 말을 건넸다. 순간 유리문 속에 촛불이 고양이 눈빛과 한데 겹쳐 얼비친 것이 환상적이었다. 묘오한 생각이 들어, 문득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그때까지 고양이 세 마리가 빗속에서 국화 꽃밭을 보고 있지 않는가! 오싹했다. 나는 거실 문을 열고 급히 나가 보았다. 오호 애재(嗚呼哀哉)라! 국화 꽃밭 속에 어미 고양이가 죽어 있는 게 아닌가. 빗물이 하늘의 슬픔을 물고 내려와 꽃밭에 흘려보내는 것도 모르고, 그 어미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죽어 있었다. 하여, 시「국화꽃밭 문 옆엔 가을비가 울고 있었어요」(4시집『깍지』. 2016, 그루)는 그렇게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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