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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선진 민주주의를 꿈구며---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다
80년대에 밀양 시골에서
그 어떤 책보다 나에게 양식의 자극을 준 것은 한계레 신문이었다.
말 머리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리영희 선생님의
붓끝이 교사인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전국교사협의에 임원이 되어 전국을 뛰어다닐 때의
정보 역시 한겨레 신문이 아니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자유인><전환시대의 논리><8억인과의 대화> 등
선생님의 책을 독파하고 얼마나 통쾌하고 가슴 뛰었는지 모른다.
기득권 들의 칼끝이 내 가슴 가까이로 향해 올 때
나는 이 책들을 묶어서 다락방 깊숙이 숨기고
참 교육을 외치며, 몇몇 시골 고을에서 농사용 트럭에 선생님들을 태우고 북치며 <님을 위한 행진곡>을 목 놓아 불렀던 그 날이 그립고 아련하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당당히 가슴에 <교장직선>이라고 검게 쓴 리본을 달고
교육 현장에서 참교육을 목 놓아 부르고, 기득권들의 항복을 받아내어, 전국에서 처음으로 교장을 나의 손으로 뽑는 쾌감을 맛 본지 어연 40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있다.
그 때 까까머리 중학생중 사)경남통일농업협의회를 이끈 사무국장 )최재수군이 보고 싶다.
최군은 부산대학교에 학생회 간부로서 학생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김대중 때, 고향 밀양으로 되돌와, 나와 함께 통일 농업 운동을 열심히 했던 친구였다. 북한에 비닐하우스를 보급하여 비닐 하우스로 농사 짓은 마을의 농가 소득이 그렇치 않은 마을과 크게 차이가 나서 남한으 자본 주의를 비판 받는 일도 있었다. 밀양 딸기 모종을 북한에 가져가서 딸기 재배 기술도 전수하고, 우리 볍씨도 북한으로 보내어 북한의 농업을 변화시켜 보려고 무척이나 노략했던 중학교 때 첫 제자였다.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서, 정부 보조에 힘입어 10억 원을 모금하여 콩 두부 공장을 만들어서 북한 어린이 건강을 돌보기도 했던 통일 일꾼이었다.
밀양 예림면에 초등학교 폐교를 임대 받아 폐교를 통일 농업 전진 기지로 삼아 가열 차게 통일 농업을 실천했던 시절이었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남,북한과의 분위가 좋았다.
교통사고로 갑자기 제자를 잃고, 그 장례식에 북한 김정일 위원장 이름으로 조화가 오기도 했다. 아마 정몽헌 회장 영결식 다음으로는 국내 인사 중 2번째로 알고 있다.
추석 때 고향 친구들과 낚시를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동기 3명과 함께 저세상으로 떠나고, 몇 사람은 장애를 입었고, 한사람만 온전하여, 현재 부산일보 기자로 근무하고 있다.
그 친구들이 보고 싶다. 그 때 사고를 당하지 않았으면 큰 일을 했을 것이다. 중학교 때 첫 제자들이었다.
오래 된 이야기이지만 여름 방학이면 모여서 연극을 준비하여, 각 초등학교를 순회하면서 농촌 계몽 연극을 선보여 주민들에게는 박수를 받았지만 항상 경찰 정보과 형사들이 따라다니면서 말렸다. 그 때 내가 트럭이 있었기 때문에 저녁마다 이 학교 저 학교로 무대를 싣고 다녔다.
한번은 의료보험 체불을 연극 소재로 하여 의료보험을 제 때 못 내는 농민들의 소뿔에 압류 딱지를 붙이는 억울한 내용으로 연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밀양 의료보험 조합에서 난리가 났든 적도 있었다.
강촌향후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회지를 발간하였는데 밀양 경찰서 정보가 세어나가 회지를 배포 해 보지도 못하고 전부 압수당했던 적도 있었다. 회지 발행 건으로 제자들을 경찰에 연행되어 문제를 삼으려는 것을 내가 찾아가서 선처해 달라고 해서 아무문제 없이 회지만 빼앗기고 무마 된 일도 있었다.
제자들 중 상당수가 서울 부산 등으로 대학 진학을 하면 대부분 운동권학생으로 되돌아 왔다. 졸업 후에도 민주운동의 투사가 되어서 서울, 부산 등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친한 제자 중에 한명은 부인이 민노총 사무국장을 지내다가 폭우에 목숨을 잃은 부인 의 문상을 서울 까지 갔던적도 있었다.
전두환, 노태우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추억이 될지 모르지만 그때는 주변 사람들이 많이 걱정을 하기도 했다.
이영희 선생의 글을 정리하다 보니, 그 때 그 친구들이 모두 보고 싶어진다. 비록 작은 일일지 모르지만 나름 민주주의 씨앗을 심었다고 자부하고 싶다.
이영희 선생님은 2010년 12월 5일 하늘 나라로 떠나셨다.
그 때 이영희 선생의 평전을 꼼꼼히 읽고 쓰 두었던 글을 다시 다듬어 봤다.
시인 고은은 회갑 기념 문집에 이렇게 썼다.
<사상의 은사
시대의 선구자
60년대 70년대 80년대 대표적 지성
불 얼음
우리들의 전위와 후방>
리영희는 1929년 12월2일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나 삭주군 외동면 대관동에서 자랐다. 아버지 이근극은 영림서 직원이었고 어머니 최희저는 지주의 딸이었다.
리영희는 그 당시는 드문 유치원 교육까지 받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면장을 지낸 할아버지는 지역사회에서 개명한 유지였고, 어머니는 벽동군의 거부로 알려진 천석꾼의 딸이어서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었다.
그외 조상들은 대대로 변방의 하급직 무관이었다.
대관면의 수재로 소문나 있었다고 한다
불과 4년 반 동안 나치 지배를 받았던 프랑스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인 약13 만 명을 재판장에 세워 사형 집행하였고, 800명을 종신 강제 노동형, 2,700여명 등 무려 5만여 명을 처벌하였다.
일제 침략을 15년간 받았던 중국국민당 정부는 역시 전쟁 뒤, 반민족 세력 3만 8,000여 명을 기소하여 사형 포함 1만5,000여 명을 처벌 하였다.
우리는 해방 이후 친일 세력을 어떻게 처벌 하였던가 여기서부터 대한민국의 역사는 꼬이기 시작하였다.
친일의 뿌리는 깊고도 깊어서 지금도 정권만 바뀌면 고개를 처들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뜻있는 애국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특히나 교육계에 뿌리내리고 있는 친일 부역자에 대해서 반드시 단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리영희는 학비가 면제되고 숙식을 비롯한 경비 일체를 국가에서 부담한다는 <국립해양대학>창설 신입생 모집 공고를 보고 1947년 1월 항해과에 입학하게 된다. 해양대학에서의 성적은 중간 정도였다.
리영희는 스스로 한양대학에 4년간 다니면서 시간을 낭비하였다고했다. 7년간 6.25속에서 통역 장교로 있으면서 배웠다는 것은 권총 사격 뿐이었다고 했다. 선생은 권총을 매우 잘 쏘았다.
백범 김구가 친일 세력의 군인 안두희에게 암살되고 국민장을 치루는 군산시의 추모식에 참석하여 추모가를 부르며 통곡하였다.
<오호 여기
발구르며 우는 소리
지금 저기
아우성치며 우는소리
하늘도 땅도 울고
바다조차 우는소리
끝없이 우는소리
임이여 가십니까?
임이여 가십니까
이 겨레 나갈 길이
어지럽고 아득해도
임이 계시옴에 든든한 양 믿었더니
두 조각 갈라진 땅 그대로 버리고서
천고의 한을 품고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40년이 지난 후에도 그 추도가의 가사와 곡을 잊지 않음은 김구 선생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크고 깊었던 탓이었다.
1950년 3월에 국립해양 대학을 졸업하였다.
친구 부친이 교장으로 있는 경북 안동소재 공립중학교 영어 교사로 취직하게 된다. 준교사로 발령받아서 5학년 영어 담임을 맡는다. 대학교 때 영어에 소질이 있었기에 가르치는 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3개월 뒤 6.25가 일어나 “유엔군 연락 장교단 모집 광고”를 보니 특별히 영어 교사를 우대한다는 내용에 호감이 가서 지원하게 되어 통역 장교로 7년간 복무하면서 통역관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소령으로 예편하여 1957년 하숙집 아주머니의 중매로 제주 처녀 윤영자를 만나서 결혼한다.
예편 1개월 전에 <합동통신> 입사 시험에 합격하여 외신 기자로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된다.
해양대 입학이나, 군 통역 장교로 갈 때처럼 기자 생활도 우연한 기회에 맞게 된다.
결혼후 부산 양정의 8평짜리 집에서 노모를 모시고 어렵게 신 살림을 하는 데 변소에서 연론사 기자 모집 광고를 보고 응시하게 된다.
응시생 273명가운데 5명을 뽑는데 꼴찌로 합격하였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운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승만의 폭정을 보며 변혁의 시대정신에 눈을 뜨게 된다.
가난한 살림을 살다가 낳은 첫 아이를 잃게 되는 불운을 겪기도하였다.
평소의 생활신조가 <검소한 생활에 높은 도덕적 추구 였다>-Simple Life, High Thinking-
그는 원래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글쓰기에 대해서 정규 교육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나이 30세가 되어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를 구입해서 독학으로 맞춤법과 글쓰는 법을 익혔다.
이승만 정권 말기에 국내 사정을 정확히 분석하여 <워싱턴포스트지>에 익명으로 편집국장 앞으로 기고문을 보내게 된다. 이것이 <워싱턴포스트>와 인연이 시작 된것이었다..
이승만의 정권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미국, 미국에 영향을 미치는 큰 언론 매체와 맺게된 인연으로,
1959년부터 1961년까지<워싱턴 포스티지>의 익명<서울 통신원>의 통신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영희의 고정 칼럼으로 실명이 오른 것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쓰려진 후부터였다.
당시 미국 언론은 한국에는 주재 기자가 없고 일본에 파견한 주일 특파원을 통해서 정보를 얻었는데 리영희 서울 통신원익명으로 보낸 국내 정세의 분석 등으로 미국이 한국에 대한 정책, 4.19를 통한 이승만의 거취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59년에 <플브라이트>장학 계획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회사를 사직하고 미국으로 가게 된다.
미국에서 6개월간 엄청남 문화적 쇼크를 받고, 하와이 <한국독립운동 단체>를 방문하여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진실을 알고 충격에 빠지게 된다.
귀로에 일본 도쿄에 들러서 다시 한번 문화 충격에 빠지게 된다. 특히나 그 당시 국내에는 2층 짜리 서점도 없었는데, 도쿄에는 5~6층 짜리 큰 빌딩에 수십만 권의 책이 놓여 있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도쿄 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구입하였는데, 님웨일스의 <아리랑의 노래>도 샀다. 내용을 안 것은 아니고 <아리랑>이란 단어에 익숙하여 샀는데, 이 책을 통하여 공산 혁명에 눈뜨, 중국 혁명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마르크 블로크으 말에도 감명을 받았다. “진리를 사랑하는자는 진리를 추구 할 뿐 아니라 반드시 이를 옹호해야 하며, 생활속에서 그 진리에 복무 해야 한다.
4.19 혁명 때 <워싱턴 포스트>특파원 <카이즈 비치>의 취재와 기사 작성을 돕는데 하루 종일 신들린 사람처럼 살았다. 그렇게 신나는 경험은 평생 처음이었다.
”동적 에너지의 집중적 표현이 혁명“이라고 했다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자유는 인간 존재의 전부이며 그 본질이다. 본질을 부정 당했거나 박탈 당한 상대는 자유가 아닐 뿐 아니라 <인간>자체가 아니다. <자유인>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라 할 수 있다.
4.19는 우리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시민 혁명이다. 186명의 사상자와 6026명의 부상자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른 끝에 비로소 시민 혁명을 이룬 것이다.
리영희는, “얕은 재주나 술수는 우직한 성실성만 못하다”는 말을 평생의 격언으로 삼으면서 살았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가 “사상의 은사”로 부르게 된 리영희는 그의 미친 정도의 일에 대한 집념과 열정이 있었고, 여기에 가족의 희생이 뒤 따렀다.
65세가 되어서야 수도꼭지에 온수가 나오는 집에서 살 수 있을 만큼 빈한한 삶을 살았다.
카마르크스가 한참 <자본론>을 쓰고 있을 때 집에 양식이 떨어지자 그의 어머니가 “얘야<자본론>만 쓸게 아니라 ”자본“도 좀 구해 오려무나라고 했다는 비화가 있다.
상처 입은 조개가 내출혈을 통해 진주를 빚어낸다
사상범으로 투옥 되어, 1964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년 말 까지 보냈다. 복도에 일제 강점기에 설치된 스팀 장치를 철거 시켰다. 방한 시설이라고는 얇은 이불이 고작 이었다. 실내는 영하 4~5도가 되었다. 겨울 감방에서 동상이 걸린 10개의 발가락에서 피를 짜내는 일이 일과가 되었다.
최전방 1,000고지에서도 동상이 걸리지 않았는데 정치적 사상적 이유로 감옥에 갇혀 동상에 걸리니 나라를 잘 못 타고난 죄이거나 시대를 잘못 타고난 죄를 한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제 강점기 그들이 우리 말 성까지 뺏앗아 갔지만 감옥에서 펜과 종이를 거두지 않아, 한용운은 서대문 형무소에서<조선독립의 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홍명희<임꺽정>을 썼다.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동양평화론>
,최남선은 마포형무소에서 <자열서>를 쓰며 친일을 변명하였다. 그래서 시인 김남주는“펜도 없고 종이도 없는 자유 대한의 감옥에서 살기 보다는 차라리 고대의 노예로, 중세의 농노로, 일제 치하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고 절규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이세상에 사는 한 사회적 악과 싸워서 이겨야 할 것이지 불의에 정복 되어서는 안된다. 위험을 무렵쓰고 괴로운 싸움으로 살 것이지 사회의 불의에서 도피하여 안일과 한가로움 속으로 물러서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청년들이 톨스토이나 타고르가 되기보다는 콜럼버스나 안중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20년을 사귀어야 그 사람을 왠 만큼 알았다고 생각하고, 극한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벗이라고 할 때는 30년쯤 사귄 사람을 말한다. 적어도 20년을 두고 봐야 사람을 알 수 있고, 30년 쯤 험난한 행보를 같이 해야 믿을 만한 벗이라고 생각하다는 리영희만의 친구관을 피력했다.
참 지식인은 (비판)을 생명으로 한다. “비판은 (시)와 (비)를 (반)으로 쪼개어 보여 준다는 뜻이다.
지식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진리를 밝히고, 진리를 억압하는 권력구조를 비판해야 한다고 믿었다. 지식인이 가진 힘이란 이성적인 사고와 진리에 대한 믿음과 용기 뿐이라고 생각했다. 비판 할 줄 모르는 지식인은 육체적 (고자)와 같다고, 일괄하며 사슬 푸른 전두환 때도 한겨레 신무을 통해 한치의 붓을 꺽지 않았다.
학자. 언론인 중에 리영희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는 양심과 진실을 속이는 자들이다. 양심을 속이고 진실을 왜곡하는 이들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느냐는 것이다.
이영희는, 신문종이를 만들어 내는 신문인들이 감히 언론인을 참칭 할 때, 그들을 (언롱인)이라는 호칭으로 경멸해 왔다.
우익은 이권으로 뭉치고 좌익은 이념으로 모이지만, 동시에 우익은 이권 분배의 크기로 분열하고, 좌익은 이념의 지나친 정밀화. 세밀화에 집착하는 “작음”의 고질적 아집 때문에 망한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이다.
<우익은 이권의 분배에 따라 뭉치거나 헤어지고, 좌익은 이념의 세분화에 따라 모이거나 분열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80년 그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로 방공법으로 2년형을 살고 출소하기도 했다.
한겨레신문은 1988년 2월25일 국민주 5만9000여명의 창간 기금 50억을 모금했으며 같은해 9월 발전기금(목표 100억원)모금에 나서 89년 5월15일에 창간 일주년 기념일에 목표액을 초과한 115억원을 모금 하게 되었다.
이 때 나는 시골 학교 선생이었고 나도 국민주에 가입하여 한겨레 신문의 애독자가 되었다. 리영희 교수가 논설고문으로 있을 때 한겨레 신문은 살아있는 신문이었다. 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1974년 자유언론투쟁에 앞섰다가 추방된 임재정, 이병주, 정태기, 리영희 4사람이 강남의 어느 대중 사우나탕에서 목욕을 한 후 맥주를 마시면서 기획 된 것이 오늘의 <한겨레신문이다>이다.
1988년 5월15일에 한겨레 신문이 창간되었다.
리영희는 남명 조식을 많이 닮았다고 하였고,
<그리운 김구 선생>의 글에서 인상 깊은 일화가 있다.
전기가 부족하여 남포불이나 촛불이 조명의 주종을 이루던 때에, 친일파나, 극좌 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던 험악한 때에 주연이 베풀어졌는데, 갑작기 전기불이 나갔다. 자석은 혼란에 빠졌다. 곧 전기불이 들어 왔는데, 좌석이 모두 텅비어 있었다. 거의가 방 밖으로 티어나가고 없었고, 밥상 밑으로 몸을 숨기거나, 피한 이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김구선생만은 홀로 그 자리에 태연하게 앉아 있더라는 것이었다. 김구다운 면모였다.
리영희는, 80년 5월의 전두환의 광주 시민 학살은 독일 나치 권력집단의 유대인 학살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고 일괄했다.
최근에 리박스쿨의 국회교육위원회의 상임위원회에서 대표 손효숙은 전두환을 옹호하는 말언으로 질타를 받은 적이 있다.
수많은 광주 시민을 죽인 전두환은 반드시 사형시켜야 했음이 나의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리영희 선생님의 제자 결혼식 주례사에서
매사에 정확하고 성실하고 섬세한 사람이 선이 굵고 멀리 볼 수 있는 것이다. 결정적 순간의 큰 일에서 의견 차이가 생긴다면 신랑은 반드시 신부의 의견을 따르기 바랍니다. 이것은 인생의 선배로서 경험적으로 드리는 충고입니다.
1999년 9월에 출판한<반세기의 신화-휴전선 남북한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에서의 그의 소견은 40여년의 관찰과 연구의 결과로 나는 북한에는 남한 만큼의“악”이 있고 남한 만큼의 “선”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찬 가지로, 남한에는 북한 만큼의“선”이 있는 반면, 북한 만큼의 “악”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지적하는데도 서슴치 않는다.
<대화>의 출판 기념일에“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 왔다고 했다.
리영희 서재에는 오래전부터 백범 김구의 오언절구 붓 글씨 한편(복사본)이 걸려 있다. 백범이 통일정부 수립 협의차 북행하기 전에 쓴 서산대사의 시다.
<(답설야중거) 눈길을 걸을 때
(불수호란행) 흐트러지게 걷지 마라
(금일아행적) 내가 걷는 발자국이
(수작후인정) 뒤에 오는 이의 길이 될 것이다.>
자서전 <대화>의 말미에
<족한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 ((지족즉불태))라는 성현들의 가르침은 지금 바로 나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말을 남겼다.>
봄 누에는 죽어서야 실 뽑기를 거치고/촛불은 제가 되어서야 비로소 마른다는 중국 당 말의 (무제시)
깨어 있는 영혼은 세월이 스며들지 않는다.-리영희의 생 제문에서 윗 글을 남기기도 했다.
리영희의 사랑방에는 장일순이 희갑연에 기념으로 써준 휘호가 걸려 있었다.
<(한매춘심)> 매화는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저자(김삼웅)가 평전을 준비하고 있다고하자 손사래를 치면서 백지에 이른 문구를 썼다
<(성문과정)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으면
(군자치지)군자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스승이란 가르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배우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람들의 선입견을 깨뜨렸고, 사람들의 잠을 깨웠다. 한마디로 리영희는 일깨우는 사람이었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 “생각의 스승”으로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휼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스승이란 우리에게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 우리를 생각케 하는 모든 존재에게 부여 할 수 있는 이름이다.
임진왜란 대 의병도 퇴계의 후학보다는 남명의 후학에서 훨씬 많이 배출되었다. 선생의 역할은 퇴계보다 남명선생에 더 가깝지 않나 생각 한다.
2010년 8월 27일 서울 연희동 큰 아들 자택에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과의 대담에서 <이명박 정부는 미국의 노예 정권이야, 이승만 정권도 이러진 않았어 미국에 큰 소리 좀 쳤다고, 헛 소리를 가끔하면서도---->라고 일갈 하였다.
리영희 선생은 나의 30대 젊을 때 나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미친 참 스승이었다.
이명박, 박근혜를 거쳐 오면서 나는 대한미국의 민주주의가 이렇게 퇴보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배웠다.
이재명 대통령의 민주주의 발전을 지켜보겠다. 민주주의 원칙은 정의가 강물처럼 흘르러 한다.
정치권력, 언론권력, 검찰권력, 교육 권력 등등이 국민 주권주의를 바탕으로 국민으로 부터나왔을 때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고 확신한다.
민주주의란 제 발로 찾아오지 않음이 역사의 증명이다. 선현 들과 앞서간 사람들의, 피와 목숨과 희생의 댓가만큼 뒤 따라가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향유 할 수 있는 선진 민주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4.19. 김주열, 6.10의 이한열, 박종철, 촛불혁명, 가까이는 빛의 혁명 및 그 눈보라치는 남태령 고개에서 농민트랙타 시위를 지켜 준, 젊은 이 들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한다..
40년 전에 감동 깊게 읽었던 리영희 선생의 평전을 다시 정리하면서 고향을 위하여,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치열하게 싸웠지만 불행이도 먼저가 몇몇 제자들의 생명이 헛되지 않도록, 나에게 주어 진 생명의 푸른 초불을 높이 들고 앞서나가고자 한다.
그리고 희망과 미래가 보장 된 민ㅜ 대한민국을 꿈꾸어 본다.
2025. 7.11 여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