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심(下心)의 실천
중안 조상진
칠십 나이를 바라보는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동년배의 한 친구가 자신의 현재 처지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던 이야기가 의미심장하게 클로즈업된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이었으니 서로 그동안의 삶에 대한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야 친구야 요즘 어떻게 지내는 거야?”라고 묻자 “나는 요즘 3중 인생을 살고 있다.”라고 불쑥 내뱉는 말에 다시 나는 “너 옛날에 고관도 지냈는데 무슨 소리야?”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가 마음속에 있는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2개월 전, 특별히 하는 일이 없고 용돈도 보탤 겸 하여 도로변에 비치된 교차로 신문 구인란에서 관리소장 채용 광고에 응하였다. 30년을 공직사회에서 관료로 지냈으므로 조직, 행정 등 업무는 달통하였고 틈틈이 배워온 소방, 승강기 등 기술업무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다. 게다가 법정업무도 상당한 경험을 갖고 있으니 집합건물 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민원들을 처리할 실력도 겸비하였다. 드디어 면접을 받으라는 통지를 받고 현장 관리소에 갔다. 면담 주관자는 까칠하게 보이는 조금 젊은 여성이었고 이 아파트 관리단 회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런데 근무조건으로 소장이 경비원을 겸직하고 매일 쓰레기 분리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무 인원은 미화원 1명과 소장 1명이 전부이고 급여는 매월 200만 원이며 차후 인상도 가능하다는 말을 덧붙인다.
망 칠십의 나이에 월 200만 원의 추가수입은 그런대로 나쁘지 않고 경비원이 아니고 소장이라는 직책도 있으니 최소한의 체면유지는 가능하기 때문에 근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요즘 아침 8시에 아파트 관리사무소로 출근하여 하루를 시작한다는 말과 함께 그는 빙긋이 웃는다. 1개 동 나 홀로 아파트이니 사무소에는 소장 책상 1개와 사무용 장비, 그리고 비상대비용 전자기기들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출근하면 우선, 사무실 점등과 함께 일과를 점검하고 소장의 자리에서 혼자 커피 한 잔을 마신다. 그리고 첫 순서로 쓰레기 분리수거장을 향하여 작업용 장갑을 끼고 절단용 커트 칼을 챙겨 밖으로 나선다. 건축 구조상 쓰레기 분리장은 건물 뒤쪽에 위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아파트는 건물 전면에 위치해 있다, 그러니 작업 모습이 모두 노출되므로 혹시나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쳐다보면 체면이 우습게 될 수도 있지 않은가.
5종류의 오물 분리를 위한 세팅은 그런대로 문제가 없었으나 비교적 부피가 큰 종이 상자와 폐휴지 등이 무질서하게 쌓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의 경우에도 그런 현상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특별한 문제로 여기지 않고, 매일 밤사이에 버려진 크고 작은 종이 상자들에 대하여 납작하게 펴서 쌓는 정도의 작업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의 작업방식에 회장은 불만이었나 보다. 현장에 나오더니 작업을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도 한 마디, “어차피 쓰레기장인데 더 이상 다르게 정리해도 별 의미가 없지 않은가요?”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더 이상 말이 없기에 인정했나 싶어서 안심한 후 그날은 무사히 퇴근을 하였다. 솔직히 그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정도의 작업도 자존심을 많이 죽인 것이고 나름대로 상당한 근로정신을 발휘하였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건물 한쪽 구석의 잘 안 보이는 장소에서의 작업도 아니고 아파트단지의 전면이 아닌가. 그리고 명색이 소장이라는 사람이 경비원들이나 하는 쓰레기 분리를 한다는 현실이 쉽게 용인될 수 있는 경우도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념도 잠시, 집에 퇴근하여 휴식을 취하려는 시간인데 휴대폰의 신호음이 울린다. 심상치 않은 직감에 따라 열어보니 근무시간에 그에게 불만을 보였던 회장이었다. 채용조건으로 제시한 약속을 왜 이행하지 않는가, 우리 아파트는 젊은 부부들이 대부분 살고 있어서 단지 환경에 예민하다. 폐휴지 처리가 너무 지저분하다, 좀 더 보기 좋게 정리해라, 아니면 그만두어도 좋다고 신경질 말투로 내뱉는다.
지적한 내용은 이해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쓰레기장은 쓰레기장일 뿐이다. 마치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분을 많이 바른들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그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고, 전면에 위치한 쓰레기장을 측면이나 뒷면으로 옮기면 건물 미관도 더 나아질 것이 아닌가.
그리고 쓰레기 분리를 전담하는 경비원을 별도로 채용하지는 않고 소장 1명에게 모두 떠넘기려는 행위는 일방적인 갑질이 되는 것이다. 하여간 그는 근로계약상 ‘을’이므로 약자로서 자신의 생각을 모두 ‘갑’에게 표시할 수는 없다. 다음 날 그는 출근하여 관리단 임원 1명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보다 연상이고 남성이라 그런지 소장의 입장을 두둔해주고 관리단 운영이 현재 비정상이며 회장은 정당한 절차 없이 직위를 행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잘 참고 근무하라고 위로도 잊지 않는다.
그러면 그의 사정은 어떠한가. 30대에는 유명 정치인의 비서관을 역임했고 40대 이후에는 중앙행정기관에서 국장을 역임하였다. 공직 퇴임 후에는 지방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제자 학생들도 많다.
공부도 할 만큼 했고 상당한 사회 경험도 쌓을 만큼 쌓았다. 먹고살기가 힘든 상황도 아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지금 아파트단지에서 하류 인생처럼 근무하고 눈치를 살펴야 하는가.
하여간, 출근해서 다시 쓰레기 분리장에 나가 작업을 하고 있는데 회장이 또 찾아왔다. 앞으로 어떻게 만족스러운 작업을 보여줄 수 있겠냐고 노골적으로 하인 취급을 한다. 어제 집에서 여러 가지 생각한 것처럼 항의를 하려다가 일단 참으면서 대안을 제시하였다. 오늘 시청에서 폐휴지 수거차량이 와서 모두 실어가면 이 공간이 비워지게 될 것이니 그 상태에서 다른 정리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하며 직접 충돌을 피하였다. 예정대로 수거차량이 도착했기에 쓰레기장 바닥이 깨끗할 정도로 수집하기를 강조하였고 텅 빈 바닥을 바라보면서 또 밤사이 버려질 폐상자와 폐휴지들을 어떻게 차곡차곡 정리할 것인지를 구상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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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분리수거장으로 왔더니 예상대로 잡다한 종이 쓰레기들이 버려져 있다, 먼저 아파트 창문들에서 볼 때 미관저해를 최소화하는 방향과 공간을 만들고 펴진 상자들을 먼저 각도를 유지하면서 차곡차곡 쌓으며 중심선을 잡고 그 사이사이에 폐휴지들을 채워가다 보니 원래의 공간도 절반으로 줄었고 빈틈없이 수평으로 쌓인 모양은 그런대로 정돈된 제단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날도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귀가 준비를 하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받아보니 회장이었고 또 무슨 지적이라도 받을까 긴장하였는데, “오늘 너무 고생하였어요, 분리수거장이 아주 깨끗해졌어요, 칭찬해주고 싶어서 전화했어요.”라는 것이다. 그 역시 새롭게 분리작업을 해놓고 보니 전보다 훨씬 정리된 느낌이 들었지만 인정하는 칭찬을 들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도 어김없이 출근하자마자 오고 가는 시선들을 의식하지 않고 분리작업부터 시작하였다.
칭찬받으면 고래도 춤을 춘다고 하니 7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의 능력에 비하여 적은 급여이고 전직 경력에 비교하여 너무 바닥인생으로 보이기는 한다. 그리고 이력서를 낮은 신분으로 위장하였다고 실토하고, 그 가족과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근무지를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 3중 인생을 살고 있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에게 단언하여 말을 하였다. “내 친구야 너무 멋있다. 너는 이제 철이 들었구나. 나는 아직도 위만 쳐다보고 하심(下心)의 묘미를 모르는 철부지이니 나 자신이 오히려 부끄럽다.”라고. 우리 둘은 환하게 웃으면서 가득 부은 막걸리 잔을 힘차게 부딪쳤다.
첫댓글
노년의 3중 인생!
짝짝짝~~~ 박수 갈채를 보냅니다.
고관을 지냈던 친구의 새로운 도전(?)을 멋있다고 응원하는 작가.
막걸리 잔을 부딪힐 때 찰랑찰랑 흔들리는 막걸리가 보입니다.
그 자리 합석하여 구수한 입담을 들어보고 싶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