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門下) 30년
이동하(소설가)
내가 먼발치에서나마 김동리 선생님을 처음 뵈온 것은 1963년도던가 아니면 그 이듬해 봄이었다. 신라예술제 행사의 하나였던 학생백일장대회에서였다. 장소는 경주의 김유신장군릉이었다고 기억된다. 월탄 선생님을 비롯 미당, 목월, 동리 선생님 등 문단 원로들께서 대거 심사위원으로 초빙되어 오셨던 것이다. 비록 먼발치에서, 그것도 처음 대면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나는 선생들의 면면을 거의 다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얼굴들이야말로 각급 국어교과서들을 비롯, 내가 뒤적거렸던 책들 속에서부터 이제 막 걸어나온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눈부신 느낌이었다. 백일장 참가는 난생 처음 해보는 일이었고, 이를 위해 털털거리는 고물 자전거를 끌고 대구에서 그곳까지 백팔십 리 길을 달려갔으며, 그러고도 그 흔한 장려상 하나 챙기지 못한 쓸쓸한 귀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이 날의 기억이 너무나 신선한 것으로 가슴에 남았다. 대작가 김동리를 멀리서나마 직접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두어 해 뒤인 1965년 1월 하순경이었다. 나는 동리 선생님 앞에 앉아 있었다. 감명 깊게 읽은 소설이 무어냐고 선생님은 물으셨고, 몹시 긴장한 나는 얼결에 [죄와 벌]이라고 답변했다. 서라벌예술초급대학 문예창작과 구두시험장이었다. 주인공 이름이 뭐냐, 어떤 대목이 감동적이었느냐, 중심사상은 무어라고 생각하느냐 등등 선생님은 계속 질문하셨지만 나는 거의 한 가지도 신통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였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영 답답하셨던지, 주인공 이름부터 주제에 이르기까지, 선생님 특유의 그 정력적인 강의를 해주셨다. 그러니까 나는 구두시험장에서부터 이미 착실하게 동리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 제자였던 셈이다. 또래들에 비해 서너 해나 지각하고서도 굳이 진학 결심을 한 것도 동리 선생님 문하에 들겠다는 일념에서였던 것이다.
그렇게 소망했던 사제의 연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선생님 앞에만 가면 나는 늘 주눅이 들어버리곤 하였다. 강의실에서나 문단에서나, 또는 자택으로 찾아뵈올 때나 매양 나는 기를 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나의 20대는 미아리 제4강의실과, 지붕 밑 도서관에서 <황토기> <무녀도> 등을 읽으며 빠져 들었던 감동을 빼고는 별로 얘기할 것이 없다. 동리가 대지주라면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은 그의 소작농에 불과하다던, 그 무렵 사석에서 목월 선생님이 하시던 말씀이 기억난다. 어쨌건 선생님의 문학적 성가는 나를 기죽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까치소리>를 발표하신 직후니까 1966년인가 7년도쯤 되리라. 이 소설은 서구의 실존주의 문학을 이미 넘어선 것이다, 라고 선생님은 강의시간에 아주 정색을 하고 자평하신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속으로 미소 지었지만, 선생님의 그 당당한 태도 역시 매사에 소심한 나로서는 항용 열등감을 느끼게 하였다. 문학적 신념만이 아니다. 남들은 시류에 민감하게 처신할 때도 선생님은 늘 당당한 보수우익이셨다. 무슨 말을 해야 대학생들이 박수를 칠지 나도 안다며, 제자들의 드센 비난조차도 괘념치 않으시던 분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나를 가장 주눅 들게 만든 것은 선생님의 그 많은 영특한 제자들의 존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문자 그대로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늘 선생님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에 소심하고 촌스러운 나로서는 매양 자격지심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의 관심과 사랑으로부터 늘 소외받고 있다는 의식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재학시절에는 더러 어리석은 투정도 했던 것 같다. 첫 직장이었던 [월간문학] 기자시절에는 동리 선생님이 직장 상관(주간)이기도 하셨으나 나는 타고난 무능으로 역시 점수를 따지 못하였다. 지방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모처럼 별러서 선생님 댁을 더러 찾기도 했지만, 술도 시원찮고 말재주도 없는 한심한 제자라 벙어리처럼 멍청하게 앉았다가 슬그머니 일어서는 게 고작이었다. 낯 뜨거운 고백이지만 필경에는, 자네 이제 그만 가보시게 하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서야 화들짝 놀라 황망히 물러난 적도 없지 않았다.
만 5년의 투병기간 중 나는 고작 1년에 한 차례 정도 찾아가 뵈었다. 못나고 소심한 제자로서는 선생님이 기왕에도 늘 저만큼 멀게만 생각되었지만, 그제는 아예 손닿을 수 없이 아득한 거리 밖으로 나앉으신 것 같아 매번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었다. 장지에서 누군가 말했다. 앞으로 동하 형이 능참봉 하십시오! 선생님의 유택이 마침 내가 사는 분당 뒷동네여서 나온 농이었다. 이나마 다행스런 인연 아니냐, 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어쩌면 생전보다 선생님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현대문학,19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