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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텃밭시학상│심사평
현대시의 전통과
새로움
너머와 여기를 잇는 시에는 ‘나’에 대한 특별한 언어와 감정이 들어 있다. 그것은 시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말과 삶, 앎과 느낌의 방법이다. 현대시는 전통에 기반한 모더니티를 추구한다. 모더니티는 전통을 새롭게 파악하고 수용하는 계기이자 모티브로서, 전통과 결코 적대적이지 않다. 대대적待對的이고 상의상관적相依相關的이다. 하여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 같은 이는 “가장 최근의 것이 가장 낡은 것이며, 가장 닳고 닳은 주제가 가장 미친 듯이 새로운 것”이라고 언급한다. 그런가 하면, ‘도광산채韜光鏟彩’란 말이 있다. ‘빛을 감추고 무늬를 대패로 깎아 숨긴다’는 뜻이다. 이처럼 저마다의 명검에는 빛과 무늬를 고유한 방식으로 숨겨 보전하는 저들만의 전통과 새로움이 있다. 좋은 시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다시 현대시의 전통과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텃밭시학상이 올해로 그 두 번째를 맞는다. 최근 2년 이내 발간한 시집 가운데 역량 있는 시인에게 주어지는 이 상은 우리 시단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리라 믿는다. 이런 기대와 함께 마지막 심사 대상은 정범효의 시집『꽃인지 나비인지』(그루, 2023), 김병해의 시집 『오늘은 너에게로 진다』(시인동네, 2023), 최백규의 시집 『네가 울어서 꽃이 진다』(창비, 2022) 등 세 권이다.
정범효의 경우, 전통 서정시의 방식으로 고전의 정신과 태도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의 시는 관수觀水(유술有術 : 맹자, 「진심상」)의 시법으로 내면의 진정성이 돋보인다. 정신과 자연, 역사와 종교(불교), 시간과 자아를 본위로 한 그리움의 정서라든가, 살핌[內省]을 모티프로 하고 있는 시에서 자연(화엄사의 홍매화, 뿌리 뽑힌 나무, 계곡의 물소리와 바위 속 등)은 모두 법이자 문(法—文)이다. [꽃인지 나비인지/ 면허증/ 찰나의 보석(“움켜쥔 손/ 놓아버리면/ 내가 바로 바다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토함산 석굴암/ 팰구나무(“누구를 기다리는지, 무심한/ 허공에 길을 내고 있다”)] 등은 수작이다. 다만 평이한 구성과 발화의 방식, 고전—교양의 현대적 수용, 형상 사유와 미적 실현의 문제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김병해의 경우, 나와 너(그)의 이음Fügung을 표방한 서정시의 세계와 존재 방식을 다루고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내 안의 나’로 수렴되며, 구심력을 형성한다. 다른 한편으로, 서정적 단시의 단아함과 묘비명 같은 말이 인상적이다. “기우듬한/ 몸이// 먼저 알고/ 미리 가는 것이다”(「세월」), “꽃은/ 자신이 스스로 세운 비석”(「꽃」) “찔리기도 전에/ 살점이 먼저 아프다”(「생선」) 등이 그것. 그리고 「변신에 대한 몽상]에서 보여주는 말법의 묘는 ‘봉놋다’, ‘눙치다’, ‘시틋한’, ‘애시’, ‘가녘’, ‘순긋’ 등 순우리말 사용으로 이어진다. 그의 시에서 ‘감옥’, ‘수렁’, ‘적소謫所’ 등이 환기하는 내재성immanence의 측면은 이항異項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주어진다. 고통과 사랑, 심신心身의 경계, 슬픔과 아픔의 현상(학)을 표방하는 ‘꽃’의 사유 이미지는 시와 삶에 대한 하나의 조건이며 질문이다. 치밀한 구성과 다양한 변주, 특히 서정적 단시가 갖는 메리트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경계와 극한을 좀더 세련되고 다이내믹하게 밀고 나가는 상상과 에너지, 미적 장치가 수반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수상자로 선정된 최백규의 경우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에다, 사실과 환상, 서정과 현실, 전통과 새로움이 교차하는 뉴트로newtro 감성이 돋보인다. 음악적(랩적) 요소의 기입에다 과학적 사고, 여름의 빛과 그림자에 대한 바리에떼Variété, 미적 감각 등은 미래파 이후 새로운 서정시를 선취하는 감이 있다. 이번 시집의 저변에는 발화자인 ‘나의 성장 과정’이나, ‘나는 왜 시를 쓰게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이 가로놓여 있다. 수상작인「향」 외 4편의 시(돌의 흉곽 / 대서 / 수목한계 / 불시착)에서 서시 격에 해당하는 「향」은 “향냄새가 가시지 않는 시절”, 1992년 여름에 대한 기억과 상상이 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태어난 날의 슬픔을 노래한 욥Job, 아니 최백규에게 ‘향’은 사라지는 방식으로 발현되는 피지스physis, 하나의 사건이다. 그 향에는 모든 아픔과 상처, 사랑과 죽음이 내재해 있다. 실존과 현실을 가로지르며, ‘그’에 대한 기억과 위로가 담긴 「돌의 흉곽」은 유마힐의 마음처럼 말미의 진술(“나는 강바닥으로 가라앉으며/ 그의 심장을 머언 바다로 밀어주고 싶었다”)이 인상적이다. 한편, 「대서」의 경우, 여름의 절정에서 갖게 되는 마음의 국면이 ‘먹빛’과 ‘먼 잠’의 이미지로 표출되어 있으며, 「수목한계」는 수목의 한계와 사랑의 한계를, 「불시착」은 불가능성, 아니 다른 가능성을 개성적인 언어와 이미지로 묘파하고 있다. 이 경우 ‘불(시착)’과 ‘폐(허)’는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말하는, 부정의 생성이다. 이외에도 「네가 울어 꽃이 진다」, 「열대야」 등도 기억에 남는다. 바라기는, 현대시의 전통과 새로움의 내적 관계를 보다 심도있게 천착하여, 진중한 태도로 견고한 감성과 타자의 윤리 등을 모색하였으면 한다. 수상을 축하하며 이후의 시를 기대한다. 아쉽게도 선에 들지 못한 분들에겐 다음 기회를 엿보기로 한다.
심사위원|이하석, 김상환(글)
제2회 텃밭시학상│수상작
향 외 4편
―1992년 여름
최백규
멀리 금호강 너머로 불꽃을 터뜨리는 학생들이 떼 지어 몰려다녔다
공장에서 돌아온 영은 늦은 저녁상을 물린 뒤 주말 오후에 시내 쪽으로 나가볼 궁리를 하며 마루에 누워 있었다 태운 편지를 먹고 자란 하중도의 유채꽃마저 긴 숨을 내쉬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왠지 계속해서 젖어가는 밤이 있었다
막차에서 내린 선은 만삭의 몸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채 지지 않은 유채꽃을 들여다보다 꽤 근사한 기분에 눈물이 돌았다 만기가 다가오는 적금을 깨서라도 약을 늘려야겠다 생각하며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영이 언제쯤 돌아올 수 있을지 물어보았다
곧 태어날 내가 꿈결에 아버지를 부르면 수화기를 든 영이 돌아보았다
아랫목에는 그의 늙은 아버지만이 잠들어 있었는데
아직 누구 하나 놓아주지 못했지만 아무리 씻어도 빈손에서 향냄새가 가시지 않는 시절이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다
돌의 흉곽
호스피스 병동 한구석에 누운 그는 강바닥에 묻힌 돌이었다
병실마다 선산이었다
지금 가슴을 열지 않으면 암세포가 파고든다는데 수술비는 삼촌이 도박으로 탕진한 지 오래였다
사채업자들이 드나들기 시작하자 그는 자루 안에서 질질 끌려가는 것처럼 웅크렸다 여생 동안 돈에 묶여 물속으로 유기된 셈이다
언젠가 나는 물 바깥에서 배를 뒤집은 돌과 눈을 맞추며 앉아 있었고
어느 날 일터에서 귀가한 그는 가족에게 바람을 쐬러 계곡으로 떠나자 했다 주말 저녁이라 차들이 밀려나와 아주 어두워서야 황량한 저수지에라도 닿을 수 있었다
그맘때가 돌아오면 수면에 돌을 던지고 환하게 번져 나가던 그의 웃음이 어른댄다
쓰러진 후부터 그는 매일 관을 내리듯 떨어진 꽃만 주웠다 어릴 적 어머니와 지키던 고물상 터로 돌아온 듯이 천막을 견디는 흉곽이 너울거렸다
나는 강바닥으로 가라앉으며
그의 심장을 머언 바다로 밀어주고 싶었다
대서
해 지고 흰나비가 스치면 초상을 치른다 일러준 사람이
흰나비로
날아가고
수국도 없이 초여름을 지났을 거다
개수대에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서 있자니
해는 채 지지 않아 허공도 먹빛을 견디는 듯하다
낙과가 거뭇해지고
더위에 지친 가축이 초원에 쓰러지듯이
미래니
사랑이니 하는 말들은
느지막한 발자국이나 눈가를 비비는 표정에
가깝고
영정을 들고서 걸었던 바람도 숨죽여
돌아보게 된다
이부자리 위 흰머리를 헤아리다 보면 먼 잠을 떠도는 흰나비들
손을 건네면 아직 닿을 것 같다
수목한계
우리에게 사랑은 새를 기르는 일보다 어려웠다
꿈 바깥에서도 너는 늘 나무라 적고 발음한 후 정말 그것으로 자라는 듯했다 그런 너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나도 온전히 숲을 이루거나 그 아래 수목장 된 것 같았다 매일 꿈마다 너와 누워 있는 장례였다 시들지 않은 손들이 묵묵히 얼굴을 쓸어가고 있었다
부수다 만 유리온실처럼 여전히 살갗이 눈부시고 따사로웠다
돌아누운 등을 끌어안고서
아직은 아무 일도 피어나지 않을 거라 말해 주었다
불시착
활주로 끝에 소년이 서 있다
그어버릴게 번지듯 퍼뜨려지자 우리는 영원하지 않을 거야 우리 없이 살아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어갈 거야 시동을 걸자 걷다가 질주하자 손을 흔들며 위험하도록 소리치면서
꿈에서 친구를 죽이고 자퇴하겠다는 애인을 달래다가
머리를 넘긴 채 식물원과 미술관을 걷는다
손차양을 한 아이의 뒤통수를 쓰다듬고 있자면
몇백 년 전 당신과 이곳에 다녀간 내가
가지런히 덮을 옷을 지어 살고 있다
대공원과 경복궁에 나비가 있다는데 꽃밖에 보이지 않고
여름을 밟는 걸음이
곱다
이 순간을 위해서 그렇게도 많은 친구들의 무덤이 필요했던 거구나
등을 맞대고 자야 하는 자취방에는
마른 욕실이 있다
절룩거려도 깨진 적 없는 당신의 무릎을 안으며 흰 발을 만져주던 일이 오래다
그런 삶
아무도 우리를 해치지 않는
국경을 허물어 폭설 속에서 한없이 연착되고 싶었다
평일 내내 손등으로 떨어지는 찬물을 맞으며 그릇만 씻었다
서걱거리는 우유를 시리얼에 붓고
종이 위에 그려진 얼음을 손수건으로 훔치기도 하며
마룻바닥을 쓸다가
발목에 혈관이 뛰어 징그러워 잘 봐둬 나중엔 뛰고 싶어도 못 뛸 때가 온다
늙은 개를 오래 발음하듯이
살이 나간 선잠을 접던 당신과
휴일의 숙소는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백사장 같다 헐거워진 몸에서 나도 모르게 떠내려가면 어떻게 하나
악력이 희미해지는 계절이 와도 여전히 손을 잡고 있을까
아무 걱정 없이
석양에 물든 아이들이 철길 건너편으로 날아가는데 전선 위 늘어선 새떼
맑은 죽이 끓어 넘친다 몇 년 후에 다시 사랑하자 했을 때 다음 생에도 이미 폐허라는 걸 알았다
꽃을 먹고 죽으면 나비로 태어난다는 미신을 믿었다
오래된 착륙이었다
시……
좋아하세요?
시를 쓴 지 10년이 흘렀습니다.
유명해지고 싶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저를 믿어 주는 사람들이 생겨서 조금 신이 나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저에게 속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떠나야 할 것들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라져야 할 것들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까지 올 생각이 아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너무 멀리 걸어와 다시 돌아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제가 걷고 있는 길을 함께 걸어갈 동료들을 믿기로 했습니다. 지금껏 저를 믿고 기다려 주신 부모님, 스승님, 친구들에게 모든 사랑을 드립니다.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를 호명해 주신 이하석, 김상환 심사위원 선생님과 《텃밭시학》에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저는 시를 정말로 좋아합니다.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영광의 시대가 언제였는지 물어본다면 지금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제2회 텃밭시학상│작품론
당신은 온몸으로
꽃의 영원을 추구하는 장르
—최백규론
김준현 평론가
시인의 첫 시집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라는 제목은 하강의 이미지를 공통분모로 삼고 있는 두 상황을 인과로 연결하고 있다. 인간의 정서가 자연의 순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믿음은 언제나 이처럼 불가능한 문장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시 장르는 도약과 여백이 필연적으로 내장된 장르로서, 언제나 불가능한 모든 언술의 종착지가 되어 왔다.
다만, 여기 최백규 시인의 시 앞에서는 다르게 생각하기로 한다. ‘너의 울음의 순간’과 ‘꽃이 지는 순간’이 단지 우연에 의해 겹쳐진 거라면, 1992년의 여름과 2023년의 여름이 삶의 비선형적 속성을 암시하지 않는 현재형의 감각이라면, 과 같은 방식으로. 떨어진 두 대상 사이를 잇는 행위는 때로 수십만 광년은 떨어져 있는 별들을 이어 별자리를 만드는 것과 같은 시선의 권능/무력함과 닮았다. 최백규 시인의 시는 바로 그 권능과 무력함이라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두 극단을 동시에 함의하는 이상한 열도熱度를 품고 있다. 피상적인 접근일 수 있지만, 최백규 시인의 시가 지속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계절인 ‘여름’을 떠올려본다. 시인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바 있는 문장 “여름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진짜 더운 7-8월의 여름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1년 내내 여름에 갇혀있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여름이 온도와 습도로서의 여름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의 여름일 수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시집을 보면 일 년 내내 꽃이 펴도 여름이고 눈이 와도 여름이면서 계속 여름에 갇혀있는 느낌이 들거든요.”를 배후로 두고 시인의 세계관을 살펴보자.
멀리 금호강 너머로 불꽃을 터뜨리는 학생들이 떼 지어 몰려다녔다
공장에서 돌아온 영은 늦은 저녁상을 물린 뒤 주말 오후에 시내 쪽으로 나가볼 궁리를 하며 마루에 누워 있었다 태운 편지를 먹고 자란 하중도의 유채꽃마저 긴 숨을 내쉬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왠지 계속해서 젖어가는 밤이 있었다
막차에서 내린 선은 만삭의 몸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채 지지 않은 유채꽃을 들여다보다 꽤 근사한 기분에 눈물이 돌았다 만기가 다가오는 적금을 깨서라도 약을 늘려야겠다 생각하며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영이 언제쯤 돌아올 수 있을지 물어보았다
곧 태어날 내가 꿈결에 아버지를 부르면 수화기를 든 영이 돌아보았다
아랫목에는 그의 늙은 아버지만이 잠들어 있었는데
아직 누구 하나 놓아주지 못했지만 아무리 씻어도 빈손에서 향냄새가 가시지 않는 시절이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다
―「향―1992년 여름」 전문
‘여름’ 하면 떠올리는 관성적 이미지를 떠오르는 대로 도출·나열해보면 강렬한 빛, 매미의 울음, 초록, 땀, 맨살, 운동성, 파랑, 다채多彩와 같은 것들일 텐데, 이 모든 것들은 대개 어떤 절정에 상응하는 말로서 치환되곤 한다. 즉 일종의 변곡점으로서, 이후의 하강을 예비하고 있는 계절로서 이 ‘여름’은 숱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상기한 이미지들로 전경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최백규 시인의 시를 읽는 많은 이들은 ‘한국의 여름을 대표하는 시인이 되겠다’는 시인의 선언에 따라 시인의 시를 손쉽게 오독誤讀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저 선언의 이면에서 시는 시인의 선언 이상을 보여주며 자율적으로 중량감을 획득한다. 시인은 모두의 의식을 배반하고, 여름이 지닌 모든 관성-중력을 완전히 무시하는 방식으로, ‘여름’을 재정의하면서 세계를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백규 시인의 시 속에서, 여름은 끝나지 않는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작업한 그의 첫 시집은 여름에 영속성을 부여하는 작업의 결과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인데, 그의 시 속에서는 이를테면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상승도 하강도 웃는 것도 우는 것도 대구도 서울도 기쁨도 슬픔도 회복도 아픔도 모두 ‘여름’이다. ‘유채꽃’의 입장에서 이 ‘여름’은 개화의 시기가 아니라 낙화의 시기이며 파국破局의 시기이다. “채 지지 않은 유채꽃”과 “만삭滿朔”은 동일한 정서적 자장 안에서 일종의 바통 터치를 하듯 연결된다. 한 생명의 죽음으로 인해 가능한 생명처럼, 일종의 승계와도 같이. 시인은 과잉의 생명력으로 흘러넘칠 여름의 숱한 식물들을 지나쳐 “채 지지 않은 유채꽃”을 보고 있다. 마치 세계를 관조하는 것처럼 보는 이 시선은, “곧 태어날”이라는 수사를 통해 개연성을 얻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서 인용한 인터뷰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시인의 여름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여름이 아니라 “감정적으로의 여름”이다. 숱한 언술을 통해 시 속의 공간이 이 세계(“금호강” “만기가 다가오는 적금”)임을, 이 세계의 핍진성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름”이 시·공간을 초월하며 확장되는 힘은 “영”과 “선”으로 표상되는 감정으로부터 발원하는 것이다. 이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화자의 부모지만, 부성父性과 모성母性의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롭다. 한 생명을 품고 낳고 기르는 데서 올 어떤 불안과 생계가 생과 사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는 점에서 ‘1992년 여름’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음에도 회상에 기대지 않는 방식으로 과거를 환기하는 힘은 ‘나’의 탄생 이전을 바라보는 눈과 “채 지지 않은 유채꽃을” 바라보는 눈이 동일하다는 데서 온다. 지극히 개인사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싶으면서도, 막상 시 속에서 ‘나’의 자리는 시인으로부터 꽤 멀리 있다. “빈손에서 향냄새가 가시지 않는”에서, 나는 “빈손”을 ‘빈소’로 오독했는데, 이 둘을 나누는 음운 ‘ㄴ’의 존재가 삶과 죽음 사이를 가르는 지극히 얇은 경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시공을 건너뛰듯 연聯/緣을 건너뛰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다”라는 마지막 문장이 이를 확신하게 했거니와, 이 오독의 또 다른 근거는 어쩌면 「돌의 흉곽」, 「대서」와 같은 시들과의 관계성으로부터 왔을지도 모르겠다.
호스피스 병동 한구석에 누운 그는 강바닥에 묻힌 돌이었다
병실마다 선산이었다
지금 가슴을 열지 않으면 암세포가 파고든다는데 수술비는 삼촌이 도박으로 탕진한 지 오래였다
사채업자들이 드나들기 시작하자 그는 자루 안에서 질질 끌려가는 것처럼 웅크렸다 여생 동안 돈에 묶여 물속으로 유기된 셈이다
언젠가 나는 물 바깥에서 배를 뒤집은 돌과 눈을 맞추며 앉아 있었고
어느 날 일터에서 귀가한 그는 가족에게 바람을 쐬러 계곡으로 떠나자 했다 주말 저녁이라 차들이 밀려 나와 아주 어두워서야 황량한 저수지에라도 닿을 수 있었다
그맘때가 돌아오면 수면에 돌을 던지고 환하게 번져 나가던 그의 웃음이 어른댄다
쓰러진 후부터 그는 매일 관을 내리듯 떨어진 꽃만 주웠다 어릴 적 어머니와 지키던 고물상 터로 돌아온 듯이 천막을 견디는 흉곽이 너울거렸다
나는 강바닥으로 가라앉으며
그의 심장을 머언 바다로 밀어주고 싶었다
―「돌의 흉곽」 전문
해 지고 흰나비가 스치면 초상을 치른다 일러준 사람이
흰나비로
날아가고
수국도 없이 초여름을 지났을 거다
개수대에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서 있자니
해는 채 지지 않아 허공도 먹빛을 견디는 듯하다
낙과가 거뭇해지고
더위에 지친 가축이 초원에 쓰러지듯이
미래니
사랑이니 하는 말들은
느지막한 발자국이나 눈가를 비비는 표정에
가깝고
영정을 들고서 걸었던 바람도 숨죽여
돌아보게 된다
이부자리 위 흰머리를 헤아리다 보면 먼 잠을 떠도는 흰나비들
손을 건네면 아직 닿을 것 같다
―「대서」 전문
조상의 무덤 또는 그 무덤이 있는 산을 ‘선산先山’이라 한다. “병실마다 선산이었다”라는 문장에 그대로 대입해보면 이 ‘병’은 한 개별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누대로부터 이어져 온 역사라 할 수 있다. 하강의 이미지는 여기서도 계속되는데, 이를테면 앞서의 꽃이 ‘지는 일’과 같이, ‘그’는 “돈에 묶여 물속으로 유기”되고, “나는 강바닥으로 가라앉”는 풍경이 등장한다. “해는 채 지지 않아 허공도 먹빛을 견디는 듯하다”는 문장은 앞서의 “채 지지 않은 유채꽃”과 같이, 제 이후에 올 ‘미래’ ‘사랑’을 위해, 그들의 손에 제 남은 온기를 전해주기 위해 남아있는 것과 같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다’
채 지지 않았다고 믿으며, 어떻게든 연결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이건 먼저와 나중을 잇는 역사가 아니라 하강하는 자들의 연대다. “그는 (…) 관을 내리듯 떨어진 꽃”을 줍고 있으며 ‘나’는 “그의 심장을 머언 바다로 밀어주고 싶”어 한다. ‘죽음’을 함의한 이들이 제 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순간들-아픔이 밀려오는 순간들. 제 무게만큼 가라앉아 떠오르지 못하고 외부 세계를 견뎌야 하는 수없이 많은 ‘돌’의 처지. 더 이상 유동하지 않는 물. “황량한 저수지”와 같은 삶의 면면들을 옮기던 화자는 참았던 목소리를 터뜨리듯 마지막에 등장해 “머언 바다”를 제시한다. 그곳은 끊임없이 유동하는, 운동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운동은, 「대서」에서 죽음 이후에야 가능한 어떤 무게-살아서는 불가능했던 무게인 ‘흰나비’의 무게로 전환된다. ‘돌’로 형상화된 삶의 무게와 반대 항에 놓여있는 게 ‘흰나비’가 아닐까. “흰나비”의 시간은 기어이 “해 지고” 나서야 오는 시간이며 “초상을 치”를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십사절기 중의 열두 번째 시기인 ‘대서’는 본격적인 더위의 시간이므로, 시인의 여름을 구성하는 중심축은 어쩌면 여기-“영정을 들고서 걸었던 바람”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사랑은 새를 기르는 일보다 어려웠다
꿈 바깥에서도 너는 늘 나무라 적고 발음한 후 정말 그것으로 자라는 듯했다 그런 너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나도 온전히 숲을 이루거나 그 아래 수목장 된 것 같았다 매일 꿈마다 너와 누워 있는 장례였다 시들지 않은 손들이 묵묵히 얼굴을 쓸어가고 있었다
부수다 만 유리온실처럼 여전히 살갗이 눈부시고 따사로웠다
돌아누운 등을 끌어안고서
아직은 아무 일도 피어나지 않을 거라 말해주었다
―「수목 한계」 전문
활주로 끝에 소년이 서 있다
그어버릴 게 번지듯 퍼뜨려지자 우리는 영원하지 않을 거야 우리 없이 살아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어갈 거야 시동을 걸자 걷다가 질주하자 손을 흔들며 위험하도록 소리치면서
꿈에서 친구를 죽이고 자퇴하겠다는 애인을 달래다가
머리를 넘긴 채 식물원과 미술관을 걷는다
손차양을 한 아이의 뒤통수를 쓰다듬고 있자면
몇 백 년 전 당신과 이곳에 다녀간 내가
가지런히 덮을 옷을 지어 살고 있다
대공원과 경복궁에 나비가 있다는데 꽃밖에 보이지 않고
여름을 밟는 걸음이
곱다
이 순간을 위해서 그렇게도 많은 친구들의 무덤이 필요했던 거구나
등을 맞대고 자야 하는 자취방에는
마른 욕실이 있다
절룩거려도 깨진 적 없는 당신의 무릎을 안으며 흰 발을 만져주던 일이 오래다
그런 삶
아무도 우리를 해치지 않는
국경을 허물어 폭설 속에서 한없이 연착되고 싶었다
평일 내내 손등으로 떨어지는 찬물을 맞으며 그릇만 씻었다
서걱거리는 우유를 시리얼에 붓고
종이 위에 그려진 얼음을 손수건으로 훔치기도 하며
마룻바닥을 쓸다가
발목에 혈관이 뛰어 징그러워 잘 봐둬 나중엔 뛰고 싶어도 못 뛸 때가 온다
늙은 개를 오래 발음하듯이
살이 나간 선잠을 접던 당신과
휴일의 숙소는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백사장 같다 헐거워진 몸에서 나도 모르게 떠내려가면 어떻게 하나
악력이 희미해지는 계절이 와도 여전히 손을 잡고 있을까
아무 걱정 없이
석양에 물든 아이들이 철길 건너편으로 날아가는데 전선 위 늘어선 새떼
맑은 죽이 끓어 넘친다 몇 년 후에 다시 사랑하자 했을 때 다음 생에도 이미 폐허라는 걸 알았다
꽃을 먹고 죽으면 나비로 태어난다는 미신을 믿었다
오래된 착륙이었다
―「불시착」 전문
얼마 전 내가 거주하는 이 지역의 한 박물관에 전시된 유골을 보았다. 삼국시대 이전의 한 임당 고분에서 출토된, 3-5세로 추정되는 한 아이의 유골이었는데 그 근처에 있는 다양한 부장품과 귀물들로 미루어 압독국의 한 왕자였다는 설이 유력했다. 내 눈길을 끈 것은 그 옆에 함께 순장殉葬된 유모였다. 15세 정도로 추정된다는 아이의 유모. 어쩌면 자연의 순리로 인한 죽음 옆 그렇지 않은 죽음이 함께하는 일. 지금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지만 이와 같은 의식을 차치하고 두 사람이 함께하는 죽음이라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춰 생각해보자. 풍습(인습에 더 가까운 것이지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주고자 하는 마음은 어디서 발원하는 것일까?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그 이후를 지켜보고자 하는 마음은 아닐까.
많은 ‘장례’ 가운데서도 ‘수목장’은 “정말 그것으로 자라는” 실감을 얻게 만든다. 사후에도 여전히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산 자들 (남은 이들)에게 더없이 아름다운 믿음을 갖게 만든다. 유골이 섞인 흙의 영양을 물적 토대로 삼아 성장하는 나무들이 저마다의 높이에 이르러 빛과 그늘을 가르고 독특한 ‘시공간’―숲을 형성하는 일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러나 이 시의 제목인 수목 한계樹木限界―‘지역의 환경 변화에 따라 교목이 자라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는 한계선’라는―의 뜻을 반영하듯, 시 안에도 인위적인 한계선인 ‘유리온실’이 등장한다. 다만 여기서 이 한계의 범주를 좀 더 넓게 설정해보면,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세계―일어나지 않은 일 “매일 꿈마다 너와 누워 있는 장례였다”는 죽음에 대한 선행 학습이 지니는 필연적 한계가 아닌가 싶다. 고통이나 절망, 좌절에 기대는 경험적 사실은 사실 산 자들의 것이며, 이를 치유하기 위해 죽은 자를 이 세상에 붙들어놓고 싶은 마음이 수목장과 같은 게 아닐까. 사실 죽은 자들의 평화와 안식은 “부수다 만 유리온실처럼 여전히 살갗이 눈부시고 따사로”운 것이 아닐까. 시의 마지막 문장 “아직은 아무 일도 피어나지 않을 거라 말해주었다”는 문장에서 다시 ‘꽃’의 이미지가 발생하는 것은 어쩌면 시인의 시집을 관통하는 이미저리인지도 모른다. ‘꽃’은 특정한 몇몇 단어의 원관념이라기보다는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의 한 총체인지도 모른다. 시를 쓰기 전에 이미 내면화된 것―입에 붙어버린 것.
이 ‘꽃’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은 ‘꽃’과 거의 흡사한 무게를 지닌 ‘나비’다. “먼 잠을 떠도는 흰나비들”이 “흰머리”―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어떤 징후로 발현되었던 ‘대서’ 이후 “꽃을 먹고 죽으면 나비로 태어난다는 미신을 믿”는 마음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때 ‘꽃’은 착륙이 지연된 존재다. 다르게 말하면 “국경을 허물어 폭설 속에서 한없이 연착되고 싶”은 소망의 형상화다. 지상에 채 닿지 않고 다른 존재로 전이되는 이 과정은 다분히 윤회에 기반하고 있으며 ‘나비’는 ‘꽃’에 없었던 이동의 자유를 얻는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여전히 전생이었던 ‘꽃’을 기억하고, 다가가는 존재로 읽힌다. “악력이 희미해지는 계절이 와도 여전히 손을 잡고 있”는 마음 같은 것. 꿀을 빨아 제 욕망을 채우는 게 아니라 ‘꽃’과 ‘꽃’의 교배를 가능하게 하고 끝내는 ‘꽃’처럼 죽는 존재.
사무엘 벤체트리트의 영화 「아스팔트」(한국어판 제목은 「마카담 스토리」)의 포스터에 “모든 시작은 불시착”이라는 문구가 있다. 여섯 명의 인물―전혀 모르는 두 사람이 만나는 과정을 그린 세 개의 에피소드가 교차되는 이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할머니와 우주비행사의 만남이다. 우주비행사 ‘존 멕켄지’는 우주에 있던 미국인이며 착륙 과정에서 말 그대로 프랑스의 한 아파트 옥상으로 ‘불시착’한다. 나사NASA에서 존 멕켄지를 데리러 올 때까지 그는 이 아랍 이민자 출신의 외로운 할머니의 집에 머물며, 함께 지내고 헤어진다. 맛있는 음식과 자장가를 통해 짧지만 강렬한 교감과 연대, 위로의 순간을 보낸 이들은 사실 각자 불어와 영어로 이야기하고 있어 손쉽고 간단한 소통밖에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존이 영어로 부른 자장가를 들으며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할머니는 존에게 쿠스쿠스라는 음식을 만들어 주며 따스한 눈으로 바라본다. 영화에서도 선연하게 드러나지만, 도입부에서 밝혔던 언어의 권능/무력은 힘겨우면 힘겨울수록 더 간절하며, 더 생생하게 빛을 발한다. 결국 모든 꽃의 죽음은 사실 ‘불시착’이 아닌가. 갑작스럽게 시작되는 관계 그리고 헤어짐이 아닌가. 제가 죽을 자리를 미리 봐둔다는 말이란, 사실 불가능한 말이 아닌가. 죽음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도착하는 것이다.
시인의 언어가 지연시키고자 하는 것―행간을 통해 “오래 발음”하는 일은 모두 이 ‘꽃’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무라 적고 발음한 후 정말 그것으로 자라는” 이 감각과 “늙은 개를 오래 발음”하는 일 사이의 이 발음發音이, 시에서는 어떤 대상을 자기 내부로 들이는 의례로 읽히는 것 또한 어쩌면 같은 맥락이 아닐까. 일종의 연습. 이 소리의 울림과 파장은 외부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 향하는 확성기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건 어떤 절망이나 슬픔과 같이 청승맞고 처연한 감정의 확장이 아니라, 어떤 직접적인 위로의 말―시인의 시편 전반에서 계속되는 어떤 안심의 표현들 : “아직은 아무 일도 피어나지 않을 거라 말해주었다” “그런 삶 / 아무도 우리를 해치지 않는” “아무 걱정 없이”와 같이, ‘죽음’을 함의하고 있음에도 무해하고 안전한 세계가 바로 여기임을, 시인의 시임을, 끊임없이 주문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자리를 빌려 어떤 소망―기원을 담아 시집의 제목을 다시 읽어본다. 시인은 결코 “네가 울”지 않기를 바란다고, 그리하여 ‘꽃’의 자리가 영원하기를 바란다고.
♥ 김준현_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시) 2015년,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동시), 2020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평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자막과 입을 맞추는 영혼』 『흰 글씨로 쓰는 것』, 동시집 『토마토 기준』 『나는 법』, 청소년시집 『세상이 연해질 때까지 비가 왔으면 좋겠어』와 『2023년 제24회 젊은평론가상 수상작품집』(공저)을 냈다.
신작시
독립 외 4편
최백규
컨베이어 위로 구름이 흘렀다 빵과 우유를 삼키다 학교에서 제적되었다는 문자를 읽은 날이었다 그해 나는 자주 침상에서 뒤척였고 여러 공장을 번갈아 다니며 최저임금마저 떼였다 조립과 검수와 포장의 연속이었다 철야 후 공구 골목에서 이따금 쇳소리가 울리고 아침 공기도 적당히 산뜻했다 영화 상영 직후처럼 비슷한 표정의 일용직들이 길 건너편으로 흩어지는 모양이 어지러웠다 그 시절에는 다세대주택 창고에 식물처럼 세 들어 살아도 괜찮았다 배가 고프면 수돗물을 마셨고 밑창이 떨어진 신발을 신으면 빗물에 발이 젖어 뿌리부터 썩어 들어갔다 학교에서 제적된 것보다 천장에서 비가 떨어지는 것이 훨씬 큰일이었다 낮이면 식탁 위로 밤이면 이불 위로 쏟아졌다 먹고살기 위해 그곳에서 자고 일어나 다시 일하러 가는 게 지겨웠다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똑같거나 더 최악일 거라는 사실도 이해했다 내가 벌여 온 짓들이 나를 망치고 있었다 숨을 참았다 한 발만 더 내리면 열차가 즐겁게 나를 쓸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해 여름에서
더는 커터칼로 주민등록증을 긁지 않을 그해 여름에서
동기들은 도시로 상경하고 서로의 방을 떠돌며 무언가
신기했다 어쩐지 자꾸 두근거리고 쉽던 것이 어려워져 누군가
계속 보고 싶었다 그해 여름에서
모르는 곳들이 줄어들고 수상한 친구들이 늘어날수록
나는 말수가 적어지고 취하지 못했다 그해 여름에서
너는 어두운 복도를 똑바로 걸어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여름에서 우리가 선택한
국회의원은 날치기로 법을 통과시켜 집값을 폭등시키고
본인 건물의 보증금과 월세를 몰래 올리다
적발되었다
그해 여름에서 염색공들의 피부도 함께 물들고
용접공들의 화상 자국이 점점 깊고 넓게 퍼져만 갔다
그해 여름에서 전국 화장터에 시체들이 쌓이고
지지하는 정당이 여권인 시대라면 국민들은
누가 죽었는지 얼마나 불행한지
상관없었다
그해 여름에서 길가에 늘어선 가게들이 거짓말처럼 문을 닫고
취객들이 택시를 향해 소리치며 손을 흔들고
그해 여름에서 비행기가 폭파되고 지하철이 불타고 배가
가라앉았다
지겹다 지겨워서 잊히지 않는다
그해 여름에서 멀쩡한 건물과 다리가 무너지고
그해 여름에서 연쇄살인범들이 줄줄이 잡히고
아이들이 유괴되고 노인들이 스스로 실종되었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그해 여름에서 그해 여름에서
모르는 번호의 전화가 울리고 주먹으로 벽을 세게 때리고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듣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고
모두가 웃었다 옷을 벗고 물을 마시고 바닥에 누워 천장만 노려보았다
그해 여름에서 젊은 어머니는 바닥에 포대를 펼치고 밤을 깎았다
가져온 밤을 다 깎아 돌려주어야 일당을 받을 수 있어
말없이 밤을 깎았다 잠든 나를 가끔 돌아보며
어긋난 손가락을 부여잡으며
살아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돈은 뺏고 물건은 훔치면 되는데
어리석게도 아버지는 매일 새벽 일터로 향했다 그때 내가
찢어 버린 시들을 하나씩 펼쳐 읽으며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거리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했다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노인들은 달성공원에 웅크리고 앉아
몸을 긁었고 동물들은 뜨거운 바닥을 어슬렁거리거나
햇볕을 받으며 서 있었다 친구들은
재개발 구역에서 용역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철거 통보서를 뜯어 읽었다 나는
칼을 갖고 다니던 형들에게 사람을 한 번에 죽이는 방법에 대해 배우고
꿈에서 정말 사람을 죽여 부끄러웠다
하지만 나의 애인은 아직도 나의 죄를 모르고 나의 의사는
나를 죽이지 않았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웃거나 울고 집 앞 하수구마다
정체 모를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우리는 드럼통에
불을 피운 채 둘러앉아 있었다 사는 것같이 살고 싶었다
구름이 흐르는 방향으로 바람이 일었다
무채색
택시비가 아까워 한 시간을 넘게 걸어서
집까지 갔다 안개 사이
때늦게 누군가 어른거렸다 이어폰에서 일정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머리 한쪽이 아픈 것도 버릇이 되었다
어느 새벽은
틀린 정산을 자책하며 마감을 미루기도 했다
손바닥에 쇳내가 가시지 않았다
조용히 녹슬어갔다
하품을 하듯 도시의 사타구니가
캄캄해졌다 아무리 밀어도 몸에서 무언가 자란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무서웠다
벌건 못에 찔린 발자국처럼 떨어진 비가
구정물로 번지고 있었다 희미한 담배 연기처럼 흩어지면 좋겠다
동이 트면 좋겠다
교차로에는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 차들이 줄지어 있었다
바람에 긁히며 영정이 행진하고
인파가 길게 늘어졌다
혀를 내어 문 개들처럼 짓무른 울음이
떨구어지고 있었다
구겨진 인간은 어디로 버려져야 하는가 못다 한 말들과
다만 죽어지내는 날들에
영원한 침묵
사랑은 셀 수 없이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를 쥔 채 놓지 않았다
이제 습관적으로 멸망을 앓고 있다
손톱만한 비가
스친다 파업으로 도로를 점거한 자들을 피해 걸어와
네가 없는 빈집에 누워
너를 기다린다
쓰다 만 이력서와 마이너스 통장들이 쌓여 있다
씻어 말린 수저와 밥그릇이 이 집에서
가장 깨끗하다 우리 마음처럼 아무리 맞춰도 밥물은
매번 가늠이 달라진다 창밖 골목 끝으로 해가 지고 있다
북성로 포장마차에 불들이 켜질 시간이다
여름인데
영사기가 꺼진 스크린처럼
어두운 창문에 떨어진 눈송이가 꽃으로 피어난다
시리도록 화창한 시절이 다 휩쓸려 갔다
진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 최백규 약력 : 1992년 대구 출생. 2014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시집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시선집 『이 여름이 우리의 첫사랑이니까』. 동인 시집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 창작동인 ‘뿔’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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