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한강)
첫째 날: 제주의 빛과 어두움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그렇게 참혹한 역사가 있었다는 걸 누가 알았을까. 학살과 탄압의 공포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해원 되지 못한 아픔과 갈등이 여전히 이 땅에 떠돌고 있었다.
# 그들이 꿈꿨던 세상
삼다도(三多島)이자 삼무도(三無島)라 불렸다는 제주도. 도둑과 거지와 대문이 없다는 이 섬은 좌우(左右)도, 기업가와 노동자도, 지주와 농민도, 여자와 남자의 권리도 차별 없는 세상을 꿈꿨다. 광복 직후 강대국의 이해관계 속에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상황 속에서도 남한만의 단선단정(單選單政)을 거부하고 저항했다. 이 나라의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맞이하고자 함이었다.
그들의 염원은 무참히 짓밟혔다. 분열과 분단의 씨앗을 심은 미국과 이승만이 승인한 군인과 경찰, 그보다 더 극악한 서북청년단에 의해 제주는 초토화되었다. 국가폭력에 비하면 미미하나 무고한 희생자 중에는 남로당 무장대에 의한 죽음도 있었다. 군인과 경찰의 가족, 무장대 가족이 대살(代殺) 당하기도, 그에 따른 보복 학살로 이어지기도 했다. 남은 가족과 후손들이 이 섬에서 혈연관계로 엮여 같은 마을에 살기도 한다니 황망하기 그지없는 현실이다.
무장대가 들었던 무기라고 해봐야 죽창(竹槍) 정도였다. 평생 바다에서 물질하고 농사지으며 하루 밥 벌어먹는 민중들이 제대로 된 훈련은 받아봤을까. 아무리 무지하다 한들 이 싸움의 결과가 개죽음이라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앉아서 죽기보다는 서서 맞서 싸우다 죽기를 선택한 민중의 분노가 1980년 5월 고립된 광주 시민들의 결기와도 닮아있다고 생각하니 먹먹해졌다.
마을 단위로 이름이 적힌 수많은 위령비 중에는 이름도 없이 죽어간 생명도 있었다. 이름을 짓기도 전에 죽었거나, 여전히 그때의 공포에 짓눌려 차마 가족의 이름을 말할 수도 없거나, 이름조차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졌거나, 온 가족이 학살되어 이름을 찾을 수 없는 수많은 생명의 비(碑)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 ‘부당하므로 불이행’
이 거센 죽음의 불길 속에서도 제주의 생명이 꺼지지 않도록 지킨 의인들이 있었다. 학살의 광기로부터 무고한 양민들을 보호하려 했던 김익렬 중령, 30만 제주도민을 모두 죽여서라도 진압하겠다는 상관을 암살한 부하들, 동포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며 4.3 사건 진압 출동 명령을 거부한 여수의 군인들, 서슬 퍼런 예비검속 총살집행을 ‘부당하므로 불이행’함으로써 무고한 민중들을 석방한 문형순 성산포 경찰서장.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스러져 간 의인들의 투쟁에 빚지지 않은 생명은 없다. 우리가 이 순례를 멈추지 않을 이유이다.
#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이 중일전쟁의 전초기지로 삼았다는 알뜨르 비행장은 감자와 참깨가 심긴 밭이 넓게 펼쳐진 곳이었다. 지금은 국방부 소유로 활주로 제외하고는 농지로 임차되어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한 주전 한국공동체교회협의회 수련회에서 만난 개척자들의 이야기에서 ‘전쟁의 소문이 그칠 때까지’라는 각오와 사명을 들었는데 그때 함께 전해주신 미가서의 말씀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4:3)’가 떠올랐다. 비행장에 스포츠 센터나 사격훈련장 혹은 평화공원을 세우려 한다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더 평화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 그럼에도 훼손되지 않은 삶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담벼락 위에 옹기종기 솟아난 선인장 구경하며 진아영(1914-2004) 할머니 삶터로 갔다. 무명천 할머니라 불리던 진아영 할머니는 제주 4·3사건 때 총상으로 아래턱을 잃으셨다. 말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먹는 것도 거의 불가능해진 할머니를 보며 친척분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생각하셨다. 친척이 있는 월령리에 홀로 거주하며 무명천으로 얼굴을 감싸고 다녔던 할머니의 작은 집에는 색이 바랜 벽지와 당신의 손때가 묻은 가구와 집기들이 그대로 있었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 4·3의 아픔과 고통을 고스란히 짊어졌을 할머니에게 이제는 안식과 평화 가득하기를.
둘째 날: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른 7시, 강정마을 숙소 근처 해군기지 정문 앞에 모여 매일같이 100배(拜)를 드리며 생명 평화를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적은 수지만 그 누구보다도 힘 있는 운동을 이어가는 이들은 정문을 지키고 드나드는 군인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듦 없이 묵묵히 절을 한다. 남녀노소의 목소리로 울려 퍼진 기도는 나와 네가 하나임을, 모든 생명이 연결된 하나임을 말했다.
평화롭고 순조롭게 100배를 마친 것 같지만 실은 이곳이 아주 비싼 공간이라 선녀님이 알려주셨다. 처음 이 운동을 시작했을 때는 바로 옆에 있는 민원실 문을 잠가 화장실도 못 가게 하고 몇몇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고. 지금도 공간을 쓰기 불편하도록 곳곳에 큰 화분들(지금은 아무것도 심지 않아 흙만 가득 찬)이 놓여있었다.
# 구럼비는 곧 일어설 것
오전 11시, 차가 쌩쌩 달리는 2차선 도로 한편에서는 허름한 천막과 야외용 플라스틱 의자를 두 줄로 놓고 미사를 드린다. 이 미사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춥든 덥든 매일같이 드려진다. 곳곳에 구럼비 바위를 향한 메시지들이 보였다. 구럼비 바위는 강정마을 해안가에 있었던 길이 1.2km, 너비 150m에 달하는 거대한 단일 용암 너럭바위로, 용천수가 솟아나 국내 유일의 바위 습지를 형성하고 있어 보전 가치가 매우 높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2012년 3월 기습 발파하였고, 그렇게 온갖 불법과 폭력, 속임수 위에 결국 해군기지는 세워졌다.
그러니 구럼비는 되찾아 회복해야 할 모든 것의 이름이다.
# 하나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
2005년, 故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이라 지정·선포했다. 제주도가 동북아의 평화기지, 평화의 거점이 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2007년 국가안보와 국익 보호를 명분으로 제주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이 공식화되자 주민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이 땅에 일제 강점기 때와 4·3 때 겪은 고통을 재현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는 온갖 수단으로 주민들을 회유하고 속이며 이간질했다. 해군기지를 민군복합형으로 건설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기지 내에 주민들도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스포츠 센터를 짓겠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속였다.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며 강정으로 이주한 활동가들은 국가의 개입에 의해 마을 주민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마을 회의에 참석조차 할 수 없었다. 반대 운동을 하던 주민들은 농사를 망쳐 빚지고 쓰러져 가정마저 풍비박산 나버렸다. 활동가들은 전과자로 낙인찍혔다.
2016년 2월, 해군기지가 준공되었다. 구럼비 바위는 부서졌다. 싸움은 실패했다. 모두가 알았다. 이 싸움은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오늘도 내일도 절하며 기도한다. 깃발 들고서 노래하며 기지 앞으로 행진한다. 춤추며 평화를 외친다. 평화를 이루는 방법은 평화뿐이다. 나와 네가 구분되지 않는 우리 안의 평화를 이룰 때 우공이산의 믿음으로 이 운동을 멈추지 않을 수 있다.
한공협에서 만난 개척자들은 강정평화운동을 20년 가까이 지속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밥상’에서 나온다 말씀하셨다. 이번 순례를 통해 이 밥상을 직접 보고 함께 밥상 나눌 수 있어 참 고마웠다. 변변한 건물 없이 비닐하우스를 이용하는 ‘삼거리 식당’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청년부터 노인까지, 대부분은 제주에 아무런 연고도 없지만 이 투쟁을 위해 강정마을에 모였다. 모두가 실패했다고 단념한 자리에 평화가 싹 틔운다.
# 제주의 허파, 곶자왈
이름도 생소한 곶자왈.
제주어 ‘곶’은 숲, ‘자왈’은 덤불을 뜻한다. 곶자왈은 용암이 식어 굳은 돌무지 위에 갖가지 식물이 모여 자란다. 희귀식물, 멸종위기 동·식물이 모여 산다. 보물창고 안을 걷고 있는 듯 했다. 곶자왈을 이루는 나무는 주로 상록수다. 그래서 가을이나 겨울이 아니라 봄에 잎이 떨어진다고. 그렇게 떨어진 낙엽들이 부서져 흙을 대신해 양분을 제공한다.
예부터 제주도는 물난리라고는 모르는 동네였다. 화산섬이라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바닷가 쪽에서 용천수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골프장, 관광시설 등의 무분별한 개발로 훼손되면서 물난리가 나기도, 물이 부족해지기도 했다. 곶자왈이 매립되면서 물이 흡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주도 면적의 약 5% 정도의 면적을 지닌 곶자왈을 지키려는 사람들. 이것도 계란으로 바위 치는 싸움인 걸까. 거대하고 강력한 자본의 물살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휩쓸리지 않으려면, 거슬러야 한다. ‘곶자왈사람들’은 국민신탁으로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내 기금을 마련하고 곶자왈을 매입한다. 그리고 영구보존시켜 개발에서 곶자왈을 지켜낸다. 곶자왈은 몇몇 사람이 아닌 모두가 함께 지켜야 할 유산이기 때문이다.
셋째 날: 볍씨는 생기를 싣고
이른 오전부터 부지런히 움직여 볍씨학교에 도착했다. 오전에는 집 짓기 울력에 참여했다. 얼마 전 화재로 일부 타버린 학교의 공간을 짓는 일이었다. 먼저 초롱초롱한 눈빛과 차근한 목소리의 학생에게 학교 공간을 소개받고, 목수님이 오셔서 오늘의 작업을 설명해주셨다. 기운이 넘치는 분이셨는데 뜨거운 해가 내리쬐는 한낮에도 늘 그늘이 아닌 땡볕 아래 서 계셨다. 사랑도 넘치셔서 볍씨학교 학생들을 무진장 아끼신다는 것을 대번에 알겠더라. 학생들의 눈빛부터가 다르다며 귀하게 여기셨다.
학생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목수님의 마음을 느껴보고 싶었는데 갑자기 심해진 감기몸살로 여의치 못했습니다. 볍씨학교 친구들과 이영이 교장선생님과 나눈 이야기는 함께 순례 다녀온 분들의 후기를 읽어주세요. 순례에 동행한 벗들과 물질과 마음으로 후원하고 기도해주신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