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리리의 <호모 데우스>을 읽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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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은 이미 수천 년 전에 자기 자신 외의 다른 존재가 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확실하게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그저 추정만 할 뿐 확실하게 알 수 없다. 혹시 내가 우주 전체에서 뭔가를 느끼는 유일한 존재이고, 다른 모든 인간과 동물들은 마음이 없는 로봇이 아닐까?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내 꿈속의 등장인물이 아닐까? 혹시 내가 가상세계에 갇혀있고, 내가 보는 존재들은 시뮬레이션이 아닐까?
→덧붙이는 내 생각 1
세계는 내 마음이 투사된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唯識유식의 관점이다. 알라야식이 전변하여 주관(識能變, 투사하는 주체로서의 식)과 객관(識所變, 투사되어 대상화된 식)이 발생한다. 세상 삼라만상이 모두 한 마음에서 펼쳐진 영화라는 것이다. 心造萬有論(심조만유론, 마음이 모든 존재를 조작해냈다는 설)같은 唯心유심(오직 마음이 만상의 제일 원인이라는 믿음)주의다. 주관이 대상과 세계를 경험할 때 대상과 세계는 실재하는지 실재하지 않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주관이 모든 것에 앞서고 주관이 모든 것의 최종 원인이다. 주관중심주의다. 내 눈에 보이는 자연과 풍경, 내가 만나는 인간군상은 내 마음이 펼쳐낸 드라마이다. 내가 펼쳐낸 드라마에 내가 몰입하여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한평생 삶이 원맨쇼이다. 지독한 唯我유아론(solipsism)이다. 소위 말하는 一心, 한마음이 주인공이란 법문과 일체유심조라는 게 이런 것인가? 그러면 붓다의 무아설과 배치되리라. 고정불변하는 실체로서 주관이라든지, 한마음이라든지 주인공을 말하면 붓다가 부정한 아트만(atman, atta)이 되어버리니까. 한편 유식에서도 알라야식은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업의 흐름으로 본다. 주관주의, 유심주의에서는 타자에 대한 연민과 자애, 배려와 관심이 기본적으로 부차적으로 밀려나는데, 주관과 유심의 일차적 관심은 항상 자기 주관, 자기 마음의 웰빙에 가 있기 때문이다. 지구의 주인을 자처하는 인간은 탐욕과 분노와 무지의 힘에 휘둘리는 동물이기에 그가 연기하는 드라마는 희비가 엇갈리는 코메디다. 주관주의, 유심주의는 필연적으로 인간본위주의, 지구인중심주의로 귀결한다. 그래서 지구인은 지구를 마음대로 하던 버릇으로 우주도 그런 식으로 개발하려 한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유심주의가 있다. 이제까지의 논의는 정화되지 않은(불교 수행적인 관점에서) 마음이랄까 알라야식을 말했다면, 정화를 마친, 즉 완전히 깨달음 마음(그것을 진여심 혹은 불성, 한마음이라고 하자)을 말한다. 이는 일체 생명이 공유하는 바탕이 되는 무차별하고 평등한 여래장(진리 그대로의 능력을 품고 있는 상태)이다. 그것은 만 생명이 모두 자기 몸이 되기에 만 생명의 고통이 자기의 고통으로 느껴지며 만 생명의 환희가 자기의 것으로 수용되는 同體大悲동체대비(한 몸처럼 느끼는 큰 자비)다. 이런 유심주의는 불성을 깨달은 차원이다. 우주는 그분이 펼친 드라마(이 경우에는 만달라 라고 한다)이며, 그 드라마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모두 그분의 화신이며 자연환경은 報土莊嚴보토장엄(공덕의 결과로 나타난 세계의 장엄)이다. 그런 예로써 아미타불이 원력으로 건설한 극락정토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동물과 존재들은 모두 아미타불의 화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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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과학적 정설에 따르면,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내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활동의 결과이고, 따라서 ‘실제’ 세계와 구별이 불가능한 완전한 가상세계를 위조하는 것이 이론상으로 가능하다. 어떤 뇌 과학자들은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할 거라고 믿는다. 그런데 만에 하나 당신에게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당신이 아는 것과 달리 지금은 서기 2,500년이고, 당신은 2023년 신나는 원시세계를 흉내 내는 ‘가상세계’ 게임에 푹 빠진 심심한 10대일지도 모른다. 이 시나리오가 실현 가능하다고 까지만 인정해도 수학적으로 매우 섬뜩한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즉 실제 세계는 하나뿐인 반면, 가상세계의 수는 무한하므로, 당신이 하나밖에 없는 실제 세계에 있을 확률은 0에 가깝다.
→덧붙이는 내 생각 2
두 가지 차원의 진리 즉, 二諦說이제설에서는 실제 세계를 진실제, 승의제(paramattha satya)라고 하며 가상세계는 세속제(samvriti satya)라 한다. 세속제는 상대적, 잠정적, 한시적, 관습적 진리이다. 인간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인간끼리 서로 통용하는 진리라는 것이다. 일종의 실용주의적 진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세속의 진리는 하나가 아닌 무수한 진리가 있을 수 있다. 더구나 모든 개인은 각기 다른 진리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면 각 개인의 진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가상으로 여겨지며 동시에 자신의 진리도 다른 사람에게는 가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상대주의적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가상으로 경험된다. 가상의 존재인 내가 가상의 존재인 다른 사람이나 물건을 집착하거나 혐오한다면 이는 가상세계 속의 게임에 빠져들어 희로애락을 경험하게 된다. 꿈속에서 현실인 것처럼 실감 나게 꿈을 꾸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이런 실감 나는 경험을 하려고 일부러 가상세계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게임에 몰두해있는 정도가 심해져 거의 중독된 상태가 된다는 거다. 이 사람은 자기가 가상세계에 빠져있다는 자각이 없기에 실제 세계를 알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가상세계에서 빠져나와 실제 세계를 느끼게 해줄 수 있을까? 딱! 이마를 때리면 ‘아야!’ 하는 순간에 실제 세계로 돌아온다. 즉시 가상게임을 멈추고 밖으로 걸어 나가서 자연을 느끼기를.
나뭇잎
동시영(시인, 충북 괴산 출생)
나뭇잎은 미풍에도 떨린다
순간을
아! 하는 감동으로 맞으라고
세상에서 가장 설레이는 건
지금
가상세계에서 빠져나와 실제를 깨달은 토끼가 가상세계를 되돌아본다면 어떻게 보일까?
모든 애썼든 일은 끊임없이 바뀌고 변해가며(제행무상), 모든 정체성은 허구이며, 모든 있는 것은 실체가 없다(제법무아). 어떤 즐거움도 이내 사라지나니 삶의 기본 정서는 불만족이다. 무릇 모든 집착에는 고통이 따른다(제행개고).
이 세상은 지옥에서 하는 꽃구경이어라. 世の中は地獄の上の花見な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 1763~1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