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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가족
성경본문 : 에스라 10:1-12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할머니가 낱말 맞히기를 합니다. “매일 눈만 뜨면 보는 사람은?” 하니까, 할머니는 “영감탱이!” 하고 대답합니다. “두 글자로?” 하니까, 뭐라고 그랬는지 아시죠? “웬수!”라고 합니다.
가족이라는 것은 가장 가깝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웬수같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에 가장 힘이 되어 주고, 삶의 용기와 희망이 되고,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살기 때문에 다투거나 갈등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도 보이지 않으면, 한 없이 그리워 마음의 병이 생기기까지 하는 것도 가족입니다.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을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역사를 보면, 그리 화려하지도 않고 잘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런 민족의 역사이거나, 때로는 지지리도 연약하고 못난 백성일 때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건의 배경은 남 유다가 멸망한 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여러분이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의 백성들이었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했을까요? 그들은 자기들이 멸망한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침략자들에 의해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만드는 기회로 삼으려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자기들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누구인가?’ ‘하느님의 백성에는 누가 포함될 수 있으며, 그것은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가?’ 그 노력은 포로로 끌려가서 있을 때부터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서술한 것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신명기역사서’와 ‘역대기역사서’가 있습니다.
신명기역사서는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입니다.
역대기역사서는 역대기서, 에스라, 느헤미야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두 역사서는 단순한 사건을 기록하거나 나열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명기에 바탕을 둔 신학적 사관에서는 이스라엘 역사의 흥망성쇠 과정을 모두 토라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 그리고 이에 따른 하나님의 축복과 징벌의 결과로 해석합니다. 여기에 회개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요소가 첨가되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벌하십니다[징벌]. 이 때 이스라엘이 그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면[회개], 하나님께서는 징벌을 거두시고 그들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구원]. 이 4단계의 역사과정은 신명기 사가의 역사 해석의 기본구조이며,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위기를 당했을 때,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대망하는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사가는 왕국의 멸망이 단순히 군사력의 약함이나 정치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고,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징벌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역사적 수난과 비극에 직면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구원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 확신의 근거는 다윗 왕조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임재의 상징이고, 하느님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던 성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일 먼저 하려했던 것은 성전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에서 귀향 후에도 그들이 기대했던 왕국의 회복에 대한 꿈과 희망은 점차 무산되어 갔습니다. 따라서 페르시아시대의 이스라엘은 제사장을 중심으로 종교적 의식을 엄격하게 지킴으로써 그들의 주체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의 이스라엘은 정치적 왕국이라기보다는 종교적 공동체로서 자기의식을 재정립하게 되었습니다.
변화된 자기의식을 가지고 과거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기술한 것이 바로 “역대기”입니다. 이스라엘 왕국이 회복된다는 꿈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약소한 이스라엘이 자기를 지켜나가기 위해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성원과 자기 정체성에 대해 묻고 답변합니다.
“이스라엘이 누구냐”(공동체의 구성원)라는 질문에 대하여 역대기 사가는 족보(1-9장)를 제공해 줍니다. 그 족보에는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족장들과 12지파의 족보, 그리고 바벨론 포로에서 귀향한 이스라엘 귀향민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존재가 없고 수적으로 미약한 상황에서 역대기 사가는, 이스라엘의 구성원이 혈통으로 결정되며, 혈통의 순수성을 지킴으로써 소수의 이스라엘이 주변의 크고 강한 다른 민족들에게 동화되거나 흡수되지 않고 존속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무엇이냐”(자기 정체성)라는 질문에 역대기 사가는 이스라엘이 순수한 종교적 공동체임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심점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제도와 종교의식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역대기 사가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신앙과 혈통을 중요시합니다. 역대기 사가는 포로생활에서 귀향한 이스라엘에게 신앙과 혈통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과거의 전승과 순수한 결혼의 보존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주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본문을 봅시다. 에스라가 이스라엘의 죄를 자백합니다. 그 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여자들과 결혼하여 혈통의 순수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은 “이 땅에 있는 이방 백성들과 관계를 끊고, 결혼한 이방 여자들과 그들에게서 난 아이들을 내쫓기로 하였습니다.”(3, 11절) 이러한 조치는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엄격하게 적용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재산을 모두 빼앗고, 백성들의 모임에서 내쫓고, 심지어는 때리거나 머리털을 뽑기도 했습니다(느 13:25).
혈통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엄격히 지키려는 노력은 오랫동안 어렵게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어려움과 시련이 닥칠수록 의지할 곳이 필요하고, 자기와 동질성을 가진 사람들을 찾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것이 신앙이라는 끈으로 묶인 공동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따라서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자기의 정체성을 찾고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혈통을 강조하는 것을 무작정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단일민족임을 강조하면서 민족적 배타성이 강한 우리의 역사와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많은 시련을 겪은 사람들은 배타적으로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전체 이스라엘이라는 구색을 맞추고 있지만, 실제로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9절; 1:5; 4:1).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은 남 유다의 왕족과 귀족들이었던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로 이후를 이스라엘이라고 하지 않고 유대인, 유대주의 혹은 유대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했던 사람들(아스돗, 암몬, 모압; 느 13:23)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까지 올라가면 그들과 먼 친척관계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나 모세 등의 민족 지도자들도 이방의 여인들과 결혼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것을 율법적으로 죄악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생각이 앞서서 나온 지나친 오류입니다.
그 이후로 500년 동안 그들은 철저하게 유대주의에 매몰된 유대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혈통의 순수성이라는 것은 점점 형식에 치우쳐 화석화 되었고, 그들의 지키려고 했던 율법은 일부의 살만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되었다는 것을 예수님 당시의 상황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주의는 그들만의 닫힌 공동체의 폐쇄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의 모습 속에서도 비슷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 중에서 혈연, 지연, 학연에 많은 비중을 두려고 하는 것이나 가족 이기주의가 그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지극히 사소한 부분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가족에 대한 끈이 점점 더 느슨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조사한 설문에서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부모의 의무”라는 문항에 긍정적인 사람들이 남한 50%, 일본 56%, 스웨덴 72%, 미국 84%였다고 합니다. 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 가족이기주의 등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한국과 일본에서 ‘부모의 희생이 강조되는 문항을 선택한 비율이 낮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8-9년 전에 남한의 경제가 전체적으로 어려울 때에 보육시설에 맡겨진 한 고등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아버지가 찾아온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자 그 학생이 말합니다. ‘그렇게 반갑지는 않을 것 같아요. 혹시 돈이라도 많이 벌었으면 모르지만, 서로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은 싫어요.’
이렇게 가정을 해체하고 가장 끈끈한 인간관계인 가족의 끈을 느슨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맘몬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가족이나 가정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작아졌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가족을 버릴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물질에 의해서 가장 소중한 공동체인 가족이나 가정이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이 한탄조로 말씀하신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대부분은 어떤 사람이 예언자적 능력을 갖기 전에 어렸을 때부터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그들이 유독 공동체성이 적어서 그랬을까요? 그런데 그 말이 나온 시대적 배경을 보면 조금 달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예언자는 언제나 권력을 쥔 사람들을 비판하고 그들의 죄악을 폭로하였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인 죄악의 원인을 찾아내고 그것을 바로 잡아서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권력자들에게 예언자는 결코 달가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예언자들을 그들에게 쫓겨 다니거나 잡혀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팔레스틴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자나 메시아로 자처한 사람은 언제나 유대 지배자들과 로마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언자나 메시아로 자처한 사람과 연관된 사람들이나 지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본거지라고 생각되는 곳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초토화되거나 수많은 사람들이 반란죄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언자의 가족이나 고향은 그 예언자를 그저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언제 끌려갈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예언자라는 사람을 만나거나 그 가족조차도 기피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을 당하신 것도 그런 것입니다. 남한의 역사에서 연좌제도 같은 맥락입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수배당한 사람이나 그 가족들의 고통이 그 말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권력의 횡포와 탄압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이들이 예언자를 품고 예언자를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가족들은 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까? 21절에 보면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붙잡으러 나섰다.”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미쳤다”는 말은 [στημι]인데, “바꾸어 놓다, 놀라게 하다, 기절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가족들은 예수님이 세상을 바꾸려 하고 놀라게 하기 때문에 잡으러 왔던 것입니다. 가족들의 불안과 걱정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누이들은 예수님이 세상을 놀라게 하기 때문에 자기들에게도 핍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잡으러 왔던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는 예수님을 바알세불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누명을 씌우는 것과 같이 취급되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 그 자리에 있었으며, 그의 동생 야고보는 처음 예루살렘 사도 공동체에서 베드로와 함께 지도적 위치에서 함께 활동합니다.
가족들이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들은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이것은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의해서 새로운 형성된 가족은 사람들의 상호 관련을 지향합니다. 예수님에 의해 새롭게 된 가족은 피와 인종과 민족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 공동체는 혈연과 지연과 학연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억압과 폐쇄가 아닙니다. 반대로 하느님 나라는 개방과 해방 곧 엶과 놓음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과 평등하게 맺는 형제 됨이고, 자매 됨이며, 어미 됨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와 베냐민 지파가 혈통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적대시함으로써 자기의 정체성을 지키려했던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중심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개방합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스스로 쳐 놓은 울타리를 허무는 것입니다. 그 울타리를 허무는 중심에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제시한 하느님의 가족은 그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가족적인 공동체” -
“대교회주의를 배격하고 가족적인 공동체를 이루어가며, 교인 정원제를 실시하여 일정한 숫자 이상이 출석할 때는 분가의 방식으로 선교하는 교회가 된다.” 이 신앙고백은 자기의 몸집을 무작정 크게 하려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모순에 빠지는 성장주의나 대교회주의를 지양하는 고백입니다. 비록 작을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하느님의 가족이 되려는 노력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로운 가족의 가치를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그 목적인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 있습니다. 작아지려고 하는 행동(분가)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작은 것에 만족하거나 정체된 작은 공동체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작아지려는 행위를 통해서 남한의 교회들이 빠진 모순과 오류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분가한지 벌써 두 해가 지났습니다. 충분히 작지만, 두 교회는 서로 도우며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작아짐에는 아픔과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과 어려움은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깨닫게 합니다. 그러한 아픔과 어려움이 없었다면 우리는 교만해졌을 것이고, 나태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픔과 어려움은 우리가 뜻과 힘을 모으면 충분히 그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또 다른 희망을 줍니다.
분가선교는 미래의 가능성으로 자기를 개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가선교는 혈통의 순수성만을 주장하는 폐쇄적인 가족 이기주의가 아니라, 더 크고 의미 있는 하느님의 가족으로 자기를 개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가선교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형제와 자매와 어미와 아비를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새롭게 하시고 하느님의 뜻이 중심이 되는 하느님의 가족에 우리의 정체성을 두는 것이 단지 아침에 일어나면 기억할 수 없는 꿈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활동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꿈이 되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