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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굴리는 사람 / 조상호 목사
매년 4월25일 ANZAC Day가 되면 이곳 신문과 방송에서 가장 많이 언급하는 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갈리폴리 전투(Gallipoli Campaign)‘라는 사건입니다.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만 해도 터키는 중립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일로부터 군사적인 많은 도움을 받은 터키가 독일과 동맹을 맺게 되자, 영국정부는 갈리폴리를 공격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갈리폴리는 터키 서부의 항구로, 흑해로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하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만약 이곳을 장악한다면 러시아로 통하는 관문을 뚫어서 지중해를 지배할 수 있고, 터키의 국토를 양쪽으로 갈라놓을 수 있는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세계최고의 해군력을 자처하던 영국군은 당시 세계 최강의 전함으로 알려진 엘리자베스호를 중심으로 31척의 주력 전함, 3척의 전투 순양함, 24척의 순양함, 25척의 구축함, 50대 이상의 수송선으로 이루어진 대선단을 동원하여 1915년 2월19일과 2월25일, 3월25일에 세 차례에 걸쳐 터키군에게 포격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터키군의 반격을 받아 오히려 3척의 함대가 격침되고, 3척이 대파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무리한 작전을 이끌었다는 책임 때문에 ‘피셔’ 제독이 사임하고, 총 책임자인 ‘윈스턴 처칠’도 해군장관직에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해밀톤 장군을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런데 터키군은 영국군이 해군 수뇌부를 교체하는 6주 동안, 부족한 병력을 추가로 배치할 수 있었습니다. 세 차례에 걸친 영국군의 포격으로 인해 터키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영국군이 곧바로 상륙작전을 펼쳤다면 터키군도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이 해군제독과 장관을 연이어 교체하면서 오히려 터키군에게 병력을 재정비할 시간적 여유를 제공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국군은 해군의 단독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판단한 끝에 호주와 뉴질랜드군을 주축으로 한 영연방 연합군를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해밀턴장군의 지휘 아래에 4월25일에 이 영연방군과 프랑스군 등 7만의 연합군이 재차 갈리폴리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산다스 장군과 케말 파샤의 터키군의 반격을 받아 또 다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호-뉴 연합군(ANZAC-Corp)은 방탄복은 커녕 철모도 없이 터키포대를 향해 올라갔습니다. 거기다가 영국해군은 약속된 시간보다 3분이나 늦게 함포를 쏘기 시작했고, 그 함포조차 터키군의 진지에 닿지 못하는 바람에 터키 진지를 향해 기어 올라가던 호-뉴 연합군은 엄청난 희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단 10분 동안에 호주-뉴질랜드 군은 전력의 90%를 잃어버렸습니다. 기가 막힌 것은 총알받이가 되는 것이 분명한 상황 속에서도 지휘 장교는 2분 간격으로 다섯 차례에 걸쳐 돌격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전술로 인해 호주군이 8,587명이나 전사하고, 1만 9,367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연합군 총사상자는 25만 2000명이나 되었습니다. 결국 상륙작전의 실패로 말미암아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6개월 뒤에 갈리폴리에서 완전히 철수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읽은 오늘 본문도 전쟁 이야기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영국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쉽게 승리할 줄 알았던 ‘갈리폴리 전투’에서 터키군에게 패배한 것처럼, 북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쉽게 승리할 줄 알았던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아람 나라에게 패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전 약 853년 경 북이스라엘은 아합 왕이, 남유다는 여호사밧 왕이 각각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웃에 있는 아람나라와 이스라엘은 수시로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람 왕 벤하닷과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이 서로 전쟁을 하지 않기로 화친을 맺으면서 3년 동안 평안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전쟁 없이 3년이 지났을 때, 남쪽에 있는 유다 왕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 왕 아합을 찾아 갔습니다.
그러자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 줄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와 함께 가서 길르앗 라못을 아람 왕의 손에서 다시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그 이유는 아람 나라가 빼앗아갔지만, 다시 돌려준다고 약속한 길르앗 라못을 반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20장 30절 이하를 보면, 북이스라엘 아합 왕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아람 왕 벤하닷을 체포하였다가, 아벡이란 곳에서 빼앗겼던 길르앗 라못을 비롯한 여러 성읍의 반환과 다메섹에서의 비즈니스를 보장받고 나서 다시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아람 왕 벤하닷은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해놓고도 길르앗 라못을 되돌려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 아합 왕은 빼앗긴 갈르앗 라못을 아람 나라로부터 다시 찾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북 이스라엘 단독으로 상대하기에는 아람 나라가 너무 강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 왕이 다스리고 있는 남 유다와 연합군을 결성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북 이스라엘 왕 아합의 몇 가지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첫째로 그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기 전에는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이었습니다. 분열된 후에는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은 대체적으로 서로 적대관계가 되어 서로 전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당시 아람 나라를 견제하여 나라를 안정시키려고 하는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의 마음을 이용하여 서로 연합군을 결성하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적과의 동침‘이라고 합니다.
요즘에도 ’적과의 동침‘ 현상이 자주 벌어지고 있습니다. 경쟁 업체들이 비용을 절감하고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경쟁업체들끼리 공동 기술 개발에 나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즘 세계 자동차 업계의 최대 화두 중의 하나는 연료 전략형 ’하이브리드 신차‘ 개발입니다. 그러나 하이브리드 엔진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이 들기 때문에, 경쟁 업체들이 공동 투자함으로써 비용을 줄이는 전략을 택하기도 합니다. 원래 하이브리드 차량 분야는 일본의 도요타와 혼다가 앞서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제너널 모터스(GM)과 크라이슬러는 일본 자동차 회사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공동으로 하이브리드 신차 개발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또 미래형 전투기 개발을 위해 노스롭그루만은 또 다른 방위산업체인 BAE와 합작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에 본사가 있는 가구 제조업체인 스틸케이스 인터내셔널은 기술개발과 비용절감과 경영합리화를 위해 현재 20개국에 파트너를 두고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적과의 동침‘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아람나라로부터 ‘길르앗 라못’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 적대관계에 있었던 남 유다와 연합군을 결성하려고 합니다. 아합 왕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 보면 아합 왕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영화나 드라마들이 그러한 것들을 자꾸만 유도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크라이스트처치에 Voice TV가 나와 한국에서 수년 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가 나오는데, 저도 ‘주몽’이라는 드라마를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한국 드라마를 보니까 굉장히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 드라마에 보면 부여국의 태자 자리에 오르기 위해 대소와 영포 그리고 주몽 세 사람이 경합을 합니다. 그런데 경합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셋째인 주몽은 대소와 영포를 누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소금을 구해오기도 하고, 부여국의 오랜 숙원인 강철무기 개발에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습니다. 반면에 첫째인 대소는 주몽을 누르기 위해 죽은 사람의 머리를 이용하기도 하고, 적국인 현토성 성주와 손을 잡기도 합니다. 둘째인 영포는 형 대소와 주몽을 누르기 위해 납치와 살인도 서슴없이 저지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 눈에 고춧가루 뿌리고 피눈물 나게 만드는 것은 비단 드라마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서 종종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재산이 탐이 나서 부모를 살해하는 못된 자식이 있는가 하면, 거액의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사랑하는 남편을 살해하는 비정한 아내도 있습니다. 돈 욕심 때문에 수십 년간의 우정도 하루아침에 저버리는 사람도 있고, 출세하기 위해서 서슴없이 속이고 상대방을 짓밟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아합 왕처럼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편법을 따라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목적을 성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목적을 이루는 방법도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의 진리를 따라 정도를 걸어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사람
둘째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사람이었습니다. 아합 왕으로부터 ‘길르앗 라못’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 연합군을 결성하자는 제안을 받은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자기 혼자서 덜컥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람 나라를 쳐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물어보자고 합니다. 그리하여 400명의 선지자를 불렀는데, 사실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 400명은 ’올라가소서. 야훼께서 그 길르앗 라못을 왕의 손에 붙이실 것입니다‘라고 거짓으로 예언을 합니다.
여호사밧 왕은 아무래도 이상해서 아합 왕에게 다시 말합니다. ’이 사람들 외에 우리가 물어볼만한 야훼의 선지자가 또 없습니까?‘ 그러자 아합 왕은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는 항상 불길한 예언만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를 미워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여호사밧 왕은 미가야 선지자를 데려오도록 부탁을 합니다.
그래서 미가야 선지자가 와서 진짜로 예언을 합니다. 다같이 14절과 15절을 보겠습니다.
“미가야가 이르되 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야훼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이에 왕에게 이르니 왕이 그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또는 말랴 그가 왕께 이르되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야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올라가서 싸우면 아람 나라를 이기고 잃었던 길르앗 라못을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17절 말씀입니다.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야훼의 말씀이 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무슨 뜻입니까?
아람 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길르앗 라못을 다시 찾을 수는 있겠지만, 지휘관이 죽음으로 남은 병사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흩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같으면 미가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이 말씀을 기억하고 아람 나라와 전쟁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될 때가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아합 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유다의 여호사밧왕에게 ’내가 아까 저 사람은 항상 나에 대하여 좋게 예언하지 않고 나쁘게 예언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하며 미가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그러자 미가야 선지자는 다시 한 번 아합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다같이 19절과 20절을 읽겠습니다.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야훼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야훼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야훼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그를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또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미가야 선지자는 ’아람과 전쟁을 하게 되면 아합 왕이 죽임을 당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 번씩이나 전해주었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합 왕은 화가 나서 미가야 선지자를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리고 유다의 여호사밧 왕의 군대와 연합하여 아람 나라와 전쟁을 하기 위해 길르앗 라못으로 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전쟁에 임한 그는 아람 군대가 쏜 화살을 맞고 죽임을 당합니다.
사도행전 27장에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다가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던 백부장입니다. 그는 바울을 통해서 전달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미항은 좁기 때문에 겨울을 지내기가 불편하므로 미항을 떠나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항해를 강행하였습니다.
결국 미항을 출발한 지 얼마있지 않아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배가 깨어지고 큰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습니다.
이사야 55장 2절과 3절에 보면,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 좋은 것을 먹을 수 있는 비결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우리 영혼이 사는 비결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아합 왕과 같은 분들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머리를 굴리며 살아가는 사람
셋째로 그는 머리를 굴리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아합 왕은 ‘전쟁을 하게 되면 빼앗겼던 길르앗 라못을 다시 찾을 수는 있지만, 자기가 죽임을 당한다’는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
그래서 한 가지 ‘꾀’를 씁니다.
다같이 30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니라.”
아마도 아합 왕은 적군인 아람 나라의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31절에 보면, 아람 왕이 32명에게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와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32명은 요즘으로 말하면 특수 훈련을 받은 특공대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죽이기 위해서 훈련받은 특수대원들이었습니다. 아합 왕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다가는 32명의 특공대원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한 가지 ‘꾀’를 썼습니다. 유다의 여호사밧 왕에게는 왕복을 입은 채로 전쟁에 나가게 하고, 자기는 일반사병의 복장으로 변장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아합 왕이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언뜻 보면 그가 최전방에서 활을 맞거나 칼에 찔려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밝힌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렇습니까?
아합 왕이 목숨걸고 최전방에서 싸우기 위해서 일반사병의 복장으로 변장하겠다고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합 왕이 변장한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혹시 아람나라 특공대원들의 공격을 받는다 할지라도, 여호사밧 왕에게 초점을 맞추게 하고 자기는 편안하게 전쟁하겠다는 속셈입니다. 그는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죽게 하고, 자기만 살려고 머리를 굴린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합 왕의 계획이 성공했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가가 막힌 꾀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다같이 34절을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내가 전쟁터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가 ‘무심코’라는 단어입니다. 당시 병사들은 가슴을 보호하기 위해 쇠로 만든 갑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본문 34절에서 언급한 ‘갑옷 솔기’라는 말은 가슴을 덮는 쇠 갑옷을 연결하는 부분의 작은 이음새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한 아람 병사가 ‘무심코’ 화살을 쏘았는데, 그 화살이 아합 왕이 입고 있는 쇠 갑옷의 작은 이음새 부분에 정확하게 꽂힌 것입니다.
사실 그 화살은 아합 왕을 정확하게 조준해서 쏜 화살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무심코 쏜 화살이 그 작은 이음새를 뚫고 아합 왕의 가슴에 꽂힌 것입니다. 이것을 언뜻 보면 우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미가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화살이었습니다.
결국 그 화살을 맞은 아합 왕은 너무 많은 피를 흘리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잠언 19장 21절에 보면,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야훼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합 왕처럼 우리가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강대상을 보면 <성전꽃꽃이부>에서 옛날 독을 이용하여 아름다운 꽃을 장식해놓았는데, 옛날 어느 마을에 독을 지게에다 지고 이 마을 저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파는 가난한 독장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큰 독 하나를 지고 고개를 넘어가다가 갑자기 큰 소낙비를 만났습니다. 갑자기 소나기를 만난 독장수는 하는 수 없이 지게에 지고 가던 독을 내려놓고는 독 안에 들어가 비를 피했습니다. 독안에 들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기의 신세가 너무나도 한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독장사를 더 이상하지 않고 돈을 벌 방법이 없을까 궁리했습니다. 이것저것 생각한 끝에 기가 막히게 좋은 한 가지 계획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읍내에 있는 장에 가서 이 독을 팔아서 번 돈을 가지고 암 병아리를 몇 마리 사서 키우고, 또 그 암 병아리가 커서 알을 나면 다시 부화시켜서 키우고, 또 그 병아리가 커서 또 알을 낳으면 또 부화시키기를 계속하다보면, 나중에는 수백 마리 닭이 될 것이고, 그 닭을 팔아 암 돼지를 사고 암 돼지를 키워 수백 마리의 새끼돼지를 낳게 하고, 나중에는 돼지를 팔아 암송아지를 사고, 암송아지를 키운 후 그 소들을 팔아, 집도 사고 논도 사고 밭도 사면 나중에는 큰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낙심하고 신세만 한탄했는데 마음 가운데 희망이 생기자, 독장수는 너무 너무 좋아서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 바람에 그만 독이 굴러 떨어지면서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박살나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생이 바로 이렇습니다.
우리 계획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밤새도록 세워놓은 계획대로, 고민하고 고민하며 세운 계획대로 일이 술술 잘 풀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은 우리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꿈과 계획을 갖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꿈이 있어야 합니다.
또 할 수만 있으면 계획도 잘 세워야 합니다. 만약 꿈이 없다든지, 계획을 세우지 않은 사람은 잘못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계획을 세울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가 아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인가 아닌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잠언 16장 9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야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의 주관자는 야훼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야훼 하나님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6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어렵게 지내다가 12살 되던 해에 어린 동생을 데리고 조그만 치킨집을 시작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조금씩 가게 규모를 갖추어갈 무렵 뜻하지 않은 화재로 식당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게는 잿더미가 되었지만,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재기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간신히 가게를 일으켰지만, 얼마 후 아들을 잃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정신이상자가 되었고, 아내마저 그를 버렸습니다. 결국 그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 돈 한 푼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 정부 보조금 105달러를 받아서 이 저리 저 거리를 헤매며 사는 노숙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늦가을 잠결에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새벽기도회에서 흘러나오는 찬송소리였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찬양이 흘러나오는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고, 교회당 안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평생 돈만 의지하며 살다가 결국엔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겠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저의 잘못을 용서해주세요.”
기도하는 가운데 그 동안 살았던 헛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하며 기도한 후 한 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그래, 살더라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고, 죽더라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죽자.”
그날부터 새벽기도회를 참석했습니다. 세상의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둔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과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물론 여전히 밑바닥 인생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던 중에 치킨을 만들어 팔라는 간절한 소원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11가지 양념과 배합법을 기도 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게를 다시 연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동업자로 삼았기 때문에 어떤 어려운 상황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작은 포장마차에 간판 하나 걸고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KFC입니다. 그리고 그가 바로 KFC 간판에 인자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설립자 ‘커넬 센더스’입니다. 독특한 맛과 그의 성실함이 인근에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은 몰려왔고,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KFC 소문이 이웃나라로 퍼지면서 마침내 전 세계 100여 개 나라에 3만3천개 이상의 Branch를 설립하는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저는 KFC 설립자인 ‘커넬 센더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합 왕처럼 머리 굴리는 사람이 되지 말고, ‘커넬 센더스’처럼 하나님의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은혜, 약속하신 축복들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