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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전서 1장
5-6절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본받는 순서가 의미심장하다. 즉 우리를 본받고 그 다음에 주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종종 스스로를 본 받으라고 말하고 있는데 고전4:16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하고 있으며 고전11:1에서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개역성경에서는 어순이 바뀌어 쓰이고 있는데 원래 어순은 “너희는 우리를 본받는 자가 되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라고 되어 있다)고 말함으로 살전1:6과 순서가 동일하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여기서 바울이 의도적으로 정한 이 본받는 순서의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사도바울의 사역자로서의 굉장히 높은 소명과 높은 사명의식을 엿볼 수 있다. 즉 복음 선포자는 복음을 말로 선포하지만 그러나 말로만이 아니라 그 삶으로 복음을 그려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전함에 있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하심 또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 사건을 계획하셨다는 이 복음은 말로만 선포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그려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 4:10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함으로 자기의 사도직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사역자가 복음으로 가르치는 성도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는가 하는 아주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주의 사역자가 말과 삶으로 그려내는 그 주를 우리의 회중이 알고 본받게 되는 것이다. 회중은 그 사역자를 통해서 주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소명에는 위대한 사명이 같이 따라다니는 것이다. 누구나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말로 그리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을 삶으로 그리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자기 희생과 부정의 삶, 섬김의 삶을 나타내지 않으면 영적 도덕적 권위가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오늘 사역자의 권위 위기의 본질이 있을 것이다.
9-10
7-8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전파된 복음이 이윽고 다른 마게도니아 교회에 전하여지며 그들의 굳건한 신앙이 다른 모든 곳에 좋은 소문이 났다고 말하는데 그 소문이 난 실제 내용이 바로 9-10절이다. 그런데 우리가 9-10절을 이해하기 위해서 데살로니가전서의 성격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성격은 굉장히 짧은 편지로 위기의 상황 속에서 굉장히 서둘러 쓴 편지이다. 그리고 이 편지는 무엇보다 그들의 신앙을 칭찬하고 북돋아 권면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과 좋은 관계에 있던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로써 데살로니가 교회가 당면한 몇 가지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만 충고하는 편지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몇몇 다른 편지들과 같이 유대주의자들의 도전에 대응하는 내용이 전혀 없는 편지이다. 그리고 단순히 몇몇 문제들에 대해서 구체적인 지침을 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선포한 복음을 다시 깊이 해석한다거나 변증하는 내용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을 이런 몇몇 문제들을 권면하는 중에 행간에 암시되어져 있는 것을 읽을 수는 있는데 9-10절 부분도 바로 그런 부분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바울의 칭의론의 기본적인 요체와 또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그 정의를 볼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시는 심판의 때에 믿는 성도가 하나님의 진로 하심에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무죄함으로 판명되어 의인으로 선언되어는 칭의론의 기본적의 모습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권세를 위임받아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시는 분이라는 기독론의 요체가 암시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9-10절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선포한 복음의 핵심이자 기본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복음의 핵심적인 부분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가장 먼저 요구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상을 버리고 사시고 참된 하나님께로 회심함이다. 그리고 이러한 권면은 이방인 교회에게 행하는 바울 설교양식의 한 전형임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우선 우상을 버리고 사시고 참된 하나님께로 회심함의 순서는 우리에게도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예수님께서도 우상을 버리지 않고 사시고 참된 하나님께 회심함이란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신 바가 있다(마 6:24, 눅16:13, cf. 고전 10:21).
그 다음에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고 사시고 참된 하나님께 회심한 그 결과가 10절인데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오는 종말론적 구원 즉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부터 구원 받는 강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함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다. 바울은 이 분을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과거)으로 그래서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현재) 미래에 하늘에서 다시 오실 분으로 알며 종말에는 우리를 최후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실 분으로 ‘아들’이라는 칭호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해는 바울이 롬1:3-4, 고전15:24-28 빌2:9-11 3:20-21 등에 나타내었던 것들과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먼저 하나님의 아들과 관련하여 롬1:2-4, 9, 16-17을 통하여 우리가 알아 볼 수 있는 것은 바울이 복음에 대한 정의를 두 가지로 하고 있는데 먼저 롬1:2-4에서는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정의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을 섬긴다고 9절에 말하고 있다. 또한 롬1:3-5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져서 하나님의 권세를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하셨다”는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①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②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③성결의 영으로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 ④창조주로서의 온 우주에 대한 권세를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고백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⑤“예수는 만유의 주(퀴리오스), 예수 그리스도”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빌 3:20-21에서는 “우리가 하늘 시민으로서 막강한 하나님의 권능으로 하늘에서 올 우리의 구원자를 기다린다”라고 쓰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우리의 천한 몸을 자기의 영광된 구원의 몸과 같이 변화시키실 것인데 우리가 고대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1:10절을 보면서 ‘아들’이라고 말할 때 가장 기본되는 의미는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대권의 상속자”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대행하기 때문에 주 예수의 뜻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그의 구원의 힘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고 그의 구원의 행위가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인 것을 10절에서 포괄적으로 전제하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여기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하나님의 대권자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을 해야한다. 그분이 어떻게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무죄선언 하실 수 있었는가?(칭의와 무죄 선언은 결국은 같은 말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10절과 4:14과 5:9-10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그의 대속의 죽음을 우리가 이해하여야 한다. 즉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대권을 행사하시는 이 분은 다른 분이 아니고 우리 죄를 위해서 스스로를 대속의 제사로 바치신 분이신 것이다(아멘! 우리가 어찌 이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에 겨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그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의 제사의 덕을 입어 하나님의 진로로부터 사함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라는 복음은 초대교회의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케리그마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초대교회의 기본 복음이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 곳은 고전15:3-4 인데 이 부분을 우리는 소위 사도적 공통복음이라고 부른다. 거기서 사도들이 공통적으로 합의하며 전파한 복음은 ①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성경대로 죽었다는 것”과 ②“그리스도가 장사되었다는 것(땅에 묻혔다)” ③그리고 “그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성경대로 일으켜졌다”는 것이다. 이 역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초대교회는 바로 이 신앙고백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후 2000년의 모든 기독교의 역사도 이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이 복음은 로마서 5:9절에서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함으로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그의 대속의 제사로 지금 현재는 의인으로 이미 선언되었고 그래서 미래에 최후의 심판 때에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즉 칭의에는 현재와 미래 두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두 단계가 어떻게 관계 있는가? 그것은 미래의 하나님의 심판은 지금 믿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지금 현재의 의인 선언의 확인이다 . 다시 말하면 미래에 최후의 심판에서 무죄로 선언되고 의인으로 선언될 것을 지금 선취하고 있는 것이다. 즉 미래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 현재 믿음으로 얻는 칭의는 최후의 심판 때의 칭의의 선취이고 현재에서 미래를 바라보면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대속의 제사에 힘입어서 우리의 죄가 다 용서되고 씻겨지고 덮어지고 그것이 미래에 다시 재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살전 1:9-10에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셨다는 케리그마 가운데 그 가장 핵심이 되는 죽음의 형식을 암시함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미래에 우리를 구하는 것은 그의 대속에 힘입어서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는 분이라는 것을 또한 말해주는 것이다.
이 사상을 좀 더 정확히 파악하려면 연관되는 성경구절인 갈4:4-5, 롬1:2-4, 9, 16-17, 7:24-8:4 8:28-39과 같은 부분과 같이 살펴보아야 하는데 먼저 갈 4:4절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때가 차서 구원을 성취할 때가 이르매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서 나게 하셨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일명 sending fomula 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 보내심의 목적은 항상 구원이다. 이어서 갈4:5-6에서는 그 구원이 이중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속량하기 위해서이고 다른 한가지는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 구원의 첫번째 목적인 율법의 저주로부터 속량한다는 말은 율법의 저주가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자 하나님의 진노의 근거이기도 하므로 하나님으로 진노로부터 우리를 속량한다는 말과 다른 말이 아니다.
다른 성경구절인 롬7장과 8장에 걸쳐서는 바울은 갈라디아서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보냄의 형식을 시작으로 구원의 과정과 목적을 서술하는데 특히 8:28부터 시작해서 39까지 구원의 확실성을 아주 장대하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우리 구원을 종말의 심판 때까지 지키신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바울은 여기서 예정론에서부터 시작하여(8:29-30) 구원의 확실성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그래서 30절에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다. 그 어떤 존재도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 없다”.
이 문맥 중에 바울은 8:34절에서 우리 구원이 확실한 또 하나의 이유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보좌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하심을 들고 있다. 그런데 항상 그렇듯이 바울은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 부분을 굉장히 확대하여 독특한 기독론으로 전개한 부분이 히브리서인데 거기서도 대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대 제사장노릇하는 것과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우편에서 자신의 십자가의 대속의 제사를 근거해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중보기도하신 다는 대 제사장의 기독론이 대표적으로 히4:14-16절에서 멋지게 서술되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롬1:16-17절을 통하여 복음을 구원론적으로 정의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구원의 힘인 복음과 그 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한다. 이 복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그런데 이 복음이 선포될 때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는 우리는 의의 ‘관계론적 개념’을 살펴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의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 인류에게 하나님 노릇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언약행위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는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이미 담겨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순종했어야만 했다. 그래서 이 의의 관계론적 개념으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각자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바로 이 ‘의’ 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의 불의한 모습에 화를 내시며 아버지 노릇을 안하시면 이번에도 하나님 편에서도 불의한 것이된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관계론적 측면에서 보면 자신의 의무를 다 하지 않으신 것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쁜 소식 복음은 인간은 불의해도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것이다. 이때 의는 관계에서 나온 의무를 다함, 자기 약속을 신실히 지킴, 즉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를 통해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특별히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심으로 약속을 신실히 시키셨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의가 전 인류에게 나타난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신 사건이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우리 죄를 위해 내어주신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신 절정의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술에는 항상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 하심이 드러난다. 다른 말로 창조주가 우리를 사랑하심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사랑과 다른 말이 아니다.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하신 것이다. 거기에 죄악의 구렁텅이이 빠진 인간의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바로 이것, 우리 죄를 덮어버리고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인이라고 선언하는 것과 그리하여 곧바로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다름 아닌 칭의이다. 그래서 칭의가 법정적 개념으로 쓰이면 우리에게 무죄선언하신 것이고 또한 이것이 관계론적 개념으로 쓰이면 하나님이 우리와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심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발생하냐면 그의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심으로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으심을 당하시고 부활하시어 지금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는 분으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으로 가능하여 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에 들어 있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