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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6: 6-10 선행에 대한 권고 ( 1 )
2. 선행에 대한 권고 ( 6: 6-10 )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갈 6: 6 좋은 것을 함께 하라 -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
1] 가르침을 받은 자는
헬라어 '카테쿠메노스'(*)의 동사형 '카테케오'(*, '가르치다')는 원래 '이해하게 하다', '귓가에 울리게 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때로는 '좋지 않은 소리를 귀에 따갑도록 반복해서 알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 행 21: 21, 24 -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혹자는 본 절에 언급된 자들이 유료(有料)교사들의 집단으로 추측한다(Boice).
그러나 본 절 '카테쿠메노스'는 어떤 특정한 단체나 조직 속에 있는 자들을 가리키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교훈 아래 있는 자'들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Boice, Cole).
2]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들의 신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듯이 '가르치는 자'들의 신분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로서 다른 서신서는 '디다스칼로이'(*)라고 표현되었으며 '교사'라고 번역되었다.
* 고전 12: 28 -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 엡 4: 11 -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교사들'이 '가르치는 자'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인지에 대한 견해는 둘로 나뉜다.
Ⓐ 이들이 초대 교회 안에서 목회자적인 신분을 가진 자들로서 '디다스칼로이'와 같은 신분의 사람들이라 한다(Ridderbos).
그러나 본서가 다른 서신들보다 일찍 기록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볼 때 '가르치는 자' 즉 '카테쿤티'(*)가 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임명된 직분자들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 초기의 직분자들로서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과 바나바와 디도 같은 사역자들과 교회가 임명한 장로들을 가리킨다(Huxtable).
* 행 14: 23 -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이들은 '교사'들과는 달리한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전도 여행자들을 뜻하는 것 같다. 문맥상 Ⓑ의 견해가 무난하리라 본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모든 성도요,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목사들이다.
3]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말씀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라'는 말씀이다. '모든 좋은 것'이 무엇인가? 그것들은 음식과 옷과 집 등을 포함한다.
박윤선 목사는, 본 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는 교인들이 물질적으로 참된 자격 있는 교역자들을 도와주어야 할 것'을 가르친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의 주신 물질적 축복을 가리킨다.'고 주석하였다(바울서신[상], 103쪽).
청교도적 주석가 매튜 풀(Matthew Poole)도 '여기 언급된 좋은 것은 목사가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데 사용될 현세적 좋은 것들(temporal good things)을 가리킨다.'고 주석하였다(성경 주석, 3권 660쪽).
가르침을 받는 자는 왜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영적인 일의 종사가 육적인 일의 종사보다 더 귀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육적인 일은 썩는 양식을 위한 것이지만, 영적인 일은 영생하는 양식을 위한 것이다.
육적인 일은 이 세상 살 동안만의 일이지만, 영적인 일은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영원한 세상에서도 유익한 일이다.
영적인 일은 곧 하나님 자신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기를 원하시는 바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셨고, 지금도 그 이루신 바를 사람들에게 적용하기를 원하시는 일이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5: 27에서 이 사실을 증거하기를,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다.
우리가 영적인 것의 참 가치를 안다면, 육적인 것을 함께 나누기를 아까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고린도전서 9: 11에서도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라고 했다.
바울 사도가 이런 이유 때문에 영적으로 어린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지만, 이치는 그러하였다.
참된 목사들이 이런 말씀에 근거하여 더 나은 대우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지만, 교인들은 이런 이치를 알고 이 말씀을 순종하려 해야 할 것이다.
구약의 십일조 제도도 원리적으로 이런 이치를 확증한다.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성전 봉사자들에게 물질적으로 후한 공급을 하였다.
민수기 18: 21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12지파에 속한 백성들의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려져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12지파의 각 지파가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쳤으니, 각 지파에는 10분의 9가 남았을 것이고, 레위 지파는 10분의 12를 얻었을 것이다.
물론 레위 지파는 그들이 얻은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려 제사장들에게 주었다. 그러면 실제로 레위 지파가 얻은 소득은 10분의 11이 조금 못된다. 이와 같이, 레위 지파의 소득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소득보다 평균적으로(?) 많았다.
제사장들은 레위인들 보다도 더 윤택한 생활을 했다. 제사장들의 수가 레위 지파 전체 수의 10분의 1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레위 지파가 받은 10분의 12 중에서 10분의 1을 받았다. 제사장들은 이런 십일조 외에도 백성들의 제물들의 일부분을 그들의 몫으로 받았다.
민수기 18: 12에,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 제사장들에게 ) 주었다'고 했다.
또 민수기 18: 29에 보면, '( 레위 지파 사람들은 ) 너희가 받은 모든 헌물 중에서 너희는 그 아름다운 것 곧 거룩하게 한 부분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지니라.'고 말씀했다. 여기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원어(켈레브)는 '기름진 것', '가장 좋은 것'을 의미한다.
제사장들은 가장 좋은 것들을 풍성하게 받았다. 이와 같이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레위 지파 사람들과 제사장들 곧 성전의 일에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적으로 윤택함을 주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운영의 원리를 보인다.
물론, 신약 시대에 제사장이나 레위 지파가 있지는 않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 성전 일에 전무(專務)한 자들이 있었듯이, 신약 시대에도 복음 사역의 일, 교회의 일에 전무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목사요, 목사 후보생들 곧 전도사들이요, 또 교회의 기타 전임 봉사자들(full-time workers)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들이 구약의 십일조 정신으로 교회의 목사들과 목사 후보생들 그리고 교회의 전임 봉사자들에게 물질적으로 공급하여야 한다.
목사들은 오직 성경 연구, 독서, 설교 준비, 심방 등 주의 일에만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
목사 후보생들은 충실한 신학 교육과 목회 훈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교회의 기타 전임 봉사자들을 채용하는 데도 어려움이 줄어들 것이다.
물질적 유여함이 교회 봉사자들을 생활의 해이함과 불성실함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특히 오늘날 어떤 목사들의 사치나 안일은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죄악이요 사탄의 시험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그들 간의 문제이다. 교회와 성도들 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십일조 제도에서 보여주신 정신에 따라 마땅히 교회의 전임 사역자들을 물질적으로 넉넉하게 공급하는 것이 옳다.
교회가 재정이 부족해서 그들에게 유여하게 공급하지 못하면 몰라도, 재정이 있는데도 인색한 마음으로 바르게 쓸 줄 모른다면 그것은 잘못이라는 말이다.
갈 6: 7 속이지 말라 -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
1] 스스로 속이지 말라.
'속이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라나스데'(*)는 3절에 '프레나파타'(*)와는 차이가 있다.
'플라나스데'는 '길을 잃게 하다', '진리에서 벗어나도록 하다', '잘못되게 유인하다', '미혹하다' 등을 뜻하는 '플라나오'(*)의 현재 수동태 명령법으로 '어떤 유혹에 미혹되어 믿음을 잃게 되다'는 뜻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원어는 단순히 '속지 말라'고 번역할 수 있다.
누구에게 속지 말라는 뜻인가? 아마도 마귀에게, 또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에 속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2]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업신여김'에 해당하는 헬라어 '뮈크테리제타이'(*)는 '바보 취급당하다'(to be fooled, NEB)라고 번역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그릇된 본성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이기적 본성에 의하여 저질러진 행위는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등한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본 절에서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꿰뚫어 보시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공의로운 심판을 하실 것을 의미한다.
* 시 139: 1-6 -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 겔 11: 5 -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렇게 말하였도다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
본 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하며 할례를 행하는 자들이 오히려 진정한 율법의 정신인 사랑과 선행을 무시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는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교훈하고 있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조롱함을 혹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는 뜻이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선대하고 후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접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받으실 만한 분이시다. 앞에서 언급한 십일조 제도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켈레브, best part)을 요구하셨다.
* 민 18: 12, 29-30, 32 - 12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29 너희가 받은 모든 헌물 중에서 너희는 그 아름다운 것 곧 거룩하게 한 부분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지니라. 30 이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그 중에서 아름다운 것을 가져다가 드리고 남은 것은 너희 레위인에게는 타작 마당의 소출과 포도즙 틀의 소출 같이 되리니 32 너희가 그 중 아름다운 것을 받들어 드린즉 이로 말미암아 죄를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성물을 더럽히지 말라 그리하여야 죽지 아니하리라.
* 신 6: 4-5 -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잠 3: 9-10 - 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10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이 말씀들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최선의 것, 최상의 것을 원하신다.
3]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바울은 인간의 행위를 자연 법칙에 비유한다.
이렇듯 행위와 그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농사의 비유를 들었다. 씨 뿌리고 거두는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헬라 문화와 성경에서 자주 발견된다.
* 마 7: 16 -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 막 4: 26 -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 눅 19: 21 -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 고후 9: 6 -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바울은 고후 9: 6에서 적게 심는 것과 많이 심는 것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나 본 절에서는 심는 것과 거두는 것의 '질'에 대하여 논한다.
'심든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페이레'(*)는 현재 가정법 능동태로 미래 조건을 나타내기 위해 '에안'(*, '...하든지')과 연결되어 있다. 현재 가정법은 동작의 계속적 반복을 나타내므로 본 절에서 묘사된 행위는 인간이 지속적으로 행하는 각각의 행위를 말한다.
또한 미래조건절임을 나타내는 '에안'이 사용된 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가 미래의 결과, 곧 하나님의 심판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그것을 어떻게 실생활에 실천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가 미래의 심판대 앞에서 어떠한 결과를 거둘 것이냐 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의 근거로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것을 든다.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이 구절이 시작된다. 심은 것을 거두는 것은 자연계에나 영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진리이다.
사무엘상 2: 30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사사 엘리에게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귀한 것으로 섬겨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귀히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가장 귀히 여기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 12). 이 말씀을 하나님께 대해 적용해 보라. 우리가 하나님께 가장 좋은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대접해야 한다.
갈 6: 8 심는 대로 거두리라 -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
1]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육체를 위하여'라는 말의 뜻은 이 세상만 알고 이 세상만 상대하고 일함을 의미한다. 이런 일은 썩어진 것을 거둘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1) 이 세상이 헛된 것이고 썩은 것이다. 그것을 목표하고 일한 결과는 썩은 것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2) 이 세상을 목표로 하는 일은 성령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일 자체가 썩은 것이기 때문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일반적인 법칙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경우에 적용된다.
바울이 앞장에서 육체와 성령을 비교한 논리(5: 16-18)와는 차이가 있지만 세상 끝의 추수를 바라보는 시간은 동일하다.
타락한 육체의 본성을 따라 규모 없이 생활한다면 육체적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초래하게 되며 영적인 성품들을 잃게 될 것이다.
2]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자기의 삶을 성령에게 맡기고 성령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 롬 8: 14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러한 삶은 인간 내면세계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이는 육체적인 생명 전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부활 후에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영화(榮華)로운 생명을 의미한다(Ridderbos).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함은, 신자가 성령에게서 받은 모든 은혜와 능력을 하나님 봉사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희생함이다.(Greijdanus).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함은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전인격(영혼과 몸)이 영생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 구절은 사람이 그의 선한 행실의 공로로 영생을 얻게 된다고 가르치는 의미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믿음과 행위를 각각 별개의 것으로 생각할 때, 이 구절을 그렇게 잘못 보게 된다. 우리가 이론적으로는 믿음과 행위를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 둘은 함께 있다.
참된 믿음은 의로운 행실을 열매로 나타낸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선(믿음으로 행해진 선)을 행하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선행이 영생을 얻는 공로는 아니다.)
원문은 본 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온다. 본 절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사실의 근거를 다시 제시한다. '자기 육체를 위해 심는 것'은 육신의 일, 세상의 일, 혹은 죄악 된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썩어질 것'은 '썩는 것'을 가리킨다.
'썩어질 것을 거둔다.'는 말씀은 육신의 일, 세상의 일, 혹은 죄악 된 일의 결과는 다 '썩는 것, 멸망할 것'이라는 뜻이다.
'성령을 위해 심는다는 것'은 믿음의 일, 의로운 일, 선한 일, 복음 전도의 일, 교회 부흥의 일, 교회 건립의 일을 가리킨다. 그것은 영생의 길이다. 이것은 사람이 이런 일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가 아니고 육체를 위해 심는 자가 아니고, 성령으로 사는 자이며 성령으로 심는 자, 곧 선한 일을 행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교회에 참석하고 헌금하는 일, 전도하고 선행을 하는 일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 영생 얻은 자들의 표요 장차 영생에 들어갈 자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일들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도, 우리는 우리의 최선의 것으로 하나님을 대접하자. 또 교회는 세상일을 버리고 교회의 일, 하나님의 일, 복음 사역에만 전심전력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멸시하지 말고 물질적으로 선대하며 후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