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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13: 5 너희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너희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 고후 13: 5 )
오늘 말씀의 주제는 믿음이다.
여러분의 믿음의 무게가 얼마나 될 것으로 생각합니까? 그 깊이와 길이와 무게가 얼마나 될 것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곰곰히 생각해 보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 문제는 심각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도 그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모든 물체을 측량하는 장치들이 있다. 몸에 열이 나면 체온계를 사용하면 금방 알 수 있다. 키가 얼마인지, 운전자의 음주량이 얼마인지, 자동차가 달릴 때 속도가 얼마인지 계측기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사람의 몸속뿐 아니라 지구의 둘레나 땅속의 깊이, 바다의 깊이, 태양의 열이나 빛의 속도도 잴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재보고 달아볼 수가 없다. 자로 잴 수도 없고 저울로 달아볼 수도 없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너희 믿음을 달아 보라'고 하신다. 우리는 겉모습만 보고 믿음이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가 없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다. 니고데모는 중생도 몰랐지만,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해서 장례를 치렀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겉만 보고 판단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 후서를 끝내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믿음이라는 시험의 척도를 제시하고 있다. 이 시험의 척도는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바울은 '너희 자신의 믿음을 시험해 보라'고 명한다. 짧은 본문에 '너희'라는 단어가 여섯 번이나 나온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너희 자신을 시험하고/너희 자신을 확증하라/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그러니까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를 '시험해 보라(test), 찾아 보라(to see), 확증하라(to find out)'고 한다. 생필품 중에는 한번 구입하여 사용하다 버리는 것도 많지만, 어떤 것은 쓰면서 수시로 점검하고 확인하면서 써야 하는 것도 있다. 만약 확인하고 점검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생명의 위협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의 경우에는, 차를 구입하여 폐차할 때까지 엔진 오일이나 냉각수, 타이어의 압력, 브레이크 등을 점검해야 한다. 가스도 마찬가지다. 밸브에 새는 곳은 없는지, 연결 고리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기구가 안전한지 늘 살펴야 한다.
물건만 점검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점검해야 한다. 부부간에도 서로의 사랑을 점검하고 자녀도 늘 점검하고 확인해야 한다. 아이들이 잘못되었을 때 부모들이 쉽게 하는 말이 '우리 애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부모가 알고 있는 아이와 실제가 다르다는 뜻이다.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친구나 학교, 사회를 통해서 변화하고 있다. 그런 자녀들을 얼마나 점검하고 자녀의 친구들을 아는가? 자녀의 취미가 무엇이며, 어디에 잘 가는지 점검해야 한다.
여러분, 살면서 누구에게 배신당합니까? 가까운 사람, 친구 같은 사람에게 당한다. 이렇게 주변 사람들을 점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기를 점검하는 일이다. 건강이나 일상을 점검해야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를 점검하지만 본문 말씀대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하는 일이 가장 귀중한 일'이다. 왜 그런가? 믿음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왜 중요한가? '버리운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왜 우리는 구원을 받아야 하며 왜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성경에 보면 세 가지 운명의 선언이 있다.
▶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롬 3: 23). ▶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 23). ▶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다(히 9: 27).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친밀했다. 같이 손잡고 산책하고 대화하고 가까이 지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끊어졌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에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리 떠나게 되었다(롬 3: 23). '죄의 값은 죽음이라' 죄의 결과로 인간에게는 죽음이 왔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히 9: 27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다. '죄와 죽음과 심판' 이 세 가지 운명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피할 수가 없다.
심판은 분명히 있다. 사람이 한 세상만 산다고 생각합니까? 천만에 그렇지 않다. 사람은 세 가지 세상을 산다. 첫 세상은 모태에서의 세상이다. 모태에서는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세상에 나간다는 것도 모른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밖의 세상을 모른 체 산다. 얼마동안 삽니까? 280일의 짧은 기간이지만 편하게 살았다. 완벽한 환경 속에서 그 세상이 전부로 알고 살다가 두 번째 세상인 이 세상으로 나왔다. 이 세상으로 나올 때는 악을 쓰고 운다. 울지 않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나를 알고, 부모를 알고, 이웃을 알고, 사랑을 아는 인간의 의식을 배우게 되는 더 긴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80년-100년의 세상을 살다가 다음 세상으로 들어가는 때가 온다. 죽음이다. 그때도 울게 된다. 형제와 자식, 이웃까지도 울어 준다. 오는 세상은 280일, 100년이 아니라 영원한 세상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오는 세상은 초월의 세계다. 말이 필요 없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오는 세상으로 들어갈 때는 인간들이 두 편으로 갈라진다고 말한다. 하나는 영원한 천국의 세계,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세상과 다른 하나는 영원한 지옥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다. 갈라지는 시점이 '심판'이다.
1. 믿음이 무엇인가?
1) 우리의 생명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를 깊이 알고 믿는 것이다.
잘 믿는다는 것과 바로 믿는다는 것은 개념상 큰 차이가 있다. 잘 믿는 것은 형식상의 문제라면 바로 믿는 것은 본질상의 문제다. 바로 믿으려면 바로 알아야 한다. 예수가 누구인가? 교회가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바로 믿을 수 있다.
▶ 최불암 시리즈에 나오는 유머가 있다. 최불암, 유인촌 두 사람이 미국 여행을 하고 있었다. 각각 자동차를 빌려 타고 미국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였다. 미국은 고속도로마다 고유번호가 붙어 있다. 예를 들면 10번, 105번, 405번, 605번 그렇게 되어 있다. 어느 날 최불암씨가 105번 고속도로를 시속 100마일로 달리다가 교통경찰에게 걸렸다. 미국의 고속도로는 60마일이 제한 속도다. '면허증을 보여 주십시오. 왜 속도를 위반했습니까?' '속도를 위반하다니요. 저는 표시대로 운전했는데요' '이 도로는 제한 속도가 60마일입니다.' '저는 105마일이 제한 속도인 줄 알았는데요' '아닙니다. 그건 도로 이름입니다.' 이 말을 듣고 난 최불암씨가 잠깐 망설이더니 하는 말, '허허 큰일났네. 유인촌 그 친구 405번 도로로 들어갔는데...'
웃기느라 만든 유머지만 뜻하는 바가 있다. 바로 알아야 살기도 편하고 바로 믿을 수가 있다는 의미다. 본문도 '예수께서 너의 안에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묻고 있다. 그 분이 내 안에 성전 삼고 계신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신 줄 믿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그 예수를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행하는 믿음이 내게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데는 문제가 없다. 그래서 회교도 유대교도 천주교도 통일교도 하나님을 믿는 일에 이의가 없다. 모두 똑같은 형태로 하나님을 믿는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문제가 나오면 복잡해진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종교 간에도 이 예수 때문에 갈등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일에 우선 몇 가지 신비한 내용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아들 됨, 나의 구주가 됨,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 재림 등이다. 한결같이 이성적으로 믿기 어려운 조건들이고 영적인 도움이 없이는 믿기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믿지를 못한다. 자녀들이 부모의 은혜는 알고 있다. 그래서 '하늘보다 높다'라고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것은 아는 차원을 고백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자녀들이 부모의 마음을 깊이 알 때가 온다. 그것이 언제인가? 애를 낳아서 길러본 후이다. 그것도 낳은 자식으로부터 속을 썩어보아야 한다. 그때 흘리는 눈물이 진짜 부모의 마음을 깊이 아는 고백의 눈물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깊이 체험할 때가 오게 된다. 그때부터는 우리가 예수를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고백하고 믿게 된다. 카톨릭 신학자 '칼 융'이 '오늘날 신앙인들은 너무 추상적으로 예수를 믿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 예수가 나를 구원하시고 나의 구세주 됨을 지식으로만 알뿐 체험되고 고백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 '예수께서 너의 안에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⑴ '주님이 내 인생의 구주이시며 내 생명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느냐?'를 묻고 있다.
이 물음 속에는 주님의 십자가를 온전히 믿는가도 포함되었다. '죄 사함의 은혜와 구원에 감격을 누리고 있느냐?'를 묻고 있다.
⑵ 이런 믿음이 확실하면 우리에게 먼저 기쁨이 있다.
시 16: 11에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증거는 기쁨이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증거는 사랑으로 사랑의 교제가 있는 곳에는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다. 사랑할 때는 그 마음속에 기쁨이 있고 그 사랑만 생각하면 즐거움이 생긴다. 여러분, 삶에 기쁨이 있습니까? 아니면 권태와 짜증, 원망과 미움이 있습니까?
⑶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평강이 온다.
요 14: 27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또 요 16: 33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2) '빛'으로 오신 예수를 품고 사는 것이다.
빛은 생명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생명이다. 요 1: 4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 말씀은, 예수 안에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은 사람들 속에 빛으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요 8: 12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셨다. 믿음은 빛 되신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빛은 '생명이요, 사랑이며, 길이고, 진리'다. 요한복음의 주제다. 이 빛을 받아들여서 빛을 품고 살아가면 그가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 빛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영의 양식을 주고, 은혜를 주고, 믿음을 더해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들이 이 빛을 품고 살아갈 때 불의를 멀리하게 되고, 죄를 멀리하게 되고, 멸망에서 멀어지고, 심판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 이런 사람들을 빛의 자녀라 한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을 '어두움의 자식'이다.
▶ 이 세상에서 가장 맛이 좋은 사과는 미국 캘리포니아산 사과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곳은 일조량이 아주 풍성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곡식도, 과일도, 식물들도, 햇빛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께로부터 나오는 이 빛을 받고 살아갈 때 성숙한 신앙, 열매 맺는 신앙 인이 된다. 그래서 이 빛을 '믿음의 빛, 생명의 빛'이라고 말한다.
3) 사랑의 사도 요한은 이 믿음을 '질'(품격)로 비유했다.
요 1: 4에 '그 안(빛/예수)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했다. 생명이 모두 똑같지 않다. 어두움에 묻혀서 살아가는 생명도 있고, 그 빛 가운데 거하는 생명도 있다. 어두움에 묻혀서 살아가는 생명은 살아 있으나 실은 죽은 영혼이고 무의미한 생명이다. 사람도 보면 변화 받은 사람이 있고 변화 받지 못한 옛사람 그대로의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생명은 같을 수가 없다. 우선 질이 다르며 모양이 다르고 내용이 다르다. 색깔이 다르고 품위가 다르다. 예수 안에 있는 영혼은 질이 다르다. 고품격이다. 여러분의 질은 무엇입니까? 사람은 질이 좋아야 한다. 물건도 질이 좋아야 값이 있다. 우리가 질을 따질 때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 하나는 품질이다. 이것을 '아가도스'라 한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신앙이든, 사랑이든, 불문하고 품질이 좋아야 한다. 거짓말하고 사기 치고 허풍떠는 사람들을 가리켜 '질이 나쁜다.'라고 한다. 왜 그런가? 품질이 좋지 않아서 그렇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꾸만 위태위태한 것은 믿음의 품질이 나빠서 그렇다. 그리고 믿음 생활을 하면서도 변화를 받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도 믿음의 품질이 좋지 않아서 그렇다. 그래서 믿음이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품질이 좋아야 한다.
▶ 다음은 '모양'이다. 이것을 '칼로스'라고 한다. 질을 말할 때는 품질만 좋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모양도 좋아야 한다. 사람이 마음씨가 곱고 품질만 좋다고 모두 인기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마음씨만 보지 않는다. 품질도 좋고 모양새도 아름다워야 그게 고루 갖춘 미인으로 본다. 그래서 얼굴 짱, 몸 짱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신앙도 '질'이다. 여기서 질이 좋다는 말은 품질과 모양이 다 같이 좋다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를 알고 변화를 받게 되면 먼저 질적인 면에서 변화를 받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이 속에 모든 믿음의 행위가 다 들어 있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다. 그래서 믿음을 질이라고 말한다.
4) '고난을 믿음'으로 이해하게 된다.
사람들의 평소 믿음을 보고 우리가 그대로 평가할 수는 없다. 사람의 성격이 평소에는 좋을 수가 있다. 평상시에는 그 사람의 성격이나 인격을 알 수가 없다. 손해보는 일을 당하던지 불이익을 당해보아야 알 수 있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평소 평안할 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그 믿음을 좋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어려움을 당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때 물러나는 사람이 있고 더 다가서는 사람이 있다. 믿음은 시련기를 맞아보아야 측정될 수 있다. 요셉을 보면 형들에게 팔려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다. 누명을 쓰고 옥살이하며 10년이라는 세월을 하염없이 고뇌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 그는 어느 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형들이 그 앞에 나타났다. 순간 요셉의 눈에서 불이 일어났을 것이다.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고 두려워했다. 그때 요셉이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나를 팔았다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당신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당신들을 통해서 나를 먼저 이곳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우리 주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 예수가 내 안에 있으면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 즐겁다.
성경은 '형제를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는 모든 사람은 주안에서 형제 된 사람들이다. 그 형제들을 뜨겁게 사랑하라고 했다. 이것이 내가 믿음이 있는가를 잴 수 있는 척도다. 여러분, 누구를 사랑해 보았나? 누군가를 사랑해서 그를 위해서 물질을 나누고 수고해 보고 헌신해 보앗는가?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누구를 위해서 수고하고 희생하고 나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요 14: 23에 보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를 사랑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듭남의 표적이다. 하나님을 닮아 가는 모습이다. 신앙의 표징이다. 또 사랑은 관심이다. 영혼에 대한 관심, 하나님 자녀 되게 하려는 관심, 구원의 관심이다. 그것이 없으면 전도가 불가능하다. 전도는 영혼 사랑의 결과이고 열매다.
5) 예수가 내 안에 있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승리자로 살아갈 수 있다.
요일 5: 4-5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그렇다. 믿음은 모든 것의 배경이다. 빽이요 힘이다. 뜻이며 의미다. 우리의 생존의 이유이고 목적이다. 이 믿음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본문은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인하라 너희 안에 예수께서 계신 것을 모르느냐 모르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우리가 '시험하고 확증하고 점검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1) 예배를 점검해야 한다.
건전한 신앙생활의 제일 조건은 예배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분명하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43: 21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고 말했다. 예배가 찬송이다.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은 예배로 시작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하늘나라에 가서도 예배를 드리는 존재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호흡이 끊어지지 않는 것처럼 예배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수가성 우물가에서 주님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예배로 히브리어로 '아바드'인데 이 말은 '섬긴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일 좋은 방법은 예배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잘살기 위함이 아니며, 고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자로 살겠다는 목적이 출애굽의 사건이다. 우리에게 예배처럼 중요한 일은 없다. '오틀런드'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예배는 인간이 하는 일 중 가장 숭고한 것이요, 가장 가치 있는 행위'라고 말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인데 예배가 바로 그것이다. 출 3: 12에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예배)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2) 헌금생활을 점검해야 한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다. 성경에는 중요한 열쇠 네 가지가 있다.
⑴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의 열쇠다.
믿음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 그 믿음이 열쇠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마 16: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⑵ 어떤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는 '기도'의 열쇠다.
기도는 지금도 역사를 일으킨다. 기도는 지금도 응답된다. 마 7: 7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⑶ 말씀을 잘 지킴으로 하늘 보고를 여는 '순종'의 열쇠다.
신 28: 12에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찌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⑷ 물질 축복의 문을 여는 '십일조'의 열쇠다.
말 3: 10-12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씀 중에 두 마디가 우리를 흥분시키고 있다. '하늘 문을 열고' 그리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는다' 그렇다. 십일조 이야기는 돈 이야기가 아니라 축복의 이야기다. 어부는 절대로 그물을 팔지 않는다. 농부는 아무리 어려워도 종자 씨를 먹지 않는다. 화가는 아무리 살림이 어려워도 붓을 없애지 않는다. 목수는 망치와 대패는 어디를 가든지 가지고 다닌다. 성도는 십일조만은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
3) 전도자로 살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의 관심사가는 전도다. 주님의 마지막 유언도 전도다. 마 28: 18-20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한 영혼이 구원받는 일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고 했다. 전도는 한 사람을 교회로 데리고 와 교회를 부흥시키자는 차원이 아니다. 전도는 '진정한 사랑의 열매이고 관심의 열매이고 섬김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을 배려하고 선물을 주고 섬기는 일이 전도라고 할 수 있다.
⑴ 이웃의 운명에 관심을 두는 일이다.
내 친구가 암에 걸려 투병하고 있고 그때 내가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의 가까운 친구이기에 나만 알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도다. 바울은 딤후 2: 10에서 '택한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가 구원받게 하려함이라'고 했다. 그가 전도를 받게 된다면 나는 모든 어려움을 참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전도는 상대방에게 깊은 관심을 두는 데서 출발한다. 이 관심이 중요하다. 자식이나 부모, 형제라도 상대방의 운명이나 영혼에 관심이 없으면 전도는 상상할 수도 없다.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전도를 할 수밖에 없다. 나의 배우자,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그냥 둘 수가 없다. 그래서 눈물로 기도하게 된다.
골 4: 3에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하게 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다.
⑵ 이웃의 마음을 배려하는 것이다.
골 4: 5에 보면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했다. 나의 행동이 때로는 상대방에게 부정적으로 선입견을 품게 할 수 있다. 생각 없는 행동이 상대방에게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게 하고, 예수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다. 불신자들은 신자들의 언행에 세심하게 보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살면서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인색하거나 무례하고 말이 많음도, 무책임함도, 신용 상실도 모두 전도의 문을 막는 걸림돌 역할을 한다. 오늘의 섬김과 친절은 씨를 뿌리며 심는 일이고 언젠가 열매를 거둘 날이 오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의 공동체의 삶을 이루는 데는 이 배려하는 삶과 정신을 발휘하는 삶이 절대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옥중에서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⑶ 모든 기회를 활용한다.
골 4: 5에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헬라어로 '기회를 사라'는 뜻이다. 그 말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라'는 말씀이다.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기회가 주어져 있다. 기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절호의 찬스다. 그리고 기회는 잡아야 열매가 열린다. 기회가 왔는데도 잡지 않으면 지나가 버린다. 그래서 바울은 '기회를 사라'고 당부하고 있다.
⑷ 확신 있게 전해야 한다.
신앙은 확신이 필수적이다. 구원의 확신, 응답의 확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의 확신이 있을 때 힘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다. 확신을 가지면 그 확신이 내 주위 사람들에게 전염된다. 옆 사람도 자신감을 갖게 만든다. 여러분은 진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고 하시기를 소원한다.
⑸ 전도자에게 따르는 표적이 있다.
무기 없이 병사들을 전쟁터에 보내는 장군은 없다. 하물며 대장 되시는 예수님이 전도자를 그냥 보내지 않으신다. 능력과 권세로 무장시키신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눅 9: 1). 그럴 뿐만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하신다.'라고 약속하셨다. 그 결과 전도자들이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났다. 막 16: 17-18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약속하셨다. 교회 안에만 머무는 신앙은 귀만 커진다.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으로 선 것은 전도 현장에서다. 바울이 위대한 사도로 성장한 것도 선교 현장에서다. 영혼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면 주님의 손이 함께 하신다. 그리고 전도자의 삶이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이 나게 하신다. 단 12: 3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3.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얼마나 가까이 하며 살았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예배를 위해 얼마나 교회를 찾았나? 하나님 말씀을 배우기 위해 얼마나 교회를 찾았나?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얼마나 교회를 찾았나? 봉사하기 위해 얼마나 교회를 찾았나? 예수의 이름으로, 참 행복한 교회의 이름으로 얼마나 일하셨나?
교회는 법적인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의무적으로 온 구성체가 아니다. 교회는 자유 사회다. 자원하는 사회다. 누가 강요해서 되는 곳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모이는 곳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분량대로 봉사한다. 우리는 각자 다 독특한 성격이 있고, 생활 능력이 다르며, 학식이 다르고, 신체조건이 다르다. 그런데 어떻게 똑같이 평가할 수 있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시는 것을 믿기 바란다. 자기 분량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것도 없다. '나는 이렇게 하는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할까'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이 다 아시고 계신다.
교회는 일을 찾아서 하는 곳이다. 시켜도 하기 싫으면 그만둘 수 있다. 그러나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고 했다.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기를 원하시는 일을 우리가 자진해서 해야 한다.
작은 일에 힘을 다해야 한다. 교회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어떤 사람은 이름이나 내고 얼굴 내미는데 서는 잘한다. 그런데 이름 없이 빛없이 힘들고 어려운 일은 기가 막히게 알고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에 보면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 일을 맡긴다'고 했다. 목동으로 최선을 다했던 다윗에게 왕을 맡겼고, 사환에 최선을 다했던 사람 요셉에게 총리를 맡겼다.
교회의 일은 사람을 관계치 말고 위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일한다. 충성, 봉사는 기쁨으로 하고 아낌없이 해야 참되며 값지다. 기쁨이 없는 봉사가 아니다. 기쁨이 없이는 헌금이 아니다. 모든 일을 기쁨으로 하시기 바란다. 그래야 하는 일이 즐겁다.
특별히 하나님이 세우신 목회자를 얼마나 도왔는가를 점검해야 한다. 여러분은 목회자를 위해 얼마나 기도했으며 목회자가 즐거움으로 일하게 했는가? 근심으로 일하게 했는가? 히 13: 17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