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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제13장
예루살렘 성전의 몰락 막13:1-2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이 유대인의 환심을 얻기 위해 정책적으로 지은 것입니다. 그 성전 안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된 신앙을 통렬히 꾸짖으신 주님께서(마23:2-39;막12:35-37) 성전을 떠나려 하시자 한 제자가 수선스럽게 성전의 규모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답변은 그 아름다운 성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성전은 주님의 예언대로 완공된지 7년도 안되어 주후 70년경 로마군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역사는 현재의 거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몰락에 관해 상고함으로 오늘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고자 합니다.
1. 성전을 보는 시각
1) 제자의 시각
'보소서 이 돌들이 어찌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1절) 하듯이 제자들은 성전의 (1) 외형만을 보았습니다. 성전은 기초석 크기 하나가 길이 12미터, 높이 4미터, 폭이 6미터나 되는 아프리카산 녹백색 대리석으로 장식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멀리서 보면 바다같이 보였으며, 또한 본 건물 전면부에는 금관을 입힌고로 햇뱇에 반사된 성전은 마치 찬란한 황금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성전 건물 자체를 이스라엘의 이상으로 여기며, 우상화했습니다. 우상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신격화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2) 제자들은 현재만 바라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칼빈은 말하기를 '제자들은 땅의 성전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하늘 천국을 바라보지 못하는 근시안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성도는 비록 땅에 거하지만 영원한 것을 사모하고 추구하는 자입니다. 그래야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벧후1:4-9) (3) 제자들은 주님께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만 관심이 있었고, 정작 성전의 주인되시는 주님께는 무관심했습니다. 영적 지혜가 부족한 무지의 상태였습니다.
2) 주님의 시각
주님께서는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2절)고 제자의 어두운 시각을 책망하시며, '돌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2절)고 하심으로 제자들과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예언하셨습니다. 성도는 매사를 주님의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1) 말씀의 시각으로 보셨습니다. 주님은 성전의 '건물'을 보신 것이 아니라 성전의 '정신'을 보셨습니다. 세속화로 부태되어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막11:15-17)은 말씀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소멸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하33:7-10) 이처럼 성도는 세상의 사물과 사건들을 대할 때 말씀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눈은 영적 통찰력을 가져다 줍니다. (2) 주인의 시간으로 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성전을 대하실 때마다 '내 아버지의 집'(눅2:49)이라고 하심으로 성전의 소유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성도는 만물을 대할 때 장차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상속받을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고후4:16-18) 그런 시각을 가지게 될 때 비로소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고전3:21-23)
2. 성전 몰락의 요인
1) 평화의 주님을 폭력으로 처형했습니다.
교회는 어떤 형태든지 폭력을 의지하거나 사용하거나 선동해서는 안되며, 선으로 악을 이기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보다 무서운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마10:27-32)
2) 죄악의 온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한 지도자들의 부패와 무지, 불신앙, 위선, 탐욕, 허영 등은 성전을 더럽혔고 따라서 옛적 유다의 솔로몬 성전처럼 소멸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겔8장) 오늘날 우리 교회들이 기복화, 상업화, 친목단체화 등으로 세속적 기관으로 타락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권위를 훼방했기 때문입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면'(14절) 몰락이 시작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예언은 장차 나타날 적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지만(살후2:3,4) 원리적인 측면으로 볼 때 교회가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인본주의로 전락하면 심판을 당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교회는 주님외에는 모든 것을 우상으로 여겨야 합니다.
4) 주님께서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버린'(겔10:18) 솔로몬 성전도 소멸되고, 주님을 떠나게 한 헤롯 성전도 결국 나라와 함께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종교가 부패하면 사회도 부패하고, 따라서 정치, 경제, 문화 도덕 등 모든 분야가 부패해져 나라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머무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주께서는 오직 당신의 계명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오셔서 함께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기억합시다. (요14:20-24;계2:4,5)
적그리스도의 미혹 막13:3-5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 멸망의 때와 징조에 대해서 묻는 제자들에게 그날에 특히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를 주시는 내용입니다. 왜 주님께서 하필이면 사람의 미혹을 받지 말도록 권고하셨는지 우리는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께서는 그 이유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제 과연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 사상들이 성도를 미혹하고 자신들이 구세주라고 자처하는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단 종파의 미혹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6절). 예루살렘의 멸망, 즉 세상에 종말이 올 때에는 극에 달한 환란과 함께 자칭 구세주라 하는 자들이 이리 저리 우후죽순처럼 일어납니다. 특히 역사의 격변기로 인해 정치와 종교, 그리고 사회가 혼란해지면 이단들은 극도의 신비주의와 유토피아적인 이념을 내세워 마치 자신만이 이 어려운 난세를 바로 잡을 수 있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등장합니다. 한국내에서도 자칭 구세주라고 하는 가짜 예수가 약 300여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전도관 신앙촌의 박태선, 통일교의 문선명은 그들 나름대로의 종교적 형태를 갖추고 커다란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특히 통일교는 막대한 금권으로 정치와 재계에 진출하면서 심지어는 정치자금으로, 기존 교회 목회자들에 대한 원조금으로, 자기들의 왕국 건설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있는 지경입니다. 통일교가 우리 교계에 침투해 들어오는 방법과 방식은 너무나 교묘하고 철저하여서 자신도 모르게 성직자들도 말려드는 사례가 흔합니다. 또 미국의 몰몬교, 사랑의 가족, 하나님의 빛 선교단 등도 무시 못할 세력으로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는 이단종파입니다. 이들은 다 공히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면서도 또 다른 의미의 구세주로 자기네 종파의 교주를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말세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외에는 다른 아무 길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함을 더욱더 깊이 깨닫고 믿음위에 굳건히 서야 하겠습니다.
2. 물질만능의 미혹
주께서 말씀하신 바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확대해서 생각해 보면 그 말은 다시 말해서 사람이 생각해내고 유출해 낸 인간 중심의, 혹은 하나님 외의 다른 어떤 것을 절대화 시키는 사상과 문화의 흐름에 미혹되지 말라는 뜻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가장 심각하게 인간을 파괴하고 침체시키면서 미혹하는 것은 물질 만능주의입니다. 자본주의가 싹트고 산업 혁명이 일어난 후 인간의 삶을 결정지어 주는 요소로 경제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습니다. 경제의 필요불가결성은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 이후에는 거의 현대적 삶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간의 삶을 경제가, 즉 더 축소된 의미로 말한다면 물질이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물질은 인간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참으로 물질적 재화가 있지 않으면 거의 인간적 삶의 영위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그 말은 틀린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물질과 돈은 인생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목표와 목적이 되지는 않습니다. 물질은 보다 더 올바르고 참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생존하기 위한 수단이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현대화되어 기능화되어가는 사회에 사는 인간들은 점점 더 물질만능주의의 미궁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돈이면 모든 것이 다 되고 이루어진다는 식의 의식과 무의식이 현대의 인간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사고방식은 교회안에서도 만연되어 하나님 나라의 법칙대로 살아가야 할 성도들조차도 깊게 물들어 있음을 봅니다. 실로 이러한 사실은 시급히 개혁되어야 할 중대한 과제입니다.
3. 과학 기술주의의 미혹
우리 믿는 성도들이 주의해야 할 또 하나의 큰 미혹거리는 점점 고도화되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가는 과학기술주의입니다. 첨단의 과학문명을 토대로 인간을 위한 복지세계의 건설로 인간은 더욱 편리하게 그리고 또 훨씬 인간답게 살아갈 날이 우리 앞에 곧 다가올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이상은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비신앙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이 모든 삼라만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보다 더 잘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일이지 결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어그리면서 인간의 윤택한 삶을 목표로 진행되어져 가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극도록 발달한 유전공학, 핵물리학, 컴퓨터공학이 유익하고 아름다웁게만 쓰이지 않고 유익한 만큼 혹은 그 이상의 유해한 요소들이 결국은 인간을 파괴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과학의 발달이 우리의 모든 삶을 더욱 복되게 해 준다는 유혹을 우리는 물리쳐야 합니다. 과학만능사상은 적그리스도의 사상입니다.
종말을 예비하는 성도의 지혜 막13:6-8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는 곧 이 세상의 종말과 비유됩니다. 그러나 그날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막13:32) 다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종말에 나타나는 징조들에 대해 말씀해 주심으로 그 날을 예비토록 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특별히 이러한 종말의 징조는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수많은 재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8절) 그리고 주님은 이러한 징조가 나타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이러한 말씀을 토대로 세상 종말에 대처하는 성도의 지혜는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1. 적그리스도를 주의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혹케 하리라'(6절). 적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혼란을 가져다 주는 징조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시는데,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잘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1) 마지막 때는 적그리스도가 많아집니다.
예수게서는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항은 '많은 사람' 중에 진짜 재림 예수는 계시지 않기 때문에 애써 분별하고자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무조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저기에서 자기가 재림주라고 주장하는 무리가 있을 때에는 적그리스도라고 단정해도 좋을 것입니다. 섣불리 진짜인지를 분별해 보고자 그들 앞에 나아갔다가는 교묘한 유혹에 넘어가기 십상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2) 많은 사람들이 적그리스도의 유혹에 넘어갈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6절). 많은 사람들이 적그리스도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그의 유혹에 넘어가는 자는 구원을 상실한 자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그러한 유혹에 넘어가는 자입니까? (1) 표적을 구하는 자들은 쉽게 유혹에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적그리스도는 입으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큰 능력을 행함으로써 자신이 선지자요, 재림주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외형적인 능력만을 추구하거나 그러한 자를 좇아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도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치료하는 등 많은 권능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7:22,23) (2) 믿음의 확신이 없는 자는 쉽게 유혹에 넘어갑니다. 이들은 자신의 믿음에 확신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믿음과 말을 의지합니다. (3) 안일한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자는 쉽게 유혹당합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요구하신 고난의 자기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눅9:23) 넓고 평탄한 길만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이러한 자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수월하고 평탄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여 그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여러가지 재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1) 전쟁의 소문이 있을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전쟁 역시 종말의 징조입니다. 예수님은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대로 나타난 징조입니다. 두차례의 대규모적인 세계대전을 비롯하여 월남전재아 한국전쟁 등을 비롯하여 끊임없는 국지전과 소모전이 끊이지 않는 등 인류역사상 가장 전쟁이 많은 세기가 바로 20세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자체가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종말의 징조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으로 인해 멸망 당할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임박한 말세를 대비하여 더욱 신앙의 끈을 당기고 깨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 지진과 기근이 있을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라(8절)' 하셨는데 '재난의 시작'이라는 말씀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 위에서의 낙원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많은 인본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지상 낙원을 부르짖으며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으나 성경은 이러한 사상을 배격합니다. 또한 20세기의 과학 문명이 풍요한 인류 미래의 소망을 꿈꾸게 하나 오히려 이것 때문에 자연은 파괴되고 농작물은 훼손되어 사람들의 피해는 날이 갈수록 극심해질 뿐입니다. 따라서 지구 곳곳에서는 기근으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부요해지는 사람이 느는 만큼 궁핍으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도 늘어납니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소망을 두고 물질적 풍요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세의 핍박과 복음 전파 막13:9,10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멸망 때 당할 핍박, 즉 성도들이 받을 환란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이유로 정치 권력과 종교세력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애매하게 고통당합니다. 주께서는 이러한 지경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경고하시나 결국 그러한 핍박으로 인해 복음이 전파되며 그들을 복음 증거자로 삼으실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교훈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조심하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9절). 주님께서는 극심한 환란과 핍박이 임할 때 신앙을 잃지 말고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하시고 계십니다. 확고한 신앙의 터전 위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서 있지 않을 때 우리는 폭풍우와 같이 밀어 닥치는 환난의 풍파에 넘어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견고히 서 있지 못하고 쓰러진다면 하나님 앞에서 상을 잃을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요이1:8) 성도들이 받는 박해에는 정당한 이유가 없습니다. 굳이 이유를 단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삶에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항상 주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끊임없는 박해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우리의 현대사 속에서도 불의에 대적하는 예언자적 교회와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탄압과 멸시 속에서 인권을 유린당하며 고통을 당했습니까? 역사의 어둠이 짙어가고 권력과 물질이 그 힘을 더해갈 대일수록 하나님을 의지하며 끝까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공회에 넘기움을 당함
성도들이 당하는 핍박의 한 유형은 그들이 정치권력에 의해 탄압받고 수난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복음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데 왜 하필이면 정치하는 자들 곧 국가들로부터 고통을 당해야만 합니까? 초대교회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로마의 정치가들은 헬레니즘을 기초한 철학과 지혜와 힘이 온 세계를 지배하기에 충분하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의 한 시골에서 일어난 예수란 자의 힘이 점점 세력을 더하여 온 유대를 삼키고 로마를 삼킬 지경에 이르자 그들은 기독교가 로마의 세계관과 지배 논리에 대항하는 무서운 세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온갖 공권력을 동원해서 성도들의 집회를 불법집회로 간주하고 잡아들여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고 전도하는 것은 반역죄로 간주되어 엄청난 고통 속에서 극형을 당해야 했습니다. 오늘날도 그 유형은 달리 하지만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사는 자들을 향한 권력의 탄압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교회가 정의를 외치고 예언자적 기능을 감당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공권력에 의한 제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끝까지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선포해야 합니다. 세상 권력은 항상 하나님의 나라의 권력과 상충합니다. 전자를 불의와 폭력이라 한다면 후자는 공의와 사랑입니다.
2. 회당에서 매질을 당함
이들은 또한 같은 동족이며 형제인 유대인에게조차도 배척을 당합니다.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9절).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고 그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마23:34) 항상 정치와 유착되어 있는 현실의 기존 종교 세력은 복음의 능력을 역사속에서 심어가는 자들을 불순 세력으로 매도하고 마치 이 세상에서 존재하면 안 될 사람으로 정죄합니다. 이러한 종교의 역기능적 현상을 예수께서도 친히 당하셨고 오늘날에도 우리 눈앞에서 늘 일어나고 있습니다. 진정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자들을 잡아가두고, 복음을 전파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을 오히려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핍박하고 짓밟습니다.
4. 그러나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어야 함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서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 함이라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9,10절) 성도들이 정치와 종교세력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탄압을 받고 그 앞에서 서게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증거자가 되어야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게 하려 함입니다. 성도들이 온갖 압력과 핍박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그 신앙의 정조를 지킨다면 그 자체가 얼마나 큰 복음 전파의 효과를 지니겠습니까? 죽어가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만큼 탁월한 전도 효과는 없습니다. 이와같은 자들에게는 영원히 썩지 어ㅏ니할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핍박과 고난, 그리고 순교로 이어지는 기독교 역사는 바로 장엄한 선교의 역사였습니다.
전도자의 자세 막13:11
복음이 유대 국경을 넘어 세계 모든 이방 나라에까지 전파되는 것이 세상 종말 전에 이루어지는 징조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전도자의 길은 순탄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대적하는 사탄의 무리들이 전도를 방해하고자 전도자를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이 말세에는 극심할 것이라고 제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전도자는 이러한 때에 어떠한 자세로 전도에 임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그러한 자세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전도자는 많은 수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전도자는 자기에게 고난이 닥쳐온다고 해서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현세에서의 기복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에게 고난이 닥쳐올 때 하나님의 존재마저 거부하고 신앙을 저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그래서는 안됩니다. 본문에서도 말씀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수많은 고난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든 고난이 닥쳐올 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도자에게 고난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전도자는 사람들로부터 자유를 구속받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강제성을 띠어서는 안됩니다. 여러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피전도자가 자발적으로 복음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자의 행위 역시 그의 자유로운 의사표시입니다. 따라서 그 행위는 합법적이며, 그 어느 누구도 그 행위를 비난하거나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세상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들을 핍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지 전도자라는 이유로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를 구속하고 제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억울한 일은 전도자는 각오하며 사역에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전도자는 사람들로부터 인격적 모욕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무고한 전도자를 공적으로 핍박하는 것은 명백한 인권침해현상이며 인격 모독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단지 전도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공회'에 넘기고 재판에 회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도자가 '이럴 수 있느냐'라고 외쳐보아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고난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게 하심을 전도자는 깨달아야 합니다.(9절) 사도 바울이 이방인을 향한 전도의 씨앗을 심은 곳이 바로 '공회'였으며, '감옥'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2. 전도자는 인간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적'이란 말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의지함을 말합니다. 특별히 전도자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마음 속에 새겨야겠습니다.
1) 인간적인 노력은 실패를 가져옵니다.
본문에서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라는 구절을 누가는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21:14) 이것은 전도하다가 세상 권력이나 다른 어떤 반대세력에 부딪혀 그들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게 될 때 대답할 변명을 미리 연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실패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인간적인 노력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훌륭한 지혜를 짜내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완전한 성공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앝은 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2) 인간적인 노력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든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행위는 용납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사람들입니다. (고전10:31)
2) 성령님을 의지할 때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는 것이 문제 해결의 방법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전도자를 어떻게 도와 주시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1) 성령님께서는 전도자의 모든 문제를 책임지십니다. 어떤 문제만 특별히 도와주시고 책임져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모든 문제를 완전하게 책임지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2) 성령님께서는 때를 따라 전도자를 도우십니다. 전도할 대에는 전도의 능력을 주시며 고난을 당할 때는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 시에 성령님께서 주시는 그 말을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때에 맞추어 성령님께서는 필요한 말을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3) 성령께서는 전도자와 함께 사역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라는 말씀에서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인 전도자가 할 수 없는 것은 성령님은 하시기 때문입니다. (롬8:3) 단지 전도자는 언제나 성령님만을 의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인내의 축복 막13:12,13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하지만, 반면에 가족과 친지로부터 혈육을 넘어선 매서운 핍박과 저주도 받게 합니다.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이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12절)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핍박중 가장 잔인한 핍박은 가족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다운 신앙 생활을 하고자 할 때 불신 가족으로부터의 핍박은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끝까지 참고 견디는 자는 구원해 주시겠다고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1. 인내는 고귀한 그리스도인을 만듭니다.
논어에 보면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숙한 인격과 경건한 생활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하루 아침에 어제까지도 없었던 탑이 갑자기 솟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탑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과 인내와 기술이 필요합니다. 마친가지로 성숙하고 고귀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많은 반대와 핍박에 부딪히며 그것을 싸워 이기는 데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악하고 간교한 사탄은 우리의 고귀한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진실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며, 방탕과 소극적인 삶을 살도록 유혹하며 계속하여 시험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3:14)
2.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 역시 이러한 유혹을 받았습니다.
우리보다 앞서서 하나님의 큰 일을 감당했고 거룩한 삶을 살았던 신앙의 선배들도 많은 유혹과 시련을 겪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위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모세역시 광야에서 백성들을 인도할 때 여러차례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었고, 엘리야도 이세벨에게 쫓길 때에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로뎀 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한 적도 있습니다. 우리는 나 혼자만이 이 세상에서 시련과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3. 인내치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리가 만일 현재 흐르고 있는 물을 이용하여 물레방아를 돌리지 않는다면 그 물레방아는 쓸데없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돌탑을 쌓아올려야 하는데 계속해서 그 돌을 쌓아올리지 않는다면 탑은 결코 완성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과거가 진실되고 고귀한 것이었다면 현재의 우리는 그 과거에 의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며, 중도에서 포기한다면 이제껏 이루어놓은 업적과 지금까지 닦은 우리의 신앙과 인격을 송두리째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일은 오늘 하고 내일은 내일 일이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중도에 그만두고자 하는 유혹을 이긴다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승리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도움을 주실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더욱 견고히 할 뿐 아니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방법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4. 성도의 인내는 거룩한 승리를 보장합니다.
우리는 천성문을 향하여 걸어가는 순례자입니다. 이러한 순례자의 길을 걷는 우리가 모든 여정이 순탄하고 평화스러우며 자유롭고 즐거우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큰 오해입니다. 성경에 보면 역설적이고 상반된 구절들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잠3:17),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6:24),'그리스도 예수의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오른 눈을 빼어내 버리고 오른 손을 찍어내 버리라'(마5:29,30)는 등의 어려운 말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역설적인 말씀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기쁨이 있지마는 그 기쁨은 고통가운데 누리는 기쁨이요, 평화가 있지만 그 평화는 끊임없는 전투 가운데서 얻어지는 평화요, 또한 휴식이 있지만 그것 역시 수고와 노력 속에서 누릴 수 있는 휴식인 것입니다. 견디어 낸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뒤를 충실히 따르려고 할진대, 많은 어려움이 우리를 가로막고 실패케 하려 할 것입니다. 또한 실제로 발람이나 가룟 유다처럼 배도와 멸망의 길로 빠진 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완전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과정은 진행중에 있는 것이지 완성되어 멈춰버린 것이 아닙니다. 천국을 보상으로 받고 하나님의 기쁨 속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은 끝까지 참고 견디어 내는 자인 줄 믿습니다. '너희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21:19)
말세의 징조와 환란을 피하는 지혜 막13:14-16
본문은 장차 닥칠 환난을 성도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의 말씀입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14절)이라는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사건의 예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의 징조로 임하는 환란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때 성도들이 취해야 할 실제적인 태도를 말씀해 주시고(14-16절), 모든 성도들이 환란을 잘 이겨내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말세의 징조
예수님은 단11:31을 인용하여 말세에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출현하여 '서지 못할 곳'에 선다고 하였습니다. 적그리스도가 출현한다는 말씀입니다.
1) 많은 우상의 출현
인간의 지식과 지혜가 발달하고 과학문명이 계속적으로 발전하는 오늘날 우상과 미신은 줄어들기는 커녕 증가하여 큰 기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발달할수록 더 많은 우상이 곳곳에서 생겨나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미혹당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그러한 미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2) 거짓 선지자의 출현
'거짓 그리스도들과…기사를 행하여'(22절). 말세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거짓 가르침으로 진리를 호도합니다. 진리가 배척받고 거짓이 활개칩니다. 미혹케 하는 영이 세상을 유린합니다. 그리스도를 가장한 거짓 그리스도들에게 성도들을 팔아 넘깁니다. 그들의 목적은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22절) 하는 것입니다. 조심할 일입니다.
3) 거짓이 진리를 당분간 이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이란 말씀은 적그리스도가 거룩한 성전 보좌에 앉아 성도들의 경배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리아의 안티오커스가 주전 168년 예루살렘 성전의 번제단을 훼손한 사건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예언은 그때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마지막 때에 있을 사건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거짓된 우상이 진리로 가장하여 거룩한 곳에서 경배를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진리는 당분간 거짓에 눌려 그 빛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혼돈과 왜곡으로 말미암아 미혹을 받아 멸망의 길에 들어서는 때입니다. 때문에 말세가 다가올수록 진리에의 무장은 더욱 필요합니다.
2. 환난을 피하는 지혜
1)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예수님께서는 말세의 징조로서 환란이 닥치게 되면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1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은 환란을 만난 하나님의 백성들의 피난처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되기 전 두 천사가 롯에게 나타나 산으로 도망가라고 말하였습니다. (창19:17) 온갖 비리와 불의와 거짓이 난무하는 세속과 멀리 떨어진 곳이 산입니다. 세상이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하는 곳이라 한다면 산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자들을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려면 산으로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은 기도하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입니다. 예수님도 즐겨 산을 찾아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산을 가까이 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2) 지붕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라
이 말씀은 환란의 때에는 모든 물질이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물질은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전체적으로 완성되는 종말의 때까지 물질이 환란 때 인간을 구원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롯의 처는 끝까지 물질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하여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창19:26) 물질을 의존하는 자는 신속하게 망합니다. 물질은 그를 좇는 자와 함께 세상이 멸망할 때 함께 멸망당하고 맙니다. 환란 날에 무용지물이 될 물질을 위해 시간과 건강을 허비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구제를 위해 아낌없이 사용합니다. 물질은 얻고 생명을 잃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3)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환란이 닥치면 성도들은 지체없이 도피하라는 말씀입니다. 머뭇머뭇거리지 말고 주저하지도 말고 즉시로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합니다. 안전한 곳이란 다름아닌 하나님의 품안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피난처시요 산성이시요 보호막입니다. 하나님 안에 안식이 있고 안전이 있습니다. 특히 환난 때에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의 구원은 즉시로 완벽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막 13:17-19
본문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모형으로 삼아 장래, 주님의 재림 직전에 있을 두려운 상황들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환란의 가혹함과 특정한 사람들의 피해에 대하여 경고하셨습니다. 이제 본문을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그 날의 의미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뿐만 아니라 재림에 대해서도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 삼백여회 기록되어 있으며, 신약에만도 이십 여절에 한번 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것은 너무도 확실한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날이 바로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듯, 종이 출타한 주인을 기다리듯, 주님을 사모하여 기다린 신실한 성도들에게는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베푸시는 천국의 잔치 자리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유물주의, 허무주의, 향락주의에 빠져 살던 불신앙의 사람들에게는 가장 무섭고 저주스런 날입니다. 왜냐하면 이 날로부터 대환난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이 말하고 있는 '그날은' 참으로 의미 있는 날이라 하겠습니다. 그날은 사망과 생명을 갈라놓는 날이요 축복과 저주가 교차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
2. 그날의 피해자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17절). 천재지변이나, 전쟁 등 불의의 사태가 발생하면, 가장 비참한 사람들은,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들은 위험한 상황의 대응력과 판단력 등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큰 사태가 발생하면 흔히 그렇듯 사회 도덕과 윤리의 질서가 무너지므로 여성의 경우 죄악의 영향력에 쉽게 노출되며 수치스러운 피해를 당하는 일들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임신한 여성이나 자녀를 가진 어머니들은 그 피해와 슬픔의 심도가 극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자신의 아름다운 창조물 중의 극치인 여성들에게 깊은 연민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참화를 기록했던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로마군에게 포위되어 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갈 때,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자기 모친이나 타인들에게 잡아먹히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대환난날에 주님의 이 예언을 통하여 영적인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시집가서 가정을 가진 여성도는 세속적인 염려와 욕심에 얽매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습니다. (고전7:24-31) 또한 야고보 사도는 세속적인 성도를 가리켜 '간음하는 여자들'(약4:4)이라고 했고, 성도가 세상의 정욕을 따라 살면서 타락하여 주님을 등지는 과정을 마치 여성이 임신하여 자녀를 낳는 과정으로 비유했습니다.(약1:14,15)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 전 대환란 날에 화를 당하는 사람들은 인본주의의 우상을 마음에 품고 사는 불신앙인들을 의미하며 무거운 죄악의 열매들로 삶의 갑옷을 꾸민 미련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세상사에 얽매여서는 아니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17:32)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불타는 소돔 성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므로 화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3. 그 날이 오기 전에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18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대환란의 날이 겨울에 닥치지 않도록 아버지 하나님께 특별히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1)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말년에 디모데에게 '겨울 전에 …오라'(딤후4:21)고 했습니다. 이는 겨울에는 지중해의 풍향이 바뀌어 배들이 장거리 항해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 땅의 교회들은 주님께로부터 생명과 은혜를 풍성히 공급받고 있습니다. 즉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구원의 날'(고후6:3)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재림이 가까와오면, 교회의 사명은 그치고 심판의 매서운 바람이 이 땅을 얼어붙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전에 교회는 최선을 다해서 전도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2)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고 주님께서 예언하셨듯이 역사의 종말이 가까워올수록 불의한 세상의 죄된 풍조로 인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겨울처럼 차가와지고 황폐화되어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의 재림으로 도래할 영원한 봄의 나라를 대망할 뿐만 아니라 차갑게 경직되어가는 사회를 주님의 사랑으로 녹이며, 그들의 마음에 믿음과 소망의 꽃이 피게 해야 합니다. (벧전 3:8-11)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들 먼저 열심히 사랑함으로써 현재 속해 있는 교회를 은혜의 동산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고 하시듯 심판의 바람이 불어와도 사랑이 충만한 교회는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14:17)
말세에 필요한 지혜 막13:20-23
대환란의 때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게 되지만 이러한 환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참 성도들을 가려내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서 참 신앙인은 이러한 환난의 때에 어떠한 지혜를 가지고 믿음을 지키며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1) 환난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지금까지 그날을 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하나님께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보여드리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평안할 때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보다, 비록 고통스러울 때일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환란을 맞이할 때 성숙한 성도가 취해야 할 자세입니다.
2) 환난은 믿음을 단련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3,4)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인내는 영광스러운 결과를 낳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인내처럼 값어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신앙의 인내는 축복의 면류관을 보장합니다.
2.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은 고통스러운 일이나 어려운 지경을 만나게 될 때 자신을 도와 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지 가리지 아니하고 붙잡으려 합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듯이 말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환란을 당하게 되면 아무 사람이라도 자기에게 유리한 말을 해주는 말을 쉽게 믿고 의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1) 사람의 말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그들은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에 나타나실지도 모른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확신있게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사람은 경험에 약합니다. 미혹하는 자들이 분명이 예수님을 보았다고 경험적인 사실처럼 이야기 하기 때문에 쉽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배제한 경험이나 기적과 이적만을 추구하는 신앙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2) 잘못된 지도자들의 말을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돌아다니면서 전하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은 잘못된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들을 멸망의 가증한 자리로 이끄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방해하여 성도들을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지도자들의 꾀임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3. 신비한 능력에만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1)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은 이적과 기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들은 이적과 기사를 통해서 택하신 백성을 유혹하려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이란 말은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기사와 이적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모두 수단으로 사용할 것입니다. 병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 주는 온갖 좋은 구호를 사용하여 성도들을 미혹합니다.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 주님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2) 구원은 기사와 이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신비한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명백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구원의 은총을 우리에게 값없이 내려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23절)고 하셨습니다. 여러 사람의 말이나 자기의 이성으로 판단하여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장래에 될 일들을 성경에 미리 기록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설명하면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권면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방법이며 환란을 당할 때 성도가 취해야 할 바른 행위를 규정해 주는 복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자의 재림 막13:24-27
'인자의 재림'이란 말은 무신론 현대인들에게는 기이한 일로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 제자와 성도들에게는 곧 이루어질 확실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서 재림의 예언이 어떻게 인식되든지간에 본문에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자신의 재림을 선포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러한 일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없었던 일로 단정해 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재림하시는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살펴봅시다.
1. 예수님의 재림은 환란 후에 이루어집니다.
22절의 ' 그 환란 후에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환란이 예수님의 재림 전에 닥친다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태도를 가지고 환란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1) 환난의 때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환란에 대해 언급하신 것은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결코 환란을 두려워하거나 절망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에 소망을 두는 자는 어떠한 환란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2) 환란의 때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비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결혼을 앞둔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단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부가 신랑을 위해 지켜야 하는 것이 정절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때 준비해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환난의 때에는 이 믿음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많은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유혹할 것입니다. (21절) 이러한 때 우리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진리의 말씀으로 늘 무장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3) 환난의 때에는 죄인의 길에서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환란을 겪도록 하시는 것은 죄인들에게 경각심을 주어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환란은 곧 주님의 마지막 사랑의 행위라 하겠습니다.
2.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천체의 대혼란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는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는 현상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묵시적이며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할지는 주석가들의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재림의 때는 자연계의 대혼란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부분적인 기상 이변이 아니라 천체의 대혼란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 인간에게 자연은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그것이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고대로부터 자연숭배자들로부터 신성시되어 왔던 태양과 달은 본문에서 말씀한대로 그 찬란한 빛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빛을 잃은 태양과 달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연의 오묘함과 웅장한 모습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피조물이지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자리에 설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롬1:20)
3. 예수님의 재림은 모든 사람이 목격하게 됩니다.
26절에 보면 '사람들이 보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밧모섬의 요한은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계1:7)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곧 성경은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모습을 만인이 보게 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여기있다 보라 저기 있다'라는 말에 미혹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앞에 직접 영광으로 오셔서 함께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은 영광으로 오십니다.
2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재림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초림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신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으며, 예수님께서는 심히 초라한 모습으로 유대의 마굿간 말구유에 탄생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많는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했으며, 멸시 천대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재림 때는 '큰 권능과 영광'으로 개선하실 것입니다. 누구도 그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며,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부인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2) 그 날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영광의 날입니다.
이 날을 위해 갖은 수모와 고통을 겪은 성도들은 주님의 영광에 동참케 됩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이들을 '땅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실 것입니다. (27절) 이것은 순간적인 영광이 아닙니다.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지속적인 축복입니다.
때가 이른 줄 알라 막 13:28-31
본문은 예수께서 무화과 나무를 예로 들어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줄 아는 것과 같이(28절) 말세의 여러징조를 보면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가까운 줄 알라는 가르침입니다. 또 예수께서는 이러한 일들이 이 세상이 지나가기 전에 다 이루어지겠으며 자신의 말씀은 천지가 소멸하여 없어지는 경우에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성취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의 의미를 음미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재림의 날이 가까워 옴을 알아야 함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세의 여러 징조들이 보이면 당신의 재림이 가까워 온 줄 알라고 권고하십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14절)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고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이적과 기사를 행하면서 할 수만 있다면 택한 백성을 미혹케 하려는 것들이 눈에 보이면 그 때가 예수 그리스도가 문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십니다. 주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심은 성도들이 이 모든 것을 보고 깨달을 수 있는 신앙의 눈이 떠 있지 않으면 느낄 수 없습니다. 도무지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께서는 이 모든 현상을 보고 식별학\여 깨달을 수 있는 영안을 가지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ㄷ\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25:13)
2.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반드시 이루어질 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30절) 주께서는 당신의 재림이 이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에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고 하십니다. 주의 초림과는 다른 의미로 재림은 또 하나의 역사의 정점입니다. 뿌려 둔 복음의 씨에 대한 수확이라는 점에서나 그 동안 방치해 두었던 가라지를 심판하는 의미에 있어서나 그리스도의 재림은 역사의 매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의미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 주님의 재림은 반드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루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3. 말씀의 영원성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1절) 주께서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자신의 말씀이 영원히 불멸하리라는 사실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진리에 초석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내신 근원적인 표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 말씀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중보자,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미와 영광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그 자신들의 실질적인 생활 속에서 늘 하나님 나라의 생활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희구하며 주님 오실 날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4. 그래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긍휼히 여기시어 그 정확한 때와 시를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적당한 징조를 보이시는 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이에 대하여 마태복음에서는 노아 때와 같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도 그러하여서 홍수가 눈 앞에 닥쳐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 가지 깨닫지 못하였던 것처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도 그리하리라 하였습니다. (마24:37-39) 실상 우리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 주께서 염려하실 만한 부분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분명히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면서도 그 생활은 너무 세속 속에 뿌리 박고 있어서 정작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도 도저히 구별이 안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가슴 아프게 추구하면서 나아가야 할 자인데도 불구하고 세인들처럼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세인들보다 더 많은 욕심에 차서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살아갈 것처럼 행동하는 때도 있습니다. 선을 추구하지도 정의와 사랑을 애타게 찾지도 않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방치해 둔 채 적당히 편한 대로 살아가는 세속의 사람으로 있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주께서는 성도들이 이러한 자리에 머무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역사 속에서 참으로 빛과 소금을 역할을 잘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법 정신을 올바르게 이행하여 귀한 나라를 구축해 나아가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현실 속에서 주저앉아 먹고 마시고 하다가 멸망당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마지막 때 막13:32-37
종말이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필연적인 사건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나 다 예외없이 이 길을 가야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왕후 장상도 영웅 열사 열녀도 이 길만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일찍이 덴마아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말하기를 '사람이란 유한한 존재이며,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며, 또한 종말을 가진 존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종말이 개인에게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도 다가오며 어떤 단체나 국가에도 종말이 다가옴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주적인 종말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음을 성경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늘 종말의식을 느끼며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그런즉 깨어 있으라'(32,33절)
1. 우리의 직무는 그 날을 알려 하는 것이 아니라 대망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성삼위 하나님에게는 신성의 질서가 있습니다. 즉 성부는 계획자, 성자는 계시자, 성령은 보존자이십니다. 아울러 재림의 시기를 작정하는 일은 성부의 사역에 속하고 성자 예수님은 그 날에 재림하셔서 심판하시고 성부의 계획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는 아버지만 아실 일입니다.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니느니라' 마찬가지로 신자에게는 신자의 직무와 질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조차 모르는 엄청난 비밀에 싸인 그날을 우리가 알려 하고, 또 아는 체 하고 소동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탈선행위인 것입니다.
2.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항상 경계하여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인간의 육체는 일정한 휴식과 수면을 취해야 건강이 유지되기 때문에 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깨어 있으라는 말은 육체의 잠을 깨라는 뜻이 아니요 우리가 주님을 언제라도 만날 수 있도록 우리의 영혼이 깨어 있고, 생기있고 영적으로 늘 긴장해 있는 상태를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무감각과 태만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날을 망각하도록 유혹하는친구와 모임, 그리고 그런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주의하고 피해야 하겠습니다.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살전5:6).
3.우리는 임해야 합니다.
이어 우리는 남은 때를 육신을 위해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모두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육체의 호흡이 끊어지면 그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죽은 후에 하나님의 일을 하리라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모든 이에게는 항상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빛으로서 빛을 발하고,우리 시대의 소금이 되고 복음을 위한 신실한 증인이 되며,또한 주님의 말씀과 내 양심과 매일의 생활이 일치하도록 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4.우리는 늘 대비해야 합니다.
우리의 현 인생은 다른 시대 사람들에게 비한다면 깊은 밤과 같습니다. 우리는 밤 몇 시경에 주님이 오실는지 모릅니다. 젊은 날에 주님이 재림하실는지 중년이나 노년에 오실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잠자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재림이 실로 한밤중에 도적이 오는 것과 같은 큰 놀람과 두려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재림에 대한 관심과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되지만 아울러 개인적인 종말(죽음)에 대한 주의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독일인 성경 주석가인 '하노버'는 자신의 서재 문에다 '늘 대비하라'는 경귀를 써 붙였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항상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재지변이나 사고, 또는 질병 등으로 갑작스레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은 물론 이러한 돌발적인 사건들을 늘 염두에 두면서 개인적인 죽음에도 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매일 매시마다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5.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다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기다림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넫 세속적인 기대의 대부분은 슬프게도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맙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것만을 기다린다면 언제나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실로 축복된 영광의 아침일 것이요, 그날에 우리는 진정한 십자가의 승리의 병사로 개선한 것이며, 썩지 않고 빛나는 면류관을 받아쓰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멘 주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계2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