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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아버지
2000년 대희년 중앙위원회 선교사목위원회
(1999년 발행)
| 머리말 일러두기 제1부 전반적인 선교사목 방향 가. 예수님과 아버지 나. 교회와 아버지 다. 인류와 아버지. 제2부 신앙의 여정을 향하여: 성서적 · 교리교육적 · 전례적 개요 가. 대림 시기 나. 사순 시기 다. 부활 시기 제3부 가정, 모임, 운동 단체, 만민 선교를 위한 특별 지침 가. 만민 선교 나. 가정 다. 모임, 운동 단체, 단체 |
머리말
선교사목위원회는 「하느님 아버지」라는 제목의 이 자료로 일련의 대희년 준비 보충 자료집을 완성하게 됩니다. 이전의 두 자료인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1997년용)와 「생명 주시는 주님이신 성령」(1998년용)과 마찬가지로, 이 자료도 「제삼천년기」(Tertio Millennio Adveniente)의 지적처럼 성부께 바쳐진 해인 1999년 동안 개별 교회와 본당, 가정, 모임, 운동 단체들을 뒷받침하기 위한 사목 방향과 신앙의 여정을 다룹니다. 성부의 해는, 성부께서 사랑하시는 성자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성령의 변함 없는 인도를 받으며 아버지를 향해 나아가는 하느님 백성과 인류의 순례와 회개 운동을 열심히 장려하도록 계획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부의 해의 목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만백성과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진 보편적 구원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교리교육적 성찰과 사목적 복음화 그리고 그리스도인 삶 전체의 중심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아버지께 되돌아가게 되어 있으며, 인간의 삶과 세상 역사가 끝날 때까지 그러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회귀'는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과 새로운 내적 기쁨으로 화해성사를 거행할 때 회개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회개한 사람들은 충만한 사랑의 삶을 삶으로써, 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강력하고 실질적인 사랑을 세상에 드러냅니다.
교회가 그 선구자이며 주창자인 사랑의 문화는, 참된 정의에 도달하고 여성과 어린이, 노인,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증진하기 위하여. 선의를 가진 모든 사람과 다양한 종교인들의 공동 노력과 진정한 삶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마리아처럼 교회도 세세대대로 성부의 자비를 노래합니다. 성부의 자비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신 마리아의 삶과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여 주신 사랑에 사람들을 가까이 데려다 주신 그분의 사명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이 보충 자료는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일련의 구체적인 방향과 교리교육-양성 지침을 제시함으로써 신자들의 신앙과 삶을 돈독히 하고,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신분과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거기에서 샘솟는 사랑을 확실히 증언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안합니다.
이 보충 자료는 앞선 두 자료의 형식을 따라 세 부분으로 전개됩니다.
제1부
예수님과 아버지, 교회와 아버지, 인류와 아버지를 각각 주제로 하여 일련의 방향 제시를 하였습니다. 각 주제마다 신학, 성서, 교부학, 사목, 선교에서 이끌어 낸 풍부한 참조문들로 이루어진 간단한 묵상거리들이 일목요연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묵상거리들은 확고한 신학적 사목적 바탕 위에서 직선적이고 논증적으로, 아버지께 대한 깊은 성찰을 지난 2년간의 여정, 곧 그리스도의 해와 성령의 해의 여정과 연계시킴으로써, 교리교육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과업이 교회와 세상 안에서 하느님 자녀들의 소명을 재발견하고 끊임없이 드러낼 수 있게 하는 좌표를 제시합니다.
제2부
전례 주년의 가장 중요한 시기들을 따라 12개의 교리교육 개요를 제시하였고, 각각의 개요마다 다섯 부분(묵상과 성찰, 말씀 듣기, 신앙의 나눔, 기도, 나의 약속)으로 나누어 신앙의 여정을 밟도록 하였습니다.
여기에서는 성자의 사명과 성령을 통하여 제시되고 전례 주년 내내 교회 안에서 실천되는 다양한 측면의 하느님 계획들의 증거를 담고 있는 전례 규정과 기도 제안으로 가득한 성서적 교리교육적 여정을 제시합니다.
개요들은 차례대로 전개되어 있어 공동체들의 다양한 상황에 적용하고 활용하기 쉽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에서 발췌한 적절한 본문들은 완전한 그리스도교 교육에 필수적인 이 자료를 편리한 참고서로 만들어 줍니다.
제3부
만민 선교와 가정 사목, 그리고 모임과 단체, 운동 단체들에 대한 사복을 위하여 더욱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여러 가지 사목 계획을 제시합니다. 이 보충 자료는 「제삼천년기와 거기에 나와 있는 구체적인 제안들을 참고하여, 일련의 분명한 계획과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다음 두 가지 중요한 과제에 노력을 기울이도록 합니다. 곧, 관련 주제들(본당 공동체, 가정, 모임, 운동 단체)의 영구적 교육과 복음화 사명입니다.
이러한 제안들과 사목적, 영성적 과제는 지난해의 희년 준비와 관련이 있으므로, 교황 성하께서 주장하시는 회개의 정신을 따라 교회 공동체의 사명과 생활을 쇄신하는 것에 목표를 두며,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더욱 결실 풍부한 친교와 협력을 실천하도록 합니다. 이것은 믿음과 사랑의 증거가 진정 효력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한 기본 조건입니다.
이 자료는 신앙과 그리스도인 생활의 다양한 언어들을 일치시킴으로써 독특하고 서로 다른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영성 쇄신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유용한 도구가 됩니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모든 이에게 그들 공동체의 충만한 정체 성과, 모든 인류를 위한 일치와 화해의 성사가 될 과업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위원장 브르나르 아그레 대주교 아비장 대교구장
부위원장 책사례 노실리아 주교 로마 대복구 부대리
일러두기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아버지의 집을 향한 대순례이다. 2000년 희년은 각자의 마음에서 시작되어 믿음의 공동체로 확대되고, 이어서 온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뜻깊은 사건이다. 1999년 준비 여정의 목표는 "신앙인들의 시야를 넓혀 그들이 그리스도의 전망 안에서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전망 안에서 사물을 보게 하는 것이다"(「제삼천년기」, 49항).
구원 역사의 출발점에서 우리는 성부의 사랑을 발견한다. 성자와 성령과 맺는 관계 안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아버지의 사랑은 때가 차자, 그리스도의 사명과 성령을 통하여 인류에게 전달된다. 삼위일체의 사랑의 결실은 구원 약속의 관리자들인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과 결합하여 피조물 안에 드러나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1요한 4.9-10).
모든 인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광 속에 다시 오실 때까지 세세대대로 이 유일한 구원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구약 성서에 이미 나와 있듯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강복과 약속은 이 땅의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창세 12.3 참조). 아브라함은 만민족의 시조이기 때문이다(창세 17.5: 집회 44.19-22 참조). 하느님의 약속을 실현하신 하느님의 종은 만국의 빛이시며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다 주신다(이사 49.6), 만백성이 새 예루살렘에 와,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이사 25.6-8: 66.23: 시편 65.4: 지역 3.9 참조).
신약성서에서는 보편적인 구원의 실재가 중심이 된다. 따라서 가서 모든 민족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는 선교 명령이 중심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뿐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뿐이신데 그분께서 바로 사람으로 오셨던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자기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바치셨습니다(디모 2.4-6). 구원 역사가 아버지의 사랑을 그 출발점으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 역사의 실현 또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수렴되어 아버지께 되돌아가는 것(에페 1.3-14: 3.2-9 참조)을 전적으로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교회 생활과 사명의 궁극적인 지평이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령의 활동은 교회를 통하여 아버지를 향하고, 그분들께서는 교회가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는 제물로 자신을 바치도록 은총을 주시며, 교회가 하느님의 구원의 선물을 모든 사람에게 전해 주는 분배자가 될 수 있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하느님의 단일한 백성을 이루어 아버지의 생명과 영광에 참여하도록 해 주신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대희년의 직접 준비로서 올해에 필수적이라 생각하신 과제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더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참회와 화해의 성사를 새롭게 거행함으로써 회개의 여정을 시작하고 사랑의 삶을 충만히 살도록 촉구받는다(「제삼천년기, 50항 참조). 동시에 그들의 시선은 온 인류에게 향한다. 성령의 선물인 사랑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실질적이고 우선적인 선택, 민족간의 정의와 평화에 대한 노력, 다양한 문화간의 대화 증진, 여성의 권리와 혼인과 가정의 존엄에 대한 관심 등으로 구체화된다. 세속주의가 가져오는 정신적 빈곤을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의 문화를 증진하고, 종교간 대화를 촉진하는 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제삼천년기」, 51-53항 참조).
이러한 여정을 시작하며 이 모든 과제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올해에는 특별히 '모든 인류에 대한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 곧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고 성령께서 주신 이 사랑을 실천하고 증언하도록 요청받는다. 「제삼천년기의 지침에 따라 우리는 제1부에서 몇 가지 전반적인 선교 사목 방향을 제시하며, 이는 제2부에서 성서적 · 전례적 교리교육적 여정으로 이어진다. 제3부에서는 가정과 모임, 운동 단체, 그리고 만민 선교를 위한 몇 가지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한다.
제1부 전반적인 선교 사목 방향
가. 예수님과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버지께 받으신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사시고, 아버지께서는 예수님 안에 사신다. 아버지께서는 시작이 없는 시작이시며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시는 사랑이시다.
1.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요르단 강물에서 올라오시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 1.11) 하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것은 분명한 메시아의 계시이다. '사랑하는', '마음에 드는' 하느님의 종(이사 42.1 참조)에 '아들'이라는 칭호가 나중에 추가되었다(시편 2.7 참조). 마르코는 두 가지 측면을 합치시킨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유일한 사랑하는 아들이시며(여기에서 예수님의 완벽하게 자녀다운 태도로써 그분의 신적 기원이 확인된다.), 또한 겸손과 수난을 통하여 구원 사명을 완성하실 종이시라는 점이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말씀은 말씀하시는 하느님과, 하느님께 속하시며 그분께서 당신 자신의 유일한 아들로 제시하시고 그분의 사랑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특별하고 깊은 관계를 나타낸다. 이 말씀은 친교의 의미 안에서, 그리고 존재와 사랑의 상호 일치의 의미 안에서 이해된다. 사랑은 아버지와 아들의 근본적이고 독특한 관계를 성립시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진정한 외아드님으로 선포되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본래부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장엄한 계시이다. 이 계시는 아버지와 아들을 가장 다정하고 인격적인 차원 안에 일치시키면서 사랑의 측면을 강조한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당신 '아들'이라고 선포하시면서 느끼셨을 모든 힘과 기쁨이 감지되고,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무한하신 사랑으로 감싸신다. 이러한 의미에서 복음서의 말씀은 구약성서의 지평을 능가하며, 단순히 메시아 예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뛰어난 선포를 담고 있다.
2. 아버지께 순종하시는 아드님 예수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직후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공개적으로 증명하시며, 세상을 이롭게 하시려고 오셨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이스라엘이나 세상의 속되고 어리석은 사고 방식을 반영하는 사탄의 솔깃하고 그럴듯한 유혹에 맞서,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아버지의 가장 지혜로우신 뜻을 따르신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충실성과 사랑을 신뢰하시고 하느님의 사고와 행동 방식을 인간의 그것에 우선하신다. 사탄이 교묘한 말로 의심하도록 꾀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를 존중하시고 그 절대적인 우위성을 인정하신다.
아버지의 사랑하는 외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변함없는 친교를 맺으시고 신뢰를 보이신다. 아버지께 전적으로 일치하시는 이러한 자세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에 걸쳐 계속되었으며, 루가가 세 가지 유혹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면서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님을 떠나갔다." (루가 4. 12)고 한 말에서 암시하듯이, 사탄의 끊임없는 유혹에도 그 태도는 변함이 없으셨다. 루가가 말한 그 결정적인 기회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특히 게쎄마니에서의 고뇌 (루가 22.42-44 참조)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계획에 충실하시기 위해서 공생활 중에 헤쳐 나가셔야 했던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가리킬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반대하는 이스라엘인들의 편견과 당신 제자들의 몰이해를 극복하셔야 했다. 이스라엘인들은 세속적이 율법적인 메시아 신앙 사상에 젖어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께서 메시아로서 하셔야 할 일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을뿐더러 (마태 16.23 참조). 그분께서 이 세상 삶을 마치시자(마테 20.23 참조) 그분을 배반하고 부인하며 저버리기까지 하였다.
이 모든 상황에서 같은 악마가 계속해서 나타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과는 다른 왜곡된 메시아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예수님을 꾀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답게 자아를 버리심으로써 유혹을 물리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종으로서, 아버지께 대한 당신의 순종을 재확인하셨다.
3. 성자 예수님과, 그분 기도에 담겨 있는 성부께 대한 신뢰
이와 같은 자녀다운 신뢰와 믿음의 태도는, 예수님께서 기도 안에서 아버지와 나누셨던 긴밀한 친교의 순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실 기도하시는 분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때 기도하시면서 성령을 받으신다(루가 3.21 참조). 열심히 선포하시고 병자들을 고치느라 온 힘을 다 쏟으신 다음 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다시 시작하시기 전에 아침 일찍 외딴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신다(마르 1.35 참조).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뽑으시기 전에 밤을 새우며 기도하시고(루가 6.12 참조),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도 기도하신다(요한 11.41 이하 참조). 또 당신 자신과 사명에 결정적이고 의미심장 한 순간마다, 곧 변모(두가 9.28 참조)에 앞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 전에(루가 11.1 참조), 그리고 베드로의 부인이 있기 전에 (루가 22.31-39 참조) 기도하신다.
특히 수난에 앞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당신 몸을 바치셔야 할 지고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는 더욱 열심히 기도하시며 기도 안에서 신뢰와 자아 포기의 의미를 발견하시고 마침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수행하신다(마르 14.35 참조).
기도는 예수님의 일생과 하루하루의 생활을 특별히 평화와 내적 침묵의 시간이 되게 한다(마르 6.46 참조). 이것은 아버지와 맺으시는 깊은 인격적 친교와 거기에서 연유하는 사랑과 신뢰의 결과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께 맡기신 사명을 충실하게 계속해 나가시기 위한 새로운 힘과 새로운 확신을 바로 기도를 통하여 얻으신다.
일을 다시 시작하실 새로운 각오로 당신께 오는 사람들과 친절하고 유익한 대화를 나누시며, 성령으로 가득 차 불굴의 자세로 복음을 선포하시고, 신중하고 현명하게 적들의 사악한 음모에 대처하셨다. 이러한 깊은 체험으로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스승이 되신 것이며, 제자들에게 권위와 확신을 가지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마르 14.38)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
신학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곧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시며 기도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기도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신 것 같다(마르 14.36 참조).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신 것은 완전히 새로운 일이다. 히브리인들은 하느님을 향해 기도할 때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아빠'라는 말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아기들이 더듬거리며 하는 말과 같은 유아적인 표현이므로, 초월적인 하느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존경에 어긋나는 것으로 비쳤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느님을 대하셨고, 당신과 하느님의 관계가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한 전혀 다른 새로운 관계임을 가르쳐 주고자 하셨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말씀하실 때, 어린아이가 아빠에게 말하듯이 단순하고 친밀하고 자연스럽게, 자아를 완전히 비우고 신뢰를 가득 담아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을 익숙하고 편안하게 대하시면서, 아버지의 생명에 참여하시고 그분의 생각과 사랑과 의도를 공유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힘차면서도 강하고 부드러운 아버지의 사랑을 꿰뚫어 보실 수 있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며 만유 위에 사랑을 받으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당신 자신의 기원이시며 당신께서 하시는 일에 힘과 빛을 주시는 분이시라고 인정하신다.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하느님 관계의 본질, 곧 아들로서 아버지의 본성에 참여 하시고 그분과 완전한 친교를 맺으신다는 것을 단순하면서도 깊은 진실성을 담아 표명하신다.
'아빠'라는 말은 동시에, 아버지께 대한 아들의 복종, 곧 부모-자식의 관계에서 모든 자녀가 마땅히 그러해야 하듯이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려는 의지를 나타낸다(마르 14.36: 마태 11.25 이 하 참조). 또한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기도하실 때는 결코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시지 않고,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는 제자들과 구분되게 언제나 '아버지',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아버지'와 '너희(복수) 아버지'를 구분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을 당신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일치시키는 특별한 관계, 유일한 관계를 가리킨다. 이 관계를 제자들이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4. 성부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 주시는 성자 예수님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법을 특징적으로 보여 주는 예가 예수님께서 기쁨에 넘쳐 드리시는 기도에서 (마태 11.25-27 루가 10.21-22 참조) 발견되는데, 이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지혜로우신 계획과 사랑에 대하여 감사하시고 축복하신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 하고 말씀하시면서 아들로서 아버지와 맺고 계시는 관계를 심오하게 드러내 보여 주신다.
오직 성자께서만 성부를 깊이 이해하실 수 있다. 성자께서는 성부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전해 받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상 생활의 모습으로 확인된다. 곧 아버지가 자식을 특별히 잘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식도 아버지를 특별히 잘 아는 것이다. 오직 아버지와 아들만이 서로를 아는(요한 10.15 참조) 이러한 관계는 그 유일성과 상호성 때문에 주목할 만하다. 사실, 아들을 아는 사람은 아버지뿐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낳고 또 아들에게 자신의 일부를 전해 주기 때문에, 아버지만이 모든 측면에서 자신의 '아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출산 행위와 관련되어서만 아들이 된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습이고 아버지의 일부를 형성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다.
성부께서는 성자에게서 당신의 특징을 알아보신다. 성자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아버지의 눈이나 마음으로 아시지 못할 것이 없다. 성자께서는 아버지의 태도와 감정, 생각을 그대로 나타내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성자께서는 성부의 존재로 감싸여 계시고, 비록 개체로는 구분되어 계시지만 성부와 한 몸을 이루신다. 또한 오직 성자께서만 당신 존재의 근원이신 성부를 아시는 것도 사실이다. 성자께서는 당신과 성부를 일치시켜 주는 관계를 명확히 파악하고 계시며, 당신 자신을 그분의 선물이며 그분 사랑의 결실이고 그분 지혜의 표현으로 인식하신다. 성자께서는 성부와 이루시는 끊임없는 생명의 친교 덕택에 성부의 모습, 성부의 감정. 그 감정들의 표현과 성부의 척도를 완벽히 알고 계신다. 더욱 깊은 차원에서, 성자께서는 성부의 이러한 모든 실재를 당신 안에 종합하시어 그 속에 자신을 일치시키신다. 성자께서는 성부의 실재를 표현하시고 구현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께서는 성부의 바람을 꿰뚫어 보시고, 성부의 생각과 바람이 곧 당신의 생각과 바람일 정도로 성부의 마음을 공유하신다. 이는 성자의 존재 자체를 이루며, 평화와 신뢰로 가득 찬 삶을 부여하시는 성부의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성자께 준다. 성자께서는 성부께 아무것도 감추고자 하시지 않는다. 성부께서는 자신에 대하여 무엇이든 다 알고 계시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신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이다. 성부께서는 그분을 '아들'로서, 곧 당신께서 만드시고 당신에게서 난 존재로서 사랑하신다.
성부와 성자의 이러한 일치에서 또 하나의 측면, 곧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오직 아드님께서만 아버지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여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따라서 계시자로서 그리스도의 사명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그분 존재의 독특한 특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부자 관계와의 유사성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개념으로 설명하신다. 아버지가 아들과 이야기하고, 아들을 가르치고, 아들에게 법 규범을 설명하듯이, 아버지가 아들을 자기 직업으로 이끌어들여 조금씩 일을 배우게 하듯이, 아버지가 자신의 인격적 특성을 아들에게 심어 주듯이, 하느님께서도 당신 자신의 지식, 당신 자신의 존재와 생각 전부를 예수님께 전해 주셨으며, 그 모든 것을 당신 아들 안에 형성시켜 주셨다.
따라서 오직 성자께서만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참된 지식을 전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성자께서는 성부와 인류, 곧 사람들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가 되신다. 성자께서는 '오직' 한 분이시며, 성부와 인류를 중개할 '책임을 맡으신' 분이시다. 성자께서는 하느님의 비밀을 전해 받을 사람들을 선택할 권한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자께서는, 비록 모든 것을 성부께 받았다 하더라도, 참되고 자율적인 분이신 것이다(마찬가지로, 마태 28,18-20: 루가 22.29 참조).
'나의 아버지'라는 예수님의 표현은 애정과 충정을 표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생명, 존재, 자식을 나누신 예수님께 부여된 권한과 유일한 계시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은 예수님과 하느님의 매우 특별한 관계를 증언하는 것이며, 부분적으로는 그분 존재의 심오하고 궁극적인 신비와 이 세상에서의 사명을 명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5. 성부께서 보내신 성자 예수님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특별한 활동 방식을 묘사하면서, 절대적 의미의 성자이신 예수님의 측면을 가장 앞에 놓고, 그러한 측면을 그의 복음 전체에 대한 이해를 뒷받침해 주는 계시로 삼는다. 예수님께서는 파견되신 것이므로, 요한은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도록,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에 대하여 이야기한다(요한 3.16 이하 참조). 그리스도의 모든 활동은 그것이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라는 데서 기원을 찾는다. 모든 것은 아버지에게서 시작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 (요한 5.36 이하 6,44-57: 8,16-18: 10,36: 11,42: 12,49: 14,24-26: 17.3.8.18. 21.23.25:20.21 참조).
이러한 근본적 실제는 기원과 관련하여 그리스도를 언제나 오로지 성부께서 '보내신 유일한 분이시라는 독특한 위치에 놓는다. 그리스도께서 명시하시고 이행하신 모든 것은 그분을 근원과 일치시켜 주는 관계. 그분께서 이 세상에 존재하시게 되는 완전무결한 시작과 일치시켜 주는 관계 안에서만 그 궁극적 의미를 갖는다. 예수님께서 사명을 펼치실 때 본질적으로 예수님을 형성하는 배경은 바로 성부에게서 오는 이러한 기원이다.
6. 성부 안에서 완성되는, 성자 예수님의 활동
예수님께서는 성부에게서 나셨으므로, 찬미와 영광의 시간을 거쳐 성부께 돌아가셔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성부께 돌아가셔야 하므로(요한 13.1 14.12.28 16.10.27 이하: 17.11.13:20.17 참조), 그리스도의 삶과 활동의 종착점은 성부이시다. 이러한 '회귀'를 통해서 성부께서는 성자 안에서 (요한 14.13 참조), 성자를 통하여(요한 17.1 참조) 영광 받으시고, 성자께서는 세상이 있기 전에 성부 곁에서 누리시던 영광을 받으신다(요한 17.5 참조).
제자들도 같은 영광에 참여한다.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으며, 그리스도께서는 각 제자가 있을 곳을 마련해 두셨으므로(요한 14.2 참조). 성자께서는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을 함께 데려다가(요한 14.3: 17.24 참조) 그들도 아버지의 집에 머무를 수 있게 하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성자와 그분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아버지께 돌아가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모든 활동, 특히 그분의 수난과 찬미, 영광 받으심은 성부안에서 그 완전한 의미를 발견한다.
그리스도의 사명을 뒷받침하고 정당화해 주는 이러한 심오하고 지속적인 귀소 본능을 떠나서는 그리스도의 어떠한 행위나 활동도 이해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이루는 본질 자 체 때문에 끊임없이 당신 아버지를 지향하며 사시다가 돌아가셨고 부활하셨다. 오직 아버지 안에서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존재를 완성하실 수 있고, 당신의 행동과 말씀에 담긴 지고한 진 리를 발견하실 수 있는 것이다.
7. 성부와 함께 일하시는 성자 예수님
여러 측면의 그리스도의 삶은 그분 활동의 포괄적 의미를 설명하는 두 극점 - 출발점과 종착점 사이에서 성부께 대한 관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결정된다. 그분의 매순간의 삶은 끊임없이 성자와 성부를 이어 주는 이러한 끈으로 얽혀 있다. 특히 그분의 삶에는 모든 것을 다 주시는, 성자에 대한 성부의 사랑이 명백히 드러난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기셨다"(요한 3.35:5.20 참조).
예수님의 지상 생활 내내 함께하는 이 사랑은 특히 그분께서 돌아가시는 순간에 증명된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시 그 목숨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10.17). 목숨을 바치시는 행위는 성자께서 성부의 뜻과 무한하신 사랑에 기꺼이 순종하고 따르심을 보여 주는 극단적인 증거이다(요한 15.9 이하 참조). 이는 성자와 성부의 완전한 결합을 강력히 보장해 주는 힘이다.
이러한 일치로, 성부께서는 예수님의 지상 생활에 협력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성부와 함께 행동하시고 성부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요한 8.28.38.40: 12,50 15.15 참조). 사실상 성부께서는 모든 것을 성자께 보여 주시고. 생명을 주는 권한이라든가 심판하는 권한과 같은 가장 중요한 일들을 성자께 맡기신다. 성부께서는 모든 심판권을 성자께 맡기신 것이다(요한 5.22 참조).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을 파견하신 분의 뜻을 이루고자 하시며,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시면서 언제나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만을 하신다(요한 8.29 참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단언하신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요한 4.34).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높이고(요한 8.50 참조) 그분의 영광을 구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시다(요한 7.18 참조).
성부께서는 인간의 적의 앞에 예수님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그분과 함께하시며(요한 8.29 참조), 그분을 높이시고 영광스럽게 하신다(요한 8.54:13.31 이하: 17.1-5 참조). 성부께서 친히 그분을 증언해 주시며, 그분의 증언은 신뢰할 수 있다(요한 5.32.36 이하: 8.18 10.25 참조). 성부께서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명령의 기원과 그분께서 하시는 일의 권한, 그분 말씀의 진실성을 분명하게 확인해 주시기 때문이다.
성부의 사랑은 가장 큰 보증이며, 그리스도의 사명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다. 모든 인간은 이 사명의 진실성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그릇된 신념 안에 갇혀(요한 8.43 참조) 성부도 성자도 알아 뵙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초대받는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 할뿐더러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만일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요한 8.19).
대신에, 성부께서는 성자를 알아 뵙고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신다(요한 6.40 참조). 영원한 생명은 오직 한 분이신 참된 아버지 하느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7.3 참조). 그렇기 때문에 성부께서는 인간 마음속에서 활동하시며, 그들을 성자께 이끌어 주시고(요한 6.44 참조), 그들에게 믿을 은총을 주신다(요한 6.65 참조). 성자를 믿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은 성부의 사랑을 받으며 (요한 14.21. 23: 16.27 참조).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주신다(요한 14.13: 15.16:16.23 이하 참조).
결론: 하나이신 성자와 성부(요한 17.21 참조)
두 분께서 함께 수행하시는 활동을 들어, 성자와 성부를 일치 시켜 주는 상호 관계를 강조한 다음에도, 요한은 두 분의 완전한 일치에 대하여 매우 분명하고 의미 심장한 단언을 계속해 나간다. 성부와 성자께서는 서로 잘 아시기 때문에 같은 차원에서 생각하시고 사랑하시며 (요한 10. 15 참조), 두 분께서 하나를 이루실 만큼 서로 일치되어 계신다(요한 10.30: 17.22 참조). 다시 말해 두 분은 서로가 서로 안에 계시는 한 존재이시다(요한 10.38: 14.10-11.20: 17.21.23 참조).
이 모든 것은 성자와 성부의 철저하고 심오한 일치를 극히 예리하게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의 특수한 사명과 구원 가치는 그분께서 성부와 맺고 계시는 유일하고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그 궁극적 토대와 참된 의미를 발견하며,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이 되시게 하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계시해 준다.
성자를 성부와, 또 성부 성자와 이어 주는 생각과 사랑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성자를 파견 하심으로써 성부께서 인류에게 주신 은혜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요한 3.16). 요한이 보기에, 하느님 께서는 본질적으로 베푸시는 분이시며, 당신의 구원 의지를 전해 주시는 분이시다. 또한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당신의 외아드님이신 성자이시다(요한 1.14. 18: 3.16.18 강조). 성부께서는 성자를 보내시어, 어둠의 노예가 된 인류가 온갓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 그분 안에서 자유를 찾고, 같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신 것이다.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요한 1.12).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지없는 은혜이다.
나. 교회와 아버지
아버지 하느님께 바쳐진 대회 준비 마지막 해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의 전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요한 4.34).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복음의 명령에 따라 세상에 아버지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그리스도를 통한 그분의 보편적 구원 계획을 증언한다.
비록 완전한 방식은 아니더라도 교회는 아버지의 생명을 구현하고 드러낸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 당신 아드님을 내어 주실 만큼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며(요한 3.16 참조),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당신의 보편적 구원 계획을 나타내 보이시고(루가 10.21 참조), 그들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마태 15.20 참조).
- 교회를 새로운 백성, 곧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로써 당신을 섬기고 거룩한 생활로써 당신을 섬길(교회에 관한 교외 헌장, 9항 참조) 새 백성이 되게 하고자 하신다.
- 거룩하지만 더욱 정화가 필요한(교회 헌장, 8항) 이 백성에게 당신의 은총을 베푸시어, 그들의 삶이 회개와 죄에서 해방되는 길이 되게 하시고, 인간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가치들을 재발견하도록 하신다(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Dives in Misericordia), 7항 참조).
- 화해성사를 거행함으로써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진실된 당신 사랑과 자비의 용서를 베푸시어,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그들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도록 하신다(루가 6.36 15.11-32 참조).
- 아버지께서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것처럼(마태 5,44-45.48 참조), 모든 사람이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러한 보편적 이웃 사랑 안에서 살고 행동하도록 요구하신다.
- 인류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고 인류를 통하여 그 목적에 다 다르게 될 모든 피조물이 인류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들어 높여질 때(로마 8.18-23: 에페 1.10: 골로 1.20: 2베드 3.10-13 참조)가 바로 예수님의 생애(주가 23.46 참조)와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여정에 있는 순례자인 교회의 삶, 그리고 창조물 전체의 최종 목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전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고 성령을 통하여 주어진 아버지의 사랑을 경축하고, 교회 생활이 아버지께 대한 찬미와 감사의 희생 제사가 되게 한다.
1. 교회는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성부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본다
1) 성부의 계획 안에 있는 교회
“영원하신 성부께서는 당신의 지극히 자유롭고 심오하며 지혜롭고 고마운 계획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사람들을 당신 생명에 참여하도록 들어 높이시기로 결정하셨다. ~~ 성부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다' (로마 8.29). ~~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거룩한 교회로 불러들이기로 결정하시었다. 이 거룩한 교회는 ~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드러났으며, 세말에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그 때에는 ~~ 모든 의인이 ~~ 보편 교회 안에서 성부 앞에 모이게 될 것이다”(교회 현장. 2항).
교회는 성부의 보편적 구원 계획에서 생겨나 그리스도에 의해 하느님 자녀의 가정으로 설립되었으며, 성령의 친교를 통하여 드러난다. 교회는 자신을 구성하는 선물을 겸손되어 감사한 마 음으로 받아들이고, 성령과 친교를 이루고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성부의 역동적 자비와 사랑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도록 요청 받는다. 교회는 모든 관계에서 삼위일체의 역동적 친교를 실천해야 하며, 점진적이고 끈기 있게 다양성 안에서 인류 가족의 일치를 건설함으로써 그러한 친교를 증언해야 한다. 어떤 차원의 관계도 배제되어서는 안되며, 대인, 가족, 본당, 교구, 국 가, 국제 또는 전세계 차원의 관계를 모두 포함해야 한다.
삼위일체의 역동적 친교는 사실상 인간적인 모든 것을 특징짓는 불확실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회개와 교회 생활의 지속적 쇄신을 위한 토대이며 추진력이다. 그리스도의 몸답게, 교회는 그 본질 자체의 일부를 형성하는 성사적 · 교계적·은사적 선물에 근거한, 또 그것을 통하여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친교의 완벽한 거처이다. 곧, 모임과 의사 전달, 대화, 공동체적 식별. 참여와 공동 책임, 영성적·문화적·물질적 자산의 교류, 협력과 결실, 조직적인 사목 계획 등이 이루어지는 완벽한 거처인 것이다. 더 완벽하게 이러한 거처가 되고자 노력하는 교회, 이것이 아버 지의 집을 향해 가는 순례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2)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하느님께서는 "각 개인을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람들을 한 백성으로 모아서 당신을 진실히 알아 모시며 충실히 섬기도록 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계약, 곧 당신 피로써 이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마침내 '선택된 민족, 왕의 사제, 거룩한 겨레, 전에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백성' (1베드 2.9-10)이 되었다. 이 민족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며, 하느님 자녀의 존엄과 자유를 삶의 조건으로 삼는다. 이 민족의 법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며,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목표이다" (교회 현장. 9항 참조).
성부의 구원 계획에 따라 교회와 교회 안의 모든 실재(개인, 가족, 집단, 공동체, 본당, 교구 등)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거룩해질 소명을 받았음을 인식하도록 요구받는다.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는 모든 종류의 독자적인 영성을 물리쳐야 하며, 함께 교회를 건설한다는 공감된 '논리'를 가지고 이를 위한 노력에 참여하여야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다른 모든 덕과 복음적 요구에 앞서 으뜸이 된다. 세례의 은총으로 태어난 새 사람들은 이러한 사랑의 대인 관계와 사회관계 안에서 성장하여, 우리를 성인들과 함께 머무르게 하고 하느님의 친구가 되게 하는 것이다. 건물인 우리는 모퉁잇돌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된다. 여러분도 이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이다" (에페 2.19~22).
3) 성부를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보편적이고 선교적인 본성을 지닌 교회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은 “단일하고 유일한 백성으로 머무르며, 모든 세대를 통하여 온 세상에 확장되어 흩어진 당신 자녀 들을 한데 모으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여야 할 것이다.” 사실상 하나이고 거룩한 교회는 각양 각색의 인종과 문화, 민족들이 현존하는 곳이다. 이처럼 교회는 "전 인류를 그 재화와 함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 성령의 일치 안에 하나로 모으고자" (교회 현장. 13항 참조) 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하느님 백성의 이러한 보편적 일치에 속하고 이 일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가톨릭 신자들, 다른 그리스도교 신자들,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 히브리인들, 모슬렘, 진정으로 자기 양심에 따라 일하는 선의를 가진 모든 사람이다(교회 현장, 13-17항 참조).
이러한 보편성은, 사도들이 신자들과 일치하여 진리와 사랑 안에서 보호하고 보증하고 전해 준 신앙, 곧 하나로 통일된 동일한 신앙의 선물이다. 다양한 시대와 문화, 예법, 언어, 교회 조직, 지역 교회의 전통 안에서 실천되는 이러한 보편성은 선물이며 소명인 동시에 사명이기도 하다. 교회는 일체의 모든 '다른 것'에 대하여, 내적 관계에서든 외적 관계에서든 그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사랑하고 존경하여야 한다. 각각의 '다른 것'은 비록 정도와 양식은 다르지만 대화의 관계를 수립해야 한다. 진리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다른 점을 존중할 때 이해와 화합 과 친교와 일치라는 미래의 목표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러한 방향에서만 자신의 진실성을 시험할 수 있고 성부의 뜻을 실천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때 교회는 자신이 진정, 하느님의 뜻이 요구하는 '보편적 구원'의 원동력을 이루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내 형제이고 자매이며 어머니이다.” (마태 12.50)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한다.
4)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의 모습을 보는 교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4.9).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반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모습에서 (마태 25.31-46: 루가 10.29-37 참조),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마태 18,20) 신앙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당신 성령을 통하여 항상 함께하시는 세상(마태 28.20 참조) 안에서 당신 자신을 보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분 현존의 성사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곧 성서 안에 기록된 말씀, 모든 시대와 문화 안에 현존해 온 거룩한 교회 안에서 실천되고 거행되는 말씀, 교회의 교도권이 현대의 상황으로 가져온 말씀, 세상과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현존을 강조하는 시대의 징표가 되는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를 인식하며 산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비추어 자신의 생활과 시대의 징표를 끊임없이 식별하고, 역사 안에 생생하게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도록 요청받는다. 식별이라 함은, 신앙에 비추어 실재와 사건의 진실을 바라보는 것이고, 죄를 고백하고 태도를 바꾸어 현재의 사목 전략의 선택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5) 아버지의 집을 향해 순례하는 교회
“교회가 주님을 떠나 이 세상에서 여정을 계속하는 동안에는 (2고린 5.6 참조) 자신을 유랑자로 생각하고, 그리스도께서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천상의 행복을 추구하고 사모한다" (교회 현장, 6항). 교회는 지상에서 “이미 불완전하게나마 참된 성덕을 지니고 있다. ~~ 여정의 교회도 성사와 현세 제도 안에서 지나갈 현세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교회 현장, 48항).
그러므로, 거룩하지만 언제나 정화가 필요한 교회는 겸손과 절제로써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며, 지속적으로 회개와 쇄신을 추구하고(교회 현장. 8항: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 6-7항 참조).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도 결코 완전한 충성을 잃지 않는다(교회 현장, 9항 참조).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의 사랑과 자비에 힘을 얻어 시간 안에서 살아간다. 교회는 '현재'에 살며, '지금도 오고 있는 미래'에 대한 희망에 부푼 채 살아간다. 곧 이 세상에서는 결코 안정을 찾지 못하고 영원히 떠도는 유랑자, 이방인, 순례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주님과 더욱더 닮은 모습이 되어 가려고 애쓴다. 그러므로 교회는 참회, 용서, 화해, 사랑을 충성, 친교, 일치를 위한 새로운 노력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에 더하여, 교회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이 교회의 선익을 위하여 함께 추구해야 할 목표, 삶의 계획, 행동 양식을 세운다. 교회는 모든 사람과 세상에게는, 장차 오실 주님의 예언이며, 그 자신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제자'이다.
2. 세상에 성부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여 주는 교회
1) 성부의 사랑과 자비를 증언하는 교회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36). 잃었던 아들의 비유에서(루가 15.11-32)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사랑과 자비의 아버지로 제시하신다. 이러한 유비는 자비의 신비 자체,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어리석은 방탕 사이에서 전개되는 심오한 극적 사건(자비로우신 하느님, 5항 참조)을 더욱 완전히 이해하게 해 준다. 자비는 세상과 인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악에서 선을 더욱 높이 드러내고 증진하고 이끌 때 그 참되고 고유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사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성자를 믿는다는 것은 성부를 뵙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세상에 사랑이 존재하고 그 사랑은 인간과 인류와 이 세상을 덮고 있는 그 어떤 형태의 악보다도 강 하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자비로우신 하느님」. 6.7항 참조).
성부의 사랑과 자비의 증거는, 교회가 온갖 근심과 고통, 빈곤과 불의, 모욕, 폭력에 개입하여, 그러한 불행에 연민을 보여 주며, 모든 인간의 존엄을 선포하고, 사랑의 실현에 이바지하도록 재촉한다. 이러한 일은 그 자체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방적인 사랑과 자비의 베풂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최초로 경험한 바로 그 사랑과 자비의 더욱 풍부한 나눔으로 이루어진다. 자비의 진실성은 바로 이러한 상호성에 있다. 우리는 자비로운 사랑의 놀라운 샘에 참여하는 것이다(「자비로우신 하느님」, 14항 참조).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 대하여 우선적 선택을 한다.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적용되는 사랑은 각자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우선적 봉사의 대상으로 선택된다. 그것은 그들이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되갚을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들의 사랑뿐이
며, 그 사랑은 모든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만, 거저 주는 사랑 안에서 성부의 사랑과 자비가 수정처럼 투명하게 비쳐지는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태 5,7).
2) 세세대대로 이어지는 자비
마니피캇은 예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세 번째 천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며 역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통감하는 세대이다(「자비로우신 하느님」, 10항 참조). 온갖 불안정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세대는 재화를 공평하게 분배하는 정의만이 아니라, 인간에게 인간성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자비와 사랑을 필요로 한다(「자비로우신 하느님」, 10.14항 참조). 자비는 평등과 정의를 가장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이다. 자비는 객관적인 선익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인내와 친절과 사랑을 통하여 인간의 존엄이라는 더욱 큰 명분에 이바지함으로써 인간 상호간의 더욱 깊은 일치에 이바지하기 때문이다(「자비로우신 하느님」, 14항). 인권을 유린하는 모든 세력에 맞서 인권 수호에 앞장서야 한다는 의식이 교회 안에 증대되고 있다. 교회는 교육, 건의, 활동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노력하고, 물질적· 문화적·영적 재화를 서로 나누는 장소가 된다. 물론 교회가 언제나 고통받는 사람들 편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교회는 정의와 평화를 위해 분투하며, 인간의 진보, 사회 정의, 평화로운 삶을 보장하는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 대한 의식을 증대하고자 노력한다. 교회의 사회교리는 비록 실천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모든 이에게 유효하고 높은 평가를 받는 소중한 것이다. 어쨌든 교회(와 교회의 모든 구성 단체)는 인류의 선익을 위하여 교육에 매진하고, 이미 사랑의 표현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장려하며, 양심을 철저히 성찰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성찰을 통하여, 스스로 헛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 또는 너보다 낫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한 태도로는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힘차게 증언할 수 없다.
3) 몇몇 특별한 경우
오늘날 교회는 여성의 존엄, 가정의 존엄, 혼인의 존엄 등 몇몇 특별한 경우에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증언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때때로 인간의 존엄이 발아래 짓밟히는 경우가 있는데, 주로 여성의 존엄이 그러하다.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을 뿐만 아니라 성적, 경제적 이해 관계나 위신과 권력 때문에 모욕과 학대와 이용을 당한다. 여성과 밀접한 영역인 가정 또한 정치 경제 분야에서 흔히 무시되며,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사회와 대중 매체, 문화 조류에 그 가치를 위협받고 있다. 그리하여 혼인마저도 근본이 흔들리고 있다. 모든 형태의 결합, 심지어 동성끼리의 결합이라도 동일한 지위를 요구할 정도로. 혼인의 안정성이 위협받고 있다.
이러한 경우에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증거는 여성의 존엄을 증진하기 위한 노력을 수반한다. 또한 사회 안에서, 배우자이며 어머니로서는 물론, 무엇보다도 한 개인으로서 여성이 맡은 역할을 격려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교회는 가정이나 혼인과 관련하여 교육과 사회 발전을 위한 활동, 영성과 가정 사목 활동을 촉진하여야 한다. 예방 사목 계획은 부부들이 그들의 삶을 그들 본연의 사랑의 성덕을 향한 신앙의 여정으로 살아가도록 도와 줄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여러 가지 특수한 상황에도 주목해야 한다. 사회와 교회의 안녕은 가정의 성덕에 달려 있다.
3. 교회는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기린다
1) 전례, 특히 성찬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는 세례 때에 받은 성령의 도유를 통하여 "항구히 기도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사도 2.42-47 참조), 자신을 거룩하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산 제물로 봉헌하며(로마 12.1 참조), 세상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희망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1베드 3.15 참조)" (교회 현장. 10항 참조). “그리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절정인 성찬의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신자들은 신적 희생을 하느님께 바치며 자신을 함께 봉헌하는 것이다.” 또한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힘을 얻어, 신자들은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며, 지극히 거룩한 이 성사로써 하느님 백성의 일치가 적절히 표시되고 기묘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회 현장. 11항).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일치하여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만나러 오시고자 하시는 그 무한하신 사랑을 나타낸다(「자비로우신 하느님」. 13항 참조). 성찬례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의 보편적 화해를 기리고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는 자기 생명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제물로 바치도록 요구받는다. 이리하여 성찬의 힘은 교회 생활의 힘이 된다. 이는 그 구성 요소들, 곧 형제 사이의 화해, 말씀 경청과 수용. 아버지께 대한 봉헌, 자기 자신을 바침으로써 보편적 구원에 대한 인식, 영적·문화적, 물질적 재화의 나눔, 그리스도의 충만 함을 드러내는 완전한 일치를 향한 초교파적 선교 노력 등이 어우러짐으로써 가능하다. 교회는 그렇게 함으로써 지상의 순례 여정을 아버지의 보편적 구원 의지에 대한 '순응'으로 변화시킨다. 이것은 영적이고 참된 기도이며, 교회의 깊은 곳에서 "아빠. 아버지" (로마 8.15)를 부르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2) 성사에서 기념하는 회개와 화해를 통하여
루가복음 15장 11-32절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사랑에 충실하며 아들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고, 아들이 품위를 손상당할까 봐 몹시 염려한다. 이 사랑을 성 바오로는 이렇게 묘사하였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1고린 13.4-8).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을 다시 찾게 되자 감동하여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아들이 생명을 되찾고 자신에 대한 진리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자비로우신 하느님」. 6항 참조). 자비와 친절과 사랑의 하느님께 대한 지식은 항구하고 끊임없는 회개의 원천이다. 곧, 회개가 순간적인 내적 행위로 멈추지 않고 지속적인 상태. 일상적인 정신 상태가 되게 하는 원천이다. 끊임없는 회개는 지상의 모든 사람이 걸어가는 순례 여정의 일부분이다(「자비로우신 하느님」. 13항 참조).
모든 인간의 존엄을 선포하는 교회는, 자신이 선포하는 메시지와, 복음을 위탁받은 사람들의 인간적 나약성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겸손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현대 세계의 사목 현장(Gaudium et Spes). 43항 참조). 따라서, '지구촌' (더 이상 유럽 중심이 아닌, 세속화되고 다양한 문화를 가진 세계)에서 교회는 인류와 민족들의 존엄을 보장해 주는 유일한 중심으로 자처하는 '오만함'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모든 태도를 버리고, 흔들림 없는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겸손과 봉사의 정신으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여야 한다. 나아가 현대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에 근거를 둘 때만,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의 일치를 꾀하는 교회 일치 과업에 진보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방향으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교회는, 이 사랑만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간청하신 그러한 일치를 결정적으로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고백한다(「자비로우신 하느님. 13항 참조).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화해와 회개의 여러 측면을 돌이켜보며, 교회는 보편적 화해의 표지이며 도구인 자신의 특성을 더욱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여러 가지 공직 사회적 형태의 수단을 통하여 거룩한 전례에 관한 현장(Sacrosanctum Concilium), 27항 참조) 참회와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증진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3) 마리아처럼, 교회는 성부께 찬미의 마니피캇을 불러 드린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 자비의 신비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시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는 그분의 구속 사업에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참여하시는 자비의 어머니이시다. "당신 모성애로써 당신 아드님의 형제들이 지상 여정에서 위험과 고통 중에 있는 것을 돌보시어 복된 고향으로 인도해 주신다" (교회 현장. 62항: 「자비로우신 하느님」. 9항 참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구세사에서 유일무이한 사명, 오랫동안 기다려 온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는 사명을 위하여 마리아를 택하셨습니다.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루가 1.38) 하시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완전히 열린 마음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나자렛에서 시작되어 예루살렘의 십자가 발치에 이르기까지 그지없이 강렬하게 사셨던 그분의 모성은 이 해에 하느님의 모든 자녀에게,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도록 애정어린 간곡한 권유를 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그리스도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여라' (요한 2.5 참조)"(「제삼천년기」. 54항).
마리아와 함께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동참하고, 또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제시해 주신 사랑으로 이끄는 사명에 동참 함으로써, 세세대대로 자신의 삶안에 현존하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노래한다. 보편적 구원의 성사인 교회는 일치를 향한 순례의 여정에서 충실하게 전례를 거행함으로써 아버지의 자비를 실천하고 선포한다. 그것은 감사의 전례이며, 찬미의 노래이고, 새로운 알렐루야이며, 수락과 동의와 보편적 화해에 대한 '아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다. 인류와 아버지
1. 하느님의 부성애
모든 민족의 통합체인 인류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사실 만백성은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신" (사도 17.26) 하느님께 공통의 기원을 둔다. "모든 인류는 '마치 한 사람의 한 몸과 같이' 아담 안에 있는 것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04항 참조).
하느님께서는 창조주이시기에 아버지이시다.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사도 14.15)을 만드셨다. 그것은 당신 영광을 더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영광을 드러내고 나누어 주시려는 것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93항 참조). 개개인과 모든 인류는 "이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신 유일한 피조물" (사목 현장, 24항)인 까닭에 창조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오직 인간만이 창조주를 알고 사랑할 수 있다(사목 현장, 12항). 오직 인간만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56항 참조).
2.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
이 하느님의 생명은 과연 무엇인가? 오직 하느님께서만 그것을 아신다. 우리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것을 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 생명을 보여 주시고자 하셨다.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마태 11.27). 예수님께서는 훨씬 더 깊은 의미에서 하느님의 부성애를 드러내 보여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이실 뿐만 아니라, 당신 외아들에게는 영원으로부터 아버지이시다. 반면, 성자께서는 성부께 대해서만 아들이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41항 참조).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끊임없이 사랑이 교류되고 있고, 그 사랑은 사랑의 성령에게서 나온다. 이로써 사람은 하느님의 가장 내밀한 신비, 하느님의 존재 자체인 삼위일체의 사랑에 동참하게 된다.
하느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의 계획이며, 하느님께서는 그 계획에 따라 세상을 창조하시고 존재하게 하셨다. 아담이 타락하여 죄의 노예가 된 다음에도,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힘으로, 그리고 사랑의 법에 따라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고 새로 태어나게 하셨다. 역사가 완성되는 그날, 하느님께서 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가족이 되도록 부름받은 모든 사람, 모든 인류 가족을 위한 해방과 구원과 충만한 생명의 계획이다. 그것은 또한, 성령께서 머무르시는 곳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며 아버지의 자녀들인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 천상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르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의 계획이다.
3. 인간과 인류의 역사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신비와 그분의 사랑을 보여 주심으로써,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이 높이 불리었음을 가르쳐 주신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의 신비는 강생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참 빛을 발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의 후손들에게 죄로 일그러졌던 하느님의 모습을 회복시켜 주셨다(사목 현장, 22항).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아버지를 알게 하고, 모든 여성의 존엄을 인정하게 한다. 그것은 또한 생명의 충만함을 드러내고 세상의 의미와 역사의 의미를 밝혀 준다.
인류의 역사는 우리 구원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인류를 하나로 창조하시고, 죄 때문에 흩어졌던 당신 자녀들을 한데 모으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요한 11.52 참조). 그러한 목적으로 하느님께서는 당신 성자를 보내시어 당신 자녀들의 새롭고 보편적인 백성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교회 현장. 13항), 하느님께서는 다름 아닌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당신 생명에 참여하도록 초대하고자 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 무관한 개별체로서가 아니라 하나로 일치된 백성으로 당신 생명에 참여 하기를 바라신다(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Ad Gentes). 2항).
인류의 역사는 구원의 '시간'이고 하느님의 사랑의 시간이며, 인류가 하느님과 다른 모든 사람을 사랑하도록 주어진 시간이다. 인류의 역사는 죄의 상처를 입고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한 비극으로 얼룩져 있지만,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자유와 구원의 계획이 드러나고 이루어지는 시간이며 장소이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역사 안에서 인류에게 교회를 주셨다.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하느님과의 내밀한 일치와 온 인류의 일치를 드러내는 표지이며 도구이고(교회 헌장, 1항) 구원의 보편적 성사이다(교회 현장, 48항).
4. 역사 속에 실재하는 하느님의 사랑
개개인과 모든 인류 가족, 그리고 세상과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사목 현장, 2항 참조)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끊임없이 교류되어야 할 사랑, 바로 생명의 본질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성 요한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편지를 쓰면서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은 말로 선포한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
에 계십니다" (1요한 4.7-16).
사랑은 상호간의 사랑이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은 참된 자기 봉헌 없이는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없다(사목 현장. 24항 참조). 남자든 여자든 인간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며 모든 이에게 선물이 되도록 부름 받았다(자비로우신 하느님 7항 참조). 우리를 아버지같이 돌보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한 가족을 이루고 서로 형제 같은 마음으로 대하기를 원하셨다" (사 현장. 24항). 사실 우리는 모두 성자 안에서 같은 아버지의 자녀이며 형제들이다(마 8.14-17 참조). 이러한 이유로, 모든 개별 공동체는 사랑에 토대를 둔 보편적 형제애를 드러내어야 한다.
'사랑의 문화'는 바로 이러한 토대 위에 건설될 수 있다. “인간과 인격에 대한 이러한 개념이 없다면, 가정 안에 '인격의 친교'가 없다면, 결코 사랑의 문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의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차원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를 내어 주는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가정 교서 13-14항 참조). 사랑의 문화에서 모든 사회, 국가, 국제 기구는 친교의 관계, 사랑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랑의 문화에서는 소외되고 불이익을 당하며 박해받고 차별받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으며, 평등과 사회 정의, 형제애와 평화가 넘칠 것이다.
5. 세상과 교회 안에서
인간과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살펴보면 몇 가지 중요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 인간에 대한 완전한 진리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 안에 놓여 있다. 이 관계는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로 발전되며, 생명을 받은 모든 인간은 이러한 관계를 맺도록 부름 받았다.
- 여기에서, 역사적이며 동시에 초월적인 차원을 지닌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가장 건실한 토대를 발견할 수 있다.
- 신성불가침한 인권의 토대와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관심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 남녀의 평등한 조건은 다 같은 성부의 자녀라는 사실에 그 완전성이 있으며, 이는 형제애의 끈이 되어 정의와 연대의 '논리'를 형성한다. 또한 남녀 평등의 조건은 모든 사람, 모든 가정, 모든 공동체, 모든 민족의 발전을 위한 공동의 노력이라는 참으로 인간적인 시각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날마다 추구하고 건설해야 할 평화를 위한 '거룩한 긴장'을 뒷받침하고 강화한다.
- 아버지의 자녀가 된 사람은 역경에 놓여 있는 이들, 폭력과 억압과 소외로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것이 가난한 사람들, 형제 가운데서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우선적인 사랑을 쏟는 이유이다.
-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의 형제라는 것은 교회가 하느님의 가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의 고유한 목적을 위하여 주님께 받은 은혜와 은사를 함께 나누고 거기에 동참하 며 공동으로 책임지게 하는 근거가 된다.
- 이것은 또한 교회 생활과 사목 생활의 특징이 되어야 할 '환대'와 대화의 분위기를 이끌어 내는 원천이기도 하다.
- 하느님의 부성애는 신자들과 사목자의 관계에서 가장 견실한 토대가 되며, 신자 공동체와 인류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사목자의 교역 수행에서 본질적인 전형이 된다.
- 교회 공동체에서 사목 실천은 교회의 표상에 입각하여 계획하고 전개하여야 한다. 곧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에 바탕을 두고 모인 백성” (교회 현장, 4항)이며, 하느님의 가족으로 세워지고 발전되는 것이다.
- 하느님의 부성애는 교회의 선교적 특성의 토대가 된다. 교회는 전 인류와 함께 걸으며 인류를 새롭게 하고 인간 가족을 하느님의 가족으로 변화시키도록 사람들 가운데 파견되었다. 이러한 개념에서 나눔과 대화와 선포의 여정이 뒤따른다(사목 현장, 40량 참조).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힘으로 우리에게 계시되고 전달된 아버지의 사랑은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을 새롭게 하고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한다.
6.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복음 선포
교회의 선교적 특성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선교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이 적절하다. 마태오복음 28장 외 선교 명령이 그 전형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 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19-20절). 그러나 최근에는 요한복음 17장의 명령을 더 강조하는 편이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 (21절).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시어 세상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23절 참조). 복음화의 이 두 가지 차원은 상충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 보완한다.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은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l Nuntiandi)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스승보다 증거를 주장보다 경험을, 이론보다 생활과 사실을 더 믿는다."(42항)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 요한은 더욱더 '공동체 지향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이것은 교회가 선포해야 할 메시지의 성격에 더욱 부합하는 방법이다. 교회는 사랑의 친교 안에서 생활하시고 모든 이에게 당신의 친교의 삶을 전하고 싶어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선포한다. 사실 예수님의 사명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께서 누리시는 그 친교에 모든이가 동참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 현대의 복음 선교 77항에서 밝히신 생각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 선교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숙고해 볼 만한 것이다.
"만일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선교의 효과는 매우 감소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유언으로, 당신 제자들의 일치는 단순히 당신을 따르는 것만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성부께로부터 파견되셨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치는 그리스도 자신과 그를 믿는 신자들에게 해당하는 신앙의 강한 증거가 됩니다. 복음 선포자인 우리는 신자들에게 아무런 격려도 되지 못하는 분쟁으로 분열되고 갈라진 인간의 모습을 보일 것이 아니라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논쟁을 초월해서 공동으로, 그리고 성실하게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는 교회의 일치와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간의 일치를 언급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 외에도, 그리스도의 신비를 발견하는 것은 비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는. 그들이 믿고 있는 교리와 계명을 진정으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것들도 흔히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의 빛을 반영하기(비그리스도교에 관 한 선언[Nostra Aetate), 2항) 때문이다.
7.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흩어진 자녀들을 한데 모으시려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통하여 인류와 새롭고 결정적인 계약을 맺으셨다. 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마리아께 향하셨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갈라디아서 3장 28절을 인용하시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더 이상 남성도 여성도 없다(「자비로우신 하느님 11.19항 참조)고 쓰신 말씀은 암시적인 것이다. 남녀의 대립과 대조, 원죄의 흔적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갈라 3.28). 교황께서는 이 말씀이. 하느님의 위격들 사이의 가장 완전한 친교를 모범으로 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최초의 '두 사람의 일치'를 뜻한다고 설명하신다.
그러므로 결국, 당신 모습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계획은, 인간의 본성을 지닌 모든 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새로 나서. 마음을 같이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 때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다(선교 교령, 7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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