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3ㆍ15의거]
광주 금남로 '哭 민주주의 장송' 시위 3시간 후인 오후 3시 43분 경과 저녁 6시 30분 두 차례에 걸친 마산 시민과 학생 3,000여명의 극렬한 저항이 마산 제1차 시민봉기이고 이 때 행방불명된 마산상고 김주열군이 21일만인 4월 11일 마산 앞 바다에 떠오르자 극도에 달한 대규모 시위가 마산 제2차 시민봉기이다.
마산 1,2차 시민봉기에서 12명이 총탄과 최루탄에 숨지고 920여 명의 부상자와 수 백명이 구금 연행되었다.
이승만 독재정치의 3.15 부정선거에 대항했던 광주 금남로 첫 시위('哭 민주주의 장송' 데모)와 마산 1,2차 시민봉기가 4.19민주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던 '마산 3.15의거'다.
“땅! 땅! 땅! ”
인구 13만 명의 마산시내에 울려 퍼지는 총소리. 1960년 3월 15일 밤 나는 그날 밤을 잊을 수 없다.
당시 우리 집은 마산경찰서(현 마산중부 경찰서)근처에 있었고 월영초등학교 3학년 개학을 앞두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밖에 나갔다가 오셔서 절대로 나가지 말라고 하셨다. 나가면 죽는다고…….
다음날 거리에 나가 봤더니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불에 탄 경찰 짚 차가 마산역 광장(현 월포 벽산 블루밍 아파트 단지)에 뒹굴어 있었고, 파괴된 경찰서. 수많은 자갈돌과 서류들이 길바닥에 널려있었다. 마산시청 유리창은 전부 박살이 나있었고,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경찰의 삼엄한 경비 속에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호송되고 있었다. 머리에 피가 맺힌 붕대를 감은 학생도 보였다.
4월11일 실종된 김주열 시신이 참혹하게 살해되어 마산 앞 바다에서 발견되고, 격분한 시민과 학생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민주주의를 외치며 '애국가' '전우야 잘 자라' 등의 노래를 부르며 시위하던 모습, 전투복을 입은 경찰들의 모습이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는 그저 신기해 보였고 재미있어 보였다. 먼 훗날 철이 들 무렵 그것이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3ㆍ15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을…….
그때의 고등학생 모습은 나에게는 너무나 큰 산처럼 보였다. 의거가 일어난지 반세기가 지났다. 당시의 세대들은 70대를 넘은 인생의 석양길에 서 있는 세대가 되었다.
창원시민이면 한번쯤은 3ㆍ15의거를 되새기며 그때의 역사현장을 가 보았으면 한다.
[역사적 의의]
● 3ㆍ15의거는 기본적으로 마산 인이 가진 진취성과 식민지 시기 이래 형성된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성을 바탕으로 하여 독재정권에 대항한 민중항쟁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사회에 민주화 운동으로서의 민중항쟁의 효시가 된 역사적 사건이 바로 마산의 3ㆍ15의거라 할 수 있다. 이후 1960년 1970년대를 거치면서 독재에 대항하는 민주주화 운동으로 정착되었다. 이제 분명한 것은 자유 정의 앞에 어떠한 불의와 독재도 존재할 수 없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으며 또한 역사는 그것을 분명 히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장기 집권 유지를 위해 부정선거를 획책하자 마산시민과 학생들이 이에 항거하여 시위를 일으켰다. 1차 의거에 이어, 4월 11 일 그 동안 행방불명되었던 김주열 군이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의 시체로 마산 중앙부두에서 떠오르자 격분한 시민들이 다시 2차 의거를 일으켜 피 흘리 며 싸웠다. 이 의거에서 12명이 사망하고 700여명이 경찰이 쏜 총에 맞거나 체포 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 이러한 마산시민과 학생들의 자연발생적이고 의로운 투쟁에 대한 경찰당국의 가혹한 탄압은 전 국민들로 하여금 슬픔과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리하여 이는 곧 "부정선거 다시 하라". "구속된 마산 학생 석방하라"는 구호와 함께 4ㆍ19혁명으로 이어져, 드디어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함으로써 민권이 승리하게 되었다. 자유ㆍ민주ㆍ정의가 기본 정신인 3ㆍ15마산의거는 현대사에 있어 최초의 민주화 운동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으며 또한 현대사 민주화운동의 발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