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호우총에서 발굴된 것으로 이 그릇 밑 바닥에 "광개토지호태왕(廣開土地好太王)"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보여 준다.
즉, 내물왕(356~402) 때에 신라 해안에 나타나던 왜의 세력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 광개토 대왕(391~412)의 군대(호우총 그릇)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하였다(400).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고구려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나갔다.
㉠ 임신서기석(진평왕 611년): 문무왕 12년 설, 성덕왕 31년 설도 있음. 두 명의 화랑이 “忠道를 지키고,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나라가 편안치 않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忠道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3년 내에 시경, 상서, 예기, 춘추전(좌전)을 습득할 것을 맹세한다”라는 맹세의 글을 우리말식 문체로 기록한 것으로 당시의 화랑도 사상과 한자 사용, 유교 경전 공부에 대한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창녕비(561): 경남 창녕 지역에 소재한 진흥왕 순수비. 정식 명칭은 척경비(拓境碑)만 순수비와 같은 순행의 내용이다. 비화가야를 정복한 후 왕으로서의 통치 이상과 포부를 밝히는 한편, 중앙의 고관과 지방관이 일치 협력해 백성을 잘 이끌라고 한 유시를 담고 있다.
㉣ 연가 7년명 금동 여래 입상(국보 119호):경남 의령 출토. 고구려와 관련된 명문(연가 7년: 539년)가 있는 불상이 남한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문화재이다. 정수리 위에는 큼직한 육계가 있으며, 소라 모양의 보발(寶髮)이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의 불상에서는 보기 드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