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계의 고민
(정도전의 요동정벌, 국내용? 아니면 국외용?)
명나라 조정에서는 정도전이 주장하는 요동정벌이 실현 불가능한 국내용일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었다.
다시 말해, 암중모색중인 이성계의 아들들과 개국공신들을 무장 해제시키기 위한 정도전의 책략이라는 것이다.
대의명분으로 요동정벌을 내걸고 진행한 오진도에 의한 군사훈련과 사병혁파는 이방원을 향한 칼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로서는 차제에 좋은 구실이 생겼으니 조선을 최대한 압박하여 한반도에 묶어 두려는 전략이었다.
정도전의 요동정벌론이 국내용이든 국외용이든 소국이 대국을 넘본다는 것은 무엄한 일이요, 용납할 수 없는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설혹 그것이 정도전의 외교적인 실수라 하더라도 묵과할 수 없는 신흥강국 명나라의 오만이었다.
포스트 이성계와 일본을 견제하려는 명나라의 국제전략, 이런 기회에 조선을 확실하게 손아귀에 넣고 명실상부한 사대 조공국 관계를 만들어 놓겠다는 것이 명나라의 복안이었다.
이는 포스트 이성계와 왜국을 견제하려는 명나라의 국제 전략이었다. 이래야만 자국 해안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 문제를 조선에 맡겨두고 자신들은 원나라를 상대로 한 통일전쟁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방에서 원나라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명나라 입장에서 조선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밀고 들어온다면 여간 신경 쓰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원나라와 대륙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입장에서 요동 정도는 잠시 버려 둘 수 있지만 그것은 17세에 고아가 되어 혈혈단신 명나라를 일으켜 세운 입지전적 인물 명 태조 주원장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원나라에 사대하던 고려를 뒤엎고 일어난 신생국이 명나라에 머리를 조아리며 조공하겠다고 방향을 틀었다.
이것을 어여삐 받아들인 명 황제 주원장은 조선이라는 국호를 내려주었지만 이성계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변방을 다스리는 권지국사(權知國事) 취급이었다. 이것이 조선의 불안이고 이성계의 치욕이었다.
이성계는 사선을 넘나들며 전장을 누비고 무공을 쌓아 백성들의 명망을 얻었다.
목숨 걸고 혁명에 성공하여 일국의 왕으로 등극하여 임금 노릇을 하고 있다.
헌데 권지국사라니 자존심 상하고 굴욕적이지만 대안이 없었다. 이것이 이성계를 짓누르는 난제였다.
명나라를 어떻게 넘어야 하나?
그렇다고 명나라가 점찍어 놓은 정도전을 덜컹 내줄 수도 없었다.
정도전을 명나라에 보낸다면 그것은 죽음의 길이었다.
조선에서 보낸 사신을 매질하여 되돌려 보내는 주원장의 행태로 보아 불을 보듯 뻔했다.
목숨 걸고 혁명을 같이 한 동지를 사지로 내모는 꼴이었다.
정도전을 명나라에 보내어 인질이 되거나 처형된다면 혁명 동지들의 반발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도전은 무장출신 이성계의 싱크탱크, 이러한 상황에서 이성계의 선택의 폭을 좁게 하는 것은 정도전의 가치였다. 정도전은 역성혁명을 성취하는데 두뇌였으며 자신에게 없는 아이디어 창고였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둘도 없는 브레인이었다.
정도전은 개국과 함께 고려의 잔재를 청산하고 신생국 조선의 터전을 닦고 있었다. 개국 당시 즉위교서를 지었으며 혁명공약에 해당하는 편민사목(便民事目)을 발표한 것이 정도전이었다.
또한 요즘에는 조선 국채의 골격에 해당하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 매달려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으니 정도전이 없으면 혁명과업 수행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성계가 정도전을 선택하는데 주저하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명나라를 상대로 한 게임에서 정도전은 이성계가 쓸 수 있는 마지막 카드란 것이다.
섣불리 정도전을 내놓았다가 더 이상 내놓을 것이 없는 상황에 몰리면 이판사판 전쟁을 하던가 아니면 자신의 목을 내놓아야 하는 위기에 몰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경천사에서 돌아와 한 달이 다되었지만 뾰쪽한 답이 없었다.
명나라에서 장남이나 차남을 보내라는 요구가 유효기간은 없었지만 금년을 넘기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호미로 막아도 될 일이 가래로 막아야 할 큰 문제로 확대될 것만 같았다. 손을 꼽아 짚어봤다.
이성계에게는 아들이 7명이 있었다.
개국하기 1년 전 돌아간 한씨에게서 낳은 아들이 다섯, 현비 강씨에게서 낳은 아들이 둘이었다. 큰아들 방우는 이숭인과 함께 고려국 사신으로 명나라를 다녀오다 아버지의 혁명의중을 파악하고 해주에 잠적하여 은둔생활하다 죽었다.
큰 아들을 대신하여 장남 노릇을 하는 둘째 아들 방과는 심약했다.
셋째 방의는 청년장교시절 말단 군책을 맡아 전선을 떠돌다 보니 가르친 것이 없었고, 넷째 방간은 성격이 괴팍했다. 강씨 소생 방번은 어렸고 그보다 어린 막내 방석은 세자로 있었다.
그렇다면 방원?
꼽아보니 이방원... 그러나 말을 꺼낼 엄두는 안나고 손가락을 짚어가던 이성계는 방원에서 멈추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딱 찍어서 방원이 재목인데 명나라에 다녀오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방원은 고려 말 지식인 사회에서 들불처럼 번지던 성리학을 공부했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기도 했다.
이색과 함께 고려국을 대표하여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이 정도면 딱인데 입을 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몽주를 격살하며 개국공신 특등인데 공신록에 올려 주지도 못했다.
혁명동지들의 여론이 비등한데도 나이어린 아내 현비 강씨의 눈물작전에 휘말려 막내아들 강석을 세자에 책봉했다. 자신의 아들이라면 공이 있고 없고 가릴 것 없이 똑같이 받을 수 있는 당연직 정안군이라는 칭호 하나 붙여서 홀대하고 있으니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정도전의 견제에 밀려 직책하나 주지 못하고 있으니 가슴이 아팠다.
이러한 이방원에게 아무리 아들이지만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명나라에 다녀오라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이것이 이성계의 고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