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항일루트4 : 순국, 중국 다롄, 뤼순
안중근은 형장으로 끌려갔다. 교수대가 보이는 검시실에는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전옥, 소노키 통역관, 기시다 서기관, 오리다 의사, 미즈노, 가마다 변호사가 있었다. “1910년 2월14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의 판결이 확정됐고, 명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한다. 마지막으로 할말은 없는가” “나의 행위는 동양 평화를 위해서다. 한일 양국 국민이 서로 일치 협력하고 평화를 도모하기를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교수대에서 동양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싶다” 간수가 두장의 종이를 접어 안중근의 눈을 가리고, 그 위에다 하얀 헝겁을 감았다. 안중근은 3분 정도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끝나자 오전 10시 4분 밧줄이 목에 걸렸다. 안중근의 몸이 공중에 매달렸다. 10시 15분 절명을 확인했다.우덕순, 조도선, 유동하를 불렀다. 그들은 유해를 향해 조선식으로 두번 절을 올렸다. 공판 중 가장 냉정했던 우덕순이 아이고 하고 통곡하면서 관 위에 쓰러졌다. 간수들이 떼어 놓을 때까지 이별을 슬퍼했다. 차가운 비가 내리는 오후였다. (사키류조 지음 ‘광야의 열사 안중근’ 중에서)
하얼빈 서부 역에서 오전 8시30분 다롄 행 G48 고속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시속 300㎞를 넘나들며 만주벌판을 가로질렀다. 지린성 창춘, 랴오닝성 선양에 잠시 멈추더니 곧바로 다롄으로 향했다. 동북 3성, 고구려, 발해 영토이자, 이토를 격살한 거사단이 이송됐던 남만주 철길이다. 끝도 없는 허허 벌판, 지평선 조차 보이지 않는 땅, 작은 언덕도 없는 말그대로의 대 평원이었다. 다롄북부역에 12시6분에 도착했다. 970여 ㎞를 3시36분만에 주파했다. 안중근이 이틀을 걸려 온 길을 단 3시간 여만에 오다니.
다롄시 뤼순커우구 향양가 139호, ‘여순 일아감옥 구지 박물관’. 일본과 아라사(러시아) 옛 감옥에 만든 박물관이다. 일아감옥은 1902년 러시아가 만들었는데, 1907년 이 땅을 침탈한 일본이 확장했다. 회색벽돌은 러시아, 붉은 색은 일본이 만든 것이란다. 275개 감방에 모두 2000여 명을 수용했다. 이곳에서 이회영, 신채호 선생이 순국했다.
안중근왜 하얼빈에서 다롄까지 끌려갔을까. 또 청국 땅에서 벌어진 사건을 왜 일본이 재판했나. 러시아는 이토 사건과 관련, 모두 15명을 체포, 일본에 넘겼다. 일제는 이들 중 △안중근(살인)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살인예비) △정대호, 김성옥, 김여수, 김형재, 탁
공규 (살인봉조) 등 9명을 다롄으로 데려와 기소했다.
하얼빈은 1896년 러·청 밀약에 따라 동청철도의 부속지로 사실상 러시아 식민지였다. 청이 간섭할 수 없는 러시아 치외법권지역이다. 안중근은 거사 후 러시아 헌병대에서 신문을 받았다. 근데, 대한제국과 청이 1899년 9월 체결한 ‘통상조약 5조’에 따르면 ‘청 영토 내 한인에게는 한국법을 적용한다’고 명시, 대한제국의 영사재판권을 인정했다. 거사단의 재판권을 청과 러시아가 가질 수 없게 된 것이다. 일본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제2 차일한협약·외교권 박탈)을 근거로 러시아에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협약에는 ‘대한제국 이외에서의 한인의 보호는 일본 관헌이 한다’고 돼 있다.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가 한인인 안중근의 신병을 관할한다는 것.
일본은 또 1908년 10월 제정된 법률 52조 제3항 ‘만주 영사관의 관할 사건은 외교상 필요하다면 외무대신의 명령으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이송할 수 있다’는 조항을 들어 거사단을 다롄으로 이송시켰다. 관동도독부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905년 러시아의 조차지인 다롄 등 요동반도를 인수한 후 만든 조차지 행정기구였다. 관동도독부의 군대가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관동군이다. 안중근 일행의 이송에는 만주를 침탈한 러시아·일본의 불평등 국제조약과 식민지로 전락한 약소국 대한제국의 슬픈 현실이 숨어 있었다.
안중근은 1909년 11월3일부터 1910년 3월26일까지 144일 동안 뤼순감옥 제3동 9호방에 수감됐다. 그는 사형이 확정된 2월14일 이후 동생에게 붓글씨 도구를 차입해 많은 글씨를 남겼다. 안 의사 유묵은 주로 1910년 2~3월에 쓴 것으로 전체 수량은 확인되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200점이라 하나, 현재까지 55점 정도가 빛을 보았다. 그중 25점은 보물 569호로 지정됐고, 나머지는 30점은 미지정 상태다.
안중근은 2월 말 통역관 소노키 스에요스와 우리말로 대화를 나눴다. 1909년 10월28일 하얼빈에서 처음 만난 이후 4개월 동안 줄곧 함께 한 인물이었다. “무슨 걱정이 있는 낯 빛이다. 한성에 있는 아내와 규슈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사형수 처지에 일본인 통역관 가족을 걱정한 것이다. 소노키는 어머니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어머니가 건강하길 빈다”며 붓글씨 한점을 주었다. ‘韓日友誼作紹介’ 한일우의작소개, 양국이 서로 잘 알아야 우의가 생긴다는 것이다. 옥중의 안중근이 일본인에게 처음 중 글씨로 추정된다. 소노키의 손녀 후쿠오카 히로코는 “그의 인간미가 감옥 전체에 알려지면서 일
본인들조차 외경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일본 작가 사키류조에게 말한 바 있다. 젊은 검사관, 감옥소장(전옥)까지 글을 청해갔다.
안중근은 간수 치바 도시치에게도 한 점을 남겼다.치바가 한참 전 글을 부탁했는데, 거절한 것이 마음에 남았던 모양이다. 1910년 3월26일 아침, ‘爲國獻身軍人本分’ 여덟 글자를 써내려갔다. 위국헌신 군인본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란 뜻이다. 어쩌면 자신을 위로하는 마지막 글이었는 지 모른다. 치바는 평생 안중근을 위해 날마다 제사를 지냈다.
사형장은 어두웠다. 허공에 밧줄이 매달려 있고, 구멍 뚫린 바닥 위에 안 의사 영정이 놓여 있다. 어머니가 보내 준 하얀 두루마기와 검은 바지, 조선식 신발을 신고 있었다. 결연하지도, 두렵지도 않은 그저 담대한 표정이다. 1879년 해주 땅에서 태어나 만27세(1905) 때 애국교육운동을 위해 진남포에 삼흥, 돈의학교를 세우고, 이듬해 나랏빚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었다. 나라의 주권인 외교권에 이어 군대마저 빼앗겼는데 한가하게 계몽운동이나 벌일 수 없어 1907년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했다. 만 29세(1908) 때 최재형 이범윤이 만든 동의회 소속 연추의병 지휘관이 되어 국내 진공 무장투쟁을 벌였다. 승리도 잠깐, 조악한 무기와 중과부적의 세력은 뼈아픈 패배를 안겨 주었다. 그 해 9월, 더 이상의 의병투쟁이 불가능해지자, 공립협회 블라디보스토크 지회에 가입해 대중투쟁을 모색했다.
1909년 2월26일(음 2.7) 크라스키노에서 동지 12명과 대한독립을 위해 단지 혈서를 쓰고 이토를 겨냥했다. 때는 왔었다. 우덕순 등 7인과 결사동맹을 하고, 하얼빈에서 10월26일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했다. 그는 옥중에서도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며 침략, 전쟁없는 세상을 염원했다. 그렇게 만 31세를 살았다.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 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반장은 고사하고, 안 의사 유해조차 찾지 못해거늘. 국권은 회복됐으나 강토는 다시 갈라져있으니….이를 어찌할거나.
◼ 3인 거사단, 그 후
▲우덕순=1915년 뤼순감옥 출옥(3년 징역형). 1913년 나올 예정이었으나, 함흥감옥 탈옥 사건이 탄로나 2년이 추가됐다. 석방 후 중국 하얼빈, 치치하얼, 만저우리 등지에서 교육 종교사업을 펼쳤고, 러시아 전로한족중앙회에서도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해방 후 흑룡강성 한인민단 위원장을 맡아 아들과 함께 재중동포와 피난민의 귀국 수송에 헌신했다. 1948년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안중근 추모사업을 벌였다. 한국전쟁 발발 때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에게 체포, 총살당했다. 1880년 충북 제천 출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지 안장.
▲조도선=1911년 8월22일 뤼순감옥 출옥(1년6월 징역형). 하얼빈의 유동하 집에 머물며 유경집으로 부터 의서를 배우고, 제약도 하며, 환자를 돌보는 초보적인 의술을 배워 훗날 모스크바에서 동양병원을 차렸다. 1879년 함경남도 흥원 출신으로 이후 행적 불분명.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유동하=1911년 8월22일 뤼순감옥에서 출옥(1년6월 징역형) 이후 러시아 교포사회를 찾아 애국 강연회를 펼쳤다. 러시아가 항일운동을 차단하자 가족은 하얼빈 등지로 전전했고, 자신은 부친과 1917년 싸말리아로 들어갔다. 러시아혁명이 성공하자 한인들은 시베리아에서 볼세비키 혁명군에 가담, 재정러시아 군대(백군)와 전투를 벌였다. 1918년 4월 일본이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등과 국제간섭군을 편성, 시베리아에 출병하자 한인과 볼세비키는 이들과 치열하게 투쟁했다. 혁명세력과 연대해 일제를 패퇴시키면 독립이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또 전투 경험도 생기고 무기 확보도 가능했다. 그해 가을 시베리아 주둔 일본군에게 동료 11명과 함께 붙잡혀 싸말리아 강가로 끌려가서 총살당했다. 만 26세. 1892년 함경남도 원산출신. 사후 70년이 지난 198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