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문 : 느헤미야 2:11-2:20
제 목 :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11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무른 지 사흘 만에
12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13 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분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불탔더라
14 앞으로 나아가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서는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15 그 밤에 시내를 따라 올라가서 성벽을 살펴본 후에 돌아서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 돌아왔으나
16 방백들은 내가 어디 갔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고 나도 그 일을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족들에게나 방백들에게나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알리지 아니하다가
17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18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19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
20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1. 느헤미야
2017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예전에는 해가 바뀔 때마다 무엇인가 새로운 느낌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별로 그런 느낌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어제였고, 그냥 오늘인 것 같습니다. 그냥 지난 달이었고, 그냥 이번 달인 것 같습니다. 그냥 작년이었고, 그냥 올해인 것 같습니다. 새 날이 오고, 새 달이 오고, 새 해가 와도 특별한 의미, 특별한 감흥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는 해가 바뀌면 1학년이 2학년이 되고, 중학생이 고등학생이 되고, 대리가 과장이 되는 것 같은 신분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혹은 올해에는 꼭 군대를 가야지, 올해에는 꼭 취업을 해야지, 올해에는 꼭 결혼을 해야지 같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의 큰 계획을 세우곤 했었습니다. 또 이런 저런 큰 결심을 하곤 했었습니다. 그랬기에 아마도 해가 바뀔 때마다 느낌이 남달랐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어느덧 세월이 많이 흘러서 해가 바뀌어도 아무런 신분의 변화가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해가 바뀌어도 새롭게 세울 큰 계획도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큰 결심을 해도 그 결심이 결국은 지켜지지 않더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냥 나이만 한 살 더 먹은 것뿐입니다. 그냥 사십 대가 오십 대가 되고, 오십 대가 육십 대가 된 것뿐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오히려 흰 머리만 늘어나고, 오히려 아픈 곳만 늘어납니다. 그래서 새해를 맞는다는 것이 그렇게 유쾌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새해를 맞는다는 것이 공연히 서글픈 일, 서러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을 달리 해보겠습니다. [창세기 24:1],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해가 바뀌어도 아무런 신분의 변화가 없고, 해가 바뀌어도 새롭게 세울 계획이 없다는 게 우리가 바로 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범사에 복을 받은 결과일 것이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그만큼 안정이 되었고, 그만큼 성숙이 된 것이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해가 바뀌어도 큰 의미 큰 감흥은 없지만, 큰 의미 큰 감흥이 없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하나님의 복이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예. 아무 문제없이 어제가 오늘로 연결되고, 아무 문제없이 지난 달이 이번 달로 연결되고, 아무 문제없이 작년이 올해로 연결되는 것, 그것이 범사에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큰 복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해가 바뀌면 무엇인가 나아지고 무엇인가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감과 흥분 속에 요란하고 떠들썩하게 새해를 맞이하지만, 우리는 범사에 우리와 함께 하시며 범사에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알고 있기에 조용하고 차분하게 새해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어제의 그 모습 그대로 오늘을, 작년 그 모습 그대로 새해의 첫 날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쭈어 보겠습니다. 새해 첫 날이라고 해서 제가 특별한 설교를 할까요, 아니면 작년에 하던 느헤미야 설교를 그대로 이어갈까요? 전자일까요, 후자일까요? 정답은 후자입니다. 작년에 하던 느헤미야 설교를 그대로 이어갑니다. 아무쪼록 느헤미야로 설교를 시작하는 2017년 올 한해도 하나님의 큰 은혜가운데 거하시는 우리 다누림의 가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사에 은혜를 주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기억력도 가물가물해지는 은혜까지도 함께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 설교조차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하는 우리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 설교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가 작년의 설교를 기억해 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원리가 가득한 제가 앞선 세 번의 느헤미야 설교 내용을 간단하게나마 간추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느헤미야는 자서전 형태의 회고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증거가 [느헤미야 1: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라는 구절입니다. 자서전이기에 자기 자신을 나쁘게 묘사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자서전이기에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는 내용이 없습니다. 자서전이기에 잘못한 일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의와 자기 자신의 자랑만 넘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말은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해서 신실한 의인의 기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었다고 고백한다고 해서 실제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은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두가 자신이 한 일을 미화하는 자화자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런 자서전 형태의 회고록을 성경에 포함시킨 것은 느헤미야를 본받아야 하는 위인의 모습으로 제시하는 게 아니라 느헤미야를 통해 죄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주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또 느헤미야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에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사람의 후손입니다. 즉 바벨론에서 태어나고, 바벨론에서 자란 바사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이스라엘 사람으로 살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느헤미야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의 신하로서 수산 궁에서 일하는 바사의 관리입니다.
이런 느헤미야에게 아주 오래 전에 멸망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아주 오래 전에 해체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안타까움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 멸망한 국가, 해체된 민족의 신(神)인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에게 이스라엘의 해방, 이스라엘의 독립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고, 느헤미야에게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가 가장 관심을 갖는 부분은 오로지 자신의 부, 자신의 권력, 자신의 명예, 자신의 출세입니다. 이것을 위해 느헤미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왜곡해서 이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느헤미야에게 아주 좋은 롤 모델이 한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에스라입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닥사스다 왕의 신하로 있다가 13년 전에 이스라엘로 떠나 그곳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에스라는 아주 바람직한 롤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즉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신하로서 한 평생을 사느니 에스라처럼 이스라엘 땅에서 총독으로 사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로 사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서 왕께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술 관원이 되었고, 술 관원이 된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일부러 왕 앞에서 수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던 것입니다.
또 왜 그렇게 수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느냐는 왕의 질문에 대해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오니 조서를 내려달라고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 예.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땅으로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도우심을 따른 것이 아니라 느헤미야 자신의 계획이었고,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 힘입은 것이었습니다.
2. 예루살렘 성벽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땅에 들어온 느헤미야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으로 연결됩니다. 오늘 본문은 느헤미야가 몇몇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 성을 살펴보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아주 친절한 제가 예루살렘 성 도면을 주보에 삽입에 놓았으니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하튼 느헤미야가 둘러본 예루살렘 성은 정말로 황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성벽은 무너졌고, 성문은 불탔고, 짐승 한 마리도 온전히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길은 사라진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성의 상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왜 이렇게 느헤미야가 서두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2:11],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무른 지 사흘 만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지 삼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을 두루두루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먼 길을 왔기에 조금 쉴 만도 한데 느헤미야가 쉬지도 않고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느헤미야가 이렇게 서두르는 첫 번째 이유는 하루 빨리 자신의 공적을 아닥사스다 왕에게 증명해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왕으로부터 이스라엘로 들어오기 위해 조서를 받을 때 했던 말이 [느헤미야 2:5],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은 순순히 조서를 내려주었고, 순순히 보내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쭈어 보겠습니다. 느헤미야의 이 말이 혹시 이스라엘의 재건이나 이스라엘의 부흥을 도모하는 말이었다면 왕이 느헤미야에게 순순히 조서를 내려주었을까요, 내려주지 않았을까요? 절대로 내려주지 않습니다. 왕이 느헤미야를 순순히 보내주었을까요, 보내주지 않았을까요? 절대로 보내주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해 반역을 일으킬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순순히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왕이 느헤미야를 순순히 보내주었던 이유는 느헤미야가 계획한 성을 건축하는 일이 왕 자신에게도 유익과 이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느헤미야의 성 건축은 바사로부터의 해방, 바사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성 건축이 아니라 바사의 한 도(道)인 유다 땅의 예루살렘 성을 온전히 재건하여 왕에게 바침으로써 왕께 영광을 돌려드리겠다는 의미의 성 건축이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니와 두어 사람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불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갈 계획을 가지고 있던 느헤미야는 이것을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왕이시여. 소신이 몇 달 전에 예루살렘 성에 관한 소식을 들었사온데 그 성이 그렇게 황폐해져 있는 것은 대 바사 제국의 위대한 왕이신 아닥사스다의 이름과 영광에 전혀 어울리지 않사옵나이다. 소신을 그 곳에 보내주시오면 하루 빨리 성을 재건해서 왕께 바치겠나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은 느헤미야를 보내준 것이고, 느헤미야는 하루 빨리 성벽을 재건해서 왕을 만족시키고 또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서두르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서두르는 두 번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통치권을 하루라도 빨리 확립하기 위해서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예루살렘 성 재건이 느헤미야의 목적 같지만 느헤미야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벽 재건이 아닙니다. 성벽 재건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아닥사스다 왕에게 입증하는 것이고, 그 입증을 통해 유다 땅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느헤미야는 유다의 총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충성스런 백성으로 만드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마음을 일찍부터 한 곳으로 모아야만 합니다. 일찍부터 뿔뿔이 흩어진 백성들의 힘을 한 곳으로 모아야만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뭔가 특별한 이벤트가 필요하고, 그 이벤트가 바로 성 건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우리는 현대정치에서도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해가 바뀌었으니까 벌써 3년 전의 일입니다. 3년 전에 러시아 소치라는 도시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김연아 선수가 아쉽게도 2위에 머물렀던 대회입니다. 사실 그 대회는 순수한 의미의 올림픽이 아니었습니다. 추악한 정치로 얼룩진 정치 이벤트에 불과했습니다. 러시아내 소수 민족의 반발과 심각한 경제난으로 인기가 땅바닥까지 떨어진 러시아 대통령, 푸틴에 의한 푸틴을 위한 푸틴의 올림픽이었습니다. 푸틴은 그 올림픽을 통해 러시아 민심을 수습하고 자신의 인기를 끌어올리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승부조작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 희생양 중의 하나가 바로 김연아 선수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1년에 있었던 ‘국풍 81’이라는 문화대축제였습니다.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절차와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방법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힘을 한 곳으로 결집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련된 축제가 여의도광장에서 5일 동안 열린 ‘국풍 81’이었고, 그 축제의 한 행사인 가요제에서 이용이라는 가수가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로 대상을 받았던 것입니다. 지금 느헤미야가 벌이고자 하는 예루살렘 성 건축이 소치동계올림픽, 국풍 81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한 곳으로 끌어 모으는 초대형 이벤트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3.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그런데 느헤미야의 속마음이 드러나면 안 됩니다. 예루살렘 성 건축이 바사 왕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안 됩니다. 예루살렘 성 건축이 백성들의 마음을 끌어 모으는 정치 이벤트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안 됩니다. 예루살렘 성 건축이 실상은 느헤미야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위한 것이지만 마치 나라를 위한 것처럼, 마치 백성을 위한 것처럼, 마치 하나님을 위한 것처럼 가장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하는 말이 [느헤미야 2:17],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수치를 당하지 말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즉 예루살렘 성을 튼튼히 건축하여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단단히 대비하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시는 외부의 공격에 무너지는 수치스런 일, 모욕적인 일을 당하지 말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함락된 이유가 예루살렘 성이 부실했기 때문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벽 곳곳에 하자가 있었기 때문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수치를 당하고,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수치를 당하고, 또 예루살렘 성이 무너진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의 원리로 살아감으로써 죄의 결과를 당한 것, 그것이 두 왕국의 패망이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해서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말자고 말합니다. 여러분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성벽만 튼튼하면 외부로부터 침략을 당하지 않습니까? 성벽만 튼튼하면 외부로부터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까? 성벽만 튼튼하면 언제나 형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수치를 당하지 말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이야기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눈치 챘었어야만 합니다. 느헤미야의 계략이 숨어있다는 것을 눈치 챘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눈치를 챈다, 못 챈다? 못 챕니다.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합니다.
사실 성경에서 성은 하나님의 원리가 아닌 죄의 원리입니다. 성경에서 성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4장입니다. [창 4:17],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생 아벨을 살해 한 후에 가인은 오히려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합니다. 죄책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이 뻔뻔한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해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냥 살아가면 됩니다. 혹시라도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표만 보여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표를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성을 쌓습니다. 표를 주신 하나님도 믿지 못하고, 사람들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 아무도 믿을 수 없으니 자기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는 가운데 자기 혼자서만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바로 성을 쌓는 것입니다.
지금 느헤미야가 성을 쌓으며 하는 말이 하나님의 원리에도 전혀 합당하지 않은 어리석은 말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이기 위해 간교한 죄인 느헤미야가 [느헤미야 2:18],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라고 말하며 하나님까지 끌어들이는 대범함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 하나님까지 팔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비록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느헤미야의 계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우리는 눈치를 채야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도 전부 느헤미야에게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관한 대부분의 주2석서, 대부분의 설교는 성전과 성벽을 재건한 일이 훌륭한 일이었다고 칭찬을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위대한 건축물이기에 그 건축물을 재건하는 일은 대단히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이야기에 동의가 되십니까? 저는 그들의 이야기에 절대로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성전은 그렇다 치고 예루살렘 성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더더욱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께 한 번 여쭈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성을 최초로 쌓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겠습니까, 가나안 이방 사람들이겠습니까? 가나안 이방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에 보면 여호수아가 부하들을 시켜서 예루살렘 왕의 목을 발로 밟아 죽게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말은 당시 여리고 성처럼, 당시 아이 성처럼 예루살렘에도 성이 있었다는 반증이 되는 것입니다.
즉 가나안 이방 민족 중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족속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죄의 원리로 쌓은 것이 최초의 예루살렘 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 성을 복원하고, 복원하고, 복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원리로 쌓은 그 성을 일컬어 하나님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라고 하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모두가 느헤미야에게 지금 속고 있는 것입니다.
4.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느헤미야의 계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느헤미야가 오로지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구하기 위해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지만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자 말자’라고 하는 말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내용이 [느헤미야 2:18],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입니다.
느헤미야의 시커먼 속도 모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같이 힘을 모으자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선한 일인지 악한 일인지도 구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도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이것이 선한 일이고, 심지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신다고 하니까 정말로 그런 줄 알고 아무 생각 없이 힘을 보태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참으로 무지한 백성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 이처럼 어리석고 무지한 백성들의 모습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두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의 머릿속에 그 장면이 그려지실 것입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예수님께서 탄 짐승이 어떤 짐승이었습니까? 정답은 나귀입니다. 그 나귀의 등에 안장 대신 얹은 게 무엇이었습니까? 정답은 제자들의 겉옷입니다. 예. 예수님은 제자들의 겉옷을 안장 삼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당시 예루살렘에 사시는 백성이라고 가정해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같으면 제자들의 겉옷을 안장으로 얹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두 손 들고 환영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이것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시며 돌아서시겠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은 로마의 지배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줄 구원자 메시야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은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구원자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원자가 어떤 모습으로 들어와야 합니까? 삼성이 정유라에게 사준 것 같은 멋진 백마를 타고 들어와야 합니다. 멋진 갑옷을 입고, 큰 칼을 차고, 멋진 백마 위에서 늠름한 모습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또 갑옷을 입고, 큰 창을 든 제자들의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나팔수들의 팡파르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당당한 모습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사람들이 기대하고 생각하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찌질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처량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나귀를 타고 들어옵니다. 그나마 안장도 없어서 제자들의 겉옷을 나귀 등에 올려놓았을 뿐입니다. 곁에서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은 거의 상거지나 다름이 없습니다. 상상했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그러기에 조금만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돌아서는 게 맞습니다. ‘이러려고 내고 그렇게 예수님을 기다렸나.’ 이런 자괴감을 느끼는 가운데 야멸치게 돌아서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들의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펼쳐놓습니다. 그리고 ‘호산나’라고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칩니다. ‘찬송하리로다’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가장 높은 곳에 호산나’라고 환호성을 지릅니다. 어느 누군가가 이렇게 시작하니까 군중심리에 이끌려 너도 나도 함께 따라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따라하는 것입니다. 개그콘서트보다, 웃찾사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백성들, 참으로 무지한 백성들의 모습을 생생히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무지한 백성들의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겠습니다. 예를 들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나귀를 타고 찌질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온 예수님은 그로부터 오일 후에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몬 최종 결정을 한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살릴 수도 있었는데 결국은 예수님을 죽도록 결정한 마지막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그 사람은 바로 어리석고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다들 빌라도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빌라도는 명절이 되면 죄수 하나를 풀어주는 전례에 따라 누구를 풀어줄지 백성들의 의견을 물어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백성들도 그리 대답할 것이라고 기대했었습니다. 왜냐하면 빌라도가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백성들은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꼬임과 선동에 어리석고 무지한 백성들이 이미 넘어간 것입니다.
만약 백성들이 생각이라는 것을 조금만 했었다면, 백성들이 분별이라는 것을 조금만 했었다면, 그래서 백성들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선동에 놀아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백성들이 예수님을 풀어주라고 요구했었다면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살아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예수님을 죽음 쪽으로 내몬 최종 선택을 한 것은 백성들이었습니다. 오일 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호산나라고 외쳤던 백성들,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던 그 백성들의 어리석음과 무지가 이번에는 예수님을 죽게 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 일반 백성들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참으로 무지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어리석음과 그들의 무지가 결코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어리석음과 그들의 무지를 이용해서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리석은 자, 무지한 자를 가르쳐 깨우쳐주는 것이 마땅함에도 결코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더 어리석게, 더 무지하게 만들어 가면서 그들을 이용해 먹는 느헤미야 같은 사람, 대제사장들 같은 사람, 장로들과 같은 사람들이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더 안타까운 일은 이런 모습들이 오늘날 대한민국 교회에서도 너무나 흔하게 목격이 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으로 목사를 신뢰하고, 무조건적으로 목사를 따르고, 무조건적으로 목사를 존경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목사를 더 신앙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나도 똑같은 죄인 출신이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나도 여러분들과 다를 게 없는 사람이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나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이렇게 된 것이라고 하나님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목사가 성도를 가르치고 성도를 깨우쳐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사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어리석고 무지한 성도들을 이용해 먹는데 더욱 더 혈안이 됩니다. 그리고 어리석고 무지한 성도들의 숫자를 늘려나가는 데에 더욱 더 열심을 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니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새해 첫 날이라 절대로 흥분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께서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5.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느헤미야의 선동에 빠져서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전혀 분별하지 못하고 무조건 느헤미야를 따르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무지함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습니다. 예.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리석고 무지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고 무지한 이스라엘 사람들에 비해 그래도 좀 나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머리가 조금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 [느헤미야 2:19],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입니다. 당시는 바사 왕국의 시대입니다. 유다 땅도 바사의 한 도(道)이고, 예루살렘 역시 바사의 한 도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예루살렘의 성벽을 건축하고 있으니 그들의 눈에는 당연히 느헤미야와 이스라엘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를 배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느헤미야가 걱정을 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혹시 그들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신고를 할까봐 느헤미야가 염려를 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전혀 염려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아닥사스다 왕 사이에는 아무도 모르는 밀약이 맺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황폐해져 있는 예루살렘 성을 재건해서 왕께 바치고 왕의 이름과 왕의 영광을 드높이겠다는 밀약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아무리 위협을 가하고 아무리 협박을 가해도 느헤미야는 전혀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느헤미야가 하는 말 [느헤미야 2:20],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너희가 상관할 바 아니니 신경 좀 꺼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느헤미야가 한 이 말에 또 속아 넘어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라고 말하니까 느헤미야를 뜨거운 신앙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라고 말하니까 느헤미야를 뜨거운 애국심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심각한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을 절대로 구별하지도 않으시고, 차별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다른 나라를 구별하지도 않으시고, 차별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과 다른 도시를 구별하지도 않으시고 차별하지도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인류, 온 나라, 온 민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별과 차별은 오직 죄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원리에서 절대로 성립될 수 없는 말입니다. 그저 느헤미야의 생각일 뿐이고, 느헤미야의 말일 뿐입니다.
또 느헤미야는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라고 말합니다. 종이라는 말을 씁니다. 여러분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종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종 삼으신 적이 있습니까?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종 삼으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여러 사람을 일컬어 ‘나의 종’이라고 말씀하신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종은 일꾼이라는 의미의 종이 절대로 아닙니다.
주인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서의 종입니다. 즉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의미의 종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는 종, 하나님을 위해 수고하는 종의 의미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원리에서는 절대로 성립할 수 없는 말입니다.
또 느헤미야는 그렇게 사람이 수고하고 일을 하면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종인 우리가 성벽을 건축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은혜의 하나님이 아닌 보상의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 상벌의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지금 느헤미야에 의해 철저하게 유대교의 하나님으로 둔갑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 하나님을 종의 자세로 섬겨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상의 하나님, 상벌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형통하게 해주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 이것이 유대교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에 의해 조작되고 있는 유대교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이겠습니까, 느헤미야 자신의 유익과 이익만을 위한 하나님이겠습니까? 느헤미야 자신의 유익과 이익만을 위한 하나님입니다. 조금 더 확장하면 이스라엘 기득권층만을 위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유익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로 인해 파탄 지경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을 함께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어리석고 무지한 백성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그렇게 죽으려고 오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리석고 무지한 백성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새해 첫 날, 새 해 첫 예배, 새해 첫 설교입니다. 올해는 우리 기독교 성도들이 조금이라도 어리석음과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대한민국 성도가 우리 다누림교회 성도들의 1/10만큼이라도 성경을 읽고, 1/10만큼이라도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알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알고 있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우리가 더 낮은 자세로 더 겸손한 자세로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2017년 먼저 나의 행복, 나의 성장, 나의 성숙을 이루시는 가운데 우리 주변의 기독교 성도들에게도 끊임없는 관심을 보여주시는 우리 다누림의 성도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