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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이우각 박사와 이진산 대종장과의 대화를 정리하여 펴낸 책입니다)
‘미움을 완전히 없애야 어진 벗들끼리 어울려 사는 세상이 된다’는 증산과 ‘마음 밭을 완전히 다 갈아엎어야 지옥 행을 면한다’는 예수
(1) 증산은 말합니다. “나는 충직한 종복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어진 벗이 필요하다.”(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282)고 말합니다. 철저한 신분사회 속에서 ‘종’이 아니라 ‘벗’을 구하고 있습니다. 전라도의 한 논두렁과 물레방앗간에서 ‘나는 너희더러 내 종이 되라고 한 적이 없다. 나는 어질고 선한 벗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종이 되기보다 벗이 되는 일이 얼마나 더 쉬우냐?’고 가르쳤습니다.
“상말에 ‘무척 잘산다’ 이르나니 ‘척’이 없어야 잘 산다는 말이라. 남에게 원억을 짓지 말라. 척이 되어 갚느니라. 또 남을 미워하지 말라. 그의 신명이 먼저 알고 척이 되어 갚느니라.”(대순전경 p325)
“구릿골 박순여가 반신불수증으로 오랫동안 앓다가 상제님께 사람을 보내어 고쳐주시기를 청하거늘 상제 자현에게 물어 가라사대 ‘순여의 병을 고쳐 줌이 옳으냐, 그대로 두어야 옳으냐? 네가 마음을 풀어야 하리라.’ 자현이 이상히 여겨 가로되 ‘살려주심이 옳으니이다.’ 가라사대 ‘순여가 네게 불평을 끼칠 일이 많으니 너와 함께 가서 다스리라.’ 하시고 자현을 데리고 순여의 집에 이르사 휘파람을 한번 불으시고 병든 다리를 주물러 내리시며 끓인 물 한 그릇을 먹이셨더니, 그 병이 곧 나으니라. 대저 자현이 사교 관계로 인하여 순여에게 불평을 품었는데 상제님은 그 일이 척이 되어 있음을 알고 물으심이니라.”(대순전경 pp382-383)
증산은 마치 화낼 줄 모르는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망아지처럼 길길이 뛰고 자라처럼 목을 자꾸만 내미는 사람들에게 ‘참아라, 참아라, 또 참아라!’고 타일렀습니다. 스스로 제 마음과 몸을 잘 움켜쥐고 있어야 ‘원망 만들지 않고 등돌리는 일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만든 원한과 원망이 빗물 스며들 듯 내 주위로 스며들어 와 끝내는 내게 병이 되고 화가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각 자가 잘 살고 편히 살아야 상생의 세상인데 왜들 척짓고 살고 죄짓고 살며 화와 병을 불러들이느냐?’고 한탄합니다.
사람들은 모든 걸 어렵게만 보는데 증산은 뭐든 쉽게 보고 쉽게 풀이했습니다. 조선 땅 어둑한 백성들 사이에서 초월세계를 알리고 가르치느라 참으로 힘들었을 겁니다. 동학을 붙들고 일어서다 다시 쓰러지는 백성을 보며 ‘무엇이 병인가?’와 ‘어떻게 해야 고치는가?’를 가슴앓이 하며 깊이, 깊이 파고들었을 겁니다.
탐관오리들의 몹쓸 짓에 신음하는 백성들이 굶고 헐벗은 채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습니다. 동학이 만들어 놓은 깨우침과 수운(水雲)과 해월(海月)이 본보인 깨달음으로 백성의 눈 높이는 한껏 높아졌지만 임금과 신하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외세에 팔아먹으려는 도적들이 궁궐과 관아에 우글거렸습니다.
백성의 피 흘림으로 논두렁과 밭고랑이 벌겋게 되고 피난 떠나는 백성들이 흩고 간 보리쌀과 좁쌀이 누렇게 길바닥을 분칠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연자 맷돌처럼 무겁게 벽에 기대 있었습니다. 못 보던 외국인들이 총과 칼을 메고 차고 땀 흘려 농사지어놓은 논과 밭을 마구 짓밟고 다녔습니다. 구호도 많고 소문도 많았지만 어느 것 하나 나아지고 높아지고 멀어질 것 같지 않았습니다.
증산은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개벽을 대비하라’고 외쳤습니다. 상극세상에 얽매여 남 밟고 올라서고 남의 것 빼앗아 내 것 만드는 일에 너무 골몰하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욕하지도 헐뜯지도 말고 오로지 고운 말, 점잖은 말, 높이는 말만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어려운 것은 자신에게 맡기고 ‘너희는 아주 손 쉬운 것이나 하라’고 일렀습니다. 땅과 하늘을 바꿔 신과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을 만들 테니, ‘너희는 마음 다스리고, 높이고, 비우는 일’에 더 좀 열심히 매달리라고 했습니다.
(2) 예수는 갈릴리 호수를 끼고 있는 벳새다에서 한꺼번에 네 제자를 구합니다. 갈릴리 호수(디베랴 바다, 게네사렛 호수 등으로도 불렀음)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었습니다.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를 향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곧 이어 다른 두 형제 즉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향해 똑 같은 말로 불렀습니다.
두 집안의 두 형제들이 ‘배와 그물과 가족을 뒤로 한 채’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곧 예수의 제자들이고 가족이고 백성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한 초월세계의 일이라 사람의 생각과 계산으로는 도저히 담아지지 않는 ‘이상한’ 장면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 ‘큰 일, 놀랄 일’이 생기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 몰아치는 메마른 바람이 호숫물을 먹고 몸을 적신 후 다시 다른 곳으로 달려가듯이 예수의 공생애는 그렇게 단호하고 신속하게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갈릴리 호숫가 마을, 마을을 두루 다니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소리쳤습니다. 병든 자, 약한 자를 수도 없이 고쳐주고 강하게 해 주었습니다. 소문이 날개를 달고 호숫가 마을을 지나 먼 곳까지 걷잡을 수 없이 무섭게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제 집과 마을에서 아픈 자, 병든 자를 업어 나르고 태워 날랐습니다. 예수가 머무는 곳이 바로 ‘기적의 종합병원이고 무료 응급실’이었습니다.
온 사방에서 사람들이 달려왔습니다. 밤을 새워 걸어오는 이도 있고 불편한 몸으로 식구들이나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도착하기도 했습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큰 무리가’ 예수 있는 곳으로 한꺼번에 몰려들었습니다. (마태복음 4.25)
하지만 예수의 입을 통해 쏟아지는 메시지는 엄격하고 강력했습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상관없다는 식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바보’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복음 5.22-2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百體)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태복음 5.28-30)
예수의 하늘나라 ‘높은 계명’ 선포는 정말 살벌하고 아찔하기까지 합니다. ‘눈이 실수하게 하면 그 눈을 빼 버리고 손이 실수하면 그 손을 잘라 부디 지옥 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마음으로만 슬쩍 스케치(sketch) 해도 지옥 불 그 후끈하고 역겨운 기운을 느끼게 된답니다.
형제에게 ‘우둔하다, 모자라다.’는 말만 해도 반드시 그 ‘말 삯’을 호되게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형제나 이웃을 향해 ‘바보’라고만 불러도 금방 얻어맞을 일이 생기고 뒤로 넘어져 코 깰 일을 만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3) 초월세계의 기준은 정말 아뜩하기만 합니다. 이래도 죄가 되고 저래도 죄가 되는 식입니다. 하지만 ‘상생의 세상’에 속하는 일과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기만 하겠습니까? 증산은 ‘먼저 참고 먼저 덕을 쌓고 먼저 해원(解寃) 하라’고 가르칩니다. 소인(小人)의 길에서 어정거리다가 망하지 말고 속히 대인(大人)의 길에 들어서서 새 세상 맞을 채비를 열심히 하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는 ‘나를 따라 나서면 물고기 대신 사람을 낚게 된다.’고 했습니다. ‘다 버리고 떠나면 버린 것 이상의 엄청난 보답이 하늘에 쌓여있다.’고 했습니다. 버려야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눈을 땅에 붙이고 사는 한 하늘나라를 결코 바라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까지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나는 ‘미워하지 말라. 조롱하지 말라. 섭섭하게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더러운 생각, 부끄러운 생각, 말 못할 생각을 아예 품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듣기는 해도 감히 그 높은 눈 높이에 맞출 수 없습니다. ‘일단 일부터 저지르고 뒤늦게 후회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에 더 잘 들어 맞습니다. 일단 욕부터 하고 나야 화난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한데 어떻게 ‘상극 세상’을 벗어나고 ‘지옥불’을 영영 면할 수 있겠습니까?
증산이 말한 상극과 상생 조차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데 무슨 수로 개벽이 올 때를 미리 알아 재빨리 피하겠습니까? 예수가 말한 ‘마음 속 죄 짓기와 마음 속 죄 품기’를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더라고 ‘새 영혼’으로 다시 채우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생명이 펄펄 뛰고 생명이 훨훨 나는 상생의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초월자들이 세워놓은 기준에 어떻게든 딱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죽음도 없고 멸망도 없는 영생을 얻기 위해 하늘나라에 초대받으려면’ 예수가 가르친 계명을 지켜야 하고 예수가 보여준 하늘나라의 눈 높이에 맞춰 살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아끼듯이 남을 아끼고 이웃을 아끼면 가능합니다. 아이가 제 소유를 아끼고 사람들이 제 재물을 아끼듯이 제 심성을 갈고 닦으며 자꾸만 순수해 지고 깨끗해 지면 가능합니다.
우리 앞에 교재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 앞에 스승들이 너무 많습니다. 태어나는 아기들이 새 생명의 귀함을 가르쳐 줍니다. 병든 이의 신음소리가 우리의 막힌 귓구멍을 열어놓습니다. 죽은 이의 남겨진 피붙이들이 흘리는 뜨거운 눈물이 우리의 먼 눈을 띄워주고 있습니다. 빼앗긴 이들의 통곡이 우리의 닫힌 가슴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늙은이의 힘 없는 걸음걸이와 가쁜 숨소리가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우리의 뜀박질을 늦추게 합니다.
물소리가 우리의 엉킨 마음을 풀어주고 녹여 줍니다. 바람소리가 우리의 낮아진 심성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우리의 잠든 영혼을 한번 더 깨워줍니다. 목쉰 짐승의 울음소리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어미를 찾는 새끼들의 허둥대는 몸짓과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우리의 게으름을 일깨우고 우리의 느긋함을 호되게 꾸짖습니다.
초월자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종교적 가치관을 온몸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결코 새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도덕률 몇 줄과 몇 마디 훈계로는 비 온 뒤 풀 자라듯 하는 욕망과 칡넝쿨처럼 옹골차게 옭아매는 오만을 쉽게 물리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21세기는 종교적 열망과 종교적 단련의 세기라고 합니다. 흩어지고 갈라진 종교로는 도저히 제 빛을 발휘할 수 없다고 합니다. 추수할 때는 가까워지고 추수할 들판은 넓기만 한데 조각조각 흩어진 생각과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랗게 자라난 ‘힘줄’로 그 많은 생명들을 어떻게 그물에 담아 올릴 수 있습니까?
초월세계의 ‘통일’이 중요합니다. 초월세계의 ‘생명 네트워킹’이 필요합니다. 생명 구원과 세상 구하기에 초점을 맞추고 연합군을 이루고 연합전선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질구레한 먼지를 아무리 모아야 그게 어떻게 밭이 되고 논이 되고 바위가 되겠습니까? 흩어진 목소리는 아무리 커도 군중 속의 전화벨 소리처럼 이 사람 저 사람만 헷갈리게 만듭니다. 담 쌓은 선행과 구제는 땅 속에 묻은 김치 독처럼 한 철 동안 한 가족만을 먹일 뿐입니다.
세상의 왕국을 훔쳐낸 종교왕국은 21세기의 추수열풍을 견딜 수 없습니다. 겉모습, 겉치레로 제왕 노릇 하려 해 보았자 결국은 우스운 꼴로 치부되고 말 겁니다. 아이들의 소꿉놀이나 군인놀이에 틀을 맞춘 종교왕국은 멀지 않아 폭삭 주저앉고 말 겁니다. 고깔 색깔과 반지 크기, 옷 색깔과 의자 크기 따위로 계급과 서열을 정한 어설픈 종교제국은 21세기의 ‘생명세상 열기’에서 쉽게 추락하고 말 겁니다.
첫댓글 앗... 이런 책을 못 읽어 봤었네요... ㅠㅠ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쉽게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시는 증산상제님의 고뇌가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