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 10. 16 주일 낮예배 메시지
그리스도인과 율법 시리즈(2)
제목: 율법주의에서 벗어나기
갈라디아서 3:23, 24
지난 주 복습
지난 주부터 ‘그리스도인과 율법’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율법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이스라엘 자손들과 바울, 그리고 마틴 루터와 마더 테레사의 예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이분들은 모두 진지하게 신앙을 생각하면서 살아온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진지함에도 불구하고 그 생활이 하나님의 복음이 아니라 율법에 중심을 둔 생활을 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는지를 역사는 보여줍니다.
그러면 이 설교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율법 중심의 신앙생활은 마치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라고 여기는 삶을 말합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경우에는 율법을 준수하면서 이런 규정 저런 규정을 지키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신의 노력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 결론으로 끝납니다. 자기 중심의 삶은 언제나 자기 비하와 자만심으로 귀결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그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는 삶을 우리는 믿음의 삶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삶은 언제나 육신적인 삶이요, 또한 종교적인 삶임을 명확히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율법주의라는 덫
그리스도인이 율법주의의 덫에 매여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과 가족을 괴롭게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과 같은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마틴 루터 등 신앙의 위인들이 바로 이런 삶을 살면서 신음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내가 잘 해야 하나님도 인정해 주시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뼛속 깊이 새겨진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자업자득(自業自得), 또는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하는 말로 정리하여 우리의 생각 속에 저장해 두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율법주의의 덫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마틴 루터도 복음의 말씀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렇게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 깊은 고민과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갈등으로 인하여 마침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상태가 되었을 때,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신앙적 핵심을 정리한 것이 두 마디의 인사말입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이번 시리즈 설교를 통하여 우리 교회의 모든 교우들도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복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먼저, 율법주의가 무엇인지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스프로울(R. C. Sproul)이라는 목사님이 정리한 율법주의를 소개합니다:
율법주의자의 왜곡[1]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율법주의라는 정죄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이 율법주의라는 단어는 기독교 문화 속에서 바르지 않게 회자되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속 좁고 융통성이 없을 때, 사람들은 그를 율법주의자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라는 용어는 속 좁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율법주의는 여러 가지 미묘한 방식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1. 은혜가 먼저요 율법은 그 다음이다!
기본적으로,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율법을 그 원래 상황에서 따로 떼어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해할 때 규칙과 규범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기독교를 일련의 ‘하라’와 ‘하지 말라’라는 것으로서, 냉랭하고 심각한 도덕적 원리 모음으로 인식합니다. 그것이 율법주의의 한 형태이며, 거기에 매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며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계명을 지키는 데에 분명히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말씀 속에는 우리가 잊고 있는 더 많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과 같은 율법을 주신 것은 언약관계라는 상황 속에서였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셨습니다. 주께서는 그의 백성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건져내시고, 이스라엘과 다정하고 신실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런 은혜에 기초한 관계가 세워진 후에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구체적인 율법을 규정하셨습니다. 나는 대학원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던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기독교 신학의 핵심은 은혜요, 기독교 윤리의 핵심은 감사다!”율법주의자는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따로 떼어냅니다. 인격적인 관계는 결여된 채 규칙만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그리스도를 높이려는 마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자는 있는 그대로의 규칙을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 율법을 처음에 주실 때 그 배경이 된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이라는 더 넓은 배경은 무시합니다.
2.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정신이 살리는 것이다!
율법주의자의 두 번째 유형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신약성경이 율법의 문자(겉에 드러난 형태)와 율법의 정신을 구분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율법주의의 두 번째 형태는 율법의 정신으로부터 율법의 문자를 떼어냅니다. 문자를 따르지만 그 정신을 깨트립니다. 이런 율법주의의 형태와 앞에 언급한 형태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율법의 문자를 지키면서 어떻게 그 정신을 깨트릴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운전을 할 때 도로의 교통상황이나 흐름은 생각하지 않고 최소 속도로만 운전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약 그가 운전하는 도로가 최소 속도로 시속 50km라고 정해졌다면, 그는 오직 50km로만 달린다 합시다. 폭우가 몰아쳐도 그 속도로 운전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상식이 있기 때문에 속도를 늦추고 시속 30km의 속도로 운전하면서 급정차 시 생길지도 모를 수막현상으로 인한 미끄러짐에 대비합니다. 그 사람이 이런 상황 속에서도 계속 시속 50km로 운전한다면 그것은 자신만을 기쁘게 하려고 운전하는 것입니다. 비록 외적으로 시민이 지켜야 할 규칙을 곧이곧대로 준수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의 순종은 겉으로일 뿐이고, 그는 법규가 진짜로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두 번째 유형의 율법주의는 겉으로는 순종하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이나 율법의 의도, 또는 그리스도를 존중하려는 마음으로부터는 멉니다.
이런 두 번째 유형의 율법주의를 대표하는 사람은 바리새인들로서 안식일에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맞섰던 이들입니다(마 12:9~14). 그들은 율법의 문자에만 관심을 가진 나머지 그 율법을 통하여 일어나야 할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런 교사들은 율법의 정신을 놓쳐버렸는데, 그 율법은 사실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노동을 반대하지 않으며, 병자를 치료하는 노력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3.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지 말라!
율법주의의 세 번째 유형은 하나님의 율법에 우리의 규칙을 추가하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 양 다룹니다. 이것이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나쁜 형태의 율법주의입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도 바로 이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유전을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가르치는구나.”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제한하지 않으신 일에 우리가 어떤 제한조건을 추가할 권한은 없습니다.
각 교회가 어떤 영역에서 그 교회 자체의 입장을 정할 권리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교회의 교제실에서 음료수를 마시는 일에 관하여 일절 말씀하지 않지만, 어떤 교회는 그런 규정을 정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인간이 세운 규정을 사용하여 궁극적으로 양심을 억압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만이 가지실 수 있는 영역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는, 기독교란, 그 규칙이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올바른 규칙을 따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우리가 카드게임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저녁식사 때 포도주를 마시면 안 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정통적인 기독교냐 아니냐를 규정하는 외적인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복음을 심하게 훼손하는 것인데, 그 까닭은 인간의 전통으로 성령의 진짜 열매를 대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오해하여 위험할 정도로 신성모독의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신 곳에, 우리는 인간이 만든 규칙으로 사람들을 옭아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런 형태의 율법주의와 싸우는 일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거룩하고, 경건하라고 요청합니다. 이것 때문에, 세상은 복음을 거북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 복음과 율법을 서로 묶어서 기독교의 진정한 특성을 왜곡시킴으로써 불필요하게 사람들로 하여금 죄책감을 더 많이 갖도록 하면 되겠습니까? 기독교가 도덕, 공의, 윤리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경건한 도덕성에 대한 열정으로 출발하여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율법주의로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지나친 왜곡입니다. 그것은 왼쪽이 아니라 너무 오른쪽으로 치우진 왜곡입니다. 왜곡은 양극단에 모두 존재합니다.
이런 형태의 율법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사소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인데, 이에 관해서는 바리새인들이 전문가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외식하는 자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근채와 나물의 십일조는 드리면서도 율법의 더 중요한 정의와 사랑과 성실은 버렸도다”(마 23:23). 예수께서 그들로 하여금 율법의 어떤 부분을 순종할 것을 보완하셨는지 주목해 봅시다…
왜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인지 알아보는 기준을 춤을 추거나 카드게임을 하는 정도의 단순하고 외적인 것으로 규정하려 합니까? 다음 질문을 생각해 봅시다: “당신의 존경심, 정직,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알게 하는 것이 더 쉽습니까, 아니면 외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더 쉽겠습니까?” “당신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더 쉽습니까, 아니면 술 담배를 않고 춤추는 곳에 가지 않는 것이 더 쉽겠습니까?” 어떤 점에서 보면, 나중 것이 늘 더 사소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훨씬 더 중요한 일에 열정을 기울이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순전함, 정직, 사랑, 그리고 고통 가운데 있는 세상을 돕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런 식의 율법주의를 가지고 성경적 윤리를 왜곡하는 것은 너무나 쉽게 이루어집니다.
4. 빠져나갈 길을 찾는 것은 순종이 아니다!
마지막 형태의 율법주의는 “빠져나갈 구멍 주의(loophole-ism)”이라고 내가 즐겨 부르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해석하여 그것을 우회하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내는 일에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율법에서는 안식일에는 일정 거리 이상을 여행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 거리는 거주지로부터 1.5km정도였습니다. 법적으로, 사람의 거주지는 개인의 소유가 저장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어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10km정도를 여행하기를 원한다고 하면, 주중에 그들은 대상무역상에게 칫솔을 주어 그 길을 따라 1.5km정도 떨어진 바위 밑에 칫솔을 갖다 놓게 합니다. 바위 밑에 칫솔을 갖다 둠으로써 그 바리새인은 기술적으로 합법적인 거주지를 거기에 가지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그는 자신의 거주지로부터 1.5km보다도 멀리 여행하지 않은 셈이 됩니다. 율법을 우회할 기술적인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그의 여행은 안식일에 여행할 거리의 핵심을 깨트렸습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율법주의로 살면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읽을 수 없습니다. 문자를 가지고 사람을 죽입니다. 게다가 자기가 정한 법을 추가하여 다른 사람과 자신을 그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자신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런 위선적인 삶을 살게 되므로 그리스도인의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비결은 바로 이 율법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 순수한 복음을 믿고, 예수님과 생생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에 대한 바울 사도의 견해
그러면 평생을 복음을 위해 살았던 바울 사도는 율법주의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합니까? 그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복음에 율법주의적 사상이 침투하지 않도록 온 몸으로 막고 펜을 동원하여 막아 싸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읽고 있는 신약성서의 서신서 중에 많이 담겨 있습니다.
1. 앨범이냐 산 아버지냐? 히브리서 8:1~6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의 제사장으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땅의 제사장과 율법을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늘에 있는 참 성소를 본 따서 만든 모형과 그림자를 따라 살지 말고 새로운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 것을 일깨워줍니다. 이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 곧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우리 식당에는 두 분 목사님들의 사진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선교회에서 모임을 가지면서 그 사진을 보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목사님과 저 목사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우스운 이야기도 하고 힘들었던 이야기도 합니다. 한참을 이야기 꽃을 피우는데, 문득 식당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들어옵니다. 그 사진에 있는 한 목사님이 들어옵니다. 여선교회원들이 깜짝 놀라서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그 목사님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여전히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과거를 회상합니다. 그 목사님이 그 사진에 대해 설명해 주는 데도 여전히 사진 속의 목사님과 성도들만 보고 있다면 얼마나 우스운 모습입니까?
바울은 우리들도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다는 말을 해 줍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이 늘 곁에 계시는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만을 생각하고 거기에 빠져 있다면 옛 언약 가운데 살아가는 율법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법과 규칙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2. 율법주의는 계약 위반이다! 롬 4:13, 갈 3:15, 17
율법주의란 무엇입니까? 내가 한 봉사와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는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과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의롭게 된 것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처럼 복을 받습니다(갈 3:6~9).
아브라함은 무엇을 믿었습니까? 로마서 4장에서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고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니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의로 여김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모든 복을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복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율법을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로마서 4:13)
이것은 율법이 오기 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입니다. 그 언약은 누구도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꼭 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모으고 또 모았습니다. 마침내 2200만원 정도가 모였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사고 싶었던 차를 사러 대리점에 갔습니다. 그리고 차를 샀습니다. 자동차 판매상과 차량구매 계약을 맺고 서명을 하고, 돈을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차를 몰고 신나서 돌아왔습니다. 그 사람은 가족을 데리고 주말이면 근교에 드라이브도 가고 도심 이곳 저곳을 마음껏 다녔습니다. 그리고 지방에 있는 친척 집에도 방문하고, 여름 휴가 때에는 전국 일주도 하기도 했습니다. 차는 너무 좋았습니다.
그렇게 한 지 일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휴대폰으로 음성 메시지가 왔습니다. 그 메시지에는 자동차 판매상의 음성이 녹음되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인 즉, “선생님, 죄송합니다. 자동차 계약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200만원을 더 받아야 하는데 그만 잘못되었습니다. 계약서를 가지고 200만원을 추가로 들고 대리점에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별 탈이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서 그 사람은 자동차 구매 계약서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구입한 지 430일이 지난 것을 확인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그 남자는 자기 주변의 변호사에게 전화를 합니다. 그랬더니 그 변호사가 알려주기를, 그것은 명백한 계약위반이라고 그렇게 한다면 상거래가 다 무너지게 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옛 언약이라는 율법으로 복을 받으려는 사람이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라디아서 3:15, 17).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것은 430일 전이 아니라, 430년 전에 하나님이 확실히 정하신 계약이며 약속입니다. 그 믿음의 언약을 430년이나 지나서 율법이 폐기할 수 없다고 명백히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려고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백성에게 복을 주시고, 아브라함처럼 의롭다 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로 돌아가서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는 것은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을 폐기하려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사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지 복을 더 받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누구를 위하여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은혜 아래 있으며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은 맞지 않다고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淫行)하는 자와 남색(男色)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디모데전서 1:8~11).
율법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 곧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 세운 것입니다. 그 율법은 믿는 사람, 옳은 사람을 위해 있지 않습니다. 그럼 그 율법이 무슨 역할을 합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로마서 3:19~20)
율법을 통해서 불순종하는 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실 분이 필요함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렇게 해서 율법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안내합니다.
나는 더 이상 갇힌 자가 아니야!
그렇게 율법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께 온 사람을 예수께서 어떻게 맞이합니까? 그를 두 팔 벌려 맞아주시고, 그의 모든 죄와 허물을 그의 피로 씻겨 주십니다. 그리고 새 옷을 입히고 새 반지를 끼워주어 상속자로 삼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종이 아니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받는 자녀로 당당하게 그리고 의미 있게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는 더 이상 갇힌 자가 아닙니다. 이전에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실행 못하고 정죄 받던 삶은 더 이상 살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이 그에게 거룩함과 의로움과 구원함이 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30). 율법 아래 있는 삶은 갇힌 자의 삶과 같습니다.
제가 이것을 비유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했습니다. 스물 세 살에 군대에 가서 나이가 적은 사람들이 고참이 되어 구박을 당하기도 하고 100명이 되는 중대생활을 하는 가운데 갈등과 긴장 속에서 살았습니다. 물론 군대에서 먹는 쵸코파이와 라면은 환상적이긴 하지만 군대생활은 즐거운 기억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대 한 후 약 3년 동안 몇 차례 악몽을 꾸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다시 군대에 입대하기 위하여 훈련소 정문을 들어가는 꿈이었습니다. 그 때 꿈에서 얼마나 소리쳤던지요! “저는 군대를 마쳤다고요!”
이것을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라디아서 3:23, 24)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매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전에는 나의 행위를 보고 의롭다 말하기도 하고 악하다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이 나의 의로움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의로운 자가 된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기쁨과 감사, 그리고 평안과 담대함으로 나아갑니다. 그 사랑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능력의 품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일하고 계심을 감사합니다. 저도 주님의 일이 동참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더 이상 걱정하지 않습니다.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고 기대합니다. 예수 안에서의 삶은 희망과 기쁨, 그리고 평강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