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캠핑의 기본은 불 피우기, 불 피우기의 기본은 바람이다.
아무리 좋은 불쏘시개와 번개탄을 써도 바람이 잘 통하지 않으면 불씨는 금방 꺼진다.
바람이 작은 불씨를 자꾸 꺼트리는 걸 막기 위해 바람 막이용 가림판을 쓰기도 하는데, 거기에도 구멍이 여럿 뚫려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불이 곁을 지키려면, 적당한 바람이 필요하다.
바람이 좀처럼 내 맘 같지 않으면 안락한 집이 절로 생각나지만, 이 수고스러운 일에 빠지게 된 건 그날의 기억 때문이다.
15년 전 창립기념식 단상에서 김 부장이 전한 은퇴사를 떠올리며 나는 오늘도 장작을 쌓고 있다.
“아 아…! 제가 무슨 말을 해도 교장님의 훈화 말씀처럼 들리겠지요.
이왕 그럴 거 제가 30년 동안 회사 생활을 하며 얻은 한 가지는 꼭 여러분께 전하고 싶습니다.
저도 제가 따분한 사람인 걸 알지만 늙은이 가는 길, 오늘만큼은 너그러이 봐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지금의 여러분과는 달리 대학을 졸업했다는 졸업장 하나로 이 회사에 몸을 담게 되었습니다.
해가 갈수록 더 뛰어난 능력을 갖추신 분들이 이 곳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며 남몰래 반성하고 빨리 태어난 것에 감사했답니다. 하하.
팔자 좋은 소리처럼 들리시겠지만, 제가 여러분 나이에는 감히 하지 못한 것들을 향해 부단히도 달려온 여러분을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만약 더 뛰어난 동료들을 마주하며 기죽은 적이 있다면 잊지마세요.
30년간 이곳에 몸담아 온 저도 여러분 모두 앞에서 스스로 작아졌었더라는 걸.
한 분 한 분 모두 존경받을 만한 분들입니다.”
막 들어온 신입들은 근 몇 년 간의 시간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는지 눈물이 맺히는 이들도 있었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스스로를 너무 대단하다고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존경한다더니 대단하진 않다니 노망 난 건 아닙니다-… 하하.
우리는 모두 사람이기에 바람에 언제든 스러질 수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는 어떤 형태의 열망이든 각자의 촛불이 있겠지요. 스스로의 길을 밝혀온 촛불들 말입니다.
그 작은 불씨에 바람이 불지 않길 노심초사 하느라 부디 더 큰 불꽃을 놓치지 마세요.
여러분의 삶에 잘 적용해왔던 규칙들을 무너뜨리는 바람이 언젠가 반드시 불 겁니다.
요즘 헬스가 아주 유행이라지요?... 그렇담 다들 아실 겁니다. 근육도 찢어져야 성장한다는 걸요.
바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바람과 친해지세요.
안타까운 건 은퇴를 앞두고 30년을 돌아보면서 비로소 깨달은 사실이라...
저와 함께한 동료들은 저를 원칙만 고수했던 갑갑한 인간이라 기억할 것 같네요. 하하.
저는 해내지 못했지만 여러분은 저보다 더 뛰어난 분들이니 이 말만 기억해주세요.
바람은 하나의 촛불을 꺼뜨리지만 모닥불은 살리기도 합니다.”
15년 간 나는 살아온 대로 부단히 열심히 살았음에도 김 부장의 말처럼 나를 완전히 무너뜨리려는 바람을 몇 번 만났다.
그날의 연설이 캠핑 중독이 되라고 한 말은 아니었을 텐데.
나는 나에게 분 바람이 단지 작은 촛불만을 꺼뜨린 거라고 믿기 위해 장작 앞에 앉아 모닥불을 피우기 시작했던 거다.
결과적으로 나는 바람을 다룰 줄 알게 되면서 인생에서 이런 저런 모닥불을 피워냈다.
은퇴를 앞두고도 새로운 모닥불을 피워야 할 줄은 몰랐지만…
정년은 멀었어도 이제는 은퇴자끼리 경쟁하는 시대가 왔고,
나는 일단 오늘도 습관적으로 장작 앞에 앉아 어떤 위기와 새로운 도전을 마주해야 하는지 고뇌하고 있었다.
아... 문득 김부장처럼 빨리 태어난 것에 남몰래 감사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메로나]
"올 때 메로나~"
한 때 인삿말처럼 쓰였던 말.
어디 갔다 올 때 간단한 간식거리도 같이 부탁한다는 귀여운 표현이다.
하지만 하나는 이 말이 유행할 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메로나를 좋아하지 않거니와 자기만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웃픈 기억이 자꾸 떠올랐다.
하나는 삼남매의 첫째다.
하나는 첫째라서 '하나', 두나는 둘째라서 '두나',
막내는 아들이라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돌림자를 써 '태범'이라는 용맹한 이름을 가졌다.
하나는 초등학교에서 이름의 뜻을 알아오는 숙제를 하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작명 과정은 아주 불만스러웠지만 작명 결과가 나쁘지 않아 마지못해 넘어갔다.
또 하나네는 13살까지 할머니와 같이 살았는데 남자가 주방에 들어가면 고추 떨어진다는 그 시절 사고가 집안에서 먹혔다.
식사 시간 마다 수저를 놓고 반찬을 나르는 일은 하나와 두나의 몫이었고 막내는 할머니 무릎에 앉아 만화를 보고 있었다.
그때도 하나는 나름 삼남매의 첫째로써 어린 동생에 대한 베네핏을 인정했다.
두나와 태범의 나이차가 한 살이긴 했지만.
나름의 생각들로 잘 잠재웠던 하나의 억울함이 폭발한 건 어느 여름날이었다.
매미 소리가 쨍하니 귀를 울리고 잎이 짙은 초록을 띨 무렵.
할머니는 방에 앉아 두꺼운 텔레비전으로 만화를 보고 있는 삼남매 중 막내만 옷을 입혀 마트로 향했다.
마트에 도착한 할머니는 보기 좋게 퉁퉁한 막내를 힘겹게 영-차 안아올렸다.
"우리 손자 먹고 싶은 아스크림이 뭐야~"
할머니는 그것과 하나와 두나의 것을 하나씩 챙겼다.
"똥강아지들 아스크림 먹어라~~"
막내 손에 들린 건 하나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그 아이스크림 TV 광고에 나오는 노래가 하나의 주제가일 정도였다.
원래도 긴 하나의 입이 좌우로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역시 우리 할머니가 최고야!'라고 생각을 고쳐먹었던 하나였다.
하지만 검은 비닐봉지에 남은 아이스크림 2개를 본 하나는 곧장 얼굴이 울그락붉으락! 닭똥같은 눈물을 흘렸다.
"나는 메로나가 제일 싫단 말이야~~~~으아아아앙"
다른 건 다 참아도 제일 좋아하는 월드콘을 막내만 먹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하나는 용납할 수 없었다.
"아구 메로나가 어때서~ 담에 할미가 또 사줄게"
단순히 투정 부리는 걸로만 생각한 할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하나에게 그 날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낀 상처가 되었던 거다.
지금은 좋아하는 월드콘을 자기 돈으로 열 손가락에 꽂아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된 하나지만
아직도 '메로나'만 들으면 탐탁치 않은 기분이 든다.
첫댓글 [바람]
통찰력: '작은 불씨를 지키느라 더 큰 불꽃을 놓치지 말라'는 말은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다만 추상적인 개념의 이야기라, 김부장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구체적인 경험이 하나 들어가 있다면 김부장의 말이 더 설득력있고, 통찰을 줄 것 같습니다.
'입사 전에도, 후에도, 은퇴 하고도 경쟁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사회'를 그린 글로 이해했습니다 (아닐지도...?)
치열하게 자신의 경쟁력을 갈고 닦고 새로 만들어야 하는 주제이니 그렇게 치열하게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 작성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감동/공감: 모든 현대인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주제라고 생각이 듭니다
주목도: '나는 바람을 다룰 줄 알게 되면서 인생에서 이런 저런 모닥불을 피워냈다.'에서 어떤 모닥불을 피웠었는지 보여준다면 좀더 핍진성이 살 것 같습니다. 구체적인 행동들이 있을수록 독자가 '맞아, 나도 이런거 했었는데' '맞아 요즘 사람들 다 이거 준비한다던데' 하고 공감의 깊이가 더 깊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의 행동보다는 부장의 말을 회상하는 장면이 더 메인이 되는 글인데요
- 소설 치곤 행동이 적고
- 에세이 치곤 화자의 생각보단 다른 사람이 한 생각을 위주로 흘러가는 것 같아서
장르를 잡아서 화자의 생각 또는 행동이 더 부각되도록 작성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날의 연설이 캠핑 중독이 되라고 한 말은 아니었을 텐데: ㅋㅋㅋ 웃프기도 하고 재밌는 말이었습니다
[메로나]
통찰력: '나도 이런 경험 있는데' 하고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만 나아가 새로운(해본 적 없는) 생각거리를 던져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감동/공감: K-손녀의 슬픔... 요즘 남아선호사상이 어딨어~ 라곤 하지만 우리와 우리 윗세대는 모두 겪었을 것 같습니다
K손녀의 슬픔이 뭔데? 하는 세상이 왔음 좋겠는데 아직 모두가 알고 있는 세상이네요
각자 자신의 삶 안에서 차별 받았던 기억과 그 원인이 된 '버튼'을 가지고 있기에 보편적인 공감대를 잘 넣은 글인 것 같습니다
다만 만약 태범이처럼 막내 또는 남자애로서 모든 걸 누리고 자란 사람이라면 이 글을 읽고, 여성 독자들이 느낀 감정이나 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
주목도: '~~~다는 그 시절 사고' 등이 진짜 있는 얘기란 생각이 들게 합니다.(좋다는 뜻)
월드콘을 열 손가락에 꽂아 먹을 수 있는 나이 등의 재치있는 표현들도 톡톡 튀고 기억에 남아서, 이런 재밌는 표현들을 모아뒀다가 작문 시험 때 쏙쏙 넣어주면 주목도 높은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인물의 행동들 (영-차 안아올렸다/ 곧장 얼굴이 울그락 붉으락! 등)이 글을 재밌게, 눈에 보이게 만들어줍니다. 이런 표현들을 잘 쓸 줄 안다는 게 강점입니다
갑자기 마지막에 한 생각인데, 하나가 원래는 메로나를 좋아했던 아이라면 좀더 극적이지 않을까? 했습니다. 메로나를 좋아했던 하나가, 화려하고 더 맛있어 보이는 월드콘을 먹어보고 싶어서 cf송도 자주 따라 불렀는데 할머니가 막내에게만 월드콘을 사줬다면 배신감을 더 크게 느끼고, 원래 좋아했던 메로나에도 정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뇌내 상상극장일 뿐이니 참고하지 않아도 됩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