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ㆍ대림피정 [대림특강] 소화 데레사의 삶과 사랑 1편
무소.보조.회장(SG) 23.12.02 08:02
한 권 이어 듣기_소화 데레사의 삶과 사랑 1편 (52:37)
소화데레사의 삶과 사랑 모니카 마리아 슈테커지음, 정복례 옮김.
이 책은 진정한 삶의 원천에 이르고자 길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쓴 것이다.
별색으로 처리된 부분은 데레사 성인의 글을 그대로 인용했고 다른 많은 부분은 그녀가 한 말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불혹에는 데레사 성인의 인생 여정에서 중요한 지역을 간략하게 표시한 프랑스 지도를 수록했다.
데레사는 평범한 소녀였다. 세상의 모든 좋고 아름다운 것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었으며 감격할 줄도 알았다.
또한 인정받기를 원했고 상냥했으며 지식에 대한 욕구도 호기심도 많았다. 그런가 하면 비판적이었고 지나칠 정도로 예민했으며 고집도 대단했다.
데레사는 어려움과 한계 상황을 체험했다. 그녀는 강한 의지와 믿음으로 모든 장애물을 극복했는데 그것은 비할데 없이 커다란 사랑의 모험이었다.
많은 이들이 데레사성인에게서 하나의 모범을 발견하여 삶의 동반자이자 성실한 친구로 여길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 책이 출판되기까지 애써 준 이들에게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실질적 질문에 대해 조언을 준 데레사 연구소 지도자인 안톤 슈미트 신부를 비롯하여
이 책의 전반부를 위한 준비 작업과 원고를 정리해 준 시르재키 부인 그리고 교정을 보아 준 밴덴부르크와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용기를 준 젊은이들의 모임 불꽃의 감사드린다.
특히이 책을 쓰도록 내적으로 나를 고모시키고 시종일관 동행해 준 데레사 성인에게 감사드린다.
1997년 10월 19일 아우크스부르크 데레사 연구소 모니카 마리아 슈테커
<제1장 알랑송에서 보낸 생애 첫 4년> 먼저 부모님과 언니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부모님과 언니들은 내 삶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아빠 루이 마르탱은 1823년 8월 22일 프랑스 보르도에서 태어났다. 21살 때 꿈에도 그리던 수도원에 입회하려 했으나 라틴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수도원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아빠는 뒤떨어진 어학을 만회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지만 무척 힘들었다. 아빠는 얼마 안되어 라틴어에 소질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시계 고치는 기술을 배웠으며 부모님의 보석상을 물려받았다. 아빠는 부지런히 일했고 성공했다.
주말에 시간을내어 낚시하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때때로 저녁에 친구들을 만나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빠는 그리스도인으로 드러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즐겨 미사에 다녔다. 아빠에게 하느님은 모든 것을 나누는 좋은 친구와 같았다.
멋쟁이 아빠는 특히 알랑송 소녀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많은 아가씨들의 눈길을 받았다. 물론 아빠는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결혼할 생각도 없었다
할머니는 그런 아들을 걱정했는데 왜냐하면 아빠는 이미 서른네 살로 결혼 적령기를 훨씬 넘긴 때였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비밀리에 아들에게 어울리는 아가씨를 찾고 있었으며 어머니 다운 지혜로 결국 아빠의 고집을 꺾는데 성공했다.
엄마 젤리 계랭은 1831년 12월 23일 강들랭에서 태어났다. 엄마의 어린 시절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외할머니는 농촌 여인으로 외삼촌을 응석바지로 키운 반면 당신 딸에게는 대단히 엄격하여 여러모로 단련시켰다.
엄마도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원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이에 실망한 엄마는 알랑송에서 레이스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당시 알랑송에서 생산된 레이스는 전 유럽으로 수출되어 알랑송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엄마는 곧 까다로운 수공의 작업을 능숙하게 해냈으며 22살에 동생이자 나의 이모인 마리 로이사와 함께 가게를 개업했다.
그러나 이모 마리가 수녀원에 입회하는 바람에 엄마 혼자 직원들을 데리고 가게를 운영했다.
아빠를 결혼시키려는 할머니의 노력은 신기한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어느 날 엄마가 알랑송에 있는 성 레오나르도 다리를 건너가는데 깊은 인상을 주는 청년이 맞은편에서 걸어왔다.
순간 '바로이 사람이다' 하는 소리가 내면에서 들려왔다. 그것은 아빠에게도 마찬가지였는데 그야말로 한 눈에 반한 사랑이었다.
그때 두 사람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개월 뒤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했다.
1858년 7월 13일 알랑송의 아름다운 마리아 성당에서 가까운 친지들을 모시고 당시의 관습에 따라 한밤중에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서둘러 새 집을 구했으며 엄마를 위한 사무실도 마련했다.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원했던 두 사람은 이제 하느님께 많은 자녀를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언니들 1860년 2월 22일 근원이 마리 루이사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부모님의 기쁨은 대단했다. 엄마는 엄마가 된 것이 무척 행복했다.
아빠는 딸아이를 데리고 세례식에 갔을 때 두 눈을 빛내며 본당 신부님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제 아이의 세례 때문에 처음 뵙지요 이제 시작입니다. 아빠의 말이 맞았다. 1861년 9월 7일 둘째 언니 말이 폴리나가 태어났다.
언니는 건강했고 늘 활기찼다. 마리와 폴리나는 1868년 10월에 망스에 있는 수도원 학교에 입학했는데 그곳에는 이모 마리 루이사가 있었다.
두 소녀는 학교 기숙사 생활이 그다지 즐겁지 못했다. 그들은 집에 갈 수 있는 방학을 무척 기다렸다.
부모님에겐 딸들의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비싼 기숙사비를 지불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1863년 7월 3일 말일 레오니가 태어나자 부모님에게 걱정이 시작되었다. 말일 레오닌은 파란 눈동자에 노란 머리를 가진 예쁜 아기였는데 유감스럽게도 항상 어디가 아팠으며 매우 허약했다.
부모님은 레오니를 살리기 위해 여러 달을 애썼다. 아빠는 많은 기도와 함께 긴 순례를 떠났으며 사랑스러운 아기를 도와 주시도록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부모님은 레온이가 드디어 자기의 두 발로 서서 마치 작은 토끼처럼 뛰어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레오닌은 부모님을 늘 조금씩 걱정하게 만들었는데 언니는 성격이 까다롭고 미숙했기 때문이다.
사실 배운다는 것이 언니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엄마는 레온이가 이모 마리로이사의 도움으로 망스에 있는 수도원 학교에 입학했을 때 무척 좋아했다.
1871년 레오닌은 부모님과 떨어져 언니들이 있는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언니는 곧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에 대해 엄마는 몹시 실망했다.
1864년 10월 13일 마리 헬레나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엄마는 젖을 먹일 수 없어 무척 슬퍼했다. 그래서 엄마는 유모에게 아기를 맡겨야만 했다.
유머는 자기 아기와 함께 낯선 아이에게 젖을 먹여야 했다. 그러나 성실한 유모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유모들 때문에 걱정을 했지만 유모들은 대부분 아기를 사랑으로 보살펴 주었다. 언니 헬레나 역시 유모에게 맡겨졌다.
엄마는 날마다 아기를 보러 갔으며 사랑스럽게 안아줄 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1년쯤 후에 헬레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밝고 똑똑했다
그러나 서서히 아이를 향해 어둠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헬레나는 의사도 알아내지 못한 병을 앓다가 5살에 죽었다. 엄마는 아이 곁에서 꼬박 밤을 새운 뒤 옷을 갈아입혀 관에 눕혔다.
사랑하는 아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엄마의 마음은 무엇으로도 달랠 길이 없었다. 1866년 9월 20일 사내아이가 태어났을 때 우리 가족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엄마 역시 작은 마리요셉 로이를 얻은 것이 너무나 기뻐 나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을 거야라고 말했다.
그 당시 믿는 가정에서는 아들을 사제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엄마는 상상으로 작은 요셉이 제단에 서거나 강론하는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그러나 요셉은 5개월 만에 엄마의 품에서 죽었고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엄마는 곧 새로운 기쁨을 맛보았다. 그것은 다시 한 아기가 태어날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말이 요셉 요한 세례자는 1867년 12월 19일에 태어났다. 마리와 그의 어린 데모 폴리나는 동생과 함께 맘껏 놀았다.
그러나이 아이 역시 병이 났고 엄마는 아기의 고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요셉은 겨우 8개월을 살다 죽었다.
엄마는 한 편지에서 요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랑하는 작은 요셉이 오늘 아침 7시에 죽었어요.
나는 밤새도록 아기 곁에 있었는데 아기가 몹시 힘들어 했어요. 나는 울면서 어서 빨리 데려가시라고 하느님께 간청했지요.
엄마는 아기를 작은 관의 눞이고 흰 장미다발을 이마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한 고통에도 엄마는 아이를 다시 얻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1869년 4월 28일 마리셀리나가 태어남으로서 엄마의 기대는 보상을 받았다. 엄마는 많은 두려움에 시달렸지만 모든 것이 잘 되어 갔으며 아기는 예쁘고 건강하게 자랐다.
1년 뒤인 1870년 프랑스에는 전쟁이 터졌으며 그 해 8월 16일 말이멜라니 데레사가 태어났다. 엄마는 아기를 달랠 수가 없었다.
우유병을 빨던 아기가 심한 위경련을 일으켰기 때문에 다시 한번 유모를 찾아야만 했다.
첫 번째 유머는 아기에게 너무 소홀했으므로 아빠는 한밤중에 새 유모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두 번째 유머는 얼마 뒤 병이 났고 새로운 유모를 찾지 못해 아기는 굶주림으로 7주 만에 죽었다. 참으로 처참한 일이었다
엄마는 심한 충격을 받아 할 수만 있다면 아기와 함께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남은 아이들을 생각해야 했고 그 아이들에게 사랑을 몽땅 쏟았다.
그녀는 죽은 데레사와 꼭 닮은 여자아이를 갖고 싶어했다. 하느님은 그녀의 소망을 기꺼이 들어주셨다.
<스말 내에 유모 곁에서> 엄마는 나를 가졌을 때 나와 엄마 자신에 대해 많은 걱정을 했다. 엄마는 외삼촌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기에게 젖을 먹일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아기를 키울 수만 있다면 그것은 내게 큰 기쁨이지요.
나는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요. 어쩌면 아이들을 낳아 기르기 위해 태어났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것도 곧 끝날 때가 되었네요.
왜냐하면 다음 달이면 나도 41살이 되는데 이 나이면 벌써 할머니가 아니겠어요. 1873년 1월 2일 밤 11시 30분에 나는 태어났으며 막 13살이 된 언니 마리가 나의 대모가 되었다.
엄마는 저지 모자라 우유병에 빵가루와 물을 넣어 섞은 다음 다시 우유를 넣어 먹였다. 그리고 곧 죽은 아이들에게 나타났던 증상이 나에게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것을 알았다. 장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엄마는 걱정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상태가 점점 더 나빠졌으며 급하게 달려온 의사는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그것만이 아기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날 밤 곧장 유모를 찾기 시작했다.
엄마는 스마일 내에 있는 상냥한 부인을 알고 있었는데 그녀에겐 한 살이 지난 아기가 있었다.
엄마는 이제 태어난지 겨우 8주 밖에 안 된 내가 그 부인의 젖을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만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먼 길을 떠나기에는 너무 늦었으므로
이튿날 아침 엄마는 스말래를 향해 길을 떠났는데 그곳은 알랑송에서 8km나 떨어져 있었다.
엄마는 두려웠지만 오로지 나의 다급한 상태만을 생각했다. 드디어 엄마는 유머의 집에 도착했으며 그녀에게 함께 집으로 갈 수 없겠느냐고 간청했다.
그러나 로즈타의 부인은 아이들과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대신 8일간 우리 곁에 있다가 나를 자신의 작은 집으로 데려오겠다고 했다.
엄마는 이 제안에 동의했는데 내가이 부인 곁에서 보살핌을 잘 받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와 유모가 알랑송을 향해 길을 떠나 집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 30분이 넘는 시각이었다. 유모는 나를 보는 순간 마치 헛된 일이군이라고 말하듯 머리를 흔들었다.
엄마는 나를 유모에게 넘겨주고 침실에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요셉 성인상 앞에 꿇어앉아 내가 건강해지도록 하느님께 전구해 주시길 청했다.
그때 엄마는 많이 울었는데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잠시 후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내가 유모에 가슴에 매달려 2시간이 지나도록 젖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갑자기 토하면서 마치 죽은 것처럼 유머의 가슴에 축 늘어졌다.
나는 더 이상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으며 모여 있던 사람들도 내가 아직 숨을 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엄마는 아이가 편안하게 죽은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그렇게 15분이 지났을까 내가 눈을 뜨고 살포시 웃었다.
그때부터 나는 건강하고 쾌활한 아이로 자랐다. 부모님은 유모가 나를 수말레로 데려가는 것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 당시 로즈 타이 부인은 37살이었고 죽은 두 오빠도 그 부인의 젖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네 아이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어린 아이인 오이에게는 13개월이었다.
젖먹이가 집에 들어왔을 때 그녀의 남편이 투덜거렸지만 로즈는 내 생명이 그녀에게 달렸다며 남편을 설득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작은 집은 돌 짚 흙을 섞어 만든 벽돌로 지은 엉성한 집이다. 1층과 다락방이 있는이 집은 작고 낮았으며 그 주변에서도 가장 가난한 집 가운데 하나였다.
외양간과 거름 떠미 사이로 닭들이 몰려다니는 정경이 시골에 전형적 분위기를 이루며 집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집안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로즈는 살림을 하면서 아이들을 잘 키울 줄 알았다.
그녀는 잠시 맡아 키우는 양녀도 자기 아이들과 똑같이 보살폈다. 나 역시 로즈의 집에서 잘 적응해 나갔다.
나는 행복을 만끽하면서 봄날에 꽃처럼 활짝 피었다 신선한 공기와 빛나는 태양 쟁기로 갈아엎은 흙냄새 들녘을 뒤덮은
꽃들의 향기 같은 시골 환경과 건강한 농촌 생활은 나를 시골 아이로 만들었다.
나는 유모를 무척 사랑했는데 그녀로부터 나를 떼어 놓을 방법이 없었다. 4개월이 되던 어느 날 로즈는 미사에 가기 위해 나를 부모님께 데려갔다.
그녀가 집을 나가자 울기 시작하여 아무도 나를 달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 집 살림을 도와주는 루이사를 보내 미사가 끝나는 대로 로즈를 데려오라고 했다.
로즈는 미사가 끝나기 전에 달려왔다. 로즈가 나 때문에 미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한 것을 알고 엄마는 화가났다.
어쨌든 나는 사랑하는 유머의 품 안에서 금세 조용해졌다. 로제는 미사 후에 아이들의 신발을 사려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며칠 후 또 다시 가족을 당황하게 만든 상황이 벌어졌다. 목요일마다 로즈는 소젖을 짜서 버터, 달걀, 채소 등과 함께 알랑송의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동안 가족이 나를 돌보고 있었는데 나는 좀처럼 조용해지지 않았다. 결국 시장에 있는 유모에게 나를 데려갔고 유모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얼굴이 환해지면서 조용해졌다.
나는 점심 때까지 그녀 곁에 있었다. 이렇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갔다
7월이 되기까지 나는 토실토실한 아기로 자라났다. 로즈는 건초를 거두어들일 때도 나를 손수레에 태워 들로 나갔고
건초를 실은 마차에 나를 앉혀 놓았다. 로즈가 젖을 짤 때면 순한 젖소 등에 앉아 놀았다.
어느 날 내가 다시 부모님을 방문했을 때 엄마의 사무실에 레이스 짜는 여인들이 모여 있었다.
여인들이 나를 돌아가며 안아주었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나도 그들을 사랑스럽게 꼭 껴안아 주었다.
시골에서 온 데다 옷도 유모 로즈처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한 귀부인이 사무실로 들어왔는데 그녀 역시 나를 안아보고 싶어했다.
그녀가 팔을 벌리면서 안으려고 했을때 나는 뒤로 숨으면서 마치 불에 데인 것처럼 울었다.
나는 그 우아하고 곱게 차린 부인이 겁이 났고 그래서 그를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주말마다 가족이 나를 보기 위해 수말래에 왔다. 이러한 시골 소풍은 마리와 폴리나,레오니 그리고 셀리나에게는 더할 수 없이 신나는 일이었다.
언니들은 유모가 만든 검은 빵을 먹었으며 로지의 아이들은 도시에서 가지고 온 하얀 빵을 먹으며 즐거워했다.
이렇게 1년이 지나갔다. 엄마는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엄마는 1874년 1월 11일 이모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목요일 이후로 작은 데레사는 혼자 뛰어논다.
그 아이는 쾌활하고 마치 천사처럼 사랑스러우며 매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이런 것들을 다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예쁘게 웃는다. 데레사가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진다.
<가족 품으로> 4월 2일 나는 부모님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나는 15개월이 되었다 큰 사랑과 기쁨 가운데 부모님과 언니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셀리나는 내가 사랑하는 유모와 쉽게 헤어지게 하기 위해서 내 주위를 끌만한 장난감을 모아 놓았다.
부활절 방학을 맞아 집에 온 큰언니 마리와 폴리나 역시 나와 많이 놀아 주었다. 2주 뒤 언니들이 기숙사로 돌아갔을 때 나는 무척 슬펐다.
나는 엄마에게 더욱더 달라붙었다. 엄마는 앞치마 자락에 매달려 있는 나 때문에 거의 한 걸음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정원에서 놀기를 좋아했지만 엄마 없이 혼자 노는 것은 싫어했다. 나는 엄마가 잠시만 보이지 않으면 울음을 터트렸는데 엄마는 가끔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곤혹스러워 했다.
아빠는 당신의 막내딸이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했으며 나를 당신의 꼬마 여왕이라며 온갖 응석을 다 받아 주었다.
어느 날 아빠는 정원에 그네를 갖다 놓았다. 셀리나와 내게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었으며 우리는 그네 타기 내기를 했다. 나는 한 살 반밖에 안 됐음에도 셀리나와 똑같이 높이 뛰려 했다.
작은 손으로 밧줄을 움켜쥐고는 힘껏 밀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곤 했다. 사랑하는 하느님은 나를 특별한 수호천사에게 의탁하셨나보다.
왜냐하면 난 정말 야생마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매일 5시 30분에 미사를 가면서 나를 당신의 침대에 눕히고 떨어지지 않도록 요람을 붙여 놓았다.
그런데 하루는 그만 깜빡 잊고 갔는데 돌아와 보니 내가 의자 위에서 자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거기까지 갔는지 모두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엄마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축일은 우리 가족에게 특별히 즐거운 날이었는데 마리와 폴리나가 집에 오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다시 만날 때는 환성과 포옹 그리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아빠는 훌륭한 놀이 상대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때때로 아빠가 책을 읽을 때도 그랬다. 아빠는 우리를 위해서 장난감을 만들어 주거나 금색 칠을 한 공으로 마술사처럼 요술을 부리기도 했다.
나만큼은 아빠의 꼬마 여왕으로 말 등의 앉거나 탈 수 있었다. 내가 처음 기차여행을 한 것은 알랑송에서 망스까지였는데 매우 흥분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 왜 그렇게 가슴이 터지라고 울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엄마는 이모 수녀님에게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나를 보여주었다.
나는 이모에게서 작은 사탕바구니를 선물 받고서 기분이 좋아졌는데 셀리나와 나를 위해 두 개의 예쁜 반지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무척 행복해했다.
나는 기차역으로 가는 길에 사탕의 절반과 반지 하나를 흘렸다. 나중에서야 사탕과 반지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나는 내 보물을 찾기 위해 무조건 되돌아가고 싶어했지만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했다.
내가 소리 지르며 울기 시작하자 비로소 엄마는 내가 가여웠는지 길거리에서 내 보물을 주워왔다.
훗날 여러가지 작은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내 고집대로 했다. 그 가운데 몇 사건을 들려주는 것은 내가 착하거나 거룩한 아이라거나 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나는 두 살 때부터 주일 매사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를 잊어버리고 갔을 때는 얼마나 슬퍼했는지
한번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혼자 걸어가고 있는데 집안에 돌보는 루이사가 달려와서 나를 붙잡았다.
그녀는 나를 달래느라 미사를 단념해야만 했다. 1875년 마리는 학교를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언니는 함께 놀아주고 재워주기도 했다. 가끔 나는 엄마 아빠 침대에서 자기도 했다 .
어느 날 마리는 나와 함께 기도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밤늦게 엄마가 나를 내 침대로 데려가려고 방에 들어왔을 때 나는 따뜻한 침대를 떠나기 싫어 있는 힘을 다해 반항했다.
엄마가 기도하는 동안 내내 종알거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기도가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잠자리에 들려던 아빠가 심통이 난 나를 가엾게 여겨 함께 기도해 주었다. 그리고 아빠는 나를 안고 한동안 왔다 갔다 한 뒤에야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나는 엄마의 일을 중단하게 만드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엄마와 함께 하는 놀이를 무척 좋아했는데 계단을 팔짝팔짝 뛰어 오르거나 내려오면서 계단마다 엄마하고 부르길 좋아했다.
엄마가 그래의 꼬마 아가씨 하고 대답하지 않을 때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엄마가 일을 하고 있어도 나는 여전히 대답을 기다렸다.
어떤 땐 화가 나서 바닥에 주저앉아 발을 구르며 숨이 넘어갈 듯이 소리쳤다. 나는 밤에도 조용할 날이 없을 정도로 수선스러웠다.
자면서도 발버둥을 쳐 이불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나무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엄마 누가 때렸어' 하고 소리치기도 했다.
가엾은 엄마는 일어나 내 이마에 난 혹을 어루만지며 간신히 달래 재워주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또 다시 반복되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밤마다 이 야생마를 침대에 붙잡아 매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조용히 잠들었다.
셀리나는 큰언니 마리에게서 쓰기와 읽기를 배웠다. 나는 사랑하는 놀이 친구와 떨어지는 것이 싫어 셀리나와 함께 배우겠다고 큰언니에게 애원했다.
나는 큰언니가 글자를 가르쳐 줄 때까지 졸랐는데 어느 날 언니는 재미삼아 글자를 가르쳐 주었다.
다음날 순서없이 가르쳐 준 글자를 정확하게 읽어내자 큰언니는 깜짝 놀라며 나를 학생으로 받아들여 세 살에 읽기와 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또 다시 내 의지를 관철시키는데 성공했으며 셀리나와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 셀리나가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따라 했으며 어떤 것도 놓치지 않으려고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나는 높은 어린이 의자에 앉아 식사를 했는데 참 불편했다. 셀리나가 식탁에서 일어나면 호시까지 포기한 채 높은 의자에서 내려주길 기다렸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전반부는 행복으로 가득했다. 나는 파비용으로 소풍을 갔을 때와 보트 여행, 엄마와 함께 주일날
꽃이 만발한 초원과 들판, 나무가 빽빽한 숲을 산책하던 때를 그리고 아빠가 낚시터에 데려갔던 일들을 기쁘게 회상한다.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이 내게 웃음을 보내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하느님은 모든 아름다운 것에 대한 통찰력을 주셨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나의 밝고 쾌활한 본성과 함께 많은 이들의 사랑 가운데 내가 자유롭고 즐거운 삶을 살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행복했던 어린 시절에 먹구름이 뒤덮이게 되었다. 엄마가 몹시 아팠던 것이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몇 년 전부터 오른쪽 가슴에 통증과 경화 증세가 있었다. 1876년 10월 11년간 잠복해 있던 혹이 커지면서 통증이 계속되었다.
이시도를 외삼촌이 지어준 약은 아무 소용이 없었으며 엄마는 의사를 찾아가야만 했다. 의사는 무자비한 진단과 함께 엄마에게 '암입니다.'하고 말했다.
수술은 가망이 없었다. 이 소식은 우리 가족을 마치 곤봉으로 후려치는 듯 했다.
우리는 충격을 받았으며 많이 울었다. 아빠는 목맨 소리로 이제 이 모든 것을 어떻게 꾸려가야 하나
아이들과 가게 그리고 집안 살림을 하고 중얼거렸다. 엄마는 상황을 곧 이해했으며 하느님의 도움에 희망을 걸었다.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은혜를 청하며 아이들 때문에라도 건강을 되찾을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길 간청했다.
성격이 까다로운 네오니는 늘 엄마의 걱정거리였다. 수도원 학교에 다니는 폴리나에게 보낸 편지에 엄마는 이렇게 썼다.
나는 하느님께 신뢰하며 살려달라고 매달린다. 애원이가 내 손에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 병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죽을 것이다.
작은 두 아이들은 걱정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마리는 내 도움을 받으며 동생들을 잘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단지 레온이에게는 아직 내가 필요하다. 사랑하는 폴리나 정말 살고 싶다.
너도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렴. 엄마에게 이시도로 외삼촌과 외숙모 이모 수녀님은 모든 고통과 걱정을 함께 나누는 친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모가 결핵으로 죽었다는 소식은 엄마에게 가혹한 것이었다. 아빠는 이 어려운 시기에 엄마에게 말이 폴리나 레오니와 함께 성모님의 전구로 나을 수 있도록 루르드 성지순례를 떠날 것을 제안했다.
그 여행은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중환자인 엄마에게 고통스러운 모험이었다.
기차에 덜컹거림과 부딪힘은 엄마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언니들은 여행 내내 불안했다.
루르드의 숙박시설과 음식이 형편없어 새로운 방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마리는 돌아가신 이모의 묵주를 잃어버리고 우울했으며 엄마는 넘어져 내 주별과 통증이 계속 시달렸다.
그래도 엄마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굳건한 믿음으로 병인의 나음이라 불리는 마리아의 동굴에서 특별히 기도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이 축복받은 곳에서 건강을 되찾아 떠났기 때문이다. 엄마는 거룩한 동정녀께서 고쳐 주시리라는 희망으로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다섯 번이나 들어갔다.
하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아빠와 셀리나 그리고 나는 집에서 날마다 엄마가 치유되었다는 기쁜 소식이 날아오기를 기다렸다.
엄마가 중환자가 되어 돌아왔을 때 우리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엄마는 내적 힘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실망하지 않고 통증을 잘 참아냈으며 초연한 쾌활함으로 당신의 상태를 드러내지 않았다.
계속되는 일상 속에서 엄마는 고통을 극복하고 우리를 위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는 놀랄만큼 진전된 당신의 병을 고백해야만 했다.
더 이상 성당에도 갈 수 없게 된 엄마는 지옥 같은 고통에 시달렸으며 삶의 마지막 주간은 우리 모두에게 끔찍한 것이었다.
가끔 우리는 엄마가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오! 하느님 더 이상 고통을 이겨낼 힘이 없어요.
당신은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제가 고통을 감수해야 할 때가 왔다면 당신께 간청하오니 저를 떠나지 말아 주소서.
날마다 아빠는 나와 셀리나를 친척들에게 데려다주었다. 그들은 친절하게 장난감도 주고 산책도 시켜주면서 우리의 기분을 바꾸려 했지만 우리는 불쌍한 엄마만 생각했다.
8월 초 엄마의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 그 틈을 이용해 엄마를 기쁘게 해주려고 부지런한 두 여학생 셀리나와 데레사에게 상을 주기로 했다.
우리들의 개인 교사인 마린은 자신의 방을 화환과 담쟁이 덩굴과 장미꽃으로 꾸몄다. 부모님은 안락의자에 앉았고 셀리나와 나는 하얀 옷으로 단장했다. 마리는 두 학생의 이름을 불렀으며 폴리나와 함께 작성한 연설문을 멋지게 읽었다.
우리는 엄마와 아빠로부터 상장을 받았다. 엄마는 당신의 다섯 아이가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불쌍한 것들 이제 나는 더 이상 너희들과 함께 밖에 나갈 수가 없구나.' 아름다운 가족 모임이 있은 다음 또 다시 슬픈 시간이 다가왔다.
엄마의 병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 갔다. 엄마의 병과 관련된 기억들이 내 상념 속에 가슴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특히 엄마가 살아계셨던 마지막 날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엄마는 작은 소리에도 격렬한 고통을 일으켰기 때문에 우리는 귓속말로 이야기를 해야 했다.
바짝 마르고 허약할 대로 허약해진 엄마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우리는 무척 애를 썼다.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엄마는 많은 피를 토했고 완전히 기진 맥진 해졌다. 엄마의 발과 오른팔이 심하게 부어올랐으며 모습이 변했다 .
아빠는 이시도를 외삼촌에게 엄마가 아직 의식이 있을 때 만날 수 있도록 연락했다. 엄마는 8월 중순까지는 외삼촌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성모님이 고쳐주지 않았다면 나의 때도 다 지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하느님께서는 이 지상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내가 쉬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엄마의 죽음> 엄마의 생명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빠의 슬픔은 말할 수 없었으며 밤낮으로 엄마 곁을 떠나지 않았다.
8월 25일은 아빠의 영명 축일이었는데 다행히 엄마한테서 축하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다음날 아빠는 엄마가 병자성사를 받도록 신부님을 모셔왔다.
감동적인 병자성사의 전례는 내 영혼의 깊이 각인되었다. 나는 셀리나 곁에서 있었으며 그 옆으로 레온이 홀리나 그리고 마리가서 있었는데 지금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하다.
우리는 울먹이는 아빠와 함께 기도하기 위해서 신부님과 함께 임종자의 방에서 무릎을 꿇었다.
하루가 지난 8월 27일 리지회에서 이시도로 외삼촌과 외숙모가 도착했다. 두 사람이 환자의 방에 들어섰을 때 엄마는 그들을 웃음으로 맞았다.
엄마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으므로 간절한 눈빛으로 그들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죽은 다음에 이 아이들을 보살펴 주세요.
다음날 밤 엄마는 하느님의 손에 당신 삶을 되돌려드리고 영시30분 아빠와이 시도로 외삼촌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아빠는 곧 세 언니에게 엄마의 죽음을 알렸고 정원 정자 쪽으로 뛰쳐나간 폴리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우리 꼬마들이 잠든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를 깨우지 않고 다음날 아침에서야 이 슬픈 소식을 알려주었다. 아빠는 나를 안고 엄마에게 데려가더니 이렇게 말했다.
'자 어서 불쌍한 엄마에게 마지막 뽀뽀를 하렴' 나는 사랑하는 엄마의 이마에 가만히 입맞춤을 했다.
나는 내가 많이 울었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느낀 깊은 감정에 대해서 누가 하고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어른들의 대화를 듣고 또 보았다. 모든 것이 어수선한 가운데 누구도 나를 보살펴 줄 시간이 없었으며 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숨기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관 앞에 서서 돌아가신 엄마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다음날 장례식의 아이들은 참석할 수 없었다.
우리 다섯은 함께 모여 있었으며 서로를 슬프게 바라 보았다. 집안일을 돌보는 루이사가 딱한 표정으로 셀리나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얘들아 이제 너희들은 엄마가 없단다. 그때 셀리나가 마리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렇다면 좋아 이제부터 언니가 엄마가 되는 거야. 나는 폴리나의 품으로 달려들며 이렇게 외쳤다.
그렇다면 좋아 이제 언니가 엄마가 되는 거야. 엄마의 죽음은 낙천적 내 성격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쾌활하고 생기 있으며 생각을 많이 하고 이야기를 좋아하던 나는 매사에 소심하고 예민한 아이로 변했다.
누가 한번 쳐다보기만 해도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무척 싫어했으며 가족들 안에서만 행복해 했다.
아빠는 선한 성품과 깊은 사랑으로 엄마 노릇까지 했으며 두 언니 마리와 폴리나가 정성을 다해 나를 보살펴 주었다.
엄마의 죽음은 아빠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아빠는 54세의 가장으로서 가게와 가정을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지 알지 못했다.
이시도로 외삼촌과 외숙모는 아빠가 힘들어 하는 것을 알고 리즈회로 이사할 것을 제안했다.
아빠는 엄마와 가슴 아픈 사별에 이어 고향 알랑송을 떠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고향에는 사랑하는 파비용이 있었으며 함께 갈 수 없는 연루한 할머니가 계시며 무엇보다도 엄마가 묻혀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새로운 분위기에서 새 삶을 시작하며 그 어디에서도 지난날의 슬픔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곳에 대해 상상하는 것이 즐거웠다.
결국 아빠는 친척들의 권고에 굴복했고 마리는 외가에 이렇게 써보냈다. 아빠는 우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든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아빠는 당신의 삶 자체를 우리의 행복을 위해 바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빠는 아무것에도 놀라지 않고 우리의 행복을 위해 결정을 내리는 것이 당신의 의무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시도르 외삼촌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위해서 당장 집을 구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돌아가신지 14일이 지난 1877년 9월 10일 외삼촌은 25번째 본 집에 대해 멋진 설명을 곁들여 편지를 써 보냈다 .
우리는 가족 회의를 했고 휘손에로 이사할 것을 결정했다. 9월 16일 아빠가 계약서에 서명함으로써 대대적인 이사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2개월이라는 여유가 있었다. 짐을 정리하고 싸는데 얼마나 일이 많고 힘이 드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신나게 이삿짐 사이를 뛰어다니며 놀았다. 1877년 11월 15일 우리는 엄마가 잠들어 있는 묘지에 가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알랑송 성 블레즈거리에 있는 정든 집을 떠났다.
그리고 리지웨행 기차를 타기 위해서 역으로 갔다
성녀 소화데레사에 관한 교황의 사도적 권고는? (02:56)
프랑스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는 '소화데레사' 또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라고 불립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녀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사도적 권고를 발표했는데요 사도적 권고에 담긴 메시지는 무엇인지 살폈습니다.
< 사도적 권고 >
「그것은 신뢰입니다.」 프랑스 리즈외의 성녀 데리사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발표한 '사도적 권고' 제목입니다.
'소화데레사' 또는 '아기예수의 데레사'라고도 불리는 성녀는 24년 짧은 생에 동안 <하느님을 향한 단순한 믿음>과 <절대적 신뢰>의 모범을 보여준 '맨발의 가르멜 수녀회'의 수도자입니다.
교황은 하느님을 향한 성녀 데레사의 <완전한 신뢰>에 주목했습니다.
《 우리를 사랑으로 이끄는 건 신뢰 오직 신뢰뿐입니다.》라는 성녀의 말을 19쪽 분량의 공고문은, 맨 앞에 배치했습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에 관한 사도적 권고가 '그것은 신뢰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사실 이 위대한 은수자이자 교회 박사인 성녀가 증언하였듯이,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신뢰>하는 것은 우리를 주님의 마음과 그분의 복음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15살에 수녀원에 들어간 성녀는 꽃다운 나이에 결핵에 걸려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었습니다.
그런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 정원의 작은 꽃이 될 수 있었던 힘은 주님께 대한 신뢰에서 나왔습니다.
교황은 성녀 데레사의 <어린아이 같은 단순한 마음>은 매우 복잡한 시대에 단순함의 중요성과 사랑, 신뢰를 재발견하도록 도와준다고 일깨웠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규칙으로 채우고 복음의 기쁨을 식게 하는 율법주의를 넘어설 수 있도록 해준다고 역설했습니다
교황은 선교의 수호자로 널리 알려진 데레사 성녀의 선교 열정도 칭송했습니다.
수도 생활 9년 반 동안 선교 여행은 커녕 봉쇄 수녀원 울타리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지만
성녀는 평생을 세상 끝날까지 선교사가 되고 싶다면서 편지와 기도를 통해 선교사들과 함께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선교사는 자기가 있는 곳이 어디든 하느님 사랑의 도구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성녀 데레사처럼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사람은 누구나 선교사라는 겁니다.
교황은 아기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작은 길」을 누구나 따라갈 수 있다고, 또 그래야 한다고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