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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존스턴 신비신학 사랑학 l 제1부 l 그리스도교 전통 제4장 신비주의와 사랑 04-01 최고의 가치: 사랑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1코린 13,1)" 사랑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이다. 사랑에 근거하지 않는 신비주의는 그리스도적일 수 없다 |
0:42
오늘은 신비 신학 제4장 신비주의와 사랑이라고 하는 챕터
같이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1코린 13,1)
바오로 사도의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 나오는 말씀
사랑의 송가, 거기에 나오는 말씀이죠.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라고 하는 것
우리가 다 잘 알죠.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관상기도, 향심기도 하면서도
그 기도의 목적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서
나도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
같이 먼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랑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이다.
그러니 당연히
사랑에 근거하지 않는 신비주의는 그리스도적일 수 없다라고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죠. (2:00)
04-02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1090 - 1153)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 > 1. 나약한 인간은 이기적이지만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사랑한다. 2. 여전히 인간은 이기적이지만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3. 하느님을 더 알게 된 인간은 드디어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다. 4. 진정한 사랑의 단계에 다다른 인간은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 인간의 영혼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신비 체험 > 1. 영성생활을 시작하는 회개의 단계 : 인간은 예수님의 발에 입맞춤을 한다. 2. 영성생활의 발전단계 : 인간은 예수님의 손에 입맞춤 한다. 3. 영성생활의 완전한 상태 : 예수님의 입에 입맞춤을 한다. 지성적인 신학 →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관상 생활 |
2:01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
여기에서 지난번에 말씀을 드렸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언급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의 영성에서의 핵심 주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베르나르두스가
<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 >을 설명하는 구절이 있는데요,
거기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먼저 첫 번째로
나약한 인간은 이기적이지만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사랑'한다.
우리가 사랑을 가지고 살게 되지만
첫 번째는 이기적인,
그래서 자신을 위한 자신 사랑이라고 하는 사랑을 가지고 있다가
그것이 서서히 성장되어 나아간다.
두 번째
여전히 인간은 이기적이지만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라고 하는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죠.
그리고 세 번째
하느님을 더 알게 된 인간은 드디어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다.
이렇게만 해도 굉장히 아주 큰 진보를 이룬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네 번째로 진정한 사랑의 단계에 다다른 인간은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
나를 사랑하지만,
내가 목적인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이 나의 목적이 되는 것,
하느님을 위한 인간이 되는 것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또 나를 위한 것이 되기도 하죠.
이렇게
인간은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과정으로
우리의 사랑이 성장되어 나아간다라고 하는 거
이 이야기를 배경에 먼저 깔아 두는 것이 좋을 겁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가
< 인간의 영혼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신비 체험 >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도 우리가 배경적인 지식으로 알아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영성생활을 시작하는 회개의 단계를 이야기를 하는데
이때 '인간은 예수님의 발에 입맞춤을 한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인간은 예수님의 발에 입맞춤을 한다.
그리고
영성생활의 두 번째 단계, 발전단계에 가면
'인간은 예수님의 손에 입맞춤을 하는 신비 체험의 단계가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영성생활의 완전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의 입에 입맞춤을 한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사실 많은 영성 작가들이 구약성경의 아가서를 인용을 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을 이야기를 하는데
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도 마찬가지로
아가서를 해설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신비 체험을 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마치 예수님과 입맞춤을 하듯이
그런 일치의 단계, 영적 혼인의 단계, 그런 것과 같은 차원에서
예수님의 입에 입맞춤하는 영성생활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다다르는
신비 체험을 할 수 있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베르나르두스는
지성적인 신학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관상 생활,
이것이 바로 창조의 말씀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하느님의 말씀에 우리가 입맞춤하는 관상 생활
그런 생활이 가능하다라고 하면서
거기로 우리들을 초대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하게 됩니다. (5:54)
04-03 영성학파들 04-04 성과 속 04-05 14세기 신비주의자들 - 마이스터 엑카르트(1260~1327) "버리고 떠나 있기" ○ 인간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알지 않고 가지지 않을 때에 자기 자신마저 넘어서는 진정한 가난에 도달하며, 이 가난 속에서 영원한 존재가 된다. ○ 인간이 신으로부터 '유출(流出)'되었다라고 하는 사실보다 신을 향해 '돌파(突破)'할 때 신과 일치할 수 있다 - 요한네스 타울러(1300~1361) ○ 신적 심연에 도달한 영혼은 신의 불꽃을 받으며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신적 암흑과 침묵 속으로 들어가면서 하느님과 일치한다. - 하인리히 소이세(1295~1366) ○ 자신마저도 놓아두고 있으면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영혼이 선행을 실천하면 하늘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부차적인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신의 은총을 통해서 영혼과 신성이 일치하는 것이야말로 본질적인 행복이다. 하느님의 지속적인 사랑에 희망을 두는 신비체험 - 노리치의 줄리안(1342~1416) 죄의 결과가 고통이지만, 고통을 통해 정화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수난당하신 것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기에 인간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머물러야 한다. - 시에나의 카타리나(1347~1380) 사랑으로 영적 발전단계를 설명 ○ 비굴한 사랑 → 보상을 바라는 사랑 → 효경의 사랑 최상의 사랑의 상태에서 인간 영혼은 하느님의 의지에 전적으로 의탁하지만 하느님 현존에 대한 인식을 잃지 않는다. |
5:55
14세기 신비주의자들
이 책에서
신비주의와 사랑이라고 하는 주제를 이야기를 하면서
윌리엄 존스턴 신부님께서는
14세기 신비주의자들의 이름을 쭉 열거하면서
그 당시에 많은 영성가들이
이 사랑이라고 하는 주제를 집중적으로 이야기를 했다
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를 합니다.
먼저 마이스터 에카르트입니다
독일의 아주 유명한 신비주의자라고 표현할 수가 있는데요
그는 "버리고 떠나 있기"라고 하는 이러한 명제로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정리를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알지 않고 가지지 않을 때에
자기 자신마저 넘어서는 진정한 가난에 도달하며,
이 가난 속에서 하느님과 일치하는 영원한 존재가 된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묵상을 할 때
내가 어떤 것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어떤 것도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그분에게 나 자신을 내어 맡길 수 있는 것
이런 차원에서의 기도를 이야기를 했던 것이죠.
그리고
인간이 신으로부터 '유출(流出)'되었다라고 하는 사실보다
신을 향해 '돌파(突破)'할 때 신과 일치할 수 있다
라고 하는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돌파라고 하는 말을 사용을 하는데요,
하느님이 바깥에서 우리를 부르기도 하지만
바깥에서 깨기도 하지만
인간은 또 안에서 바깥으로 하느님의 품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노력
그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해서 이것을 돌파라고 하는
그런 독특한 말로 이 영상을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엑카르트의 제자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요한네스 타울러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요,
이분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신적 심연에 도달한 영혼은
신의 불꽃을 받으며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신적 암흑과 침묵 속으로 들어가면서 하느님과 일치한다.
신의 불꽃을 우리가 받는다.
하느님의 불꽃을 우리가 받을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편에서 이해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그래서 신적인 암흑이라고 표현하고
또 침묵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서 당신과 하나로 만드신다라고 하는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어서
같은 시대에 살았던 하인리히 소이세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요
그는 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마저도 놓아두고 있으면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자신마저도 내어 두어라.
그래서 아무것도 내가 무엇인가 주체가 되어서 하려고 하지 않고
하느님의 이끄심에 나를 내어 맡겨 드릴 때
오히려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이 선행을 실천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있는 부차적인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 영혼과 신성이 일치하는 것이야말로
본질적인 행복이다.
그래서 이건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들의 노력으로 무엇인가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노리치의 줄리안이라고 하는 분이 계시는데요
여성이죠.
여성 신비 체험가들도 그 당시에 많이 등장을 하게 되는데
이 노리치의 줄리안은 하느님의 지속적인 사랑에 희망을 두는
신비 체험을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희망을 두는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주제를 주로 이야기를 합니다.
죄의 결과가 고통이지만,
고통을 통해 정화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이 주로 그 당시에 14세기에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고통에 깊이 머무르는 묵상을 하면서
그 예수님의 고통을 체험하는 신비 체험
이런 것들을 많이 경험을 했다고 이렇게 합니다.
그리스도가 수난 당하신 것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기에
인간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머물러야 한다라고 하면서
이 하느님의 사랑에 희망을 두어라.
하느님의 사랑에 의탁해라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카타리나 성녀는 사랑으로 영적 발전단계를 설명을 합니다.
먼저 비굴한 사랑 → 보상을 바라는 사랑 → 효경의 사랑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이 두려운 심판자로 생각을 하면서 하느님의 이 벌,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된다라고 하는
이런 사랑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을 할 수가 있는데
이것이 이제 발전을 하게 되면
보상을 바라는 사람으로 성장을 할 수가 있다.
내가
'하느님 이렇게 했으니까 저에게 하늘나라를 선물을 해주세요.
이제 은총을 주세요.' 이럴 수 있는 것이죠.
이것을 보고 '보상을 바라는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제 더 나아가면 이런 보상을 바라서가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이 이미 나를 사랑해 주시는 분인 줄 알고 있고
또 그래서 나도 하느님을 온전히
다른 어떤 것 없이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
많이 많이 앞서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이런 효경의 사랑을 가질 수 있다라고
이렇게 영적 발전 단계를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최상의 사랑의 상태에서
인간 영혼은 하느님의 의지의 전적으로 의탁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인식을 잃지 않는다.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라고 하는 것
거기에 우리가 머물러서 묵상을 하면서 관상을 하면서
이 하느님의 사랑에 나를 온전히 내어 맡기는
이런 차원으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라고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12:07)
04-06 신학의 새로운 분야 14세기에 이르면 위 디오니시우스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널리 퍼진다 곧 "기도는 추론과 생각과 이미지를 넘어 무지의 구름에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파리 대학의 제르송(1363~1429)은 이렇게 말한다. 파리 대학의 제르송은 이렇게 말한다. 신비 신학이란 하나 되게 하는 사랑의 포옹으로 알게 되는 하느님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다. 곧 신비 신학은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것이아니라 사랑의 길을 걷고 있는 신비적인 순례자를 인도하는 경험적이고 통합적인 지식이다. |
12:08
이런 여러 14세기의 영성가들을 이야기를 하면서
이어서 이제 존스턴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정리를 하십니다.
14세기에 이르면
위 디오니시우스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널리 퍼진다
디오니시우스라고 하는 이름으로 쓴 신비 신학이라고 하는 책이죠.
거기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곧 "기도는 추론과 생각과 이미지를 넘어
무지의 구름에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표현한 이런 것이 사람들에게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래서
관상기도란 하느님에게 온전히 나 자신을 의지하면서
하느님에 의해서 내가 변화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는
이런 생각이 널리 퍼졌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파리 대학의 제르송은 이렇게 말한다.
신비 신학이란 하나 되게 하는 사랑의 포옹으로 알게 되는
하느님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다.
이런 기도, 하느님과 일치되는 것,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일치되는
이런 기도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 이 신비신학,
이거는 바로 사랑의 포옹이라고 이렇게 표현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안아 주시고
그 사랑으로 나를 가득 채워 주시는데
이것을 기도를 하면서 우리가
그때에 깨닫게 되는 어떤 경험적 지식이라고
이렇게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비 신학은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의 길을 걷고 있는 신비적인 순례자를 인도하는
경험적이고 통합적인 지식이다라고
표현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또
나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는
그런 사랑의 삶을 살고 싶다라고 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기도하는 이들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이 사랑의 길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우리 묵상 기도는 우리의 향심기도 또 이런 관상 기도는
사랑의 길을 걷고자 하는 우리 순례자들을 표현을 할 수 있겠죠.
그들에게 어떻게 이 사랑의 길을 올바로 걸어가서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지
그것을 기도를 통해서 경험적으로 깨닫게 된 그 방법,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 알려주는 것,
이것이 신비 신학이다라고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겁니다. (14:37)
04-07 두 종류의 지식: 두 종류의 기도 1. 습득된 지식 경험과 이해와 판단에 의해 획득된 지식으로, 외적 감각에서 내적 감각으로 와서 '각인된 형상' 또는 '습득된 형상'에 의해 지성으로 전해진다. 2. 성령의 선물로서의 지혜 하느님에 의해,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에 흘러들어오는 지혜 주부 관상 注賦 <무지의 구름> "하느님께서 완전히 홀로 일하신다." 토마스 아퀴나스 하느님께서는 중재없이, 피조물의 중재 없이 일하시는 때가 있다. 이것이 신비적 삶이 가지는 경이로움이다. 하느님께서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역사하시어 그의 마음에 지식과 사랑을 주입하시기 때문이다. 이는 오직 무지의 구름 속과 어두운 밤중에 있는 알기 어려운 지식이다. 이것이 신비적 삶이 가지는 경이로움이다. 하느님께서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역사하시어 그의 마음에 지식과 사랑을 주입하시기 때문이다. 이는 오직 무지의 구름 속과 어두운 밤중에 있는 알기 어려운 지식이다. 이는 아픔을 수반하는 지식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거룩한 것을 맞이할 준비를 항상 하지는 않고 지나치게 밝은 빛에 의해 어둠 속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의 지혜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으로 주입될 때에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내적 불꽃이 자라도록 허락하라!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신비의 길에 들어선다. 하느님을 향한 이 신비적인 길을 따라 이끌리도록 자기 자신을 내버려 두어야 한다 |
14:40
두 종류의 지식: 두 종류의 기도
그러면서
두 종류의 지식 그리고 두 종류의 기도를 이야기를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표현했던 것을 다시 인용을 하면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지식에는 두 종류의 지식이 있죠.
첫 번째는 습득된 지식
경험과 이해와 판단에 의해 획득된 지식으로,
외적 감각에서 내적 감각으로 와서 '각인된 형상' 또는 어떤
'습득된 형상'에 의해 지성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이것을 습득된 지식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보고 느끼고 그런 것들이
외적인 감각으로 무엇인가를 파악을 하게 되어서
그것이 우리 안에 내적인 것에서
그것이 다시 조화와 통합이 되면서 어떤 지식으로
지성으로 어떤 결론에 다다르게 되겠죠.
이런 것을 습득된 지식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거 말고
성령의 선물로 주어지는 지혜도 있다.
내가 논리적인 추론에 의해서 깨닫게 되는 것 말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시는 것
이런 것도 있다.
그래서
하느님에 의해,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에 흘러들어오는 지혜
라고 하는 것이 있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런 두 종류의 지식이 있는 것처럼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도 습득된 지식처럼
우리가 기도 중에도 내가 나의 경험, 나의 지성을 사용을 해서
예를 들자면
성경 본문을 내가 파헤쳐서 그걸 논리적으로 따져서
무엇인가 어떤 결론에 다다르려고 하는 그런 묵상,
묵상으로서의 기도라고 하는 것이 있고
또 성령의 선물로
우리에게 어떤 지혜가 주어지는 것처럼
기도할 때에도
내가 주체가 되어서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넣어 주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 흘러들어 오는 그런 것을 바라는
기도가 있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주부 관상이라고 하는 말을 씁니다.
'주(注)' '주입되었다'라고 하는 것이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넣어 주시는 것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은총을 넣어 주신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하느님이 주신 은총을 받도록 기다리는 기도라고 해서
주부 관상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거를 무지의 구름에서는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히 홀로 일하신다.
기도 중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사랑을 넣어 주시는 일을 하신다
라고 하는 뜻이겠죠.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께서는 또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무엇의 중재도 없이
피조물의 중재 없이 일하시는 때가 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
우리를 당신 뜻에 맞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한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것이 신비적 삶이 가지는 경이로움이다.
하느님께서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역사하시어
그의 마음에 지식과 사랑을 주입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런 일들을 하신다고 하는 거죠.
이는 오직 무지의 구름 속과 어두운 밤중에 있는
알기 어려운 지식이다.
우리 편에서 우리 인간편에서는
하느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구름 속 어두운 밤중이라고 표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존스턴 신부님이 이어서 또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신비적 삶이 가지는 경이로움이다.
하느님께서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역사하시어
그의 마음에 지식과 사랑을 주입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어떤
지식, 지혜, 당신의 사랑 이런 것들 우리에게 넣어 주신다.
이는 오직 무지의 구름 속과 어두운 밤중에 있는
알기 어려운 지식이다.
이는 아픔을 수반하는 지식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거룩한 것을 맞이할 준비를 항상 하지는 않고
지나치게 밝은 빛에 의해 어둠 속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죠.
하느님이 넣어 주시는 은총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찬란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찬란한 태양이 인간의 눈을 멀게 하는 것처럼
하느님이 당신이 일을 하실 때에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너무나 커다란 빛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 눈이 멀어서 깜깜한 어둠이 된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에게
어두움으로 경험이 될 뿐이다라고 하는 것이죠.
이 사랑의 지혜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으로 주입될 때에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그렇죠 하느님이 당신의 일을 하실 때에는
우리 편에서 멈추고 하느님에게 우리를 온전히내어
맡기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그때 내적 불꽃이 자라도록 허락하라!
하느님이 우리 안에 이런 불꽃을 넣어 주시는 것이죠.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신비의 길에 들어선다.
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기 때문에 것을 신비의 길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이 신비적인 길을 따라 이끌리도록
자기 자신을 내버려 두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내버려 두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것
자기 자신을 자기를 버리는 것
자기 뜻 자기 생각, 나 중심의 모든 것 이것들을 내려놓고
하느님에게 우리를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
이런 것이 기도하는 방법이다라고 해서
이런 것들을 신비 신학이라고 표현을 하게 되는 것이죠.
04-08 사랑의 신학 신비적인 길에 자신을 둘 때, 하느님의 사랑은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으로 흘러들어온다. 이것은 우리 생각의 옷을 걸치지 않은 것으로, 주입된 내면의 불, 내면의 빛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수면 위로 떠오르거나 태어나기나 하시는 듯 우리는 또한 그것을 하나님의 분출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새로운 무엇이 태어나는 것이다. 신비적인 삶은 이 사랑의 탄생과 그 성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주 작은 불똥으로부터 십자가 성요한 이야기하는 '사랑의 산 불꽃'이 된다. 사랑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획득될 수 없고 금욕의 실천이나 복잡한 기교의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재능과 상관없다.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실 때에 원하시는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신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양 우리로 들어오라고 부르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때가 올 때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관한 성실하고 경건한 성찰의 여념이 없어야 한다. 부르심의 응답하는 사람만이 양 우리로 돌아갈 수 있다. |
20:20
그러면서 존스턴 신부님은 사랑의 신학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을 하십니다.
사랑의 신학,
이런 신비적인 길에 자신을 둘 때,
하느님의 사랑은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으로 흘러들어온다.
이것은 우리 생각의 옷을 걸치지 않은 것으로,
주입된 내면의 불, 내면의 빛이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넣어 주신 불꽃
그런 불꽃을 우리 안에 일으켜 주신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하느님이 수면 위로 떠오르거나 태어나기나 하시는 듯
우리는 또한 그것을 하나님의 분출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새로운 무엇이 태어나는 것이다.
신비적인 삶은 이 사랑의 탄생과 그 성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주 작은 불똥으로부터
십자가 성요한 이야기하는 '사랑의 산 불꽃'
사랑의 불꽃, 사랑의 살아 있는 불꽃이
우리 안에서 타오르게 된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내면에 넣어주신
그 자그마한 불꽃이 성령이라고 하는 그 불꽃이
우리를 사랑의 살아있는 불꽃,
사랑의 산 불꽃으로 만들어 준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획득될 수 없고
금욕의 실천이나 복잡한 기교의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재능과 상관없다.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실 때에 원하시는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신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양 우리로 들어오라고 부르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때가 올 때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관한
성실하고 경건한 성찰의 여념이 없어야 한다.
부르심의 응답하는 사람만이 양 우리로 돌아갈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은총을 넣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를 얼마큼 했고
또 얼마나 긴 시간 했고라고 하는 것에 의해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 하느님의 사랑의 불꽃이
그 양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죠.
당신을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사람에게 원하시는 만큼
당신께서 우리에게 넣어 주시는 것,
그것을 우리는 기다리는 자세로 기도한다라고 하는 것
그런 것들을 이야기를 하십니다.
오늘 이렇게 해서
윌리엄 존스턴 신부님의
신비주의와 사랑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 나누었고요
다음번에는 동방교회에서의 신비신학
동방교회에서의 관상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