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소설을 좋아한다.
어디 소설뿐인가. 영화나 드라마도 성장소설의 삘이 나면 챙겨서 찾아본다.
어른들의 세계를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시선이 재밌기도 하고 공감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냥 행복한 유년은 없듯이 시난고난 자라난 아이들이 나름의 튼실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기쁨도 있다.
근데 왜 영주는 튼실하게 자랄 기회를 뺏기고 죽어야 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나서, 작가는 왜 어린 영주를 죽였는지가 궁금했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으면서 딱 두 번, 이후 벌어질 상황이 무서워서 책을 놓았던 적이 있다.
한 번은 계란 머랭 만드는 장면.
천진난만한 영주가 무언가 대형 사고를 칠 낌새를 보일 때였다.
영주가 벌인 사고의 후폭풍은 어리숙하고 착한 동구가 뒤집어 쓸 공산이 큰데, 정말 더 이상은 동구가 쥐어터지고 욕먹는 꼴을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감나무에 달린 감을 따러 영주가 동구의 작은 몸에 무등을 올라탈 때.
무슨일이 벌어질 듯한 느낌. 그리고..
설마 죽기야 하겠어?
아마 뇌진탕 쯤으로 그 영민한 아이가 지닌 영재성, 혹은 천재성이 사라지는 정도로 비극은 사소하게 조율되지 않을까..하는 기대.
그 기대가 무색하게 영주가 화장터에서 사라진 날, 화가 났다.
날아오는 총알에 맞은 것도 아니고, 공비들 손에 학살된 것도 아니고, 최루탄에 쓰러진 것도 아닌,
고작 설익은 풋감 하나 따려다 죽는다고??
작가 당신 눈에는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하냐?? 글의 클라이막스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이렇게 잔인하게 분탕질을 치냐??싶어 화가 났다.
그런데 갑자기 떠오르는 오래전 기억.
그 장면이 영주의 죽음과 오버랩된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때인가 대학을 다닐때인가..그래봐야 80년대이니 비슷한 시기이긴 하다.
우리집에서 걸어서 10여분쯤 거리인 시골 버스정류장에는 컨테이너 박스 절반쯤은 될까 싶은 커다란 얼음창고가 있었다.
짙푸른 비닐 갑바를 뒤집어쓰고 <어름>이라는 삐뚜룸하고 큰 글씨가 쓰여진 창고.
그 얼음 창고안에서 근처 초등학교 아이들 몇 명이 숨져 있는 것이 발견된 날.
제법 먼 거리인 우리동네까지 어수선했다.
"아이들이 심심해서 들어가서 못나왔는갑다. 우짜꼬"
"부모들이 다 일하러 가서 연락이 안돼가꼬 애들 얼굴 확인도 같은 반 반장이 와서 했단다..세상에.."
웅성대는 동네 사람들 말을 들으며 나는 친구와 함께 황망히 서있었다.
친구옆에서 내가 혼잣말처럼 말헸다.
" 왜 얼음 창고에는 들어가 가지고..."
곧바로 친구가 내 앞에 침을 찍 혹은 퇘 뱉으면서 되받아 말했다,
" 가들이 들어가고 싶어서 들어갔겠나? 그게 다 가난해서 그런거다 !!"
나는 내 발앞에 떨어진 침을 보며 아무말도 못했는데, 내가 내 친구보다 덜 가난해서 내가 세상 모든 불행에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기억이 불시에 떠오르며 작가의 무도함을 용서하기로 했다.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도 간혹, 아주 간혹, 불행한 사고가 일어날 수 있음을 떠올리며.
.................................
영주의 죽음이후 가족들이 살아남는 것을 지켜봤다.
말라서 헐떡대는 가슴으로 밥을 삼키는 동구 엄마 모습도 슬프고, 자식 죽여놓고 밥이 넘어가냐고 패악질하는 동구 할머니 모습도 슬프다.
어떻게 살아가나 싶은데..근데 다들 살 방도를 찾는다.
그 살아갈 방도는 가족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희망>이다.
그악스러운 할머니는 시골 고향에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꺼지기 전 촛불 같은 생기가 반짝 돌고,
엄마는 살아남기 위해 병원에 드러눕는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미울 수도 있는 아들 동구를 안아준다.
마른 고목같이 속이 휑 비어버린 아버지는 아내를 위해 엄마를 떼어낼 준비를 한다.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살아지는 것인가.
첫댓글 살아있어서 살아지는것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의 슬픔을 안고 또 살아나가는 것
살다보면 살아지는 것이 아닐까?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소년의 힘든 삶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소년 동구의 마음을 , 삶의 자세를 표현한 것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