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 다니던 길
집에서 학교까지는 1.5Km 정도 되나?
순천 시내를 빠져나온 비포장길 신작로는 내가 살던 높은 한질을 지나면 탁트인 해촌뜰을 바라보며 약 2Km정도는 들판길을 내달린다.당시는 차가 별로 없기도 했지만 지금의 캄보디아나 라오스처럼 선진국에서 폐차에 이른 중고차들을 가져다가
보링작업해서 운행하던 시절이라 도로에다 세금을 투자할 여력이 없었다.
우리집에서 변전소앞을 지나 500m쯤 가면 작은 다리가 하나 나온다.
봉화산에서 흘러내린 도랑과 생목쪽에서 흘러온 도랑이 만나 하나가 되어 조례저수지로부터
흘러가는 냇물로 흘러가는 도랑으로 합수되는 다리이다.
난 오후반일적에 벽돌막에 사는 옥석이랑 조금 일찍 학교로 가다가 그곳에서 진흙으로 길을 만들고 산도 만든 다음 고무신 하나에 다른 쪽 고무신을 구부려 끼워 자동차 모양을 만든다음
그 위를 밀고 다니면서 자동차 놀이를 하다가 시간 관념을 잃어 지각을 하여
선생님께 꾸중을 들은 적도 있다.
70년대 초로 기억되는 순천 실고(현재 공고)를 중심으로 한 학교 다니던 신작로 /조례초등학교가 멀리 보인다
우리가 초등하교때는 나라에서 달러를 버는 일이면 뭐든지 했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 필리핀이나 스리랑카가 정책적으로 자국민들을 해외로 내 보내듯 우리나라에서도
간호원과 광부를 독일로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야 했고 월남에 파병하여
목숨값으로라도 달러를 벌어야 하는 -
조국 근대화를 위한 꿈을 실현할려는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달러가 절박한 시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으로 전량 수출하는 양송이를 재배하고 그것을 가공하는 통조림 공장이
“계양식품㈜”라는 이름으로 내가 고학년 때쯤 그 작은 다리와 똥뫼다리라 하는 큰 다리 사이에
대규모로 들어섰다.그 규모는 최종적으로 양송이 재배소만 약 60개 동이었고
통조림 공장 건물도 큰 건물이 3개나 되었다.
당시에는 일자리가 귀했던 때라 절박하거나 모험심이 있는 사람들은 무작정 상경하여
남자들은 중국집‘뽀이’(배달이나 주방 보조)로 여자들은 식모나 공장으로 취직을 위해 떠났다.
어쩌면 취직보다는 입을 하나 덜기위한 의미가 컷던 것같다.
여자들은 자칫 잘 못 풀리면 첨부터 니나노(술집)으로 팔려가는 경우가 많았고 식모나 공장에
다니다가 작업반장등 남자들에게 희롱 당한 후 자포자기로 다방으로 갔다가 술집으로 팔려가는
경우가 많아 결국 나중엔 병든 몸으로 노랑머리 애기를 안고 낙향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소중하고 귀했던 당시 돈.돈.돈
TV에 종종 나오는 필리핀 여성들의 애환을 우리나라는 60년대~70년대에 우리 누나들이
겪었던 것이다.그런 슬픔과 애환과 노고로 현재 OECD선진국에 들어가는 우리나라를 만들었다.
우리와 우리 부모님 세대가 세계가 놀랄 기적을 만들어 낸 자랑스런 세대인 것이다.
하지만 경제에서는 성공했으나 자식들 교육에는 성공하지 못한 것같다.
효도를 바라는 것은 5대 쬬다중 하나라고 자조섞인 유머가 나올정도니 말이다.
달러가 있어야 외국 선진기계를 들여와 우리나라를 발전시켜야 하는데 60년대는
6.25전쟁 복구조차 덜 된 상태였는데 뭘 만들어 팔아서 달러를 구할 것인가?
어떤 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상태에서는 1차 상품과 국민들의 몸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60년대에는 우리나라 여자들이 일본 기생관광이나 외황선원을 상대로 서울의 호텔과
인천의 옐로우하우스에서 몸을 팔아 달러를 벌었고 70년대에는 우리나라 남자들이 사우디나 이란,이라크 건설현장에서 몸을 팔아야 했다.물론 60년대 월남파병으로 또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로
오로지 밑천없는 몸둥이로 달러를 벌기도 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소중한 달러가 밑거름이 되어 오늘날 세계에서도 스무번째 안에 든 잘사는 나라가 된 것이다.
삼시세끼 끼니 걱정만 안해도 세계인구의 30%안에 들어가는 복받은 삶이고
연봉 5천만원 이상인 자는 세계인구의 5%안에 들어가는 부유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 아버지 세대 때 쌀 한 말을 받고 그 무거운 미군을 지게로 지리산 노고단까지 운반해 줬다고
하니 중국의 가마꾼이나 필리핀 팍상한 계곡의 보트맨을 불쌍히 생각해서는 안된다.
가난한 나라 국민의 숙명이기에.
얘기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렇게 끼니 걱정하고 돈이 귀했으나 일자리가 없는 시절이었으니 동네마다 서울이나 대처로
가지못한 수많은 아가씨들이 넘쳐났고 어른들도 마땅히 돈벌이가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노동집약적인 양송이 공장은 어쩌면 해촌뜰을 끼고있는 동네의 축복이었다.
해촌뜰은 물론 인근 농지에서 짚을 싼 값에 사와서 일정 규모로 만든 틀에 물과 비료를 뿌리며
짚을 삭혀 거름을 만드는데 남자가 할 험한 일임에도 아가씨들이 왕창 들어가 밟아 제낀다.
그러면 틀 주변에서 남자들이 삼지창이나 쇠스랑으로 짚을 퍼 넣는다.
이렇게 하면 넓은 공장부지에 일정규모의 두엄이 수십개가 생기고 이런 거름이 충분히 발효되면
캄캄한 양송이 재배소로 옮겨 지는데 양송이 재배소에는 슈퍼마킷 진열대처럼 앵글로
계단을 만들어 놓고 층마다 이 거름을 깐 다음 양송이 종균을 뿌려 재배를 한다.
재배소 안에는 거름 냄새와 거름에서 나는 열로 여름에는 숨이 막힐 지경이지만 우리네 누나들은
불평불만 없이 그 일을 수행했다.작업반장에게 잘보이면 송이 채취반으로 들어가
그나마 실내에서 일했지만 신참이나 찍힌 사람들은 밖에서 거름 만드는 일을 해야 했다.
이렇게 키운 양송이는 옆 통조림 공장에서 가공하여 전량 일본으로 수출했다.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매일 카드에 출근 확인 도장을 받아 한 달에 일당으로 계산된 돈을
월급으로 받는데 여자들은 2,700원에서 3,300원까지 받았고
어른 남자들은 5,000원에서 6,000원정도 받았는데 당시 쌀 한가마(80kg)에 3,000원 정도 했다.
땡볕에 여자들이 밭 매주고 받아오는 품삯이 보리쌀 한 바가지(2리터)였으니 송이공장 벌이는
괜찮은 편이었다.나중에는 신성포에서 양식한 굴을 가져다가 동네 아주머니들을 죄다 불러
굴을 까게 하여 통조림을 만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저임금의 덕을 본 것은 사장이었겠지만 고용을 창출하였고 수출로 외화를
벌어들였으니 계양식품주식회사 사장님은 애국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주민들이 일자리를 얻은 대신 치뤄야할 댓가도 있었다.
공장 폐수로 조례저수지에서 내려온 냇물은 공장 이후부터 오염되어 우리들의 놀이터 장자불에서
조차 목욕을 하지 못했고 그 많던 붕어,뱀장어,메기도 사라졌고 미꾸라지만 간혹 뱀장어만큼
큰 것들이 있었다.
우리집 앞에 기와공장, 아랫쪽에 벽돌공장이 있어 말구루마를 끌며 먹고 사는 마부들이 많았다.
우리 동창 김중태 아버지도 마부셨고 운동 들어가기전 산밑에 윤씨도 마부였다.
뒷산 쪽 밭에서는 황토를 파 벽돌공장으로 싣고 가는
구루마가 많았고 우리가 학교 다니던 길에는 주로 논에서
진흙을 파 기와공장으로 싣고 가는 말구루마가 많았다.
가끔은 느림보 황소가 끄는 수례에 순천시내
재래식 화장실을 퍼담은 똥장군을 가득 싣고 가는
소구루마도 있었는데 소구루마 바퀴는 말구루마 바퀴보다 좀 컷다.상업용 구루마는 주로 속도가 빠른 말구루마가
많았는데 우리는 가끔 짐을 실은 구루마 뒤에 몰래 달려
걷지않는 행복을 누려도 봤지만 이내 마부에게 들켜
말부리는 채찍으로 한대씩 맞곤 했다.
말부리는 채찍은 대뿌리를 잘 손질하여 끝에다 폐타이어로
만든 두꺼운 고무줄을 동여맨 것이 주로 사용되었기에
잘못 맞으면 무지 아팠다.
당시 아버지들은 얘들을 위하는 개념이나 준법 정신이
희박했기에 자기애든 남의 애든 별 의식없이 매질을했고
또 급할 때면 시청에서 가로수로 심어놓은 묘목을 뚝 분질러 말채로 사용하기도 했으니
매년 시청에서는 가로수 심기 바빴다.
웬만한 것들은 고사리 손이지만 우리들이 몸소 다 했다.
장마로 큰 비가 오면 선생님이 직접 우리들을 안전하게 하교시켜주셨다
신작로는 장마철이 지나면 바닥이 패이고 도랑이 생기고 하여 봄 가을로 일명’땅파는 차’
본명 페이로다가 지나가면서 땅을 골라준다.그러면 길가에 있는 우리집에는 다른 때보다
먼지가 배 이상으로 날아 들어오기에 틈만 나면 길옆 도랑을 막아 물을 도로에 뿌렸다.
한여름에는 아랫쪽부터 물을 뿌리고 윗쪽으로 가면 작업이 끝나기도 전에 아랫쪽 도로는
말라버린다.어릴적에는 나라가 가난하여그런 쓸데없는(?) 노동을 참 많이 한 것같다.
비포장 도로는 페이로다의 땅고름 만으로 운행하기가 원할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 덤프트럭이 자갈을 싣고와 부으면 인부들이 삽으로 골라 준다.
겨울에는 등하교길에 도로변 논둑에다 불을 피우면서 쬐고 다녔다.
운이 좋은 날엔 논둑 무너지지 말라고 밖아 둔 말목을 빼서 모닥불을 피워 돌을 달궈서 주머니에
넣고 가면 손이 덜 시렸다.또 가끔은 도로아래 논둑에서 불피우는데 정신을 쏟고 있을 때
지나가는 차 타이어 탄력에 의해 튕겨져 나온 돌에 머리를 맞는 경우도 있었는데 아프기는 하고
원망스런 차는 아랑곳하지않고 저만치 가버렸고 정말 황당하고 환장한다.
지금은 광양 가는 도로와 여수 가는 도로 굴다리로 가장 번화가가 됐지만 그곳에는‘
똥산이라 부르는 나즈막한 야산이 있었고 조례저수지에서 흘러온 냇물과 상삼 대석쪽에서
흘러온 냇물이 만나 양송이 공장 쪽으로 하나되어 흘러가는 냇물 삼거리에
‘댐배다리’가 있었다.똥산을 좀 유식하게 부른다며 순 우리말인 똥뫼라 하여 ‘똥뫼다리’라고도
불렀다.
나중에 똥산으로 연결되는 다리를 건설하여 해촌뜰에 농토를 가진 사람들에게 편익을 제공했고
우리들에게는 뱀도 많고 문둥이들이 애들 잡아다가 그곳에서 간 빼먹는다는 소문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었던 똥산을 탐험(?)할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소문대로 뱀은 무척 많았다.
똥뫼다리에서부터 조례학교를 지나 연동 돌아가는 곳까지 신작로 양쪽에는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가로수를 이루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 하교길에는 하늘거리는 이파리,바람에 일렁이는 가지,시끄럽게 우는
매미소리가 배고픈 하교길 발걸음을 더디게 했다.
무궁화꽃나무가 양쪽으로 빽빽한 조례국민학교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면 타원형 아치 아래
정문이 있었고 오른쪽엔 사택이 있었다.측백나무 울타리 안에는 방석우 교장선생님의 교육에 대한 꿈과 열정을 실현하는 아담한 학교가 있었고 정문 들어서자 오른쪽에는 씨름을 할 수 있는
원형의 모래밭이 있었다.
조회 시간에는 동쪽에 개간한 밭을 고라니가 뛰어갔고 중간놀이 시간에는 커다란 매가
그 산에서 영역다툼을 하는지 사랑놀음을 하는지 퍼덕이던 것을 본 기억이 생각 난다.
이른 봄날 야외 사생대회때에 그 산으로 올라가 순천실고 강당과 수양버드나무를 그려 입선한
기억이 있다.4학년이 되면서부터 눈 내리는 겨울에는 그 산으로 토끼몰이도 갔었다.
그 능선을 넘어가면 빨간 벽돌집의 화장터가 있어서 연동 부락 하면 화장터가연상된다.
그 때는 왜 그리 죽음과 귀신이 두려웠던지~~
우리들 중간놀이시간과 비슷한 놀이라서 올렸네
내가 묘사하지 못한 두지,조례 현남,왕지등 윗쪽에 사는 얘들은 그 산아래로 나 있는 도랑의
뚝길을 따라 등,하교를 했다.
학교 뒤 울타리에서 좀 더 가면 커다란 상수리 나무가 몇 그루 있었다.
윗동네 사는 얘들은 그곳에서 상수리를 주워와 면도칼로 반듯이 자른 다음 책상바닥에 문질러
수평면을 만들고 그곳에다 도장을 판다.거울에 보이는 글씨처럼 거꾸로
파는데 나중엔 그 상수리 껍질이 도장의 원형 테두리로 찍혀 훌륭한 도장이 되었다.
미술적 가치가 있는 조각놀이 아니었던가!!
그곳을 좀 더 지나가면 복숭아 밭이 조례마을 앞산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산길은 빨간 황토길로
멀리서도 보였다.복숭아 밭에 꽃이 피면 온 산이 핑크빛으로 물들어 정말 말 그대로 무릉도원이
되었다.여름에는 넘어가야 할 산 길을 보면 즈례 힘이 빠졌다.하지만 저 길로 수많은 학생들이
책보자기를 들고 딸각거리는 빈 도시락 소리를 장단삼아 뛰어 다녔을 것이다.
지금은 그곳에 순천병원이 들어선 것 같았다.산길을 넘지 않으려면 조례저수지쪽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었는데 그 쪽에도 외딴 집 한 채가 있었다,
당시에는 책가방이 없어서 모두 이렇게 책보자기를 허리에 매고 다녔다.남자들은 어깨에 맸다.
지금 생각하면 수리조합 농업용수로에 물이 가득 흐르면 꽤 깊었는데 어린 꼬마들이 사고없이
무사히 다닌 것을 보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인간이라지만 참 대견스럽다.
그 때는 거의 모든 것을 우리가 스스로 해결했던 것같다.토끼장을 만들어 토끼도 키워보고
방패연도 직접 만들었고,겨울에 타는 스케이트도 우리가 직접 만들었다.
학교에서 유리창을 닦을 때도 창틀로 올라가 걸터앉은 채로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닦았던 생각이
난다.지금 학부모들이 본다면 아마 기겁을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