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씀)
"우리 새우 매운탕 먹으러
조치원에 내려 갈 거야
세수도 하지 말고 그냥 와 알았지?"
아침에 걸려 온 동창 전화에
이것저것 생각하면 여의치 않았지만
그런다고 대답해 버렸다
말도 잘 들어 시키는 대로
세수도 안 하고
양치질만 하고는 모두 모여있는 친구 집으로 갔다
일당들은 모두 8명이었다
중년이지만 만났다 하면
여중생 수준의 정신 상태로 된다
그래서 좋다!
그녀들과는 유치원부터
초·중·고까지 쭉 동창인
허물없는 친구들이다
보통 때처럼 화장한 얼굴이 아닌
서로의 민낯은
어릴 때의 민얼굴과 달라서
아무리 죽마고우라도
자세히 보려면 멋쩍다
그러니 나이 지긋한 여자들이
민얼굴 나서는 건
예의가 아니라 하지
화장 안 하니까 어려 보인다며
짐짓 서로 아닌 척 위로했지만
세수 안 하고 온 것을 나는 곧 바로 후회했다
약속을 깨고
배신자 J 친구는
곱게 화장한 것은 기본이고
헤어 롤까지 단정히 말아
풀기만 하면
우아함 그 자체가 될 것 같고
봉돗각시 처럼 뽀얗게 화장을 마친
또 한 명의 배신자 M 친구도
안방에서 신부처럼 등장한다
여자라면 그래야 하는데
교통사고로 들것에 실려 가면서도
콤팩트 꺼내 얼굴 점검한 후
다시 쓰러지는 게 여자라잖아
가정이라는 소속에 매인 몸
주부 직책의 본분도 모른 체 하고서
걱정 하나 없는 2학년 3반
아이들처럼 되어
우리는 두 대의 차로
고속도로를 달려 고향으로 내려갔다
스케즐은 새 아파트에 입주한
고향 세종시 친구 집에서
떡 만두국으로 점심을 하고
저녁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고복저수지로 가서
새우 매운탕 먹을 예정이라고 했다
두어 시간 걸려 도착한
세종시 친구네는
집주인의 정성 어린 손길이 닿은
잘 꾸며진 넓은 신축 아파트였다
바로 도우미 아줌마가 준비한
만둣국이 차려졌다
공평하게 누구도
애쓰지 않고 앉아서
차려 주는 식사를 하는 건 좋았는데
문제는 집이 오슬오슬 한기가 느껴지면서 추웠다
시간이 갈수록 더 추워지고 있었다
집 주인에게 춥다고 하소연하니
우리들 온다고 미리 환기하느라
한동안 문을 열어 놔둬서 그렇다나
하지만 문 닫고 기다려 봐도
냉기는 매한가지였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마음껏
시시덕거리고 놀고 싶은데
이방인인 도우미
아줌마 눈치가 보여
거실에서 슬그머니
안방으로 피신해 갔다
혹시 거긴 덜 추울까
생각도 하면서
그러나 기대와 달리 안방도
별반 다르지 않았고
온기라곤 전혀 없는 냉골이라
허물없는 친구 집이라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네 명은 슬슬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이불까지 덮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원 초과에 만원인 침대에도
미처 못 올라간
친구들은 추위에 떨어야 했다
아무래도 안되겠어서
온도 조절기를 찾아 살펴보았더니
난방이 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집 주인도 작동법을 아직 터득하지 못했고
여자들은 많지만 하나같이 구식에다 기계치들이라
온도 조절기는 그저 바라만 볼 뿐 무용지물이었다
주인이 궁리 끝에 추리해 낸
집이 추운 이유는
자기 집이 2층인데
1층이 아직 미입주 상태라
비어 있어서 추운 거라나?
그 말에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며
''그럼 명절이나 휴가에
아래층 집 비울 때마다 이렇게 춥겠네.?''
진지하게 만담들도 잘해요
고가의 가구로 화려하게 장식한
대형 아파트라도
추우니까 소용없었다
무조건 따스한 집이 그리웠다
다툼이 있는 큰 집보다
화목한 방 한 칸이 좋고
대궐 같은 집이라도 춥다면
작고 따뜻한 집이 더 낫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몸소
체험하고 다닌다
마침 근처에 집이 있는 친구가
자기네 집은 따뜻하다며
우리를 그리로 데려가 준다
훈훈한 집에서 언 몸을 녹이니
살 것 같았다
새우 매운탕이고 뭐고
따스함이 너무나 포근하고 감사해
그깟 것 안 먹어도 괜찮을 정도였다
모름지기 고생할 수록 감사함도 진해지는 법
수제비 넣어 끓인 새우 매운탕은
내 어릴 적 맛과 여전해서
아련한 향수를 부르는데
언젠가 마트에서 사 온 바다 새우로
매운탕을 끓였더니 민물 새우와는 사뭇 달랐다
몸통도 수염도 어찌나 억세던지
입안을 찔러 먹기가 고약했다
석양으로 물들어 가는 시간이 되자
멀리 나들이 떠나온 우리는
회귀본능이 발동
해 떨어져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가고 싶어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끙끙
새우탕은 안 먹어도 좋으니
인제 그만 집에 가자는
의견에 기다렸다는 듯이
만장일치로 찬성!
수분이 말라 쪼글쪼글한
사과를 닮아가는
탄력 잃어가는 나와 친구 얼굴이
거울 보듯 서로 낯설고 애잔해
잠깐 세월이 야속도 했지만
왕복 네시간을 달려간 고향에서
딱히 한 일도 없이
친구들과 함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철부지 아이들처럼 웃고 떠들다
정작 목적이었던 새우 매운탕은
구경도 못한
우리들의 정신나간 일탈이
어찌나 유쾌했는지
혼이 나가 시름을 깜빡 잊고
그곳 고향에 두고 왔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