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지시에도 부처간 의견조율 못한채 허송세월 재계는 상법 개정 전 M&A와 기업 분할로 지배구조 변경 활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8일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자산운용사 CEO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금융감독원]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21일 여의도 본원에서 상법 분야 학계 전문가를 초청한 자리에서 "회사와 주주 이익이 동일하며 (이사) 충실의무 대상인 '회사'에 주주 이익이 포함돼 있다는 견해가 상법학계 다수"라고 의견을 피력하면서 이사의 충실의무 논란이 뜨거워질 전망이다.
이 금감원장은 지배주주의 낮은 지분율이나 주주환원 미흡, 일반주주 주식가치 침해 등으로 밸류업에 역행하는 흐름이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에 주주를 포함하는 상법 개정 방향 및 기업지배구조 개선 방안 등에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 금감원장은 일부 회사들의 불공정 합병, 물적분할 후 상장 등 일반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는 사례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기업들의 철저한 인식 전환을 위해 개별적 규제 방식보다 원칙 중심의 근원적 개선방안을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금감원장의 발언은 일반주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근원적 개선방안으로 상법 개정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 금감원장은 금감원이 상법 개정안 논의에 중심에 선 게 적절하느냐에 대해서는 "상법 관련 사항이기는 하지만 투자자 및 자본시장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자본시장 감독기관인 금융감독원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피력했다.
상법 개정이 추진되고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의 이익이 명시화되면 기업들은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로 일반주주들과의 마찰이 확대되고 일반주주 이익이 침해됐을 경우 기업들이 소송 당할 확률이 훨씬 높아진다.
이 금감원장이 지적한 불공정 합병이나 물적분할 후 상장은 일반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는 대표적이 사례로 기업들이 곧바로 소송 위험에 노출되게 된다. 재계에서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에 강한 톤으로 반대 의견을 펴는 것도 이같은 연유다.
증권가에서는 이사의 충실의무가 일반주주의 이익으로 확대되면 기업들의 물적분할은 사실상 어려워질 것으로 보고 있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은 각각 이차전지 회사인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을 물적분할 하면서 이들 회사의 지분을 100% 가져간 사례가 있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이차전지 회사를 인적분할 했으면 대주주와 일반주주는 지분별로 똑같이 신설회사의 주식을 받게 되고 일반주주의 이익 침해 논란에서 비껴갈 수 있다.
[사진=금융감독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월 9일 주재한 제1차 경제이슈점검회의에서 기업 밸류업 지원 방안과 관련해 “투자자들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방안을 신속히 마련해 달라”고 지시했고 정부는 후속조치로 상법 개정 등 지배구조 개선 방안 마련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4개월여 지난 지금까지도 상법 개정 등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되어 있는 않은 상황이다.
경제개혁연대는 윤 대통령의 지시를 계기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뿐 아니라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 작업이 반드시 추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행 상법 382조의3항에서는 이사의 의무로서 법령과 정관의 규정에 따라 회사를 위하여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그 결과 삼성물산 부당합병, 쪼개기 상장 등의 사례에서 일반주주의 이익이 침해되더라도 회사의 이익이 침해되지 않는다면 해당 의사결정을 한 이사에게는 아무런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이다고 지적했.
미국, 영국 등 주요국은 법령 또는 판례법으로 주주의 이사에 대한 충실의무(duty of royalty)를 인정하고 있고 OECD 가이드라인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우리와 법조문이 같지만 해석론으로 자본거래의 경우 이사의 주주에 대한 의무를 인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은 올해 초 “이사회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액주주의 이익을 책임 있게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상법 개정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혀 상법 이사의 충실의무 조문 개정으로 해석됐지만 보름 후 법무부 측은 “주주 보호의 취지에는 적극적으로 공감하지만 이런 규정이 생기더라도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의미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윤 대통령이 상법 개정을 지시하더라도 법무부가 상법 개정을 하지 않으면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가 없기 때문에 회사의 이익만을 추구하면 되고 일반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해도 책임을 지거나 배상 의무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현실적으로 회사의 이익과 총주주의 이익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며 법원은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별개로 구분하고 이중 이사의 책임은 회사의 이익 침해에 한정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어 상법 개정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상법 개정을 역설하고 있지만 현실은 주무부서인 법무부가 상법 개정에 반대하는 분위기여서 당장은 상법 개정이 실현되기 어려운 형국이다.
그러나 정부 부처내에서 상법 개정에 대한 의견을 조율해 통일된 의견을 마련하고 윤 대통령이 강하게 밀어붙이면 22대 국회에서 상법 개정안이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야당도 일반 주주의 이익을 강화하는 상법 개정안에 동조하고 있는 모습이다.
현실은 금감원장의 상법 개정 의견 피력에도 불구하고 부처간 불협화음, 국회내 여야 정쟁 등으로 상법 개정이 과연 추진될 수 있을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재계에서 최근 기업간 합병이나 기업 분할 등 지배구조 변경을 서두르고 있는 것도 상법 개정 후에는 오너가에 유리한 지배구조 변화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상법 개정 전 최대한 유리한 지배구조를 구축하겠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