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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윤명(玄允明) | 현구(玄球) | 현덕형(玄德亨) |
1女: 윤변(尹忭, 1493∼1549) 1519년 생원 1522년 문과 해평윤씨 | 윤두수(尹斗壽, 1533~1601) 1555년 생원, 1558년 문과, 영의정,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 시호: 문정(文靖) | |
윤근수(尹根壽, 1537∼1616) 1558년 문과, 좌찬성,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시호: 문정(文貞) | ||
2女: 안중관(安重寬, 1524~1605) 죽산안씨(신) | 안방선(安邦善, 1543~1588) |
2. 진원박씨(珍原朴氏) 박이경(朴而儆)의 따님과 혼인하여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이고 2명의 사위는 이근(李根)과 송격수(宋格壽)이다.
朴煕中 1393생원 1401문과 | 朴暉生 | 朴文基 | 朴繼原 | 朴囷 1513진사 | 朴而儆 | 朴光雲 | ||
女:안중관(安重寬) 1524~1605 죽산안씨(신) | 안방준(安邦俊) 1573∼1654 시호:문강(文康) | |||||||
朴胤原 1496생원 | 朴衎 | 朴而誼 1534진사 | 박광전(朴光前) 1526∼1597 1568년 진사 시호: 문강(文康) | 朴根孝 1591 진사 | 朴春秀 1627진사 | |||
朴春長 1646진사 | ||||||||
朴根悌 | ||||||||
朴進生 | 朴摯 1480진사 | |||||||
朴恕 1501생진 | 朴元恂 1546생원 | 朴宣哲 1610생원 | ||||||
朴濬哲 1605생원 | 朴用輝 | 朴慶茂 | ||||||
朴坤生 | 朴謹之 | 朴昌柱 | 朴漢忠 | 朴元孝 | 朴承宗 1584무과 |
3. 7번쨰 사위 김원(金院)은 측실 소생일 수도 있겠다.
안중관(安重寬, 1524~1605) 죽산안씨(신) | 1子:안방선(安邦善, 1543~1588) | ||
2子:안방준(安邦俊, 1573∼1654) 시호: 문강(文康) | |||
1女: 남언강(南彦絳) - 宜寧人 | |||
2女: 신중경(愼重慶) - 居昌人 子諸 | |||
3女: 박종정(朴宗挺, 1555∼1597) 1576년 진사 함양박씨(咸陽朴氏) | 女:이정발(李廷發) 예안이씨(禮安李氏) | 이유량(李惟樑) - 1657년 생원 | |
이유강(李惟橿) - 1652년 생원 | |||
이유장(李惟樟, 1625∼1701) 1660년 진사 | |||
4女: 이영남(李英男) 광주이씨(廣州李氏) | |||
5女: 이근(李根)=이근(李勤) 전의인(全義人) 주부(主簿) 1606년 무과 | 女:최계헌(崔繼憲) 1590~1643 해주인(海州人) | ||
6女: 송격(宋格) 신평인(新平人) 송기원(宋起源)의 아들 | 송지희(宋之熺) | 송득규(宋得奎) | |
女:홍종문(洪鍾聞) 풍산인(豊山人). 1657년 문과 | |||
7女:김원(金院) |
《죽산안씨족보》(1935)에 안중관(安重寬)의 6번째 사위로 송격(宋格)이 나오고, 1829년 간행된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문집 《이재유고(頤齋遺藁)》권18에 그의 증손자 송호석(宋瑚錫, 1693~1756)의 행장[蒙窩處士宋公行狀丁酉 a_246_410a]을 보면, “曾祖考諱格壽爵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妣貞夫人竹山安氏。僉知中樞府事重寬女。參議牛山邦俊妹。”라는 기록이 있음.
윤변(尹忭, 1493∼1549)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구부(懼夫), 호는 지족암(知足庵). 윤연령(尹延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계정(尹繼丁)이고, 아버지는 부사용(副司勇) 윤희림(尹希琳)이며, 어머니는 수안군수 박준산(朴峻山)의 딸이다.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아버지이다. 12세에 고아가 되어 처음에는 유운(柳雲)에게 수학하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 되었다. 1519년(중종 14)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이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투옥되자 성균관유생들과 함께 그의 무죄를 호소하였다. 152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때 그를 기묘당인(己卯黨人)이라 하여 배격하는 자가 있었으나 성균관학유가 되었다. 그 뒤 봉상시참봉·의정부사록을 거쳐 1526년 사헌부감찰·호조좌랑에 임명되고, 이듬해 해남현감·충청도사에 이어 형조정랑·사복시부정·군자감정을 거쳐 1544년 삼척부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지족암집』 1책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윤두수(尹斗壽, 1533∼1601)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앙(子昂), 호는 오음(梧陰). 윤계정(尹繼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희림(尹希琳)이고, 아버지는 군자감정 윤변(尹忭)이며, 어머니는 부사직(副司直) 현윤명(玄允明)의 딸이다. 윤근수(尹根壽)의 형이다. 이중호(李仲虎)·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55년(명종 10)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1558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간 다음, 검열(檢閱)·정자(正字)·저작(著作)을 역임하였다. 1563년 이조정랑에 재임 중 권신(權臣) 이량(李樑)이 그의 아들 정빈(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한 것을 박소립(朴素立)·기대승(奇大升) 등과 함께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 그러나, 그 해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우의정 심통원(沈通源)의 계문(啓文 : 왕에게 일정한 양식을 갖추어 올리는 양식의 글)으로 무죄임이 밝혀져 수찬에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그 뒤 이조정랑·의정부검상·사인·사헌부장령·성균관사성·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지내고, 1565년문정왕후(文定王后)의 천거로 부응교에 임용된 뒤 동부승지·우승지를 거쳐 1576년(선조 9) 대사간에 이르렀다.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도승지가 되었으나, 이종동생 이수(李銖)의 옥사에 연좌, 아우 근수와 함께 파직되었으며, 대사간 김계휘(金繼輝)의 주청으로 복직되어 연안부사로 나갔다. 1581년 황해감사의 서장(書狀)에 의해 재령군수 최립(崔岦) 등과 함께 구황(救荒)을 잘했다 하여 옷 한 벌이 하사되었다. 이 후 한성좌윤·오위부총관·형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1587년 왜구가 전라도 지방을 침범해 지역 인심이 흉흉해지자,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해 수사·수령의 기강 쇄신과 범죄자 처벌에 노력하였다. 1589년 평안감사를 지내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종계(宗系 : 명나라 ≪태조실록≫과≪대명회전≫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를 변무(辨誣 : 잘못된 것을 바로 잡도록 함)한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이 되어 해원군(海原君)에 봉해졌다. 그 뒤 대사헌·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591년 5월 석강(夕講)에서 도요토미(農臣秀吉)의 답서를 명나라에 알려 진상을 보고할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 병조판서 황정욱(黃廷彧)과 함께 보고할 것을 주장하다가 양사의 합계(合啓)로 정철(鄭澈)에게 당부(黨附)했다 하여 파면되었다. 그리고 건저문제(建儲問題 : 세자 책봉의 문제)로 정철이 화를 당할 때 같은 서인으로 연루되어 회령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 뒤 그의 견해가 타당성이 있음을 안 선조는 공을 인정하는 뜻에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다시 기용되어, 어영대장·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 해 평양 행재소(行在所)에 임진강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는 주장에 반대하고 우리의 힘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해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함께 평양성을 지켰다. 이듬해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를 겸했으며, 1595년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난국을 수습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이 되고 영의정에 올랐으나, 대간의 계속되는 탄핵으로 사직하고 남파(南坡)에 물러났다. 1605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다. 평소 온화하고 화평했으나, 큰 일을 당했을 때에는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정유재란의 국가적 위기 때에는 적극적으로 극복에 나섰다. 저서로는 ≪오음유고≫·≪기자지 箕子誌≫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윤근수(尹根壽, 1537∼1616)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 장원(掌苑) 윤계정(尹繼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용(司勇) 윤희림(尹希琳)이고, 아버지는 군자감정(軍資監正) 윤변(尹忭)이며, 어머니는 부사직(副司直) 현윤명(玄允明)의 딸이다.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동생이다. 김덕수(金德秀)·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58년(명종 1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용된 뒤 승정원주서·춘추관기사관·연천군수 등을 거쳐 1562년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 때 기묘사화로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을 청했다가 과천현감으로 체직되었다. 이듬 해 8월 행신(倖臣) 이량(李樑)이 그의 아들 이정빈(李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하자 형 윤두수, 박소립(朴素立), 기대승(奇大升) 등이 반대하였다. 이로 인해 이량의 사주를 받은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 해 9월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우의정 심통원(沈通源)의 계문(啓文 : 왕에게 일정한 양식을 갖추어 올리는 글)으로 죄가 없음이 밝혀져 승문원 검교에 서용되었으나, 형 윤두수가 이조전랑이어서 취임하지 않았다. 1565년 홍문관부교리로 다시 기용된 뒤 이조좌랑·정랑(正郎) 등을 차례로 지내고, 이듬해 의정부사인·지제교 겸 교서관교리(知製敎兼校書館校理)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검상·사인·장령·집의·사예·부응교 등을 역임했으며, 1572년(선조 5) 동부승지를 거쳐 대사성에 승진, 이듬 해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 : 명나라 ≪태조실록≫과≪대명회전≫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하도록 요청한 일)를 하였다. 그 뒤 경상도감사·부제학·개경유수·공조참판 등을 거쳐 158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으며, 귀국할 때 ≪대명회전전서 大明會典全書≫를 가져왔다.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591년 우찬성으로 정철(鄭澈)이 건저(建儲 : 세자 책봉) 문제로 화를 입자, 그가 정철에게 당부했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형 윤두수와 함께 삭탈관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문안사(問安使)·원접사(遠接使)·주청사 등으로 여러 차례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국난 극복에 노력하였다. 그 뒤 판중추부사를 거쳐 좌찬성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했고,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다. 1606년 선조가 죽자 왕의 묘호를 조(祖)로 할 것을 주장해 실현시켰다. 청백간손(淸白簡遜)하고 문장이 고아하며 필법이 주경(遒勁 : 그림이나 글씨 등에서 붓의 힘이 굳셈)해 예원(藝苑)의 종장(宗匠)이라 일컬어졌다 한다. 저서로는 ≪사서토석 四書吐釋≫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박광전(朴光前, 1526∼1597) :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진원(珍原). 자는 현재(顯哉), 호는 죽천(竹川). 할아버지는 선교랑 박간(朴衎)이고, 아버지는 진사 박이의(朴而誼)이며, 어머니는 습득 최명기(崔命夔)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1568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유희춘(柳希春)이 감사(監司)였을 때 천거되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이 되었고, 다시 헌릉참봉(獻陵參奉)으로 옮겼으나 곧 그만두었다. 1581년 왕자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함열(咸悅)·회덕(懷德) 현감을 역임하였으나 상관의 뜻을 거슬려 파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계영(任啓英)·김익복(金益福)·문위세(文緯世) 등과 보성(寶城)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정병 700여명을 모집하고, 문인 안방준(安邦俊)을 종사(從事)로 삼고 장자인 근효(根孝)를 참모로 삼았으나, 병으로 의병을 통솔할 수 없자 임계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1597년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 적이 호남을 침범하자, 전 판관(判官) 송홍렬(宋弘烈), 생원 박사길(朴士吉) 등에게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이 되었다. 동복(同福)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으나 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보성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박종정(朴宗挺, 1555∼1597) :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응선(應善), 호는 난계(蘭溪). 부친은 해남훈도(海南訓導) 계공랑(啓功郞) 박인(朴訒)이다. 6살 때, 벽에 걸어놓은 호랑이 그림을 보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한 걸음도 뗄 수가 없구나![一物無所見 一步無得行]”라 할 정도로, 자질이 총명하고 늠름하였다. 1576년(선조 9)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21위로 합격하였다. 뜻을 더해 열심히 책을 읽었으나 타고난 체력이 약해 과거를 단념하고 양생하는데 힘썼다. 산수를 좋아하여 난계정사(蘭溪精舍)를 세웠다. 1589년(선조 22)에 기축옥사(己丑獄死)가 일어났을 때, 정철(鄭澈)의 사주를 받은 양천회(梁千會)가 호남의 유생을 모아 정여립(鄭汝立) 등 이발(李潑) 형제를 모함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동참해줄 것을 요구하자, 형 박천정(朴天挺)은 동참하였으나, 그는 동인(東人)이 동인을 치는 것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이발 형제와의 친분 때문으로도 참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동지들과 적병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조목조목 진달하여, 조정으로부터 장원서별제(掌苑署別諸)를 제수 받았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왜구가 호남을 침범하였을 때, 아버지를 모시고 영암(靈巖)으로 가던 중 왜구와 맞닥뜨리자, 아버지를 온몸으로 감싸 안은 채 왜구의 무수한 창을 몸으로 막다가, 아버지와 함께 죽었다.
최계헌(崔繼憲, 1590~1643) : 조선 후기 화순 출신의 의병.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백술(伯述), 호는 석문(石門).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최경장(崔慶長)이고, 아버지는 통덕랑 최홍유(崔弘有)이다. 어머니는 진원 박씨 박근효(朴根孝)의 딸이고 부인은 전의이씨(全義李氏) 이근(李勤)의 딸이다. 화순 출신으로, 재주가 남달랐고,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병자호란 때 의병을 규합하고 안방준(安邦俊)의 의병소로 들어갔다. 이에 안공이 저지하며 이르길, “그대는 형제가 없고 또한 관직에 있는 몸이 아니니 반드시 의병으로 나서야 할 까닭이 없다”라고 하였으나 개의치 않고 전략을 돕고 병기를 수선하는 일을 맡았다. 이민신(李敏臣)·박춘장(朴春長) 등 여러 의사들과 함께 군량을 모집하여 군수를 도왔다. 그리고 여산까지 이르렀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와 세상사를 멀리하고 보성의 석문(石門)에 은거하였다. 최계헌이 현인들과 벗하며 살자 사람들이 고사(高士) 5인이라 하였으며, 죽은 후에 향인들이 사우를 세워 제향하였다. 『산양지(山陽誌)』에 최계헌의 성품에 대해 칭찬한 내용이 있다.
박춘장(朴春長, 1595∼1664) : 본관은 진원(珍原). 자는 언승(彦承), 호는 동계(東溪). 부친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으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된 만포(晩圃) 박근효(朴根孝)이고, 병자호란 때 의병활동을 한 찰방(察訪) 박춘수(朴春秀)가 형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형의 명령을 받고 조카 박진형(朴震亨)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여산(礪山)에 이르렀으나,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분개하여 낙향했다. 1646년(인조 24) 병술(丙戌)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10위로 합격하였다. 낙향한 뒤로 후학 양성과 저술에 힘썼다. 저서로 『산양지(山陽誌)』와 『동계집(東溪集)』이 있으며, 진원박씨(珍原朴氏) 최초의 족보 『정유보(丁酉譜)』를 만들었다. 정길(鄭吉)‧임선(任善)‧최계헌(崔繼憲)‧김선(金銑)‧이무신(李懋臣) 등과 학문과 행의로 알려져 6현(六賢)이라고 일컬어졌고, 후에 사림들이 육현사(六賢祠)를 지어 제향하였다.
이유장(李惟樟, 1625∼1701)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하경(夏卿), 호는 마애(磨崖)‧나암(懶庵)‧우원(芋園)‧우포(芋圃)‧사익당(四益堂). 조부는 주부(主簿) 이진(李珍)이고, 부친은 통덕랑(通德郞) 이정발(李廷發)이다. 안동부(安東府) 풍현(豊縣)에서 태어났다. 1657년(효종 8) 재재(在齋) 이휘일(李徽逸)이 내방(來訪)하여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강론하고 수창(酬昌)했다. 1660년(현종 1) 경자식년사마시(庚子式年司馬試)에 진사(進士) 3등으로 합격하였다. 1667년(현종 8)에 대도솔촌(大兜率村)에 우거(寓居)하였다. 1689년(숙종 15)에 대신(大臣)이 행고학우(行高學優) 천이독실(踐履篤實)로 천거하였다. 6품계에 올라 와서별제(瓦署別提)와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669년(현종 10)에 모친상을 당한 후, 두문불출하였다. 이후 강학(講學)에 전면하면서 『주역(周易)』‧『춘추전(春秋傳)』 등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특히 주자(朱子)와 퇴계(退溪) 선생의 예설(禮說)을 절충하여 독자적인 이론 체계를 구축하였다. 한편 이론을 분류, 수편(手編)하여 「이선생예설(二先生禮說)」을 만들었고, 우리나라 역사책을 산절(删節)하고 요약 한 뒤에 자기의 의견을 곁들어 『동사절요(東史節要)』를 만들었다. 1691년(숙종 17)에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제수되었으나 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 해 겨울 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으로 제수되었지만 입직(入直)한지 7일만에 하향(下鄕)하였다. 1694년(숙종 20) 이조판서(吏曹判書) 이현일(李玄逸)이 하향(下鄕)하면서 이유장을 영남(嶺南)의 노성(老成)한 숙덕(宿德)으로 천거했다. 1701년(숙종 27) 5월 14일에 사망하였다. 묘는 경상북도 안동(安東) 풍산현(豊山縣) 북쪽 현공산(懸空山) 용감동(龍甘洞)에 있다. 1729년(영조 5) 동향(同鄕)의 인사들이 안동에 낙빈정사(洛濱精舍)을 세워 향사하였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남아있는 문집으로 『고산집(孤山集)』이 있는데, 이유장의 증손 이홍진(李弘辰)이 간행하였고, 원집(原集) 8권, 부록(附錄) 2권으로 모두 5책으로 구성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