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정집(霽亭集)》의 편찬과 간행
《제정집》은 고려 말에 활동한 유학자이자 문신 이달충(李達衷, 1309~1385)의 시문집(詩文集)이다. 이달충의 문집은 조선 세종 때에 손자인 강원 도사(江原都事) 이영상(李寧商)에 의하여 춘천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이영상은 이달충의 셋째 아들인 이수(李䇕)의 아들로, 《세종실록》에 사헌부 지평, 호조 정랑, 사헌부 장령 등을 역임했다는 기사가 보이나 기타 자세한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이영상은 강원 도사라는 자신의 직위에 힘입어 춘천에서 문집을 간행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이달충열전(李達衷列傳)〉에 “공이 저술한 《제정집》이 세상에 간행되어 전해지고 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초간본은 당시에 널리 유전(流傳)된 듯하다. 그러나 현재 전하지 않아 그 전모를 알 수 없다. 다만 윤회(尹淮, 1380~1436)가 쓴 초간본 발문이 《동문선(東文選)》에 전하고 있어 대략적인 규모는 가늠해 볼 수 있다. 윤회는 발문의 말미에서 “영특함과 아름다움이 밖으로 드러나서 마치 쇠 종이나 옥경을 울리는 것과 같아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니, 참으로 덕이 있는 사람의 말이로다. 그러하니 굳이 많을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로 보면 초간본 편찬 당시에도 이달충의 시문이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계림세가(鷄林世家)》에 의거해 볼 때, 초간본 《제정집(霽亭集)》은 임진왜란 등의 전쟁을 거치면서 후손의 집에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산일되어 모두 없어진 듯하다. 후손 이덕배(李德培, 1598~?)는 《동문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청구풍아(靑丘風雅)》 등에서 이달충의 유문(遺文)을 찾아 편차하고 한 질을 수사(手寫)해 두고는 초간본 문집이 발견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1833(순조33)~1834년에 후손 이세욱(李世煜)과 이응소(李應韶)가 문집을 새롭게 간행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이벽수(李璧秀, 1801~?)에게 이덕배가 정사해 놓은 것을 개본(改本)ㆍ정사(淨寫)하게 하였다. 이에 이벽수는 종인(宗人) 이호신(李祜新)ㆍ이철신(李喆新) 형제와 함께 《동문선》, 《청구풍아》 등에서 추가로 이달충의 시문을 찾아 보완하고, 《계림세가》와 《고려사찬요(高麗史纂要)》 등의 책에서 이달충과 관련된 사적을 뽑아내어 부록으로 붙였다. 그리하여 판각에 들어간 지 3년 후인 1836년(헌종2) 태백산 부석사(浮石寺)에서 목판본 4권 1책으로 간행하였다. 현재 이 중간본은 고려대학교 만송문고(D1-A284B)에 소장되어 전하고 있다.
한편 1919년에 후손 이능호(李能頀)가 경북 영주(榮州)에서 이 중간본을 후쇄(後刷)한 것이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후쇄본에는 1918년에 장석영(張錫英)이 쓴 서문과 같은 해에 이능호가 쓴 발문이 덧붙여져 있는데, 장서각 소장본(D3B-552)의 간기에 ‘대정 8년(1919) 4월 15일 발행〔大正八年四月十五日發行〕’이라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19년에 간행된 것이 확실하다.
이후 1939년에는 이순영(李舜榮) 등이 강원도 원주(原州)에서 연활자본(鉛活字本) 4권 1책을 삼간(三刊)하였다. 권1~3은 중간본과 같은데, 다만 권4 부록에는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이 쓴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추가되어 있다. 또한 말미에는 1933년에 이순영이 쓴 발문이 있다.
1965년에는 후손 이재길(李宰吉) 등이 석인본(石印本) 2권 1책을 간행하였다. 기존 중간본과 삼간본의 권1ㆍ2를 권1로, 권3ㆍ4를 권2로 편집하였으며, 윤회의 초간본 발문과 이재길이 1965년에 쓴 발문을 수록하고, 중간본과 삼간본 《제정집》의 서문과 발문은 모두 제외하였다. 또 부록에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이 쓴 행장과 《동사찬요(東史簒要)》, 《동경잡기(東京雜記)》 등에 나오는 이달충 관련 기록도 빠져 있다. 반면에 백문보(白文寶, 1303~1374)의 《야은일고(壄隱逸稿)》 권4에 수록되어 전하는 이달충의 시 〈사전원수송왜주(謝田元帥送倭酒)〉1편과 곽종석이 지은 신도비명, 이색(李穡)ㆍ권근(權近)ㆍ이집(李集) 등이 이달충에게 준 시, 《동국통감(東國通鑑)》의 이달충 관련 기록 등이 추가되어 있다.
2. 《제정집》의 구성과 내용
본 번역서는 1836년(헌종2) 간행된 중간본 《제정집》 4권 1책을 대본(臺本)으로 하였다. 이벽수가 쓴 발문에 따르면 이인행(李仁行, 1758~1833)과 박시원(朴時源, 1764~1842)이 문집의 편차 및 교정을 맡았다. 문집의 편차는 조선 시대 일반적인 문집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권1은 시(詩), 권2ㆍ3은 문(文), 권4는 부록(附錄)이다. 그리고 권수에는 1832년(순조32) 이인행이 지은 서문과 목록이 실려 있으며, 권말에는 1836년에 박시원과 후손 이종재(李宗梓)ㆍ이벽수가 쓴 발문이 실려 있다. 권별로 수록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권1에는 2편의 부(賦)와 35제(題) 52수(首)의 시가 실려 있는데, 시는 오언시ㆍ칠언시의 순으로 편차하였으며 한거시(閑居詩)와 기행시(紀行詩)가 많은 편이다. 한거시의 대표작으로는 〈산촌잡영(山村雜詠)〉, 〈탄동(炭洞)의 새집에서〉, 〈우연히 짓다〉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주로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고 있을 때 지은 것이다. 기행시로는 〈총석정(叢石亭) 시에 차운하여〉, 〈삼척팔경(三陟八景)〉 등을 비롯하여 〈평해군(平海郡)〉, 〈만경루(萬景樓)〉, 〈명파역(明波驛)〉, 〈삼일포(三日浦)〉 등이 있다. 관동 지역을 여행할 때 지은 시들이 대부분인데, 〈평해군〉, 〈명파역〉 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뽑은 것으로 문집을 편찬할 때 지역의 명칭을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권2에는 표(表) 7편, 전(箋) 1편, 장(狀) 3편, 잠(箴) 2편, 명(銘) 1편이 실려 있다. 표는 1367년(공민왕16) 계림 부윤(鷄林府尹)에 임명되었을 때 사직을 청하는 글이 2편이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사직하는 글이 1편이다. 나머지 표는 원나라 황제의 생일과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글이다. 전 1편과 장 3편도 원나라 황실에 올린 글인데, 모두 어명에 따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잠 2편은 〈애오잠(愛惡箴)〉과 〈척약재잠(惕若齋箴)〉인데, 출처(出處)의 문제를 다룬 글이다. 〈애오잠〉은 공자가 “인(仁)한 사람이어야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에서 취의한 글인데, 좋아함과 미워함이 어지러울 때는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주제를 담고 있다. 〈척약재잠〉은 김구용(金九容, 1338~ 1384)의 서재에 붙인 글로 “나아갈 때에는 물러설 줄을 알고, 편안할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라고 하여, 난세에 대처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일직 손 정평공(孫靖平公) 홍량(洪亮) 이 하사받은 지팡이에 붙인 명문〉은 손홍량(孫洪亮, 1287~1379)이 공민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궤장(几杖)에 붙인 명문이다. 1362년(공민왕11)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공민왕이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安東))로 피난하자 손홍량은 중도에서 평복으로 왕을 맞아 치하를 받았고, 이후 1364년 왕으로부터 궤장과 자신의 초상화를 하사받았다.
권3에는 기(記) 1편, 서(序) 2편, 설(說) 1편, 발(跋) 1편, 제문(祭文) 2편, 묘지명(墓誌銘) 2편이 수록되어 있다. 〈전주(全州) 관풍루(觀風樓)에 부친 기문〉은 1371년 계림 부윤으로 있을 때 전주 목사 한계상(韓系祥)의 부탁을 받고 쓴 누정기이다. ‘관풍(觀風)’의 의미를 《주역》을 인용하여 해설하고 풍속을 잘 살펴 선정을 펼칠 것을 당부하였다. 말미에서 기(記)와 설(說)의 변별성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여기에서 고려 말 문인들의 한문 산문에 대한 장르 인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기 평장사(奇平章事)의 봉사록(奉使錄)에 붙인 서문〉은 1349년(충정왕1)경에 지은 것으로 고려 후기의 권신(權臣)인 기철(奇轍, ?~1356)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면서 지은 시 모음집에 붙인 서문이다. 여기에서 이달충(李達衷)은 ‘시라는 것은 뜻을 말하는 것이다.〔詩言志〕’라는 명제로 시작하여 시를 통해 지은이의 인품을 볼 수 있다는 전통적인 유가적 시론을 펼쳤다. 〈나 중정(羅中正)을 전별하며 쓴 시에 붙인 서문〉은 공민왕에게 발탁된 나흥유(羅興儒)를 축하하기 위해 조정의 문신들이 쓴 시권에 붙인 글이다. 〈동재설(動齋說)〉은 관동의 존무사(存撫使)로 가는 백문보가 시서(詩序)를 지어 달라고 하자 그 대신 써 준 글이다. 이 글에서 이달충은 주로 《주역》을 가져다가 ‘동(動)’의 의미를 설명하였으며, 말미에서는 《맹자》와 《대학》 등을 인용하였다. 백문보는 15세에 〈역학설(易學說)〉을 저술했을 정도로 당시 《주역》에 조예가 깊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동재설〉을 통해 고려 말 문인 지식인들의 《주역》 이해 수준을 엿볼 수 있다. 〈김 안렴(金按廉)의 시권(詩卷) 뒤에 제하다〉는 1373년(공민왕22)에 지은 것으로, 김구용이 관동의 안렴사로 나갔을 때 지은 시권에 붙인 발문이다. 〈민급암(閔及菴)을 애도하는 제문〉과 〈문온공 민공 묘지명(文溫公閔公墓誌銘)〉은 1359년(공민왕8)에 지은 것으로 민사평(閔思平, 1295~1359)을 기리는 제문과 묘지명이다. 〈재상 김경직(金敬直)의 부인을 애도하는 제문〉은 이달충이 김경직을 대신하여 지은 듯하다. 〈각진 국사 비명(覺眞國師碑銘)〉은 고려 말의 선승(禪僧)인 각진 국사 복구(復丘, 1270~1355)의 비명으로, 국사가 열반에 든 지 5년 뒤에 공민왕의 명에 따라 지은 것이다.
권4는 부록으로 1753년(영조29)에 이달충의 외(外) 13대손인 권상일이 지은 행장과 《고려사》 〈이달충열전〉을 비롯하여, 《경주이씨구보(慶州李氏舊譜)》, 《고려사》 〈공민왕세가(恭愍王世家)〉, 《고려사》 〈이제현열전(李齊賢列傳)〉 등에서 이달충과 관련된 내용을 뽑아 수록하였다. 이와 함께 《동사찬요》, 《청구집(靑邱集)》, 《동경잡기》, 《계림세가》 등에서 이달충과 관련된 사적을 추록(追錄)해 두었다. 그리고 윤회가 쓴 《제정집》 초간본 발문과 이달충과 관련된 이제현(李齊賢, 1287~1367)ㆍ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시도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사》 〈공민왕세가〉에서 초록한 것 중에서 공민왕 14년(1365)의 기사는 실제 《고려사》와 차이가 많다. 《고려사》 권41 〈공민왕세가〉 14년 5월 기사에는 “요망한 중 편조(遍照)를 사부(師傅)로 삼고 국정에 대해 자문하였다.”라는 내용밖에 없는데, 《제정집》에는 “요망한 중 편조를 사부로 삼았는데 이가 바로 신돈(辛旽)이다. 최영(崔瑩)ㆍ이귀수(李龜壽) 등 10여 명의 관직을 떨어뜨리고, 유숙(柳淑)ㆍ이달충을 파직하였는데 모두 신돈이 참소하였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가 바로 신돈이다.’ 이하 부분은 어디에서 발췌한 것인지 상고할 수 없다. 또 정몽주가 1390년(공양왕2) 이달충의 화상(畫像)에 절하며 지었다고 하는 〈경오년 가을 청란정(淸瀾亭)에 들러 이 문정공(李文靖公)의 화상에 절하며〉 역시 어디에서 인용한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중간본 《제정집》은 《동문선》, 《신증동국여지승람》, 《청구풍아》 등에 수록되어 있는 이달충의 시문을 모아 엮은 것이다. 권1~3에 수록된 시문의 출전 현황과 특이 사항을 표로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권수 | 《제정집》 목차 | 출전 현황 | 특이 사항 |
권1 | 礎賦 | 《선부(選賦)》 권2,《동문선》 권3 | 《선부》는 편자 미상의 목판본 2권 2책으로 규장각(奎1380-v.1-2)에 소장되어 있음. |
思亭賦 | 《동문선》 권3 | |
次益齋韻 三首 | 《동문선》 권5 | |
樂吾堂感興 八首 | 《동문선》 권5 | "제1수는 《청구풍아》 권1에도 수록. 제2수 2행의 ‘遑’과 제4수 5행의 ‘如’가 《동문선》에는 각각 ‘暇’와 ‘知’로 되어 있음." |
送第二子 竱 江原監司赴任 | | |
雜興五章寄思菴 | 《동문선》 권5 | 1365년(공민왕14)경 작. 제5수는 《청구풍아》 권1에도 수록. |
思舊山 | 《청구풍아》 권1, 《동문선》 권4 | 《청구풍아》 권1에는 곽연(郭珚)의 작으로, 《동문선》 권4에는 곽균(郭㻒)의 작으로 되어 있음. |
山村雜詠 | 《동문선》 권11 | |
閨情 | 《동문선》 권5 | 8행의 ‘斯’가 《동문선》에는 ‘新’으로 되어 있음. |
題興敎寺僧統餞行詩軸 | 《동문선》 권10 | |
贈影 | 《동문선》 권5 | 《동문선》에는 《제정집》의 병서(幷序)가 제목으로 되어 있음. |
題祇林寺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 계림 부윤 시절 작(1367~1371년경). |
次金君綏韻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 계림 부윤 시절 작(1367~1371년경). |
附 原韻 金君綏 作) | 《동문선》 권19 | 《동문선》에는 제목이 〈동도객관(東都客館)〉으로 되어 있음. 2행의 ‘固無多’와 3행의 ‘南’이 《동문선》에는 각각 ‘得無誇’와 ‘東’으로 되어 있음. |
哭雲窩弟 | 《동문선》 권16 | 1340년(충혜왕 복위1) 작. |
炭洞新居 | 《동문선》 권16 | |
偶成 | 《청구풍아》 권5 | |
田婦歎 二首 | 《청구풍아》 권7 | |
春靜 | 《해동잡록》 권7 | |
次會慶樓韻 | 《동문선》 권16 | 계림 부윤 시절 작(1367~1371년경). 원주에 《여지승람》에 보인다 하였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없음. |
咸州樓上作 | 《동문선》 권16 | 1358년(공민왕7)경 작. |
次襄州官舍韻 | 《동문선》 권16,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양양도호부〉 |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저자의 성명을 밝히지 않은 채 시만 수록. 8행의 ‘須’가 《동문선》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羞’로 되어 있음. |
辛旽 二首 | 《동문선》 권16, 《고려사》 권112 〈이달충열전〉 | 제2수 2행의 ‘狐’가 《동문선》과 《고려사》에는 ‘弧’로 되어 있음. |
次叢石亭韻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5 〈통천군〉, 《동문선》 권18 | 2행의 ‘初’가 《동문선》에는 ‘欲’으로 되어 있음. |
附 原韻(安軸 作) | | 《근재집》 권1에 〈차총석정시운(次叢石亭詩韻)〉으로 수록. 7행의 ‘篛’과 11행의 ‘庭’이 《근재집》에는 각각 ‘箬’과 ‘亭’으로 되어 있음. |
金晦翁南歸作村中四時歌以贈 | 《동문선》 권7 | 제1수 3행의 ‘唬’가 《동문선》에는 ‘啼’로 되어 있음. |
次春日昭陽江行 | 《동문선》 권7,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6 〈춘천도호부〉 | |
平海郡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5 〈평해군〉 | |
萬景樓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5 〈간성군〉 | |
明波驛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5 〈간성군〉 | |
三日浦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5 〈고성군〉 | |
金幱窟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5 〈통천군〉 | |
海曲縣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5 〈울진현〉 | |
三陟八景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삼척도호부〉 | |
倚風樓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 "계림 부윤 시절 작(1367~1371년경). 원주에 《경주지》와 《동문선》에 보인다고 하였으나, 《동문선》에는 없음." |
固城山城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5 〈간성군〉 | |
醉歌 | 《청구풍아》 권2 | |
雪軒鄭相宅靑山白雲圖 | 《동문선》 권7 | |
次李稼亭 穀 平海越松亭韻 | | |
附 原韻(李穀 作) | | 《가정집》 권20에 〈차월송정시운(次越松亭詩韻)〉으로 수록. |
권2 | 辭鷄林尹表 | 《동문선》 권42 | 1367년(공민왕16) 작. |
鷄林赴任後再辭表 | 《동문선》 권42 | "1367년(공민왕16) 작. ‘多餙詐’가 《동문선》에는 없음." |
辭政堂表 | 《동문선》 권42 | |
賀節日起居表 | 《동문선》 권32 | |
賀節日表 | 《동문선》 권32 | |
賀節日表 | 《동문선》 권32 | |
賀皇太子誕降表 | 《동문선》 권32 | 《동문선》에는 〈하표(賀表)〉로 수록. |
賀皇太子封冊箋 | 《동문선》 권32 | ‘禀資……云云’이 《동문선》에는 있으나, 《제정집》에는 없음. |
方物狀 | 《동문선》 권32 | |
方物狀 | 《동문선》 권32 | |
方物狀 | 《동문선》 권32 | |
愛惡箴 幷序 | 《동문선》 권49 | |
惕若齋箴 | 《동문선》 권49 | |
與一直孫靖平公 洪亮 賜杖銘 | | 1364년(공민왕13) 작. |
권3 | 全州觀風樓記 | 《동문선》 권71 | 1371년(공민왕20) 작. |
奇平章奉使錄序 | 《동문선》 권85 | 1349년(충정왕1)경 작. |
贈羅中正詩序 | 《동문선》 권85 | |
動齋說 | 《동문선》 권97 | |
題金按廉詩卷後跋 | 《동문선》 권102 | 1373년(공민왕22) 작. |
閔及菴祭文 | 《동문선》 권109 | 1359년(공민왕8) 작. |
金敬直宰臣祭夫人文 | 《동문선》 권109 | ‘嗚呼奈何兮意’의 ‘意’가 《동문선》에는 ‘噫’로 되어 있음. |
文溫公閔公墓誌銘 幷序 | 《동문선》 권125 | 1359년(공민왕8) 작. |
覺眞國師碑銘 幷序 | 《동문선》 권118 | "1360년(공민왕9) 작. ‘就之溫然如父母’가 《동문선》에는 있으나, 《제정집》에는 없음." |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간본 《제정집》은 몇 가지 논란거리를 안고 있다. 먼저 〈구산(舊山)을 그리며〉의 작자 문제이다. 《제정집》의 원주에 《청구풍아》에 보인다고 하였는데, 《청구풍아》 권1에는 곽연(郭珚)의 작으로, 《동문선》 권4에는 곽균(郭㻒)의 작으로 되어 있다. 이로 보면 이 시는 이달충이 지은 것이 아닌 듯하다. 곽연과 곽균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곽연과 관련해서는 《고려사》 권74 〈선거지(選擧志)2 과목(科目)〉에 “충목왕(忠穆王) 1년(1345) 11월에 윤안지(尹安之), 안보(安輔), 곽연을 송나라에 보내 과거에 응시시켰는데 다음 해에 안보가 제과에 합격되었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곽균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14 〈윤환열전(尹桓列傳)〉에 “충정왕(忠定王)이 일찍이 모든 신하를 위하여 연회를 열었을 때, 윤환이 정방 제조(政房提調) 곽균을 뇌물을 받은 일로 힐책하였다. 곽균이 받아들이지 않자 윤환은 팔을 걷고 곽균을 구타하였으며 옆의 사람들이 말리지 못하였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둘 다 비슷한 시기의 인물로 이 시를 누가 지은 것인지 확정하기 어렵다.
다음으로 출전이 불분명하여 현재로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이다.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평해월송정(平海越松亭)’ 시에 차운하여〉는 원주에 출전이 밝혀져 있지 않아, 이 시를 어디서 인용한 것인지 상고할 길이 없다.
마지막으로 《제정집》 구절의 일부가 원 출전과 다른 경우이다. 〈낙오당(樂吾堂)에서 흥취가 일어〉, 〈양주(襄州) 관사 시에 차운하여〉, 〈총석정 시에 차운하여〉, 〈재상 김경직의 부인을 애도하는 제문〉 등처럼 《동문선》,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글자가 다른 경우가 있다. 또 〈황태자의 책봉을 하례한 전문〉, 〈각진 국사 비명(覺眞國師碑銘)〉 등처럼 일부 구절이 《동문선》에는 있으나 《제정집》에 빠져 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계림 부윤으로 부임한 후에 다시 사직을 청한 표문〉처럼 일부 구절이 《제정집》에는 있으나 《동문선》에 빠져 있는 경우도 있다.
한편 중간본 《제정집》에 수록되지 않은 이달충의 시문으로 현재까지 확인되는 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 페이지의 표와 같다.
출전 서목 중 《야은일고(壄隱逸稿)》는 1738년(영조14)에 전녹생의 후손 전일상(田日祥)이 간행한 문집인데, 중간본 《제정집》을 간행할 때에 주로 《동문선》, 《신증동국여지승람》, 《청구풍아》 등에서 뽑은 관계로 미처 찾지 못한 듯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제영(題詠)의 경우도 당시에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나옹화상어록발(懶翁和尙語錄跋)〉과〈김제학천처칠칠소(金提學薦妻七七疏)〉의 경우 《동문선》에 실려 있음에도 《제정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실수로 누락한 것이기보다는 둘 모두 불교와 관련된 글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수록하지 않은 듯하다.
제목 | 출전 | 내용 |
懶翁和尙語錄跋 | 《동문선》 권102 | 나옹화상 혜근(惠勤, 1320~1376)의 글을 제자들이 수집하고 교정하여 간행한 《나옹화상어록》에 붙인 발문. |
金提學薦妻七七疏 | 《동문선》 권111 | 김제학(金提學)이 아내를 천도(薦度)하여 사십구일재를 올리는 소. |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6 〈정선군(旌善郡) 제영(題詠)〉 | “산 얼굴은 묵묵하여 뜻을 품고 있는 것 같고, 시냇물 소리는 졸졸 정을 하소연하는 듯.〔山容默默如含意 溪舌冷冷似訴請〕” |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7 〈회양도호부(淮陽都護府) 제영〉 | “은계에 길이 머니 그늘이 빠르고, 철령의 관문이 높으니 가을 기운이 많구나.〔銀溪路遠夕陰早 鐵嶺關高秋氣多〕” |
謝田元帥送倭酒 | 《야은일고(壄隱逸稿)》 권4 | "1367년(공민왕16) 전녹생(田祿生, 1318~ 1375)이 경상도의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합포(合浦)에 출진(出鎭)할 때 써 준 시. “원수께서 앉아서 시를 읊조리니, 무심함은 적을 공격하는 것보다 강하도다. 감동하여 예물을 잡고 오는데, 하필 번거롭게 격문을 지으랴.〔元帥坐吟詩 無心強攻敵 感化執奠來 何必煩羽檄〕”" |
향후 이달충 시문에 대한 텍스트 고증을 보다 철저하게 해야 할 것이며, 이와 함께 이달충의 유문(遺文)을 추가로 보완할 필요가 있겠다.
3. 이달충의 생애와 문학
이달충은 1309년(충선왕1)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첨의참리(僉議參理) 이천(李蒨, 1274~1349)이고 어머니는 연창군부인(延昌郡夫人) 박씨(朴氏)이다. 이제현(李齊賢)이 그의 당숙이다. 초명은 달중(達中)이었는데, 공민왕의 명에 따라 ‘중(中)’을 ‘충(衷)’으로 고쳤다. 1326년(충숙왕13)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사한(史翰)을 거쳐 정언(正言)에 오르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 좨주(成均祭酒)에 이르렀다.
1348년(충목왕4) 3월 이학도감 판사(吏學都監判事)가 되어 장항(張沆, ?~1353)ㆍ전윤장(全允臧) 등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였다. 1352년(공민왕1) 10월 전리 판서(典理判書)가 되었고, 1353년 1월에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가 호부 상서(戶部尙書)로 자리를 옮겼다. 1358년 4월 호부 상서로서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나아갔다. 돌아올 때 당시 삭방도 만호(朔方道萬戶)였던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으로부터 함흥(咸興)의 학선정(鶴仙亭)에서 전별연을 받았다. 이때 이달충은 환조 뒤에 서 있던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태조가 올린 술을 꿇어앉아 마시며 경의를 표하고 자신의 자손들을 그에게 부탁하였다. 태조는 즉위한 뒤 이 일을 기리기 위해 이달충 자손들의 이름에 ‘입(立)’ 자를 쓰도록 명하였다. 이달충의 네 아들 이름은 준(竴), 전(竱), 수(䇕), 횡(竑)으로, 실제로 모두 ‘입(立)’ 자가 들어 있다.
1359년 호부 상서로 있을 때 형부 상서(刑部尙書) 이정(李挺, 1297~1361)과 함께 팔관회(八關會)를 위해 설치해 놓은 복야청(僕射廳) 남쪽의 장막을 철거하도록 지시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당시 동료들의 만류로 처벌은 가까스로 면했다. 1366년(공민왕15) 명유(名儒)로서 발탁되어 밀직 제학(密直提學)이 되었다. 이해 겨울 이달충은 여러 사람 앞에서 신돈(辛旽)이 주색을 좋아한다고 비판하였다가, 신돈의 중상(中傷)으로 유숙(柳淑, 1316~1368) 등과 함께 파직되었다. 1367년(공민왕16) 계림 부윤(鷄林府尹)에 임명되었는데, 경주가 관향이라 여러 차례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부임하였다. 1385년(우왕11) 을축년 8월 18일에 졸하였다. 광주(廣州) 제릉(齊陵) 북쪽 탄동(炭洞)에 묻혔고, 문정(文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달충은 고려 말 공민왕 때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대내적으로는 신돈이 국정을 전횡하고 대외적으로는 원(元)ㆍ명(明) 교체기로 홍건적의 침입이 잦았다. 이인행(李仁行)은 서문에서 “지금 공이 지은 시편과 〈애오잠(愛惡箴)〉, 〈척약재잠(惕若齋箴)〉 등을 보니, 혼란한 시대에 의연하게 홀로 우뚝 선 것을 여전히 한두 가지 떠올려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현재 《제정집》에 수록된 시문을 통해 혼란한 시대를 살다 간 이달충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주공은 앉아서 아침을 기다렸고 / 周公坐待朝
문왕은 밥 먹을 겨를도 없었다네 / 文王不遑食
어찌 안락함 즐긴 적이 있으랴 / 何嘗樂宴安
늠연히 경계하고 조심하였네 / 凜乎存戒飭
계속해서 중도를 행하면서 / 反復踐中行
부지런히 마음과 힘을 다하였네 / 孜孜盡心力
위대한 업적 마침내 허물이 없으니 / 大業竟無愆
아름다운 영광은 영원히 드리워지리 / 休光垂罔極
자벌레가 풀포기 하나에 의지하여 / 尺蠖緣孤叢
기어이 꼭대기까지 기어올랐다가 / 迺上上盡頭
내려오고 싶어도 내려오지 못하고 / 欲下却不得
다만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일만 보네 / 多見不自由
처음에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 始焉苟知此
조금 가다 그쳐서 후회할 일 없었을 것을 / 小止無悔尤
미물이지만 내 보고 느낀 바 있어 / 物微有所感
벼슬에 나가려다 도로 물러나 쉬노라 / 欲進還退休
이 시는 〈낙오당에서 흥취가 일어〉 8수 중에서 제2수와 제4수인데, 이달충의 경세 의지와 정치 현실에서의 좌절, 현실 대응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제2수에서 이달충은 주나라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이 쉴 틈도 없이 매사에 조심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이룬 찬란한 공적을 찬양하였다. 이는 곧 이달충이 추구하는 유교적 경세관이라 할 수 있다. 이달충은 〈함주(咸州) 누대 위에서 짓다〉라는 시에서 “우리 가문이 어지간히 능한 것은 오직 글뿐이니, 무력으로 세상 바로잡는 것은 집안 내력 아니네.〔我家劣能唯簡編 匡時節鉞非靑氈〕”라고 하였듯이, 문한(文翰)의 집안 출신으로 문인 지식인의 삶을 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을 펼치기에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제4수에서 이달충은 자신을 풀 한 포기에 의지해 있는 자벌레에 비유하면서, 당대 정치 현실이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에 어려운 상황임을 토로하였다. 〈척약재잠〉에서도 강조하였듯이, 이러한 상황에서 이달충은 매사에 조심하며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는 길을 택하였다.
내 장차 발을 씻으려 하나 / 吾將濯吾足
창랑이 어찌 내 더러움을 기꺼이 받아 주겠나 / 滄浪豈肯受吾辱
내 장차 귀를 씻으려 하나 / 吾將洗吾耳
영천이 어찌 내 죄를 기꺼이 씻어 주겠나 / 潁川豈肯帶吾纍
나는 본디 절름발이라 / 吾足本跛躄
안에 편히 앉아 나가지 않으니 어찌 자취를 감추겠는가 / 安坐不出誰削迹
나는 본디 귀머거리이니 / 吾耳本聾聵
험담이 이른들 어찌 괴이하게 여기겠는가 / 惡言雖至誰爲怪
무용지용이 대용이라 하였으니 / 無用之用爲大用
이 말을 깊이 음미하며 하루에 세 번 암송하노라 / 深味斯言日三誦
이 시는 〈취가(醉歌)〉인데, 혼탁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고민을 강개한 어조로 드러내었다. 이달충은 먼저 제1~4행에서 굴원(屈原)과 허유(許由)의 고사를 인용하여 세상사를 완전히 끊고 은거하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을 토로하였다. 주지하다시피 굴원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에 “창랑의 물이 맑거든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나의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라고 하였는데, 이 노래는 세상이 태평하면 벼슬을 하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은둔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 허유는 요 임금이 자신에게 천하를 양보하려 하자 이를 거절하고 기산(箕山)에 숨었으며, 또 그를 불러 구주(九州)의 장(長)으로 삼으려 하자 영수(潁水) 물가에 가서 귀를 씻었다 한다. 그러나 이달충은 굴원과 허유처럼 세상사를 완전히 끊고 은거할 수 있는 처지도, 세상에 나아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제5~8행에서 알 수 있듯이 이달충은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제6행에는 “공자는 위(衛)나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사기(史記)》 권47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가 위나라에 갔을 때 어떤 이가 위 영공(衛靈公)에게 공자를 참소하자, 영공이 공손여가(公孫余假)를 시켜 공자를 감시하게 하였는데, 공자가 불안하여 위나라에 더 머물지 못하고 위나라를 떠났다는 내용이 있다. 결국 이달충은 자신을 감시하고 헐뜯는 현실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며,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무용지대용(無用之大用)’의 자세로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달충은 〈익재(益齋) 시에 차운하여〉에서 “때와 운명은 일정하지 않거니, 공명인들 또한 무슨 도움이 되리. 만약 이 마음을 편안케 하려면, 곤하면 잠자고 배고프면 먹으면 되리.〔時命難可常 功名亦何益 若爲安此心 困眠且飢喫〕”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달충이 당대 현실을 외면한 채 명철보신(明哲保身)의 태도만을 견지하거나 한거(閑居)를 통한 자락(自樂)만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백성들의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당대 정치 현실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지아비는 홍건적에 죽고 아들은 변방 지키러 나가 / 夫死紅軍子戍邊
홀로된 이 몸의 생활은 참으로 쓸쓸하여라 / 一身生理正蕭然
장대 꽂아 모자를 씌워 세웠으나 참새가 꼭대기에 앉고 / 揷竿冠笠雀登頂
이삭 주우며 광주리를 메니 나방이 어깨를 치네 / 拾穗擔筐蛾撲肩
이 시는 〈전부(田婦)의 탄식〉 2수 중 제2수이다. 제1수에서 이달충은 오랜 장마로 흉년이 든 상황에서 백성들이 굶주림을 벗어나고자 날품을 팔지만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였다. 제2수에서는 남편과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농촌 아낙 홀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상황을 그렸다. 《청구풍아》에는 첫 구절에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위평장(僞平章) 반성(潘誠), 사유(沙劉), 관선생(關先生), 파두반(破頭潘), 주원수(朱元帥) 등 20만이 압록강을 건너 안주(安州)를 습격해서 절령(岊嶺)의 책(柵)을 부수며 아군을 여러 차례 패퇴시키고 결국 개경을 함락하여 여러 달 주둔하였다. 왕은 복주(福州)로 달아났다.”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홍건적이 침략하여 남편은 전쟁터로 끌려가 죽고 아들 또한 변방을 지키러 나갔다. 농촌 아낙이 홀로 남아서 이삭을 주우며 먹고살 길을 찾지만 참새들이 그마저 빼앗아 가고 만다. 백성들의 삶에 대한 상투적인 걱정이 아니라, 당대 현실에 즉한 현장감 있는 시라 하겠다.
한편 이달충은 당대 국정을 농단하던 신돈(辛旽)을 면전에서 비판하기도 하였다. 《고려사》 〈이달충열전〉에 보면 이달충이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신돈이 주색을 좋아한다고 비판하였다가 신돈의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신돈이 죽음을 당할 때 지은 시를 인용해 두었는데, 아래의 〈신돈〉이라는 시가 바로 그것이다.
요괴한 짓 멋대로 부리는 늙은 여우 / 騁怪馳妖老野狐
사람들 다투어 활로 쏘아 죽이려는 것 어이 알리 / 那知有手竸張弧
여우가 범의 위엄을 빌리니 곰들이 벌벌 떨었고 / 威能假虎熊羆懾
여우가 남자로 변하여 호리니 여자들 줄줄 몰려들었지 / 媚或爲男婦女趨
누런 개와 보라매 싫어하는 것은 마땅하나 / 黃狗蒼鷹眞所忌
오골계와 백마는 무슨 죄란 말인가 / 烏鷄白馬是何辜
네가 죽으면 제 살던 언덕으로 머리를 향한다 하였으니 / 嘗聞汝死必邱首
이제 성 동쪽 큰길가에서 너를 보겠구나 / 已見城東官道隅
《고려사》 〈신돈열전〉에 보면 당시 사람들이 신돈을 ‘늙은 여우의 정기〔老狐精〕’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신돈은 개와 매를 무서워하였고, 조양제(助陽劑)로 오골계와 백마 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위 시에서 이달충은 신돈이 호가호위(狐假虎威)를 하다가 죽음을 당한 것을 통쾌한 어조로 읊었다.
이달충의 시문은 이제현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제현의 주도로 백문보와 함께 국사 편찬에 관여한 것으로 보아, 이달충은 문재(文才)가 출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 문신 심의(沈義, 1475~?)가 쓴 《대관재난고(大觀齋亂稿)》 권4 〈대관재기몽(大觀齋記夢)〉을 보면, 이달충은 동시대의 최해(崔瀣)ㆍ이곡(李穀) 등과 함께 가상의 문인국(文人國)에서 고관 반열에 끼어 있기도 하다. 현재 전하는 이달충의 시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우의성(寓意性)이다. 이달충은 부ㆍ시ㆍ문을 가리지 않고 우의적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
먼저 〈초부(礎賦)〉를 들어 본다. 이 글은 기둥이 주춧돌을 꾸짖자 주춧돌이 이에 대해 반박을 하고, 마지막에 집 짓는 대목이 주춧돌의 손을 들어 주는 내용이다. 기둥은 여타 돌들이 갖가지 모양으로 바뀌면서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이는 데 반해, 주춧돌은 그저 제 자리를 굳건히 지킬 뿐 자신의 광채를 드러내지 않는다며 꾸짖는다. 이에 대해 주춧돌은 다음과 같이 기둥에게 반박을 한다.
이에 주춧돌이 엎드려 기둥에게 말하기를 / 於是礎迺頫伏而復于楹曰
자네는 당당하고도 / 子之堂堂
우뚝하니 서서 / 所立卓爾
기둥들과 쭉 늘어서서 / 疇類侁侁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았네 / 不偏不倚
그런데 누가 강이 되고 / 孰爲之綱
누가 기가 되는가 / 孰爲之紀
누가 기틀이 되고 / 孰爲之基
누가 터가 되는가 / 孰爲之址
내가 아니면 자네는 썩어 버리고 / 匪吾則腐
내가 아니면 자네는 쓰러지네 / 匪吾則靡
아방궁이 불에 타 없어졌을 때 / 阿房之失火也
오직 나만 살아남았으며 / 吾獨存焉
인상여가 구슬을 깨뜨리려 할 때 / 藺氏之謀璧也
나는 거기에 편들지 않았네 / 吾不比焉
그런데 자네 소행은 / 視子之爲
어찌 그리 비루한가 / 何陋且鄙
위로 용마루를 받들 때는 아첨을 하고 / 上承棟樑則以阿
밖에 단청이 입혀질 때는 사치스럽게 하네 / 外被丹雘則以侈
하물며 자네 족속은 / 而況子之朋類
본받을 것이 조금도 없다네 / 無可儀刑
혹은 진나라의 봉작을 받기도 하였고 / 或封于秦
혹은 정씨의 꿈에 나타나기도 하였네 / 或夢于丁
그슬려서는 먹이 되기도 하고 / 或煤于墨
뜰에서 횃불이 되어 불타기도 하니 / 或燎于庭
어찌 그리 구구하며 거리낌 없이 / 何屑屑其不憚
자기 본성을 해치고 제 몸을 망치는가 / 賊其性而殘其形
자네는 요행히 크게 쓰임을 얻었으니 / 子幸而爲大用
대들보 되려고 어찌 다툴 필요가 있겠는가 / 更何校於擧筳
마땅히 나의 공덕을 고맙게 여기며 / 宜功我而德我
천년토록 궁궐을 지탱해야 하리라 / 扶帝宅於千齡
기둥은 자기 본성을 해치고 외양을 꾸미면서 공명(功名)을 추구하는 것을, 주춧돌은 제 본성을 지키면서 공명에 상관없이 기틀이 되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하여 집을 짓는 대목은 기둥과 주춧돌의 말을 듣고서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겸손하면 이익을 얻을 수 있고 / 謙能受益
교만하면 반드시 위험해지기 쉬우니 / 高必易危
저 기둥은 더부살이를 하는 것이요 / 彼楹之寄
오직 주춧돌이 바탕이로다 / 惟礎是資
이 글에 담긴 우의를 두 가지 층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개인이 현실에 대처하는 자세 문제이다. 기둥처럼 높은 곳에 오르려고 공명을 좇다가는 불에 타는 것과 같은 위험에 빠지게 되므로, 주춧돌처럼 낮은 곳에 임하여 겸손하게 변함없이 덕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 나라의 국정 운영과 관련된 문제이다. 주춧돌이 크고 튼튼해야 기둥을 높이 세울 수 있듯이,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하는 데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좀 더 확대하여 해석하면 주춧돌은 이달충 자신을 비롯한 문인 지식인들을 가리키며, 기둥은 권문세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다음으로 〈그림자에게〉라는 시를 보자. 이달충은 이 시의 병서에서 “산중에 있으니 온종일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지팡이 짚고 신을 끌며 홀로 골짝을 거니는데 적적하여 함께 얘기할 사람도 없었다. 오직 그림자만이 나를 잠시도 떠나지 않으니, 애석하게 여겨서 그림자에게 시를 지어 준다.”라고 하였다. 이 병서를 통해 이 시가 이달충이 관직에서 물러나와 은거하고 있을 때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래는 〈그림자에게〉의 전문이다.
나는 내 그림자가 미워서 / 我惡我之影
달아나니 그림자도 따라오네 / 我走影亦馳
내가 없으면 그림자도 없고 / 無我則無影
내가 있으면 그림자도 따른다 / 有我影相隨
내가 있어도 그림자 없게 하려는데 / 有我使無影
나는 그 방법을 알지 못하네 / 有術吾未知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림자가 밉거든 / 人言若惡影
그늘에 있으면 떼어 낼 수 있다 하네 / 處陰庶可離
그늘도 또한 어떤 물건의 그림자이니 / 陰亦物之影
사람들 하는 말도 심히 어리석도다 / 人言迺更癡
물건이나 내가 있다면 / 物我苟有矣
그늘과 그림자는 이에 있는 법이지 / 陰影復在玆
나도 없고 또 물건도 없으면 / 無我亦無物
그늘과 그림자가 어디에 생기겠는가 / 陰影安所施
내 소리 질러 그림자에게 물어보나 / 擧聲我問影
그림자는 한마디 말도 없네 / 影也無一辭
마치 안회(顔回)처럼 어리석은 듯하지만 / 有如回也愚
묵묵히 알고 깊이 생각하네 / 默識而深思
내가 하는 모든 동작을 / 凡我所動作
그림자는 하나하나 똑같이 하네 / 一一皆效爲
다만 나는 말이 많은데 / 唯我頗多言
그림자는 이것만은 따라하지 않네 / 影也不取斯
그림자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 影也豈不云
말은 몸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 言迺身之危
그림자가 나를 본받을 것이 아니라 / 顧非影效我
내가 그림자를 스승으로 삼아야 하리라 / 我迺影爲師
이 시는 《장자》 〈어부(漁父)〉에 나오는 우언(寓言)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것이다. 공자와 어부와의 대화 중에 자기 그림자를 떼어 내려고 빨리 달리다가 마침내 죽고 만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부는 이 사람이 그늘 속으로 들어가 있으면 그림자가 없어진다는 사실을 몰라서 이렇게 된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그림자는 인위와 허식을 상징하며, 그늘에 들어가 그림자를 없앤다는 것은 자연의 진성(眞性)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달충은 자신의 몸이 있는 이상 그림자는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그늘로 들어가 그림자를 없애기보다는 그림자로부터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자 한다. 이 지점에서 이달충은 세상사와 완전한 격절을 지향하는 노장적(老莊的) 처세관과 길을 달리한다. 그리하여 이달충은 안회를 닮은 그림자를 스승 삼아 말을 조심하며 자신의 본성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애오잠〉을 살펴보겠다. 병서(幷序) 부분은 우언으로, 유비자(有非子)와 무시옹(無是翁)의 문답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비와 무시는 ‘아니다’, ‘없다’라는 뜻으로, 둘 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을 가리킨다.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지은 〈극진미신(劇秦美新)〉에 나오는 무시공(無是公)이나 오유선생(烏有先生)과 같은 인물들이다. 유비자가 무시옹을 찾아가 무시옹이 어떤 이에게는 사람대접을 받는데, 어떤 이에게는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며 무시옹의 의견을 묻는다. 이에 대해 무시옹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사람들이 나를 사람이라 하여도 나는 기쁘지 않고, 사람들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여도 나는 두렵지 않소. 차라리 사람다운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하고, 사람답지 않은 사람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더 낫소이다. 또 나는 나를 사람이라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며,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오. 사람다운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하면 나는 기뻐할 것이요, 사람답지 않은 사람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면 나는 또한 기뻐할 것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면 나는 두려워할 것이요, 사람답지 않은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하면 나는 또한 두려워할 것입니다. 기뻐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나를 사람이라 하고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는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인지 사람다운 사람이 아닌지를 마땅히 살펴야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어진 사람이어야 능히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나를 사람이라 하는 사람이 어진 사람입니까?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는 사람이 어진 사람입니까?
이 글의 요지는 《대학》에 나오는 “오직 어진 사람이어야 능히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라는 공자의 말로 집약된다. 사람대접을 받느냐 못 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평가하는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인지 아닌지가 주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자신 또한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이달충은 이 글의 말미에서 “좋아함과 미워함이 어지러울 때엔, 어찌 또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으랴.〔好惡紛然 盍亦求諸己〕”라고 했던 것이다. 〈애오잠〉은 우언을 통해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올바른 방식을 강조한 글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제정집》을 통해 고려 말 혼란기를 살다 간 문인 지식인의 고민과 문학의 일단(一端)을 엿볼 수 있다.
2013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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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자, 《제정공 이달충 문학: 연구논문과 해설 번역 및 영인본》, 국학자료원, 2006.
조문주, 〈霽亭 李達衷의 詩世界〉,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3.
홍성욱, 〈性理學 受容期 散文의 硏究〉,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 [주-D001] 곽종석(郭鍾錫)이 쓴 신도비명(神道碑銘) :
- 이 신도비명은 《한국문집총간》 344집에 수록된 《면우집(俛宇集)》 권147에도 들어 있다.
- [주-D002] 1366년 …… 되었다 :
- 《고려사》 권112 〈이달충열전〉에는 1366년(공민왕15)의 일로 되어 있는데, 《제정집》 권4 권상일(權相一)이 쓴 행장에는 호부 상서로 있을 때 복야청(僕射廳) 남쪽 장막을 철거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산 사건이 있은 얼마 뒤 밀직 제학(密直提學)에 발탁되었다고 되어 있다. 행장의 이 부분은 오류이다.
- [주-D003] 1385년 …… 졸하였다 :
- 《경주이씨구보(慶州李氏舊譜)》와 《제정집》 권4 권상일이 쓴 행장에는 졸년을 우왕 11년 갑자(甲子)라 하였는데 이는 오류이다. 《고려사》 권112 〈이달충열전〉에도 우왕 11년에 졸했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졸년이 우왕 11년인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우왕 11년은 갑자년이 아니라 을축년이다. 권상일은 《경주이씨구보》를 근거로 행장을 작성하였기 때문에 같은 오류를 범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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