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고 돈 있으면 뭐하냐
나에게 50년 전통에 빛나는 초등학교 반창회가 있다. 그 이름도 거창한 5264(52회 6학년 4반)이다. 45명 반원 중 13명 정도가 고희에 이르기까지 정기적으로 모임을 하고 있으며, 내가 현재 난생 처음 “회장”이란 직책을 부여받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는 반창회장이다. 절반은 출향해서 살고 있고, 절반은 고향에서 살고 있다. 은퇴하기 전 신분도 중견기업체 사장·대학교수·농부·개인사업·공무원(교사, 세무공무원, 한국전력직원, 시청직원)·법무사·개인택시 등으로 다양하다. 학벌로 따지면 박사도 있고, 돈으로 따지면 강남에 살면서 모임 때마다 삐까번쩍한 외제차를 타고 오는 수십 억 재산가도 있는데, 회원 중에서 인간 구실을 제대로 하고 있는 친구는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두 명의 친구이다. 나는 “親親親親”이라고 쓰고, 이를 “친구면 친구인가 친구 구실을 해야 친구이지”라고 해석한다. 돈좀 있는 서울 사는 깍쟁이는 산곡리(山谷里)에 사는 친구를 부인 앞에서도 산곡촌놈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산곡선생이라고 경칭한다. 산곡선생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선친의 대를 이어 평생 농사일만 하고 살았다. 다행이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고 내조하는 부인을 만나, 근검한 생활로 재산을 일궈 논밭 5000평을 경작하고 한우 50두를 사육하면서 그럭저럭 풍족하게 살고 있다. 이제는 전세가 역전되어 선생하다 조기 퇴직한 친구가 형편이 어려울 때마다 산곡농장에 들려 쌀·감자·옥수수·채소 등 농산물을 가져간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산곡선생은 농번기가 끝나면 매년 개나 염소 한 마리를 잡아서 반창회원을 초청하여 우정을 돈독히 하는 자리를 만들고, 간혹 함께 떠나는 반창회 해외 여행시 꼭 동부인하여, 졸장부들은 식사비를 낼 때 눈만 껌뻑껌뻑하고 있는데, 갈 때마다 꼭 특별 식사비를 찬조한다. 그래서 나는 박지원이 인분수거꾼인 엄행수를 예덕선생(穢德先生)이라 경칭했듯이, 손발이 거칠고 얼굴은 우리보다 열 살은 더 먹어 보이는 김 농부를 산곡선생이라고 깍듯이 예우하고 있다. 시내에서 건강원을 운영하는 장사장도 선친의 가업을 잇느라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런데 걸출한 인물, 말하는 품새, 판단하는 국량을 보면서 그가 제대로 공부를 했으면 큰일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종종 하였다. 이 친구 역시 시간만 있으면 강원도 고산에 올라 약초를 캐어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데, 친구들을 대하는 마음은 한없이 크고 넓다. 얼마 전 친구로부터 택배가 도착했다. 뜯어보니 고희선물인데, 송월타월 3장과 백봉령·하수오·돼지감자·백출·당귀·오미자·황정·유근피·지구자·산작약·산사·꿀을 넣어 직접 정성껏 제조한 건강환이 두 박스 들어 있었다. 이제까지 누구한테도 고희선물을 받아보지 못했는데, 몇 년 전 금슬 좋은 부인을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어렵게 사는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고 나니 감동이 물밀쳐 왔다. 그래서 “나이 들어 친한 친구에게 돈을 쓸 줄 아는 장사장은 멋쟁이”라는 문자를 날렸더니, 바로 “격려하는 당신도 멋쟁이”라는 문자가 되돌아 왔다. 나는 종종 나 자신에게 “배우고 돈 있으면 뭐하냐? 제대로 쓰지 못하고 사는 데라는 자조적(自嘲的)인 말을 하게 된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두 친구도 이렇게 멋지게 사는데, 대학 나와 그럴듯한 직장에서 평생 동안 대우받으면서 살아온 친구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 나이에 고향에서 노쇠한 몸으로 농사를 짖거나 시장에서 약초를 팔아 겨우 호구하면서 살아가는 두 친구가 이렇게 베푸는데, 은퇴하여 강남아파트에 살거나, 펜션사업과 임대사업으로 그럭저럭 살고, 고액연금을 받고 살면서 고급차와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친구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하여 나도 두 친구 같은 덤앤더머가 되기로 했다. 가내 한 달 수입과 지출을 계산해 보니 대략 50만 원 정도가 남는다. 고희를 넘겨 덤으로 사는 인생인데, 이 나이에 이 돈을 저축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갑자기 50만원이 생겼다고 생각하니 양쪽 어깨에 날개를 돋친 기분이다. 그동안 나와 내 가족의 호의호식에만 전전긍긍했는데, 내 주변에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사람은 없을까. 그래서 일일일선(一日一善)은 못할 망정 일월일선(一月一善)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 그동안의 은혜를 갚아야 할 신세진 사람들이 많지. - 사촌 중 내가 최고 어른이니 어른 역할을 해야지. - 회장 직책이 두 개나 되니 회장 역할을 제대로 해야지. - 아직도 아너스크럽에 들려면 반 바퀴를 더 돌아야지. - 3월에는 갈현마을 80세 전후의 노인들에게 식사라도 한번 대접해야지. - 우리 어린 시절처럼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한 아프리카 어린이들도 많지. - 아직 탈고하지 못한 <할아버지, 한자가 쉬웠어요>란 책을 완성하여 인터넷에 올리고, 그리고 죽기 전에 꼰대수필집 한 권을 더 출판해야지.
앞으로 살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내 앞에 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죽고 싶어도 죽을 시간이 없다는 말처럼 살아야 할 것 같다.(2021. 3.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