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온전하라
마태복음 5:48, 동 17
정동교회와 홍제원교회에서
太五十章十七. 딈後三章十七. 눅六章四十. 딤後三章九. 希十三章二十一. 彼前五章十. 고前一章十. 약一章四. 살前五章二十三.
神欲人離不完而入完全也. 完全之語, 多出於聖書者以此也. 保羅欲提摩完全, 딈後三九. 先使個人爲完全, 而學主之完全後爲可以完全, 故保羅書提摩曰, 聖書使神之人成完全. 딈後三章十七. 完人合而爲敎會, 故托敎友曰完合, 고前一章十. 個人如是, 敎會如是則天國可成矣. 盖世人無完全, 如主槍傷釘殺, 百孔千槍無一完處, 主親示此傷痕者, 示世人之無完也. 羅兵之猛甚於猛虎, 以槍刺而流血, 主之身無一完處, 頭上冕棘刺入, 血流被面, 手足鐵釘深入, 左右脇上槍刺無一完處, 示人靈破傷無一完人也. 故個人不完, 家庭不完, 社會不完, 國家不完也. 人欲完全, 或以學問, 或以地位. 或以金錢, 皆不完全. 東洋大哲皆欲完全, 孔子曰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 釋曰天上天下唯我獨尊, 老子曰至人無己云, 皆欲完全也. 皆欲自比而無標準, 故其理致共止於地上不及天上也. 耶蘇有標準, 以在天之父爲準故如父完全也. 吾等屬耶蘇, 以耶蘇爲師, 主曰弟子完全則可如師云. 눅六章四十. 吾等學生雖不可及, 然向主而往, 泰山高則高矣. 人皆以爲不可上, 而不欲上, 是爲病也. 向山而往, 雖不可上, 進進不已可也. 欲完之工夫, 聖書已言之. 行善除惡, 稍可爲完也. 欲做純金, 去其非金之分則自可爲純, 欲做美玉則去其瑕則自可爲美矣. 如此而人初不可爲完, 去惡行善則自可爲完矣. 希十三章二十一. 行善至難如登山, 登登不已後可登山矣. 某人欲檢自己之善惡, 於日記冊. 以朱黑點之而至月終檢之, 黑多朱少, 黑是爲不善, 朱是爲善也. 乃知善少而不善多, 故乃倍力勇往也. 又如挽逆水之舟, 不挽則舟便流下, 故古人以克己爲訓卽此也. 順己則爲惡, 克己則爲善矣. 以日日行善爲己務, 故日日負十架, 如僧呼南無佛, 稍稍爲善, 進進不已, 可以爲完矣. 吾等欲爲完則捨善奚爲哉? 且苦難則完全, 彼前五章十. 爲完之工如鍊金, 累入冶火之中而後爲純金. 神使選民受苦於埃及者, 以欲作天國之民也. 天欲成人之材則先使鍛鐵其身, 使之百折不折. 黃喜數捃摭金宗瑞者, 欲玉成宗瑞也. 古之偉人哲人英雄等, 皆通經困苦之人也. 요한曾於被囚之中見黙示, 主亦於苦難之中成救主矣. 今朝鮮人有大困難, 善忍耐則此苦難必齊來幸福矣. 不然憂愁而已, 哭泣而已也. 吾等思此眞理, 幸勿失足焉. 且忍耐則完全, 얍一章四. 忍耐生鍊達, 鍊達生完全也. 古之油商見某伯爵之射百發百中哂之, 爵曰汝歎我乎? 曰非也. 卽手熟也. 余業油商數十年, 人覓油, 余以油注入胡蘆之中一不差錯, 是余手熟也. 手熟生於忍耐, 主携一瞽者醫之曰, 視乎? 曰樹如人, 主再醫之曰視乎? 曰視物分明, 此人若不忍耐待之, 則不可見醫矣. 吾等欲見完全則忍而待之, 是亦爲完之工也. 彼薄志弱行之靑年, 手執一善業, 久忍而待之, 至於成功, 豈非工夫之事乎? 忍耐是爲完之工. 君等知之乎? 以上爲完之工, 只在心理上言之而至身魂, 神欲爲完全則待神改造可也. 살前五章二十三. 身不完者何也? 口道無禮之言, 足踏無禮之地, 手作無禮之事. 是皆不完者也. 魂不完者何也? 以飮酒貪色爲第一主義, 貪淫樂禍等也. 神不完者何也?
마태복음 5:17. 디모데후서 3:17. 누가복음 6:40. 디모데후서 3:9. 히브리서 13:21. 베드로전서 5:10. 고린도전서 1:10. 야고보서 1:4. 데살로니가전서 5:23.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온전하지 못한 데서 온전함으로 들어가게 하려하십니다. 온전이라는 말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온전하게 하려고 한 것은(디모데후서 3:9) 먼저 개인을 온전하게 하여 주의 온전함을 배운 뒤에 온전하게 하려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글로 써서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라고 하였습니다(디모데후서 3:17). 온전한 사람이 합하여 교회가 되기 때문에 교우에게 ‘온전히 합치도록 하라’고 부탁하였던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10). 개인이 이와 같이 되고, 교회가 이와 같이 되면 천국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대개 세상 사람은 온전하지 못하여 마치 주께서 창에 찔리고 못에 박혀 죽으실 때 수 없이 많은 상처로 어느 곳도 온전한 데가 없었습니다. 주께서 몸소 이러한 상처를 보여주신 것은 세상 사람들이 온전하지 못함을 보인 것입니다. 로마 병사의 사나움은 맹호보다 심하여 창으로 찔러 피를 흘리게 하여 주님의 몸은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머리에 씌운 가시관은 살갗을 찔러 피가 얼굴을 덮었고, 쇠못은 손발에 깊이 박혔으며, 좌우 옆구리는 창에 찔려 온전한 곳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사람의 영혼이 깨지고 손상되어 온전한 곳이라고는 없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이 불완전하면 가정이 불완전하고 사회가 불완전하여 국가가 불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온전하게 되기 위하여 혹은 학문으로써, 혹은 지위로써, 혹은 금전으로써 해보려고 하나 이는 다 불온전한 것입니다. 동양에서 위대한 철인들도 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하여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하였고, 석가모니는 ‘천상천하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고 하였으며, 노자는 ‘지인무기(至人無己)’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 스스로만을 비유할 뿐 표준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주장하는 이치는 지상(地上)에서 그치고 천상(天上)까지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표준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표준으로 삼기 때문에 아버지처럼 온전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속하여 있으므로 주를 스승으로 삼습니다. 주께서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스승과 같아지리라’고 하였습니다(누가복음 6:40). 우리 학생들은 비록 따를 수 없다 하더라도 주님을 향하여 가야합니다.
태산은 높다고 하면 높습니다. 사람들은 올라갈 수 없다고 하며 올라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병통입니다. 산을 향하여 올라가다가 비록 못 올라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치지 말고 나아가고 나아가야 합니다. 온전하게 하려는 공부를 <성경>은 이미 말하였습니다. 선을 행하고 악은 없애면 점점 온전하게 됩니다. 순금을 만들기 위하여서는 금이 아닌 성분을 제거하게 되면 저절로 순금이 됩니다. 아름다운 옥을 만들기 위하여서는 티를 없애버리면 저절로 아름답게 됩니다.
이와 같이 사람도 애초부터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면 저절로 온전하게 됩니다(히브리서 13:21). 선을 행하기가 지극히 어려워서 마치 산을 오르는 것과 같으나, 오르고 오르기를 그치지 아니 하면 산꼭대기에 오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선악을 검사하기 위하여 일기책에 붉은 색과 검은 색으로 점을 찍어 표시를 하여두었다가 그 달 말에 검사하여 보니 검은 점이 많고 붉은 표시가 적더랍니다. 검은 표시가 선하지 못한 것이고 붉은 색이 선한 것을 표시한 것인데, 그는 선한 일을 한 것이 적고 선하지 못한 일을 한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힘을 갑절로 써서 용감하게 나아갔다고 합니다.
또 물을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배는 앞에서 당겨주지 않으면 배가 떠내려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극기를 하는 교훈이 바로 이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순기(順己)는 악이 되고, 욕망을 이기는 극기(克己)를 하면 선이 됩니다.날마다 선한 일을 행하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마치 중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짖듯이 점점 선을 행하여 나가기를 그치지 않아야 가히 온전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온전하게 되려면 선을 버려두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또한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됩니다(베드로전서 5:10). 온전하게 하는 공정은 마치 금을 단련시키는 연금(鍊金) 방법과 같습니다. 여러 번 풀무 속에 들어간 뒤에 순금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애굽에서 고통을 받게 한 것은 그로써 천국의 백성을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하늘이 사람을 재목으로 만들기 위하여 먼저 그 몸을 쇠처럼 단련시켜서 백번 꺾으려고 하여도 꺾이지 않도록 합니다.
옛날 황희 정승이 김종서의 흠집을 낱낱이 꼬집어 나무란 것은 김종서를 잘 성취시키기 위하여서입니다. 옛 위인이나 영웅이나 철인들은 모두 이러한 곤경의 고통을 견디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요한도 일찍이 감옥에 갇혀 있는 중에 묵시를 보았고, 주님도 역시 고난을 통하여 구세주로써 성취되셨습니다.
지금 조선 사람에게는 큰 곤란이 있습니다. 인내하면 이 고난은 반드시 행복을 가져 올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근심 걱정, 통곡과 울음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이 진리를 생각하며, 발을 헛 디디지 마시고, 인내하게 되면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야고보서 1:4). 인내는 단련과 통달인 연단을, 연단은 온전에 이르게 합니다.
옛날 기름장사가 어느 백작(伯爵)이 활을 쏘는데 백발백중하는 것을 보며 웃었습니다. 그러자 백작이 ‘네가 내 솜씨를 칭찬하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솜씨가 익숙해지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나도 기름 장사를 수십 년 하는 동안 사람들이 기름을 달라고 하면 기름을 호로병에 따라주는데 한 방울도 흘리지 않습니다. 이는 나의 솜씨가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답니다.
솜씨가 익숙해지는 것도 인내에서 나옵니다. 주께서 보지 못하는 맹인을 이끌어 고쳐주시며 말하기를 ‘네가 보이느냐?’하니, 대답하기를 ‘나무가 사람과 같습니다.’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고쳐주고 ‘보이느냐’고 물으니, ‘물건이 분명하게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인내하며 기다리지 않았다면 고침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것을 보려면 참으며 기다려야 합니다. 뜻과 행동이 모자란 청년이 선한 일을 붙들고 오래도록 참고 기다린 결과 성공하는데 이르렀다면 이것이 어찌 공부를 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인내는 바로 온전하게 하는 공부입니다.
그대들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온전히 공부하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이러한 것들은 다만 마음에 관한 말한 것이었지만, 몸과 영혼에 이르러서는 하나님께서 온전케 하여 주시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3).
몸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입으로는 무례(無禮)한 말을 하고, 발로 무례한 땅을 밟으며, 손으로는 무례한 일을 만들어 낸다면 이것이 다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영혼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술 마시고, 여색을 탐내는 일을 제일로 생각하고 음란한 일을 찾으며, 화를 만들어내는 일을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정신이 불완한 것은 무엇입니까? (神不完者何也) (이하는 생략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