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자연과 종교(自然과 宗敎)
삼청동교회 야외예배에서
1934. 5. 13.
自然物之暗示, 宗敎實無言之說敎也. 花發鳥啼山高水流, 無非神之顯現也. 故保羅曰以萬物知上帝也. 誠哉是言也! 吾等何必在敎會而聞說敎而後知神也? 無處不在之神, 卽在顯其自然, 使人知神之所在也. 然人物相異, 聞鳥語而不能解, 見花色而亦不能辨, 若知花鳥之內容則 其趣渾渾無不可知矣. 古者博物採集者二人, 遇風飄至某島, 一人生還, 一人免死上陸, 至數十年之後, 友人訪友至其島, 訪友要還, 友不肯曰 吾在自然樂甚, 何必出世爲苦也? 故人可愛着自然, 則可知宗敎之內面矣. 今樂自然界而野外禮拜時, 愛自然之物於上帝可矣. 今擧數四而言之, 一山高不動, 有何像乎? 神之造山本非搖動, 高低者一定不動, 山若搖動不定則人居不安, 死者必多矣. 然一造不動者使安着以生也. 前年摞島事變, 何其不安也? 孔子曰仁者樂山, 仁者有不動之心理故樂山也. 今吾心理有不動者乎? 主甚惡其搖動多變故, 痛罵猶人之多變也. 至於國亡而不悟也. 僉位心中有不動之氣像乎? 願效山之不動焉. 二水流也. 水之性非但靜潔也, 又有流動不定之像也, 始流潺潺不息, 至大海, 魚鹽生焉, 船舶往來, 萬國交通焉. 其智何其大也? 故子曰知者樂水, 又曰水哉, 逝者如斯夫! 水之爲物, 盈科而後進, 雖遇高山峻嶺, 暫時不停, 或嗚咽, 或不平, 或激動, 然皆不顧邁往也, 水之性如是忍耐不變, 終至目的, 是非吾人之所式乎? 今朝變夕改之薄志靑年輩, 搖搖如風葦, 故終忍得救, 是非主之敎訓乎? 鳥坐處羽落, 人撼時精損事敗, 有一目的則雖遇不平或激動, 然皆忍之而邁進也. 往哉往哉我往哉人往哉. 勿顧後趑趄. 一失而至再失而猶不悟, 空怨祖上, 又務反人, 魔用此人而亡人家國, 敗人事業矣. 其次彼松靑矣. 松樹不變, 四時長春, 其節可知矣. 古人祝壽以南山之松, 曰如松柏之茂者, 指松之長靑不變也. 古者松至千年, 釋王寺有太祖手植之松, 松齡至千年猶靑靑不變, 可以戒今人之守節, 今人不守變節多矣. 可愧此松矣. 古者朴堤上曰 我寧爲鷄林之豚犬, 不爲某國之爵祿, 卓哉節乎! 彼伯夷叔齊猶取松耶? 且其材可以支大廈. 他杞榟之木, 貴則貴, 然非普通所用, 故不常看於地, 不常用工也. 然松木不然, 用於普通, 大屋小屋皆可用之, 而非松木不可矣. 吾等之材不貴不賤, 無所處而不當也. 保羅云我於處世, 知處貧, 又知處逼, 又知處富, 又知處貴, 可謂無所處不當也. 吾人不能成材, 大不可用, 又小不可用, 一無適處則可謂棄人矣. 人當以成材爲貴, 貴材德兼全, 而尤貴信德也. 人雖有材無信則不可用矣. 諸位見松之爲材, 各自成材, 必以信德爲立可也. 其次禽鳥也. 禽之樂山林, 如吾之樂自然也. 鳩則報音, 鴉則孝母, 鶯則喚友, 哀如鵑哭, 淨如鷗汎, 潔如鳳鳥, 竊惟春風之作, 衆鳥皆鳴, 故以鳥鳴春者, 古博物學者吟詠也. 有黃鳥同鳴, 聞之者輒思友人, 欲延致相樂也. 孝鳥反哺, 無父母挑思逝世之慈顔. 嗚咽不已. 聞杜鵑之悲哭, 輒思故國之興亡在天津, 聞者輒下淚嗚咽者有之矣. 又白鷗閒浮, 坐眠于白河之上, 不染塵世之汚, 超然潔己, 見塵世之汚濁者, 思欲得主之血潔之, 見飛鳳飢不啄粟, 令世之無廉恥者, 沒頭埋身, 不思家國之亡, 而只欲患得患失, 反不如彼鳥之潔矣. 見野花爭發, 不慕富貴, 不與他爭競, 不與他是非, 發自己之榮光, 歸榮于上帝何等純美, 吾等之心理反不如彼花, 虛僞百出, 以己之汚染及先祖, 又及所信之宗敎, 豈不愧彼花乎? 吾等當此日暖風和之日, 自然甚美, 足令人發信歸榮也. 今日慈母主日也, 大主宰之愛育萬物, 其愛至厚, 吾等父母之恩愛, 如山高海深, 僉位之信德, 足以榮父母, 足以榮上帝焉.
자연물이 암시해주는 것은 종교에 있어서 실로 말 없는 설교입니다. 꽃이 피고 새가 울며, 산 높고 물 흐르는 것이 모두 하나님께서 나타내 보인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이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을 안다’고 하였는데, 진실하구나, 이 말이여!
우리가 교회에서 설교를 들은 뒤에 하나님을 알겠습니까? 없는 곳이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곧 자연에서 나타나 보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소재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물은 서로 다르므로 새가 말하는 소리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꽃의 빛깔을 보아도 역시 분간하지 못합니다. 만일 꽃이나 새 소리의 내용을 알게 된다면 그 나아가는 방향이 큰 것을 모르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 박물(博物)을 채집하는 두 사람이 풍파를 만나 어느 섬에 밀려 들어 갔는데 한 사람은 간신히 살아서 돌아오고, 또 한 사람은 그 섬에 남았었답니다. 수십 년이 지난 뒤에 섬에 남은 친구를 찾아가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더니, 그 친구는 거절하기를 ‘나는 이 자연 속에 있어서 아주 즐거운데 무엇 때문에 세상의 고역을 겪으러 나가겠느냐’고 하였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연을 사랑하게 되면 곧 종교의 내면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자연의 세계를 즐기면서 야외예배를 하는 때에 자연의 사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두서너 가지를 들어서 말해 보겠습니다.
첫째, 산이 높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무엇을 형상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산을 만들 때 본래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고, 높낮이도 한결 같이 안정되게 하여 변치 못하게 하였습니다. 만일 산이 움직이고, 안정되지 않는다면 사람이 편히 살 수가 없고 죽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만들어진 뒤에 움직이지 않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지난해 물이 섬을 휩쓴 사건은 이 얼마나 불안한 것입니까?
공자가 ‘어진 자 산을 즐긴다’(仁者樂山)고 하였으니, 어진 자는 움직일 수 없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산을 즐기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에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움직이는 것이나 변화가 많은 것을 미워하여 유대인은 변덕이 많다고 통렬히 나무랐는데, 유대인은 나라가 망하여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속에 부동의 기상을 가졌습니까? 바라건대 산의 부동을 본받으십시오.
둘째, 물의 흐름입니다.
물의 성질은 정결한 것뿐만이 아닙니다. 또한 흘러 움직여서 일정하지 않는 기상이 있습니다. 처음 흘러내릴 때 잔잔하게 쉬지 않고 흐르다가 큰 바다에 이르면 물고기와 소금을 만들어내고, 선박이 그 위에 왕래하며, 만국이 바다를 통하여 교제합니다. 그 지혜가 얼마나 큽니까? 그러므로 공자는 이르기를 ‘지혜 있는 자 물을 즐긴다’(智者樂水)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라고 하였습니다.
물의 성질은 낮은 곳을 채우고 난 뒤에 나아가는데 아무리 높은 산 험한 재를 만나도 잠시도 쉬지 않고 흘러갑니다. 그러면서 때로 흐느끼는 듯하고, 때로 불평하는 듯도 하고, 때로 부딪혀 거세게 격동하기도 하나 다 뒤돌아보지도 않고 앞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물의 본성은 이와 같이 변하지 않고 인내하며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본받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아침저녁으로 뜻을 바꾸는, 의지가 약한 청년들은 흔들리기가 마치 바람 앞에 갈대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끝내 참으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한 것이 주님의 교훈이 아니겠습니까? 새가 앉은 자리에 깃이 떨어지고, 사람은 흔들릴 때 정력이 손상되고 일은 실패합니다.
한 가지의 목적을 가지거든 어떠한 불평이나 격동을 만나더라도 다 참고 힘써 나가야 합니다. 가고 또 가고, 나도 가고 남도 가야 합니다. 뒤돌아보며 주저하지 마십시오. 한번 실패하고 두 번 실패하여도 오히려 깨닫지 못하고, 공연히 조상을 원망합니다. 또 남을 배반하기를 힘씁니다. 마귀는 이런 사람을 이용하여 남의 집과 나라를 망치고, 남의 사업을 실패하도록 합니다.
그 다음은 저 소나무의 푸름입니다.
소나무는 변하지 않고 사시사철 늘 봄이므로 그 절개를 가히 알 만합니다. 옛 사람들은 남산 위의 소나무를 가지고 남의 수(壽)를 축하합니다.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무성하라고 말하는 것은 소나무가 오래도록 변치 않고 푸름을 지적한 것입니다. 옛날에 소나무는 천년을 산다고 하였습니다.
설봉산 석왕사(釋王寺)에 태조(太祖)가 손수 심었다는 소나무는 나이가 천년이 되었는데 오히려 변하지 않고 청청(靑靑)하게 있으니, 가히 사람으로 하여금 절개를 지키도록 경계를 해준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절개를 지키지 않는 자가 많으니 이 소나무에 부끄러워하여야 합니다.
옛날 신라 충신 박제상(朴堤上)이 일본 왕의 협박에 대하여 말하기를 ‘나는 차라리 신라 서울 계림(鷄林)에서 닭이나 개가 될지언정 이 나라의 벼슬은 하지 않겠다’라고 하였으니, 우뚝하기도 하구나, 그 절개여! 은(殷)나라 말기의 충신인 백이숙제(伯夷叔齊)도 소나무의 절개를 취하였는가? 또한 이 소나무는 그 재목이 큰 집을 지탱시킬 수가 있습니다. 다른 기재(杞榟) 나무는 귀하기는 하지만 보통으로 쓰일 수 있는 나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땅위에서 늘 볼 수도 없고, 항상 공사에 쓸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소나무는 그렇지 아니하여 보통으로도 쓰기 때문에 큰 집이나 작은 집이나 소나무가 아니면 쓸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재목은 귀하지도, 천하지도 않아서 어디든 마땅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바울이 이르기를 ‘나는 가난에 처할 줄도 알고, 또 핍박에 처할 줄도 알고, 또 부유한 데 처할 줄도 알고, 또 귀한 데 처할 줄도 알기 때문에 어디에도 합당하지 않은 데가 없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재목으로 성취할 수 없으면 큰 것에도 쓸 수가 없고 작은 것에도 쓸 수가 없습니다. 한 군데도 맞은 곳이 없으니 버린 인간이라고 할 만합니다.
사람은 마땅히 재목으로 성취되어야 귀한 것이니, 재목과 덕성을 겸하여 온전히 가져야 귀한 것입니다. 더 귀한 것은 신앙과 덕성입니다. 사람이 비록 재목은 가졌으나 믿음이 없으면 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소나무의 재목됨을 보았지요. 각자 재목으로 성취하되 반드시 신앙과 덕으로 써야 됩니다.
그 다음은 새들입니다.
새는 산의 숲을 즐깁니다. 마치 우리가 자연을 즐기듯 말입니다. 비둘기는 소식을 전하고, 까마귀는 어머니에게 효도하며, 앵무새는 벗을 부릅니다. 슬픈 것으로는 두견새의 울음이 있고, 깨끗한 것으로 물 위에 뜬 갈매기가 있으며, 정결하기론 봉황이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봄바람이 불면 여러 새들이 다 울기 때문에 ‘새는 봄을 보고 운다’고 옛날 박물학자가 시로 읊었습니다.
노란 꾀꼬리가 함께 우니 듣는 자는 문득 벗과 함께 즐겁게 노는 것을 생각하고, 효도하는 까마귀는 먹이를 물어다가 늙은 어미를 먹이는 것을 보고, 부모를 잃은 자는 돌아가신 부모의 자상스러운 얼굴을 떠올리며 흐느끼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두견의 슬픈 울음소리를 듣고 문득 고국의 흥망이 하늘 나루에 있는 것 같아서 듣는 자가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습니다.
또 흰 갈매기가 한가로이 떠다니다가 하얀 모래사장에 앉아 조는 것을 보며 속된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초연히 자신을 깨끗하게 합니다.
그리고 속된 티끌 세상의 혼탁함을 본 자는 주님의 피를 얻어 깨끗하게 되기를 생각하며, 봉황은 굶주려도 곡식을 쪼아 먹지 않는 것을 보며, 세상에 염치가 없는 자들로 하여금 머리와 몸을 묻고 깊이 생각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집이나 나라가 망하는 것은 생각지 않고, 없는 것은 얻어 가지고 싶어 하고 있는 것은 잃을까봐 몸부림치는 것은 도리어 저 새의 깨끗함만 같지 못한 것입니다. 들꽃이 다투어 피어나는 것을 보면 부귀를 사모하지도 않고, 다른 꽃들과 다투지도 않으며, 다른 꽃과 시비도 벌이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영광을 발휘하여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 이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우리들의 심리는 도리어 저 꽃만도 못하여 온갖 허위가 판을 치고, 자기 자신의 잘못된 오염이 선조(先祖)들에게 미치며, 또 믿고 있는 종교에까지 미치니, 이 어찌 저 꽃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우리들은 햇볕 따습고 바람 온화한 날을 당하여 자연이 너무 아름다우니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을 발휘하고 영광을 돌리기에 족합니다.
오늘은 어머니주일(慈母主日)입니다. 대주재[大主宰]께서 만물을 사랑으로 길러주시니 그 사랑은 지극히 두텁습니다.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은 산과 같이 높고 바다같이 깊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덕은 족히 부모를 영광스럽게 하고, 족히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