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신앙은 무엇입니까?(信仰何也)
마태복음 10:34-39
이태원교회(梨院 1930.5.11)
人之生活, 以信爲標準, 無信如無柁之舟, 危險甚大矣. 孔子亦言信爲之貴曰 人而無信, 大車無輗小車無軏. 子貢問爲政, 對曰 民信, 民無信不立也. 然則非但個人, 國家亦然, 吾敎會必言信仰, 而不知信之爲何物而信, 則必有錯誤矣. 信當與知合言可也. 如言仁必言義, 例如有爐火, 知其必熱 而人若犯之, 則必受火傷, 此非知也必兼言信也? 然觀今世之人, 雖知湯熱 而有犯之者何也? 必無信故也. 信者何也? 若犯火則信有火傷之結果矣. 故不犯火, 今世多知而犯者, 哀哉. 昨日步于彰義門外, 拜尹參將, 問其說話, 曾行其受福之事, 必信受福矣. 天下之事, 有原因必有結果, 此非但佛之倡道者也, 吾敎會亦尊信者也. 吾朝鮮人溯及五十年前事, 則必亡乃已也. 自上達下皆行必亡之事, 有今日之結果也. 前鑑不遠, 僉位念之哉. 東洋人如是貧弱, 西洋人如是富强, 其故何也? 西人知而信者也. 東人知而不信者也. 信者有能力, 노아及摩西, 非但知者也, 亦信者也. 僉位亦知所羅門, 但知者而已乎? 知者而信者也. 吾東洋亦以信而行能力, 許眉叟作退潮文, 韓退之作鰐魚文, 諸葛亮南屛山祈禱, 得東南風者, 皆以信而致之, 非知以致之也.
사람의 생활은 믿음으로 그 표준을 삼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방향타가 없는 배와 같아서 매우 위험합니다. 공자도 역시 신(信)의 귀중함에 대하여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큰 수레에 수레채 조종기가 없고, 작은 수레에 멍에 막이가 없는 것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정치에 대하여 물었을 때, ‘백성이 믿어야 하느니, 백성이 믿지 못하면 존립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는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교회에서도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믿음이 무엇을 위해 믿는 것인지, 혹 모른다면 이는 착오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마땅히 지식과 합쳐서 말해야 합니다. 인(仁)을 말할 때 반드시 의(義)를 같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난로불이 있으면 반드시 뜨겁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난로에 가까이 가면 화상을 입게 됩니다. 이는 뜨거운 것을 알았을 뿐 아니라 화상을 당한다는 믿음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 사람들을 볼 것 같으면 끓는 물이 뜨거운 줄 알면서도 그것을 범하여 데이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뜨거운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불에 닿으면 화상을 입는 결과가 온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에 데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에는 알면서도 범하는 자가 많으니 애석합니다. 어제 창의문 밖을 걷다가 윤(尹) 참장(參將)에게 절하기에, 그에 관한 이야기를 물었더니, 그는 일찍이 복을 받을 일을 행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천하의 일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습니다. 이는 불교에서 주장하는 도리일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역시 존중하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조선인은 50년 전으로 소급해 살펴보면, 망하고야 말 빌미가 있었습니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모두 망할 일만 실행하다가 오늘의 결과를 맞게 된 것입니다. 앞선 역사의 교훈을여러분은 생각해 보십시오.
동양인은 현재와 같이 빈약하고, 서양인은 저렇게 부강한데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서양인은 지식이 있으면서도 믿었고, 동양인은 지식은 있으면서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력이 있습니다. 노아나 모세는 지식이 있는 지자(知者)일 뿐 아니라 역시 믿음이 있는 자였습니다. 솔로몬은 지혜자일 뿐 아니라 그는 믿는 자였습니다.
우리 동양에도 믿음으로 능력을 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허미수(許眉叟)는 동해의 조수를 물리치는 글인 ‘퇴조문(退潮文)’을 지었고, 한퇴지(韓退之)는 악어의 횡포를 막는 ‘악어문(鰐魚文)을 지었으며, 삼국시대 전략가인 제갈량(諸葛亮)은 남병산에서 동남풍이 불도록 기도하여 조조의 군대를 패퇴시켰습니다. 모두 믿음으로써 이룬 결과이고, 지식으로써 이룬 것이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