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용서받는 예배
마태복음 5:23-24
吾等在家入空室而折膝祈禱, 或入敎堂入祭壇前而傾心禮拜, 先有準備可也. 準備在內省吾心, 內有何物乎? 仰見神容或無愧汗乎? 爲神所障碍者總取而去之, 又思神之所喜者, 果何也? 供物可也, 儀式可也, 禮法可也. 然其心冷却且塵汚, 則決不可敬神容矣. 神去不喜祭祀, 尤喜慈悲云者, 果何意也? 儀式淨潔, 物資豐備, 然若心無慈悲, 則人前雖有餘, 然神前甚不足也, 無一分受償之價値. 慈悲云者, 儒彿皆貴之, 神前尤貴, 古亦有言, 一婦夢, 耶蘇曰 來日必訪汝家云, 婦掃室苦待, 有一乞人臨門乞食, 婦不給, 主亦不來, 翌夜夢耶蘇責之曰 昨日余以乞人臨汝, 汝不待云. 誠哉是言, 耶利哥之逢賊人亦然. 慈悲可於隱密施之可也. 左手爲之右手不知可也. 慈悲云者亦有一意, 非但濟人也, 亦敎人也. 人犯罪於我, 如以慢我惡我毁我敗我等臨之, 則我果何如也? 古有人誡其弟出宰曰 人唾面當拭之勿對也. 弟曰唾面不拭也云. 雲長於華容道, 義釋曹操, 此雲長之長處, 孔明之於孟獲七縱七擒, 是爲孔明之長處也. 於生物聖王恩及禽獸, 不撈不盜尺之魚, 數罟不入洿池, 斧斤以時入山林, 皆恕之道. 孔子曰 忠恕爲道不遠也. 故慈之大者卽恕人也. 今朝鮮以不恕亡, 所謂貴族輩, 凌轢下民, 組成階級的社會, 凌夷至此也. 有罪亦赦之, 況無罪者乎? 有形卽無形之始也. 有形易敬, 無形易慢, 然空氣之効用, 至大且剛, 人不能過之, 可不謹乎? 故愛目前之兄弟, 卽愛不見之神者也. 保羅曰 人若懷忿, 勿至日落云, 故吾人於白日之下, 事物叢集, 使我發歡, 恕心撓如風臻, 至夕食後入寢臺, 盡忘之可也. 幸勿以忿怒疾怨之心入衾中. 靜夜無寐之時, 良心易發, 如無雲之天, 翌日心身愉快矣. 愛之爲物貴於黃金, 故博士獻此禮物, 人以黃金富饒一家, 人以愛之德榮耀一身矣. 愛掩諸罪, 不見人塵垢, 主愛罪人至捐身流血, 嗚呼, 人不能念到此, 然大愛有惡人不能察知,. 神之愛人純愛而已. 然或時加之以害恕間, 不容髮者, 欲使之玉成也. 昔黃喜常捃摭宗瑞者, 欲玉成宗瑞也. 人不察而反怨疾, 不能成愛之德. 요拿不聽神之命, 乃入巨魚腹中, 神始終其愛. 人始終不一, 或始愛而終怒, 或始怒終愛, 如是變遷而神則不然, 始終其愛也. 今神之於朝鮮之人, 使處之嚴罰, 若甘愛其罰而悔改, 則後必有光復之日矣. 然若不忍暫時之苦, 濫分犯罪, 怨讟備至則滅亡而已也, 不能更生也明矣. 主在架上不發惡, 不怨天不尤人, 故神察之, 使之在上帝之右便也.
우리는 집에 있을 때 빈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도 하고, 혹은 교당에 가서 제단 앞에 마음을 기울여 예배를 하기도 하는데, 이 때 먼저 준비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안으로 나의 마음을 살펴보는 일입니다. 그러면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우러러 볼 때 혹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장애가 되는 것은 전부 버리십시오. 또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물건을 바치는 것도 좋고, 의식을 올리는 것도 좋고, 예법을 지키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하더라도 이런 일을 하는 이의 마음이 냉각되고 또 티끌로 더럽혀져 있다면 결코 하나님을 공경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사를 좋아하지 않고 자비를 즐겨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의식이 정결하고 물질을 풍성하게 갖추었더라도 바치는 이의 마음속에 자비가 없다면, 사람들 앞에서는 물질이 아무리 풍족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매우 부족한 것입니다. 한 푼어치도 상을 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자비라고 이르는 것은 유교나 불교에서 모두 귀하게 여기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귀합니다. 옛날 말에도 있습니다. 어떤 여자의 꿈에 예수님께서 ‘내일 내가 너의 집에 유(留)하여야 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바로 집을 깨끗이 정리하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거지 한 사람이 나타나서 밥을 달라고 하였답니다. 그러나 여자는 그 거지에게 밥을 주지 않았고 주님도 역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밤 꿈에 예수님께서 나타나 꾸짖기를 ‘어제 내가 거지 차림으로 너에게 갔으나 너는 나를 대접해 주지 않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그럴 듯한 이야기이지요.
여리고에서 강도를 만난 것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자비는 은밀한 가운데 베푸는 것이 옳습니다. 왼 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몰라야 됩니다. 자비라고 이르는 것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르치기도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범죄적인 행동을 한다고 합시다. 예를 들면 나를 업신여기든지, 헐뜯든지, 나를 패망시키려고 한다든지 하는 것들을 자행한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옛날에 어떤 사람이 재상(宰相)으로 승진해 가는 아우를 보고 충고하기를 ‘누가 너의 얼굴에 침을 뱉거든 그냥 닦아버리고 상대하지 말라’ 하니, 아우가 ‘얼굴에 붙은 침도 안 닦고 가겠습니다.’ 하였답니다. 관운장이 화룡도에서 의리 때문에 조조를 살려 주었는데 이는 관운장의 좋은 점입니다. 제갈공명이 맹획을 일곱 번이나 사로잡았다가 일곱 번 다 놓아주었는데 이는 공명의 장점입니다.
생물에 있어서 살펴봅시다. 옛날의 성왕(聖王)들은 그 은혜가 금수(禽獸)에까지 미쳤습니다. 작은 물고기를 잡아내지 않기 위하여 구멍이 촘촘한 그물을 연못에 넣지 않는다든지, 도끼나 톱 등을 적당할 때를 가려 산에 가지고 들어가게 하는 것도 모두 생물에게 관용을 베푸는 도리입니다. 공자가 ‘충성과 용서[忠恕]는 올바른 도에서 멀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큰 자비는 바로 남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조선은 용서하지 못하여 망하였습니다. 소위 귀족이라는 무리들이 아래 백성들을 업신여겨 짓밟으며 계급적인 사회를 만들어 이 지경으로 망쳐놓았습니다.
죄가 있어도 놓아 주어야 하는데 하물며 무죄한 자이겠습니까? 형체가 있는 것은 바로 형체가 없는 데서 시작된 것인데 형체가 있는 것은 존경하기 쉽지만 형체가 없는 것은 업신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공기의 효용은 크고 강하여 사람들은 이것을 능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신중히 다루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눈앞에 보는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르기를 ‘사람이 만일 분한 마음을 가졌거든 해가 질 때까지 가지고 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밝은 대낮에 즐거움을 느끼게 되고 용서하는 마음이 바람에 불려오듯 하므로 저녁을 먹고 침대에 들어가서는 다 잊어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바라건대 분노하는 마음, 밉고 원망하는 마음을 이불 속까지 끌고 들어가지 마십시오. 고요한 밤, 잠이 오지 않을 때 양심이 생겨나기 쉬워 마치 구름 없는 하늘과 같다가 다음날은 심신이 유쾌하게 됩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황금보다 귀하여 박사들은 이것을 예물로 들였고, 사람은 황금으로 집안을 부요하게 하지만 사랑이라는 덕으로 자기 몸을 영화롭게 빛냅니다. 사랑은 모든 죄를 가리어 주어 그 사람에게 티끌이나 더러운 때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인들을 사랑하시어 몸을 바쳐 피를 흘리는데 이르렀으니 아하! 사람들의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지 못합니다. 큰 사랑에 대하여서는 악인들은 살펴서 알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은 순수한 사랑, 그것뿐입니다. 그러나 혹시는 해로움과 용서 사이에 조그마한 빈틈도 주지 않는 사랑이 있으니, 이는 그 사람을 훌륭하게 성취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 황희 정승이 김종서의 조그마한 실수도 낱낱이 꼬집어 내어 꾸짖은 것은, 김종서를 잘 길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내용을 잘 살피지 못하고 도리어 원망하고 미워하여, 사랑의 덕을 성취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다른 데로 가다가 물속에 빠지자 하나님은 그를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하여 살려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처음과 끝이 다릅니다. 혹시 처음에는 사랑하다가도 끝에 가서 성내고, 혹은 처음에는 화를 내다가 끝에 가서 사랑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바뀌고 옮겨 가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여 그 사랑을 시종일관 한결 같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조선 사람에 대하여 엄한 처벌을 내리고 있습니다. 만일 그 처벌을 달게 받아 회개한다면 뒷날 반드시 광복(光復)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반대로 잠시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분수를 넘어 범죄하여 원망과 비방을 모두 받게 되면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다시 살아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분노하지 않고, 하늘이나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이 살피시고 주님을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1-12
김극배(金克培) 선생
4월 29일 (주일)
余多障碍, 不能守主日, 家人以病入院, 而心撓不定也. 「福何以求得也」, 每事有分數, 年前有人請余往一敎堂, 擇聖句, 有一他人亦傳道, 而擇此聖句亦仝我矣. 由此視之, 擇讚頌亦同我矣. 其外何事皆已定矣. 況天國之事亦仝. 世人皆求福, 而不信者亦求福有各樣, 而孔子曰 獲罪於天無所禱也. 孔子主前人也, 亦知此. 若違此而求之, 則不能得矣. 家中食少而食來, 欲福而福來者理也. 此理昭然, 此八福歸於何人也? 經濟學者反對曰 彼傳道人亦不食乎? 彼反對者雖多, 無關此信仰, 以信仰得也. 李廣夜遇虎射之, 朝視之乃石也. 乃更射之不入, 此何故也? 夜則信之朝則不信也. 求病之時亦然, 信則得之不信則違之. 信者之家有各種, 一家之內, 有不平者, 信不均也. 家族中有病者, 有兒病則不求于天, 而求于偈, 萬物爲神所造也.
나는 여러 가지 장애 때문에 주일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집사람이 병으로 입원하였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복을 구하여 얻겠습니까?」 모든 일은 분수가 정해져 있습니다. 연전에 어떤 사람의 부탁을 받고 어느 교회당에 가서 설교할 <성경> 구절을 골랐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전도하러 와서 나와 똑 같은 <성경> 구절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고 있자니 그가 고른 찬송도 나와 같았습니다. 이것 외에도 무슨 일이든지 모두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천국의 일도 역시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복을 구하고, 불신자도 역시 복을 구하지만 그 방법은 각양으로 다릅니다. 공자가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도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주님보다 훨씬 이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역시 그것을 알았습니다. 만일 그것을 거스르고 복을 구한다면 얻을 수가 없습니다.
집안에 먹을 것이 적으면 먹을 것이 오고, 복을 가지려고 하면 복이 오는 것이 이치입니다. 이 이치는 분명한데 이 8복이 누구에게 돌아가겠습니까? 경제학자는 반대하여 말하기를 ‘저 전도인은 먹지 않습니까?’ 하며, 그 이와 같이 반대하는 자들이 비록 많지만 이 신앙과는 관련이 없으니 신앙으로 얻어야 합니다.
옛날 이광(李廣)이라는 사람은 밤에 호랑이를 만나 활로 쏘았는데 아침에 가서 보니 호랑이가 아니고 바윗돌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다시 그 바위를 보고 쏘았으나 화살이 다시는 박히지 않았습니다.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밤에는 호랑이라고 믿고 쏘았지만 낮에는 호랑이라고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병을 구하는 때도 이와 같습니다. 믿으면 낫게 할 수 있고 믿지 못하면 어긋나서 낫지 못합니다. 신자의 집안도 여러 가지가 있으니 집안에 불평하는 자가 있으면 신앙을 골고루 가질 수 없습니다. 가족 중에 병자가 있고 아이가 병이 있으면 하늘에 병을 낫게 해 달라고 하지 않고, 불교의 게문(偈文)을 가지고 구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